18591 1998. 1. 1 (목)
세밑의 떠들썩함도, 어수선함도.
감회도, 반성도, 다짐도 있지 아니하다.
그러나 날은 지새고 날은 밝았다.
새해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의 건축한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의 재배한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이며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라.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사야 65장-
기도.
18592 1998. 1. 2 (금)
새해 첫날.
가희는 처음으로 문을 열지 않는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경제만이 필요충분 조건은 아닐진데.
세상을 경제가 지배하고 경제에 목을 매는 생명이라니!
창조하신 목숨에 대한 모독이다.
분을 내고 발을 구른들 무에 하랴.
어머니.
깃털처럼 가볍고 머리카락은 빠져.
망팔의 노파.
아기.
형과 앉아서 소주를 마시고.. 마시고...
가희 돌아와 셔터 내리고 들어 앉아 마시고.
지난 세밑 머리맡 놓인 英이의 편지는....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제 떠났다고 대답하라.
기나긴 죽음의 시절
꿈도 없이 누웠다가
이 새벽 안개 속에
떠났다고 대답하라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
흙먼지를 재고 쓰고
머리 풀고 땅을 치며
나 이미 큰 강 건너
떠났다고 대답하라"
-양성우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18593 1998. 1. 3 (토)
가희, 정초 이틀동안 문을 열지 아니한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무고히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하시리로다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곤난에서 끌어 내소서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내 원수를 보소서 저희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함이니이다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
-시편 25-
꿈- 가희, 불...
날씨 추워지다.
18594 1998. 1. 4 (일)
그대여, 아무도 찾아 오는 사람없는 휑뎅그레한 공간에 옹송거리며 종일을 떨고 앉아 있어 보았는지.
찬바람 가슴속 불고, 귓가에는 강박의 목소리가 웅성이는, 그리하여 공연히 심장이 두근대는.
차분히 앉아서 마음을 다스려 책이라도 읽고자 하나 눈동자는 허둥지둥 글자가 들어오지 아니하여 그냥 우왕좌왕 서성이며 종일을 가게 안을 맴돌아 보았는지.
겁쟁이, 무섬타는 어린쟁이, 무기력에 잠겨 눈꼽을 떼는 늙은이.
엉금엉금 기어가 어느 쥐구멍 도망갈 자리를 찾아...
손 내밀어 잡아주고, 등을 툭툭 두드려 귓가에다 다순 숨 끼처주는 부드러운 손 전혀 없는 그런 공간에서 종일을 서성여 보았는지.
추스려 추스려.
나는 거지가 아니다. 나는 금치산자가 아니다. 나는 무능력자가 아니다.
또 추스려, 나는 신경증 환자가 아니다.
또한번 더 추스려.
나는 알콜중독자가 아니다.
더욱 추스려 추스려.
나는 크리스찬이다.
18595 1998. 1. 5 (월)
머리를 굴려라.
비빌곳 없는 막막함에서 나오는 소외감 따위, 자괴와 자기비하 따위, 또는 모멸감 따위.
이런 것으로 자꾸만 스스로를 세뇌하지 말거라.
그것은 의욕상실과 비관주의만 잉태할 뿐이다.
가난한 자존만으로 홀로 서지 않으면 아니된다.
젊은이에게 어필할 컨셉을 연구하라, 활로를 아이디어로 구축하라.
俊에게서 전화.
홍천으로부터의 그 목소리.
그렇구나, 내게는 아들이 있었구나.
기댈수 있는 듬직한 내 핏줄 하나 있었구나.
18596 1998. 1. 6 (화)
잠바를 껴입고 목도리 두른채 사진 CD를 정리하고 시화를 만들어 액자에 넣어 진열한다.
옛날 흑백사진을 스캔하여 칼라 복원사진도 만들어 가격표를 붙인다.
SM성 에게서 전화.
BB환 도, 누구 누구도, 몇십년 몸담은 직장에서 실직, 실직하였다는 소식...
모두가 정말 힘든 시절이다.
자꾸 자꾸 생각하자.
그리고 입으로 소리내어 중얼거리자.
내게 없는, 내가 가지지 못한 무엇을 생각지 말고 내가 가진 것들을.
또한 남들도 가지고 있고 나 역시 가졌음직한 그 보편적인 것들을 생각하자.
스스로 나의 상황을 왜곡시키지 말자.
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보편적이고 평범한 조건의 사람이다.
오늘 해야 할일들을, 차근차근 정리하고 실행하자.
낙관이 없다고 낙천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18597 1998. 1. 7 (수)
남녘 부산하고도 영도의 날씨, 아무리 추워봤자 대수랴.
난로는 피우지 않는다.
가희 들어앉아서 마땅치 않은 그림액자들 골라 사진액자로 바꾸려고 골라내 묶고 메모를 붙여 놓는다.
그리고 아득한 옛날 옛적의 사진.
어머니를 가운데로 중학교 교복의 형과 국민학생인 내가 양편에 서서 서울의 어느 시장통을 걸으면서 찍은 스냅사진을 스캔하여 확대하고 손상된 부분을 치유하고 배경을 노란 파스텔조의 시골 언덕 동화적 그림을 배경으로하여 바꾸어 뽑는다.
그 한 장의 사진에는 그리움이 가득 어리어 있건만.
수십년 지난 지금, 그 한 장의 사진에서 안스러움과 노여움으로 보는 눈이 내게 있으니 이를 어이하랴.
한빛그림에 고객인척 전화하여 알아보니까, 흑백사진 복원 4만원, 칼라복원 6만원 수준인데 나는 3만원, 4만원으로 가격을 정한다.
시편 51.
밧세바와 간통하고 우리아를 죽인 다윗의 통회.
기도.
18598 1998. 1. 8 (목)
사진액자 유리 끼우고, 한 쪽 벽에 정리하여 세워둔다.
출입구 표지판 디자인과 쇼윈도우에 젊은층 눈에 확 띌만한 포스터를 구상하고 이렇게 저렇게 디자인하여 본다.
아침녁, 몇잔의 막걸리.
막걸리는 머슴에게 힘을 주는 새참이다.
몇사람의 주부고객,
2건의 매출.
새벽.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그가 인식하고 추구하고 획득하였던 하나님.
나도 그이 발가락 때만큼이라도 도달해 보았으면.
18599 1998. 1. 9 (금)
겨울비 추적거리며 내린다.
포스터 디자인.
아이템별로 만든다.
그림, 아트포스터, 판화, 도자기, 액자, 사진복원, 포토아트, 패션카드, 명함, 즉석증명사진.
좀더 서민적이고 저렴하다는 인상을 줄수 있도록.
英이 학원에서 봉급 타서, 제 어미에게 몇십만원주고 아비에게도 2만원을 봉투에 넣어 준다.
구차한 아비라서가 아니라 딸아이의 이것은 말할수 없이 반갑고 귀하다.
18600 1998. 1. 10 (토)
IMF라는 것이 그토록 무시무시한 것일까.
너무나 과장된 엄살들을 떨고 있는건 아닌지.
무슨 국제기구로부터 막대한 돈을 빌려 왔다는 사실이 그토록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일까.
경제에 대하여 무식해 빠진 나는 신문을 읽어도 확연히 이해되는 바는 적으니..
그러나 실제로 모든 게 꽁꽁 얼어붙었다.
봉급쟁이들도 모두 전전긍긍, 임금삭감을 감수하고 해고되지 않기만 바라고 있는데 이미 대량해고 사태는 봇물을 이룬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 없고, 나처럼 소규모 장사하는 사람들도 생애 최대의 불황이라고 죽는 소리들이다.
저녁 가희는 J에게 맡기고 술도 마시지 않은채 이른 잠자리 든다.
그러나 11시쯤 눈이 떠져 잠자기는 포기하고 책상 앞에 앉는다.
우찌무라간죠 '기독교 문답'
내게는 너무 귀한 책이다.
쉽게, 겸손하게, 순정한 마음으로 나직하게 기독교를 변증하는 그 분.
나는 기도를 드린다.
18602 1998. 1. 12 (월)
추적거리며 겨울비 내리고 싸늘한 일요일.
J 와 한시간여 버스에 흔들려, G식 이네 부부와 함께 해운대 신시가지.
얼마전 까지만 하더라도 논과 밭이었을 그 곳에는 거대한 도시가 들어섰다.
16층 드넓은 아파트의 일실, 그의 아내가 J의 계꾼인 MBC아나운서 SY일 씨의 초대.
조금후 CS교 부부도 도착,
족발과 회로 푸짐하게 차린 상에 둘러 앉아 소주를 마시고, 미역국에 밥을 먹는다.
고스톱 판.
나는 물론 끼지 아니하다.
즐기지도 않지만 그보다 돈이 없다.
그동안 가희를 지키며 가희에서의 데이트를 즐긴 英이와 A군.
18604 1998. 1. 14 (수)
J는 S형 어머니 제안으로 D광약국 M이 어머니와 더불어 1박2일 여정의 지리산 실상사.
겨울 산자락, 고즈넉한 산사야 얼마나 좋으랴마는 몸살의 남편에게는 단돈 얼마라도 쥐어줄 배려가 없는 마누라짜리.
가희 역시 고즈넉.
18605 1998. 1. 15 (목)
겨울비 내린다.
시를 읽는다.
상상이 만드는 이미저리.
상상은 기억의 흔적.
이 말라 버석거리는 모래밭에도 한줄기 가는 풀일망정 싹을 틔울수 있을랑가.
그리고 나는 가난한 자의 술을 마신다.
그것은 소주이다.
"너는 시인에게 부어준다.
희망, 젊음, 생명을.
-그리고 自尊, 이 赤貧의 보배.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어 신들과 비기게 해주는 自尊을."
-보오들레르-
술은 내게 시를 선사한다.
그리고 자존을 선사한다.
자존이 만드는 이미저리는 시다.
새벽.
겨울 태풍인지 창문을 뒤흔들면서 아우성치는 바람.
기도.
18606 1998. 1. 16 (금)
바람의 아우성도 잠들고 흐릿한 날씨는 회색 풍경화를 이룬다.
쓸쓸한 가희의 공간.
가슴에 이는 찬바람.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니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빈집-
내 갇힌 빈집에는 찬바람 부네..
18608 1998. 1. 18 (일)
다른 지방에서는 폭설로 난리라지만 올 부산의 겨울은 유난히 겨울비가 잦다.
힘든 시절.
영혼은 짓눌려 신음하고, 소외감과 죄의식은 의식을 핍박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아내짜리의 불친절은 자심하다.
그리운 여자는...
어느 소설가가 썼다.
"사랑은 섹스가 아니다. 섹스후에 함께 잠자는 것이다."
나는 이 행복함을 상상할수 있다.
무엇보다 경제는 정녕 핍곤하다.
처음 쓰는 단어, 핍곤.
토요일.
올들어 가장 높은 매출.
지진.
한밤중 바닥이 두어번 휘청 흔들리는 느낌.
18609 1998. 1. 19 (월)
점포주인 KS동 씨에게 월세의 감액을 은근히 비추었으나 어림없다.
쉽게 깎아주지는 않을테지만 계속 건드려 볼 참이다.
P/C에 옥상의 TV안테나를 연결하여 TV가 나오게 하다.
토요일 그림을 사간 부부, 서비스권의 연출사진 만들다.
못난이 아내와 핸섬한 남편의 언발란스를 갖은 재주를 부려 꽃밭속의 어여쁜 한쌍으로 만들어 그들을 기쁘게 한다.
서정엽은 하리에 부식가게를 내어 그 아내가 운영.
시장이 없는 태종대 일원에서 반찬가게는 제법 되지 않을까 싶다.
소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
모두 모두 어려운 형편들이다.
나만이 힘든 것은 아니다.
18610 1998. 1. 20 (화)
미증유의 불경기.
펴드느니 IMF요, 들리느니 IMF요, 말하느니 IMF다.
살다가 살다가 이런 불황은 처음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죽는 소리다.
금리는 턱없이 올라서, 꿍처둔 돈이 있는 부자들은 단기 차익의 과실로 콧노래도 부를법 하지만 없는 사람들은 그저 꼽다시 죽어야 할판이다.
어려운 때, 모두 같이 어렵다면 그것은 어쩌면 견디기가 쉬울것이다.
부익부 빈익빈은 더욱 심화된다.
김대중은 국민과의 대화에 나와서 고통분담을 호소하고 자신감을 피력하였지만, 과연 올 한해만 견디면 무슨 희망의 조짐이 보이기는 할 것인지.
얼어붙은 계절에 얼어붙은 마음들.
18611 1998. 1. 21 (수)
관계의 눈은 본시 따스하다.
그러나 관계 속에는 또하나의 눈이 있으니 그것은 차가운 눈이다.
나는 온통 차가운 눈만으로 보임을 받고 있다는 자의식.
迷妄- 어쩐 일이냐, 나이 먹어 상황이 힘들수록 이것이 새록새록 솟아나 나를 괴롭힌다.
어머니에게 간곡하게 간청하였던 자그마한 지원, 그 무산됨이 무참하여 이러는 것인가.
내 그릇이 너무나 좁은 탓인가.
이 자의식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정신, 내 존재의 슬픔.
주님.
이 어두운 것들을 툭툭 털어버리고 당신의 사랑으로 다시 시도할수 있는 길을 열어 주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18612 1998. 1. 22 (목)
며칠째 영도에서도 얼음이 밟힌다.
가희, 몇 건의 액자 주문.
J와의 계약에 의하여 이틀 쉬었으니 오늘은 음주가 허용된 날.
이것은 내게 있어서는 하나의 화려한 기대.
보오들레르처럼.
이 赤貧을 自尊으로 만들어 주는 기쁨.
호주머니는 텅텅 비었을지라도.
또한 요즘 술을 마시면 나는 센티멘탈의 소녀가 된다.
P/C로 보는 TV 화면.
옛날 노래를 듣노라면 가슴을 적시는 감상이 사무치게 인다.
입영열차- 俊이 입대전 하리 어느 노래방에서 부른 노래 '이등병의 편지'를 들으면 아들놈 생각에 또 가슴이 이운다.
저녁 옛 회사의 직원들 찾아준다.
SS우, PJ수.
그림 한점씩 사고, 억지로 끌려 나가 맥주집에 둘러 앉는다.
회사, 감원바람에 전전긍긍.
치미는 화.
이런 젊은 놈들에게까지 이토록 가혹한 대선의 현실.
18614 1998. 1. 24 (토)
날씨 차웁다.
S곤, H근 저녁에 술병 꿰고 찾아오다.
가희 뒤편 공간을 이젤로 가리고 상 벌려 놓고 마신다.
H근 의 제안.
은행이나 다방등에 그림을 대여하는 사업.
제 아는 은행에서 먼저 제의가 있었다고.
일년 10만원 정도로 계약하여 3개월에 한번씩 그림을 바꾸어 거는 것이다.
50곳만 확보하면 500만원.
그러면 월 한 40만원으로 월세는 어느 정도 충당될듯도 싶은데.
한 곳에 다섯점의 그림이 필요하다고 보면 250점의 그림을 확보하고.
그러려면 봉고도 있어야 할 것이고, 매일 밖으로 돌아야 한다.
그림은 어느 세월 만들고.
H근이의 충정은 고마우나 채산성이 맞는 장사는 아니다.
18617 1998. 1. 27 (화)
고향은 어디?
아스팔트킨트라는 상투어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내게 있어서 고향은 있지 아니하다.
나 홀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닐진데, 그리워 찾아갈 내 열조의 고향은 어디란 말가.
고향은 있었는데, 내게도 고향은 있었을 터인데.
용렬하고 추하게 늙어가는 내 마음 속에는 고향이 있지 아니하니 피흘려 부끄러운 자괴감이요 입술 깨물며 눈 부릅뜨는 노여움이다.
가희 앉아 조그마한 흑백사진을 확대 복원하며 남의 사진 속 고향을 본다.
설날-
아, 겨울의 너른 빈 들판.
구수한 콧김 씩씩 내 뿜으며 내닫는 커다란 순한 짐승 한마리.
어머니...
가난한 초갓집 머리위로 가난하게 펼처진 푸른 하늘 자락.
두엄밭 싸리 울타리.
쪽마루 걸터 앉아서 저고리 젖가슴 푸는 여인.
그 젖가슴에 머리 묻을 머리가 내게 없다는 서러움이 서럽다.
시골에 살아본 적이 한번도 없지만 나는 시골의 그림이 이토록 익숙하고나.
18618 1998. 1. 28 (수)
늙어 허리 아프고 근육통으로 팔이 쑤시기 전, 용렬하여 관계를 원망하여 가슴이 저리기전, 의기소침하여 낙이 없노라고 되뇌이기 전에 나의 창조주를 기억하였었더라면.
핍박받는 마음은 한이 맺히고, 소외되는 쓸쓸함은 자기파멸을 꿈꾸는.
이 때 나의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어디서 커다란 돈푸대가 뚝 떨어진다면 이 때 나의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마법의 지팡이로 욕심과 이기로 언 가슴들에 큐빗의 가루를 뿌려서 따스한 배려와 사랑의 눈길이 회복된다면 그때 나의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나의 별은 여기가 아니라고, 나의 있어야 할 곳은 여기 도회의 언저리가 아니라고.
나의 시대는 20세기의 이 시간이 아니노라고.
맞지도 않는 이 살이의 무대에서 피에로 짓은 참 우스꽝스럽기도 하여라 하고...
군대 가 없는 아들 놈 책상 앞 앉아서 쏘주를 마신다.
책상에 엎드려 눈시울을 덥히기도 한다.
설이라는데.
남루를 걸친 마음밭에는 황량한 모래바람이 불어 불어...
18619 1998. 1. 29 (목)
설이라고, 그래도 거리는 한산하다.
그저 시린 마음을 짐짓 숨긴채 어머니 주변에 모인다.
그나마 시린 관계들의 고향은 늙고 늙은 어머니 곁.
J은이도 오랜만에 호주에서 돌아와 둘러앉아서 떡국들을 먹는다.
술이 없을소냐.
마음은 닫은 채 목구멍은 술을 넘긴다.
술이 있어 사는가, 살아서 마시는 술인가.
18621 1998. 1. 31 (토)
IMF 한파로 온나라가 추워도, 이 백의민족에게는 설은 명절이다.
예전만 못하여도 고속도로는 차량으로 넘친다.
엊그제 뉴욕 외채협상, 금리 한자리 숫자, 장기외채로의 전환등이 매우 고무적으로 타결되었다는 기사.
국제 신인도도 제고되었다고 하니 환율은 하락하고 주가는 올라간다.
희망이 보이는겐가.
올연말 俊이 제대 무렵이면 내 경제는 펴지려는가.
아니 기필코 펴져야 한다.
설날에 처가에서 가져온 J의 돌아가신 조부모님 사진, 정자관을 쓴 영감님과 음전한 촌마나님.
그 사진을 복원하여 뽑고 아이들서껀 처가 식구들의 사진들 뽑는다.
사진 복원작업- 원형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선명도를 높이고 해상도를 향상시켜 색보정을 가하여 하나의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것은 집중력과 숙련이 요구되는 작업.
나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
작업하면서 자꾸 중얼거린다.
이 정도 수준의 상품이 왜 팔리지 않을까, 충분히 어필할수 있을만한데.
이제 날씨가 따뜻하여지면 쇼윈도우의 감각을 몽땅 바꾸고, 내부의 이미지도 새롭게 꾸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