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部分

1997. 11

카지모도 2016. 6. 26.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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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0  1997. 11. 1 (토)


쌀쌀.

어느새 11월, 초겨울 문턱에 들어서다.


이제 구체적으로 차츰 윤곽을 드러내는 JOB의 그림.

나의 공간, J의 공간, 英이의 공간.


오전에 세창에서 백여점 넘는 액자 그림 싣고 온다.

내가 제작한 그림은 모두 액자를 장식한 것.

마음에 차는 것도 없지 않으나, 대체로 세창의 액자는 현대에 비하여 싸구려 냄새가 나는 것은 어쩔수 없다.


주문한 이젤 10개 화방에서 들어오고.


정가를 산정, 판매가를 확정한다.


오늘 英이 서울행.

내일이나 모레쯤 어머니 모시고 내려올 것이고.

俊이의 남은 휴가기간은 5일.


베드로서 소리내어 읽는다.

그리고 기도.

살아 섭리하시는 손길.


18531  1997. 11. 2 (일)


英이 9시 새마을호로 서울 올라가다.


아침 일찍 점포에 나가앉아서 세창공장장의 명함과 나의 명함, 英이 명함을 만든다.

그림들은 정리되지 않은채 카페트 바닥에 널려있는데.

나머지 큰 그림들과 아트포스터 액자가 들어와야만 벽면과 이젤 따위에다 설치하여 내부 어레인지가 가능할 것하다.

전단지 만드는 것과 왼도우 선팅 디자인이 시급한데, 확 이거다하는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는다.

섬세하다고는 말할수 없으나, J 의 직선적이고 과감한 손끝의 열성만은 가장 커다란 힘이다.


간판집 J사장, 신고다 무어다 제가 다 해줄것처럼 떠벌이더니 구청에 가서 간판신고도 해야하고 도로 점유세인가 년 10만원씩 납부해야 한단다.


잠실구장의 월드컵 최종예선전 한일전,

2:1 패.


18533  1997 .11. 4 (화)


이른 아침부터 어지러운 점포에 나간다.

벽에다 못을 박고 그림들을 걸고 이젤을 세워서 이리저리 어레인지 해보는데 아무래도 마음에 차지 않는다.


그림에 붙여 놓을 CODE표 제작.

화가, 화제, 제작년도, 정가를 디자인하여 상품마다 부착하는데, 그 잔손이 많이 가기란.


전화 벨은 쉴새없이 울려댄다.

H근, 내게 줄 그림을 며칠동안 그려서 표구를 맡겨 놓았다고. 무어 필요한 것 없느냐는데, 그림이나 많이 그려 다오.

느닷없이 점심때쯤 점포로 찾아온 사람들, LW규 , JM교 , SY철..

오후에는 PS곤 찾아오다.

모두들 관심을 가져 주어 너무 고맙다.


俊이와 J.

부산역 나가서 英이 모시고 온 어머니 마중.

나는 뵙지 못하였음.

다소 건강은 좋아지셨다고 하지만 망팔의 노구가 어찌 예전과 같으랴.

그러나 서늘한 가슴을 느낄 새도 없다.


온갖 상념들이 수면을 방해한다.

산적한 현안들, 과감하게 처리하라.


누가복음.

기도.

넓은 마음과 안정된 심령...

기필코 획득해야 할 사랑과 온유.


18534  1997. 11. 5 (수)


전단지 만들다.

골몰하여 진짜 마음에 쏙 드는 카피와 디자인이 아니라 생각나는데로 뚝딱 디자인한 것이다.

바닥에 널려있는 그림들은 어지럽고, 상념은 이리 저리 갈래를 나누어 흐트러지고, 마음밭은 어수선하기만 하여.

어떤 상황에서라도, 시종여일하게 견지될수 있는 굳건한 중심을 갖기에 나는 너무나 요원하구나.


오후들어 작은 처제가 화집 싣고 오다.

근 백권에 달하는 일본물 명화전집, 그림 그리는 큰처제가 얼마나 아끼는 책들인가.

작은 처제와 작은 처제의 친구와 그리고 우리 네식구, 두 대의 승용차 나눠 타고 하리 횟집으로.

명목은 복귀하는 俊이의 회식자리다.

현재, 아들의 있어야할 정위치는 바로 부대이련만, 어미의 마음은 마냥 낯선 땅으로 떠나보내는 심정이다.


오늘 俊 가는 날.

10시 비행기로 서울로 가서 친구를 만나고 오후 늦게 홍천가는 버스로 부대에 복귀한다.


18535  1997. 11. 6 (목)


俊 떠나다.

엄마와 누나의 공항 전송.

새까만 쫄병때 같으랴만 그래도 사각의 규격 속으로 들어가는 마음은 착잡할 것이다.

제 어미는 김해상공을 날아 올라가는 비행기를 보며 마음이 짠했을 것.


새로 들어온 아트포스타등에 코드표를 부착한다.

늦게까지 J와 끙끙대며 진열에 몰두.

그 무거운 커다란 액자를 벽에다 걸려니 몸살이 날 지경이다.


LB걸 내외 찾아오다.

그도 회사를 그만두었다.


18536  1997. 11. 7 (금)


어머니 가희에 오시다.

깃털처럼 가벼운 어머니...

목덜미에는 주름이 늘어졌고.


가슴속을 흐르는 진한 전율은 하나의 고통이런가.

고통은 상처받은 순결한 사랑에서 뿐이 아니라, 원망과 연민의 시리고 아픈 서러움의 상처의 아픔이기도 하다.


H이사 서껀 여러 사람들로 부터 인사전화 쇄도.


몇시간 끙끙대니 그런대로 정리된 느낌.


18537  1997. 11. 8 (토)


밖의 경제는 지금 말이 아닌 모양이다.

밖의 경제, 그러나 나는 밖에다 마음 쓸 겨를은 없다.

일단 나의 경제가 이토록 핍근한 지경이니.


J가 골라 운반해온 탁자와 소파.

무슨 커피 숖에나 어울릴 물건이다.

나는 좀 더 사무적인 느낌의 심플한 것을 원하였는데.


인쇄된 전단지 가져왔다.

영 마땅치 못하다. 두어시간 자판 두드리고 고흐의 '라 크로의 수확'을 끼워넣어 뚝딱 만든 것. 좀 더 구상하고 다듬고 할 것을.

이미 3만장이나 인쇄가 되었으니 어쩌랴.


몇사람 고객 내방,

중년의 여자에게 그림 한점 팔다.

세잔의 소품.

묘하고 짠한 기분.

난생처음 내 물건을 내 점포에서 팔아 돈을 받았다는...


오늘 오픈이다.


새벽, 불꺼 어둠 속에 잠겨 드리는 기도.


18538  1997. 11. 9 (일)


드디어 아트 갤러리 '가희'는 문을 열었다.

떡을 하고 고기를 삶고하여, J와 英이는 아침부터 주위의 점포들과 주책은행, 중리의 제이 컴퓨터까지 돌린다.

오전에 哲이와 형수 오시다.

J의 친구들, SH 어머니, SO 이와 어린 딸, DG약국 S형 부부, CS교 부부등 수십명....

오후 들자 회사사람들, KK곤, AG동, KD철....

HS혁 이사, SJ엽 , PY태, LW규 , SY철. 그리고 PI서 씨...

곧이어 들이 닥친 동창 녀석들.

SM성, OY재, KI용...


여러분 들이 그림 한점씩 사다..

기백만원의...


저녁무렵, N영 과 S곤 오다.

H근 이는 표구한 제 그림 싣고 수한나 엄마와 함께 오다.

늦도록 술을 마신다.


그리고 귀중한 한사람의 젊은이.

하얀 해군 중위의 정복을 입은 A군.

英이 얘기하였던 예의 그 선배다.

아주 핸섬하고 유쾌한 성격.

내 딸... 군인의 아내(?)


기도와 감사,


18539  1997. 11. 10 (월)


일요일.

이른 아침, J와 함께 가희에 가 셔터를 열어주고 나는 목욕탕 들어 앉는다.


명함 사진등 이미지들 출력작업.

W이 아버지 아트포스터 한점 구입,

J가 한점의 그림을 팔았다.


18540  1997. 11. 12 (수)


그림 네점 팔다.


18541  1997. 11. 12 (수)


가희.

드나드는 사람들 제법있고, 쇼 윈도우 앞에 발을 멈추고 흥미있는 얼굴로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제법 있었지만 매출은 없었다.

의외로 액자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예쁘고 다양한 액자를 갖추어야 할 필요성.

서울 올라가 패셔너블한 제품을 생산하는 곳을 알아보아야 할까.


매출이 이루어지지 않은 하루.

그러나 의기소침할 이유는 없다.

예상했던바 초반의 뜨아함은 당연지사다.


새벽.

누가복음.

기도.


18542  1997. 11. 13 (목)


금비라나.

정말 오랜만에 비 내린다.

오랜 가뭄의 해갈에는 턱없이 부족하다지만 그래도 겨울 굳은 대지의 거죽은 적실 것이고.아마도 겨울을 재촉할 것이다.


오전, 큰 처남부부 커피세트를 들고 오시다.

SH 이 오래동안 보지 못하였더니 그 새 커단 덩치의 씩씩한 젊은이로 자랐구나.


사진 액자를 찾는 사람, 창을 가려줄 커다란 그림을 흥정하는 사람등 방문 고객은 간헐적으로 이어지지만 매출과 연결되지는 않는다.


판매전략을 숙고.

구색에 있어서, 가격에 있어서, 또는 고객응대방법, 구매욕구를 유발할 무엇, 타겟으로 삼을  주고객에 대하여...


주문한 도자기 다섯점 저녁에 W 이가 차에 싣고 오다.


18543  1997. 11. 14 (금)


우루과이에서 2개월전 귀국하였다는 젊은 주부, 남미에의 향수와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한 감상.

그 녀를 상대하여 담소를 나눈다.

두점 판매.

동삼교회 전도사 방문.

교회출석의 간곡한 권유, 곧 출석할 것이라는 막연한 약속을 드린다.


오후 英이와 교대하여 집으로.

英, 판화 한점과 대형 아트포스터를 팔고, 저녁에 J는 불화의 액자제작을 주문 받았다.


어제와 같은 조짐이면.

들뜨지 말라.


꿈-

새벽.

요한복음.

기도.


18544  1997. 11. 15 (토)


아침부터 주룩주룩 비가 내린다.


YJ 엄마등에게 그림 2점 판매하고, 액자주문 받다.


英이와 J는 세창과 현대 들러서 맡긴 액자 찾고, 현대에서 사진 액자 구입한다.


옆 수족관집 외동 딸.

똑똑하고 되바라졌지만 마냥 귀여운 다섯살짜리 계집아이.

가희에 스스럼없이 문을 밀고 들어와 갖은 재롱을 부린다.

한참을 놀아준다.

요런 손녀 딸 하나 있었으면 하는 오십줄 사나이.

이제 완연한 영감탕구인가


밖에서는 온통 경제우려 속에 대통령 선거전 한창이지만.

나는 그런 쪽에 기울일 겨를이 있을리 없다.


18545  1997. 11. 16 (일)


토요일.

회화미술에 대하여 박식한 아마추어 화가인 BG민 엄마.

우리는 그녀에게 안다이 박사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동삼동에 '가희'라는, 문화 냄새 풍기는 조그만 공간이 생겨서 무척이나 반갑고 고마운 모양이다.

오며 가며 들러 차를 마시고 환담을 나눈다.

미술, 음악, 문학을 넘나드는.

이런 분들이 나를 고무케 한다.

영도의 문화적인 사람들.

이른바 스스로 교양인이라 느끼는 사람들.


BG민 엄마는 가희에서 대작 축에 드는 고호의 '붓꽃'을 사고, 천경자의 그림을 확대하여 액자하여 줄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 화가인 자신의 오빠의 회화전 때의 도록을 가져와  '코스모스'의 그림을 캪처하여 만들어 줄 것도 주문.


가야숙모와 DE 처와 아기, 어머니와 함께 오시다.

가야숙모는 프로의 솜씨로 쇼윈도우에 꽃꽂이 장식.

그리고 한다발의 꽃으로 가희에 향기를 가득 담아주시다.

어머니, 한줌의 어머니.

소파에 깊숙이 앉아 짐짓 아들놈의 점포의 분위기에 아늑해 하시는 포즈가 아들놈은 말할수이 애틋하다.


저녁에 英 이의 남자 친구 A군 오다.

볼수록 괜찮은 녀석.

외모도 준수하려니와 체격도 좋고 성격도 좋다.

얘기를 나누어본바, 사고방식 또한 군인답게 건실하다.


그런데 J는 다소 시큰둥.

어미짜리에게는 딸의 영토에 침입한 낯선 존재를 향한 심리적 저어감 같은게 있을 것이다.


18546  1997. 11. 17 (월)


일요일의 거리는 한산하다.

문을 연 점포도 몇되지 않고 오가는 차량마저 뜸한 것같다.


세창공예의 KD호 사장 방문.

생각밖으로 분위기 있게 꾸며져 있음에 놀라는 눈치다.

마주 앉아서, 그는 사람좋은 포즈로 자신의 가족 얘기, 실패하였다 재기한 얘기, 종업원들 얘기를 들려주고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역시 사람좋은 웃음을 흘린다.


작은 처남부부와 S기 찾아와 한나절을 머문다.

예쁜 S기등의 사진을 몇장 찍어 뽑아 액자를 만들고 또 처남댁의 명함도 만든다.


18549  1997. 11. 20 (목)


난로를 지피고 P/C앞 앉아서 각 장부의 포맷을 만든다.


수능시험일.


오후에 집에 있는 전축과 레코드를 가희로 옮긴다.

이제는 시중에서 찾아볼수도 없을 턴 테이블과 LP 레코드들.


음악이 흐르는 가희.


18550  1997. 11. 21 (금)


대한민국의 경제는 지금 곤두박질을 치고있는 모양이다.

외환시장은 벼랑이라는데.


그림장사, 이른바 문화적 폼을 잡는 가희.

일단 먹고 난 연후에야 문화가 아닌가.

새록새록 이는 한줄기 불안.


그러나 아니, 아니다.

아니고 말고.

컨셉을 정하고, 궁구하고 연구하고 노력하고 친절하고 성실하면 가희는 된다.

암, 되고말고,


절망이란 있어서도 아니되고 있지도 아니하다.

이제 발걸음을 떼어 놓는 갖난아기, 이 이상 무얼 바란단 말가.

최소한 1 년은 해 보아야 되는지 안되는지 알수 있다는 선배님들 말씀도 있지 아니한가.


내점하는 고객들께 디지털 촬영 연출 사진을 액자에 끼워 증정하려고 그 광고문안을 유리창에 부착한다.

그리고 서비스권이라는 딱지도 만들어 놓는다.

무언가 끌어들이는 미끼가 필요하다.

그리고 자꾸 가희라는 점포의 입소문이 퍼져 나가도록 하여...하여...


서울대 원로 교수가 30년 이상 활동한 고정간첩.


18551  1997. 11. 22 (토)


종일 내리는 비.

비 내리는 거리의 풍경화는 안온하지만 가희에는 고객이 없다.

모차르트를 틀어놓고 난로를 피워, 그 공간의 호젓함이 따뜻하지만 마음밭에는 황량한 바람이 인다.

나중에 소품 하나 팔았지만 그 여자 고객께서는 공짜로 증정하는 연출 사진 쪽의 부록에 더 마음이 계신 것 같다.


장선우 감독 '나쁜 영화'

철저하게 르뽀르따쥬 기법을 표방, 극영화를 이런 식으로 만든 것은 글쎄..

가출청소년과 행려들의 리얼리티 역시 새삼스러울게 없다.


꿈- 왕따 당하는 나, 媛이의 꼬드김, 어머니의 노골적인 배척 포즈, 나는 눈에 피를 철철 흘리며 어머니를 쏘아본다...


18552  1997. 11. 23 (일)


형과 彦, 哲이 다녀가다.

세창공예의 공장장 한참을 노닥 거리다가 갔다.

그의 사진 찍어 뽑아주다.

그는 이만한 분위기와 이와 같은 컨셉이면 꼭 될것이라고, 빈말이 아니라 진지한 포즈로 말하여 준다.

그래, 된다.


화가라는 여인, 액자 주문.

고호와 모네 정물화 팔다.


저녁 늦게 CS교 부부, 도자기 한점을 산다.


英이와 사복한 A군과 함께 하리 횟집.

J는 홀로 가희를 지키고.


英이, 아비나 어미의 눈에는 띄지 않은 英이의 장점.

딸아이, 제 선후배등 지인들 사이의 평판이 아주 좋음에 아비짜리는 공연히 흐뭇하다.

남의 얘기를 다소곳이 들어줄줄 아는, 트라블의 해결사, 이해와 포용력은 여자 같지 아니하고, 결코 튀려고 하지 않는데도 재능과 실력으로 서클을 압도하고, 헌신적인 봉사의 정신.....

아비 어미에게는 제 자식은 언제나 모자르고 못나 보이기 마련인가.

그리고 눈치를 보아하니 英이에게 대쉬하는 선배는 A군, 이 녀석 뿐이 아닌 모양이다.


A군 의 얘기에서 비로소 깨닫는 딸네미의 좋은 점.

부모라는 고착된 관념의 시각으로 보는 자식은 공정하지 못하다.

엄청나게 다른 것이구나.


건전한 사고방식과 남자다운 패기의 A군, 장남으로서 결혼이 급함을 피력한다.

아아.


18553  1997. 11. 24 (월)


일요일의 한산함.

한나절 그림을 제작한다.

이번 캔버스는 괜찮은 편.


俊이에게서 전화.

건강하고 편하다는 반가운 목소리.


LW규, 가희로 찾아와 함께 KO훈 의 집으로 올라간다.

그곳에는 SJ엽 , YY호 , NJ개 등이 이미 판을 벌리고 있다.

맴맴 맴도는 대화는 조선소의 그것들..

다시 우 가희로 몰려왔다가 옆의 이층 아담호프에 둘러 앉는다.

CS교, JM교 도 불러와 합류.


이인제는 점점 처지고, 이회창과 김대중의 대결구도.


18554  1997. 11. 25 (화)


데코라인 K사장 오게하여  브로마이드포스터 구입.

밖에다 이젤을 세워 걸어 놓는다.


날씨는 온화한데 고객은 없다.

들여다보고 둘러보는 사람들은 간혹 있으나 매출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처음이다.

한건의 매출도 없는 날은.

그러나 암담해 할 이유는 없다.


새벽.

어둔 유리창 저편, 아마 비가 듣는듯.

유리창에 빗방울이 소름처럼 돋아있다.


사도행전.

기도.


18555  1997. 11. 26 (수)


늦가을 비인지, 초겨울 비인지.

퍼붓듯 쏟아져 내린다.

가희에는 단 한사람 고객도 있지 아니하고 그렇게 비는 쏟아져 내린다.


나라의 경제는 정말로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모양이다.

원화가치는 급락에 급락을 거듭하여 달러당 1100원을 웃돌고, 주가는 곤두박질하여 주가지수 450을 밑돌고.

IMF 인가 뭐라는 데다가 500억불 지원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내년에는 정말 걷잡을수 없을 지경이라는데..


내 마음 더불어 암울.

우선 의식주 다음에 문화가 아닌가.


저녁 W이 아버지 KG평 씨 방문.

가희 셔터를 내리고 함께 앞의 고깃집 마주 앉아서 소주를 마신다.

이끄는 바람에 그의 집까지 가다.

W이 어머니, 반신불수인 J의 친구.

머리카락은 허옇게 세었는데 그 얼굴은 소녀처럼 해맑기만 하다.

KG평 씨는 좋은 사람이 있다고 英이 중매 선다고 야단이다.

英을 예전부터 잘 보아주신 분이지만, 참한 색시감으로들 꼽아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18556  1997. 11. 27 (목)


비는 그치고 활짝 갠 푸른 하늘.

봄 날씨만 같다.


네점의 그림 팔다.

이틀동안의 무매출의 늪에서 벗어난다.


'기러기들 날아 오른다/ 얼어붙은 찬 하늘 속으로 소리도 없이/ 싸움의 땅에서/ 초연이 걷히지 않는 땅에서/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바람 속에서 오늘 눈감은 나의 형제들처럼'  -기러기떼 '이시영'-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의 말.

'지금의 나에게는 거의 그 마음이라는 것이 남아있지 않다'.

나야 말로 그 마음이라는 것을 되찾아야 한다.

'나의 온기는 저 먼곳으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나야말로 그 온기라는 것을 역시 되찾아야 한다.

한 뼘 온기가 담긴 따뜻한 마음 한조각.

슈베르트를 들으며 눈믈 글썽이는 마음.

이것을 찾아야 한다.


18557  1997. 11. 28 (금)


날씨는 청명하고 고객은 없다.

안다이박사, BG민 어머니가 가희 최고의 고객.

찾아와 한동안 나누는 담소.

예술 애호가의 면모.

열정과 숨어있는 어떤 광기도 내비친다.

그러나 소녀 취향 또한 없지 아니하여 귀엽기도 하고.


가희의 실내 정리.

설합과 책장과 선반.

그리고 각 장부의 입력방식 정리, 빈 카드리지에 잉크 리필, 이미지명함 포토아트등 샘플 줄력..


멍하니 P/C의 화면으로 TV나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죽여서는 안된다.

사부작 사부작, 바지런한 생쥐처럼 무어라도 움직여야 한다.

나태는 금물.

안일함은 금물.


정신적인 방기는 더욱 금물. 금물.


18559  1997. 11. 30 (일)


오전 가희 앉아서 디스켓 정리.

액자의 원가를 분석하여 조견표를 만들었다.

가는비 흩뿌리다.


미술전공 학생이 와서 큰 그림을 꼭 살 듯 살듯하고 곧 오겠다고 나가더니 소식이 없다.

신사분 판화 한점, 수입액자 두점,

처제와서 천경자 그림과 아트포스터 한점씩.

르노와르 그림 한점.

좀 팔리는 날이라고 금새 히히덕거리지 말라.


英, A군이 부대에서 나오는 주말은 이제 허락된 데이트.

젊은녀석들, 그 데이트가 행복이라면 실컷들 행복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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