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설-
<갈매빛 그늘> -2-
2007년 11월 23일
이제 나는 안다.
인간의 실존이란 일개 이념의 틀 속에 넣기에는 엄청나게 벅찬 무엇임을.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말하였다.
<나는 어차피 살덩이와 뼈와 피와 땀과 그리고 눈물과 욕망과 꿈으로 가득 채워진 자루이다.>
전 존재로서 수렴하여야 할 완벽하고 순정한 가치관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란 살아내는 존재이다.
아버지는 결코 변증의 역사과정의 한 의미로써 스러진 것이 아니다.
아들인 나는 확신컨대, 아버지는 당신의 '갈매빛 그늘', 그 정서 속에서 가셨을 것이다.
삶이 그러하듯 죽음이란 일관된 관념 속에 가두기에는 지독하게 개별적인 것이다.
짐짓 어떤 폼을 취할지언정 본질적으로 모든 죽음은 개별적 타살이다. 자살도 또한.
불가사의한 섭리에 의하여 우리는 개별적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집단적 보편적 가치에 헌신하여, 혹은 애타심의 지고한 희생정신으로 스스로 택하는 죽음이란 겉으로 있을수 있겠으나 죽음의 본질은 타살이다.
까뮈가 말하고 김훈이 말하고 아도르노가 말한다.
"나는 어떤 관념 때문에 죽는 사람들에 대해서 신물이 난다. 나는 영웅주의를 믿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것을 위해 살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 죽는 것이다."
"사회적.공동체적 존재라는 전제하에서 주장되고 있는 모든 가치가 개별적 존재 속에서 구현되지 않으면 공허하다."
"전체는 거짓이다"
어떤 주검이라도 역사의 것은 없다.
스스로 주검을 주장할수 없으니 사랑하는 사람, 핏줄이 주장하는 주검만이 최선의 정당함을 획득할 뿐이다.
아버지의 죽음,
당신의 주검을 내게 보여주지 않았는데도 전율처럼 깨닫게 되는 이 서늘함을 정빈아. 너는 알랴마는.
그리고 아버지는.
역사의식에 겨운 순수한 프롤레타리아에 근거한 이른바 기본출이 아니었다.
기본출은 커녕 부잣집 맏아들로 태어난 사람.
부르주아적 환경 속에 성장하여 어린 나이적부터 일본에 유학하여 풍족한 환경 속에서 공부하였던 사람이다.
아이디얼한 맑시스트 레닌은 꿈꾸었을지언정 결코 혁명의 현장적 레닌은 느끼지 못하셨을.
나는 상상하며 각색한다.
당시 경제학을 전공한 인텔리는 학문적으로 어떤 식으로든 맑스에 연관되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고 ... 자본주의 제국 일본 치하에서 은밀하게 진행된 자본론 독서회 서클... 남로당 언저리의 동지도 생겨 어떤 세포조직이나 연판장도 있었을 것이고,... 그러다 해방이 되었고,... 좌우의 투쟁이 있었고,.. 이승만이 집권하였고,... 미국이 있었고,... 쏘련이 있었고,...보도연맹이 있었고... 무시무시한 예비검속 사상검속도 있었고,,, 집단적 학살도 있었고,,.
절대절명의 어떤 상황에서 아버지는 삼팔선을 넘어 북으로 갔을 것이다.
그리고 필경은 1953년 종전까지의 그 와중, 어느 북녘 어느 모롱이에서 돌아가셨음에 틀림없을고다.
그리고 오래 사셨더라도 북쪽 권력 언저리, 그 이너서클에는 들수 없었음이 분명할 것이다.
먼 훗날.
아들놈인 나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의 동경시대의 글을 읽으면서 불온한 사회주의 써클에 가입하였지만 자의식적으로 읊쪼리는 퇴폐적이고 지극히 나이브한 그 다자이 오사무에게서 내 아버지를 느꼈으니.
오오 아버지 그러하지 않은 당신이었다면 나를 용서하소서.
가는 뿔테 안경 쓴 창백한 모습의 한두장 낡은 흑백사진 남아 있어 (그마저 지금 누구의 수중에 있는지) 그 모습 뇌리에 새겨져 있지만, 갓난장이 때 떠난 아버지인데 내 무엇 한줌 그의 체취 간직하고 있으랴.
어렸을 적 고모들은 나를 보면 얘기하였다. 거울을 보아라. 거기 네 아버지가 있다고.
나는 아버지와 그토록 닮았던 모양이다.
아아, 이제 이순 넘은 내가 거울을 본다.
추상의 아버지가 지금의 나를 닮아 그렇게 늙은 모습으로 그 안에 있다.
내가 그랬다던가. 누군가 창호지 문을 찢었는데 "어구 어구 큰나났다. 아부지 오면 혼나났다"고 손뼉을 치면서 덩실거리더란다.
그 순간 두 살짜리 유아에게 아버지란 과연 어떤 존재의미로서 자리잡고 있었을까.
그러나 어버버하는 그 외마디 소리에. 아버지라는 의미는 어린 영혼에 분명하고 커다랗게 존재하였었음을 나는 소스라치게 깨닫는다.
읽던 책 제자리 없으면 불같이 화를 내고, 많은 동생들에게는 폭군으로 군림하였고, 원산 해수욕장과 금강산 스키장(나는 그렇게 들어 기억하고 있다)에서의 일련의 행각 따위의 단편적 얘기들.
주로 고모들께로부터 들었던 단편적 에피소드는 그저 부잣집 맏도령일 뿐이었다.
1.4 후퇴.
우리 식구는 모두 남으로 피난하였다.
유엔군에 밀려 다시 북으로 후퇴할 때까지 몇 개월 아버지는 포연 자욱한 서울거리에 나타났던가 보았다.
외가 친척 규청이형네 할머니의 전언이었다는데, 아버지는 종로구 내수동의 처갓집(나의 외갓집)에 계급장 없는 군복차림으로 나타나셨다고 한다.
외갓집 역시 어디론가 피난가 버린 텅 빈 집.
고색찬연한 한옥인 외갓집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짓는 담벽에다가 석필로 진하게 쓴 아버지의 메시지.
"왔다가오. 여보, 상효, 상헌, 주원아" 쯤의 글이었을까.
그게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흔적이었다고 한다.
오늘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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