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갈매빛 그늘 -8- (1,4,3,3)

카지모도 2019. 9. 25. 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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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갈매빛 그늘> -8-

2008년 8월 15일

 

외가의 큰집 사촌들.

모두 인물이 좋았지만 특히 큰누나 박규완(朴圭婉)은 정말 미인이었다.

일찍이 나는 큰누나만큼 단정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을 본 적이 없다.

잠시 눈감아 모습들 떠올리려니 큰누나에게서 돌아가신 어머니(누나에게는 큰고모)의 모습이 오버랩 되기도 하여 공연히 마음이 촉촉해 지는구나.

용모뿐 아니라 은쟁반에 옥굴러 가는 목소리, 누나에게 있어서 이런 표현은 입에 발린 수사가 아니다.

98년 늦은 봄 어머니 돌아 가셨을적 만난 큰누나는 당시 환갑 훌쩍 뛰어넘은 연배일 터인데 그 용모 음성 여전하여 내게 그것은 감동이었다.

나는 여배우 이영애를 접할 적마다 큰누나를 떠올리게 되지만, 이제 일흔 노파일 큰누나가 훨씬 더 어여쁜 이미지로 내 감성에 자리잡고 있다.

어린 소년의 순정한 마음에 아로 새겨진 미의식은 세월 흘렀다고 혹은 늙었다고 쇠하여지는게 아닌가 보다.

이틀 동안 외할미를 치대고 부대다가 얼마전 제 집으로 가버린 정빈이가 다시금 보고 싶다.

아, 지금의 네 그 모습 담은 할비의 심상은 얼마나 순정할까... 아, 할비만이 스스로 아는도다.

 

작은누나 박규연(朴圭姸)

이름처럼 연하고 싹싹한 작은 누나.

내수동 외갓집 안방의 어느 해 크리스마스 이브.

당시 여고생이었을 누나는 색종이로 고리를 만들고 등을 달아 벽에 너울너울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고서 과자조각 차려진 상 둘레에 어린 동생들은 둘러 앉혀 트럼트놀이도 하고 무슨 게임 같은것도 하였다.

촛불의 비추어 머무는 빛의 테두리는 좁았겠지만 무척 따뜻하였을 것이다.

그 따뜻함 때문일 것이다. 나의 소년기 크리스마스가 최대 최상의 명절로 여겨지는 느낌은.

1960년대의 초쯤 서울의 겨울은 하냥 추웠지만, 어느 가족의 행복한 정경을 창밖으로 훔쳐보면서 성냥불로 언 손 녹이며 하늘나라로 갔을 성냥팔이 소녀의 추위는 소년에게 있지 아니하였다.

미국땅 살고 있는 작은누나.

 

큰형 박규호(朴圭浩)

이목구비 뚜렷한 커다란 덩치, 출중한 외모뿐 아니라 성품이 참 너그러웠던 큰형이지만 박씨집 장손으로서의 엄격함은 알게 모르게 스스로에게 배어있어 어딘가 좀 어려웠었던 부분도 있었다고 기억된다.

화초가꾸기는 큰형의 대단한 취미였다.

고등학교시절(경복고) 원예부장인가를 하면서 안마당 화분 선반 꽃밭에서 분주하게 서성이는 형의 모습은 일몰받은 실루엣의 순간적 영상으로 내 기억의 한페이지에 또렷하게 인화되어 있다.

화초를 그토록 사랑하였던 형, 전공 역시 그러하였다고 기억하지만 빌딩을 짓는둥 어쩌는둥 사업실패를 하기도 하여, 큰 형도 지금은 미국에 살고 있다.

 

성북구 정능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작은형 박규선(朴圭善)이 떠오른다.

내 배움의 역정 속에 멘토는 없었는데 유일하게 멘토라는 의식이 있었다면 그건 작은형 박규선일 것이다.

고모집(어머니) 놀러와 며칠을 함께 동생들과 뒹굴던 규선이 형(내 친형도 규선이형보다 2년쯤 아래였다)과 함께 하였던 정능의 어느 겨울을 나는 잊을수 없다.

다재다능한 슈퍼맨이었다, 규선이형은.

듣기 좋은 목소리로 부르는 ‘켄터키 옛집’이 황량한 정능의 겨울풍광을 서부영화 어떤 개척지의 여름으로 만들어 버렸고, 형이 그리는 만화 그림속 피터팬이 되어 하늘을 날았고, 대본점에서 빌려 읽는 김래성의 ‘청춘극장’은 형과 나누는 가슴 울렁이는 로망의 꿈이었다.

 

아아, 그리고 정능을 회억하려니 상각사록 마음 깊은 곳이 아려온다.

미아리 고갯 마루, 훨씬 후에 세워진 미도극장을 왼편으로 끼고 한참 내려와 어머니의 ‘박 의원’이 있던 일원.

여름 과일의 달콤함 속에 농익어 썩는 내음...

모르핀에 넋을 맡겼을 순간 순간은 의사인 어머니에게는 어떤 종류의 도피성의 영역이었을까.

마흔 즈음의 어머니에게 육정의 고통 또한 없었으랴.

정능시절의 종장 무렵은 우리 세남매에게는 견디기 힘든 연옥의 계절이었다.

네 식구는 뿔뿔이 흩어져 정능을 떠났다.

어머니는 부산 할아버지에게로, 형과 나는 자하문밖에 얻은 하숙집으로, 주원이는 안암동 숙부댁으로.

일면식도 없었던 한 여대생 (숙부댁 가정교사였던 성신여대생 정순자)으로부터 장문의 편지.

어린 소녀의 외로움에 대하여, 형제간 결속에 대하여, 사랑의 나눔에 대하여, 희망과 용기에 대하여.

선의와 사랑이 가득 담겨있는 명문의 편지였다.

내 안에서 무언가 물어뜯는 짐승은 좀 유순하여 졌고, 내 창밖을 후려치던 바람소리는 좀 잦아 들었다.

그로 인하여 나는 문학을 꿈꾸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정능.

초록빛 뿐이랴 검은빛 고통 또한 어려있을 그곳.

소년의 소롯한 무덤 한기 있으리.

 

박규정(朴圭貞)

생년은 나와 같았지만 생월이 늦어 꼬박꼬박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그러나 당돌하고 발랄하기가 용수철 같았던 여동생이어서 나는 주눅이 들었을 것이다

대학때는 짐짓 아쁘레 폼을 잡고 발랄한 매력을 천방지축 뽐내었지만, 홀어머니와 오빠 언니들 귀염을 독차지한 마냥 막내딸이었다.

규정이 얼굴 본지도 몇십년이 흘렀구나.

나처럼 늙었을 규정이가 보고 싶다.

 

작은 외삼촌 (당최 성함을 기억해낼수 없다)

그다지 크지 않은 덩치, 우뚝한 코의 미남.

외숙모 병수발에 헌신하시다 오래전 상배하여 재혼하셨다던가.

어머니 상청에서 큰아들 태원(박규원)이와 함께 뵙고 벌써 십년이 넘었구나.

 

큰아들 박규원(朴圭源)

나보다 서너살 아래일, 어릴때 이름 태원이로 기억하고 있다.

현재(2008.8) 국내 유수의 H중공업 CEO.

그아래 동생들은 기억에 아슴하다.

 

이모 박남숙(朴南淑)

어머니보다 풍성한 외모로 다소 예민한 쪽인 언니보다 성품 또한 두터우셨다.

키가 크신 이모부에 비하여 대조적으로 단신이었으나 큰 딸 혜자는 키다리로 낳으셨다.

어머니 상청에서 혜자와 함께 뵈었는데, 작년 세상을 떠나셔 그만 그것이 영결이 되고 말았다.

이모라고 발음하여 보라, 뉘에게나 이모란 정겨운 사람, 그립다.

 

큰 딸, 김혜자(金惠子)

눈이 인형처럼 예뻐서 어릴적 오닝교라고 불렸던 여동생.

2005년 봄, 친조카 희진이 결혼식때 서울서 다시 만났는데 손녀딸 안아 어르는 할머니였지만 사촌 오라비를 바라보는 눈매는 그저 이쁜 소녀 그대로였다.

 

둘째 아들 홍량이와 세쩨 딸 김윤정.

지금 상면하면 알아볼수 없을 동생들.

 

내수동 외갓집과 인접해 있었던 규청이 형네.

외가쪽 촌수로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채로 규청이형 모습 뚜렷이 기억된다. 여린 모습의 외숙모님도.

안마당에 세워져 있었던 정권을 단련하는 짚새끼를 감은 낮은 기둥이 떠오르는건 어인 연유인지..

친가 李씨쪽의 서울할머니, 영대아저씨, 부산 영주동 달구지 고모 등등등

외가 朴씨 족의 서울 내수동 일대의 청진동 할머니,규청이 형 등등등

그 얼굴들 모습들은 기억의 흩어진 편린 속 어떤 정경의 그림들로 고스란히 살아난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닌 무릇 관계들이여.

모종의 파장으로 감성은 미세하게 흐느낀다.

'관계'가 무엇이관대 내가 흐느끼는가.

2008년 8월14일 새벽 2시30분

영도의 한밤, 뇌성 울리고 비가 쏟아진다.

 

오늘은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