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화 편력기 -其8->
2003년 7월
여보게.
충무로 영화판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오랜 친구의 사이트로 ‘나의 영화 편력기’전송 엔터를 쳤더니 돌아오는 답인즉슨 신랄한 비난이더이.
영화 많이 본 그것 하나 자랑하자는건가. 영화라는 전문적인 예술장르에 대하여, 그도 아니라면 어느 작품 하나에 대하여도 천착하는바 없이 두리뭉술 영화 제목만 나열하여 놓고서는 무슨 내로라하는 폼을 잡고서 ‘영화 편력기’운운의 헛소리냐하는...
실로 그러하네.
그러나 여보게들.
내 진작 얘기하지 않았던가?
내게 영화에 대하여 전문가적인 어프로치를 가능케 하는 지식 따위는 있지도 않거니와 영화 인문학적으로 무슨 주제 하나를 천착하여 건드릴 소양이 없다는 사실.
한낱 영화 애호가, 그저 낫살께나 먹은 센티멘탈리스트의 넋두리로세.
그것을 스스로 훤히 인식하면서 그렇게 시작한 글인걸 어쩌겠나.
회고취미적으로 지껄이는 감상적 글쪼가리, 유치찬란한 넋두리라고 폄한들 나로서는 어쩔 도리 없는 노릇일세.
그렇다네.
오로지 센티멘탈한 ‘나의 영화 편력기’라는 말일세.
그래서 말인데 여보게들.
궁금하여 묻는 것이네만 예전의 자네들은 어떠하였는지?
나와는 다르게 영화를 보는 쪽 자네의 멘탈은 강한 편이었는가.
한 두어시간 어두운 극장속에 틀어 박혀 있다가 극장문을 나섰을때.
그리고 방금 전 보았던 그 영화가 대단한 감동을 수반한 영화였을때, 그 때의 감정상태.
고양된 기분, 가슴 속 상기된 뜨거움, 소용돌이치는 영혼의 일렁임 같은 것..
그런 것이 없었던가 말일세.
극장을 나서서의 그 후유증. 지독하게 일렁이는 정서의 파도를 자네는 어떤 식으로 잠재웠을까 자뭇 궁금해 지는군.
나의 경우.
감동적인 영화는 최소한 연거푸 두 번씩은 보아야 하였다네.
재개봉관 같은 곳에서야 몇번이고 극장안에 처박혀 관람할수 있었지만 개봉관의 불편한 점이 바로 이점이었어.
입장권에 해당 상영횟수가 찍혀서 곤란하였지.
그래도 나는 맨 앞자리의 빈좌석, 그도 없으면 안내양의 눈총을 피하여 층계참에 앉아서라도 최소한 두번은 보았다네.
(참 자네, 그 시절 유니폼을 입고 작은 후랏쉬를 들고 사부작거리며 손님을 안내하던 극장안 안내양이 생각나는지 모르겠구만.)
삼류극장은 이런게 없으니까 몇번이고 감상할수 있었지.
그런데 동시상영의 경우 나쁜 점은, 시시한 또 한편의 영화를 몇시간이고 끈질기게 앉아서 보아주어야 하는 참을성이 필요하였지.
때로 느닷없이 필름이 끊겨 휘파람 소리가 난무하거나(꼭 결정적인 순간에 그 지경이라니까) 빗줄기가 스크린에 점멸하여 자막을 읽기 어려웠다던가.. 하는 따위 쯤이야 얼마던지.
나는 옛날 그러하였네.
감동적인 영화는 최소한 앉은 자리에서 두 번은 보아야 하였고, 두 번씩이나 보고나서도 그 일렁이는 무엇을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네.
일종의 멀미랄까.
그대로 있으면 숨이 막혀 터질 것 같았다니까.
그 부풀어 포만한 느낌을 어떻거든 덜어내어야 했지.
그래서 다른 극장을 찾아 기어 들어가지 않고서는 그대로 끝장을 볼수는 없었어.
서영춘같은 희극배우가 출연하는 말도 안되게 웃기는 영화들을 한편 또 보아야만 하였지. (서영춘이라는 희대의 코미디언을 낮추어 평가하는 것이 아닐세)
이를테면 술이 너무 독하여 물에 타 희석하거나 중화 시켜야 한다는 그런 것에 비유할수 있을까.
각설하고 다시 나열하는 영화들.
*희갑이 목욕탕 개업하다* 김희갑은 이 무렵 한창 잘 나갔지.
*새벽의 비상선* 황해, 이예춘.
*대탈주* 다크 보가드.. 리듬감있게 펼처지는 탈주극... 유모어도 놓치지 않고..
*이주사* 최남현
*검은 상처의 부루스* 최은희 최무룡. 당시 김치 캐츠의 같은 제목의 노래, 번안가요였지만 얼마나 좋았던지. 요즘은 통 들을수가 없더구만.
*돌아보지 마라* 이만희 감독 장동휘 문정숙.. 강도 결투 용의 아들 “용은 착한 너다”
*키리만자로의 눈* 그레고리 팩, 스잔 헤이워드, 에바 가드너,,헤밍웨이의 원작인데 차분한 연출로 기억되는군.
*이거 됩니까 안됩니다* 구봉서가 만든 유행어.. 이거 됩니까 이거 안됩니다..
*몸부림치는 젊은이들* 율 부린너
*다루도* 버트 랭커스터, 버지니아 메이요. 웃기는 활극영화.
*원탁의 기사* 로버트 테일러 에바 가드너 엑스캬리버라는 전설적인 영국적 주제..아더왕의 전설. 마술사 밀리엄 .. 미개한 영국.. 몇 번의 영화화 영국 아더왕
*젊음이 밤을 지날 때* 김혜정 남석훈 이상사
*아스팔트* 김진규 주증녀 장동휘 편집광.. 부부애 가족사랑. 지금 생각하면 상당한 서스펜스 영화, 이런 국산 영화, 필름 라이브러리에 보관되어 있으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내가 본 영화중 가장 좋은 영화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가장 잘 만든 영화.
레트 버틀러의 클라크 케이블이나 스카렛 오하라의 비비안리.
완벽하게 소화해 낸 적역의 캐릭터.
배경과 세트 의상 소도구에 이르기까지, 거의 완벽한 미장센.
대사와 음악, 기승전결 뚜렷한 드라마 트루기, 그러면서도 종장의 여운까지.
그리고 몹씬은 얼마나 그럴 듯 하였는지.
직접적인 전투장면없이 전쟁의 치열함을 은유적으로 묘사한 화면들.
헐리웃의 영화, 헐리웃의 매커니즘이 만들어 낸 걸작.
거짓말같이 싯뻘건 노을진 들녘. (실제로 후일 나는 서해안에서 나는 이런 싯뻘검을 보았어)
떡갈나무(?)아래 실루엣으로 비추이는 스칼렛 오하라.
무뿌리를 움켜지고 결연하게 중얼거리는 세리프.
‘나는 굶주리지 않는다. 다시는”
스칼렛 오하라의 생명력과 낙관주의와 미모와 발랄함에 반하지 않을 남성 있으면 나와 보라마.
레트 버틀러, 대범함과 여유와 능력과 포용력, 게다가 부자이니. 그런 사나이 마다 할 여성 제위 계시다면 또한 나서보슈.
가장 아메리카나이즈한 한 쌍.
가장 어울리는 이 한쌍은 그러나 그렇게 어긋나기만 하다니 늘 비극은 이 모양일세.
스칼렛 오하라의 애슐리를 향한 헛된 환상- 그 애슐리는 필경 쓰러저가는 남부의 메타포이기도 할터이지.
환상임을 깨닫고 나서야 그녀는 그제서야 진정 레트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러나 레트는 떠나고.
따지고보면 얼마나 멜로적인가.
나는 빅터 프래밍이 만들었던 마지막 화면을 상상하기로 하고 소설의 일장을 줄여서 베껴 들려 주려네.
<그리고 스칼렛은 자기가 사랑하였던 두 남자- 애슐리와 렛트를 두사람 다 진실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았다...아, 나는 누구를 진실로 이해앴단 말인가... 내일 생각하자, 그래 내일. 타라에 가서.. 내일이면 레트를 돌아오게할수 있을거야. 내일 생각하자.. 내일은 내일의 해가 떠오르니까.. 아아 테라! 아아 고향. 거기에는- 하이얀 지붕이 단풍든 나무잎 사이로 빛나고, 고요한 전원의 황혼 사이로 푸르른 솔밭이며. 검붉은 대지, 초록빛 숲속이 저마다 팔을 뻗어 스칼렛을 손짓하고 있었다. 갑자기 매미 할멈이 그리워졌다- 쉬고 싶었다. 테라에 가서 그리고 소생해야 하는 것이다. 패배에 직면하면서도 결코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선조의 사나운 피, 아일란드의 사나운 피가 다시금 스칼렛의 가슴 속에서 끓어 올랐다.... 내일이 되면- 그래, 내일이 되면 생각하자.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뜬다. 내일, 그이 렛트를 도로 찾는 방법을 생각하자...>
아, 여보게들.
결국 인생이란 멜로일세그려.
멜로의 진수라면 *애수(哀愁)*라는 영화를 얘기하지 않을수 없지. (원제는 아마 ‘워털루 브릿지’였을거야.)
역시 '비비안 리'가 출연한 영화일세.
마빈 르로이감독, 로버트 테일러, 비비안 리..
서양의 신파. 흑백의 스탠다드 화면.
여기서 흑백영화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보세.
흑백 톤의 그레이드는 150여가지가 된다던가.
하이라이트부터 로우다크까지.
흑과 백의 사이에 존재하는 그 미묘한 농담의 차이.
컨트라스트를 이루는 계조의 깊이, 그것으로 이해되는 사유의 심오함.
그 깊이가 철학적 사유 내지는 인생의 오의를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낸다고 한다면 과장이 되겠지?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칼라라는 것은 흑백에 비하면 의외로 평평한 단순함일수도 있지 않겠는지.
한때 나는 사진을 하였었네.
봉급쟁이의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에 방 하나를 암실로 만들어 시큼한 하이포 냄새를 온 집안에 풍겨댔지.
아내에게서 얼마나 지청구를 받았던지.
암실.
인화지에 서서히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할때, 붉은 보안등밑에서의 환희.
계조가 적당히 나타났을때 재빨리 건져내어 정지액에 담구어야 영상이 살아나는 일련의 작업과정.
흑백영상은 바로 그 계조를 살려내는 작업이라네.
흑백화면
'애수'도 그러하고 미켈란제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들도 그러하고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작품들도 그러하고 페데리코 페리니의 '길' 또한 그러하였지 않나?
유현목의 *오발탄*을 칼라로 상정한다면 어떠할까 생각해 보게.
어쨌거나 '애수'는 나를 얼마나 울렸던지.
사춘기도 성큼 넘어선 녀석이 눈물이 주루룩 주루룩.
이별의 곡..마스코트.. 워털루 다리.. 안개는 자욱하고...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 몸을 팔아 생존을 영위하는 여인...전쟁..
멜로 드라마.
멜로야 말로 진실한 삶의 모습일세.
얼마든지 가능한 삶의 양상이지.
똥폼잡는 무슨 사상이 녹아있는 것들 말고 바로 멜로 말일세.
아, 무릇 관계들의 현실은 그야말로 슬픈 멜로일세.
자, 거듭 멜로를 얘기해 보세.
전번 얘기하였던 소피아 로렌이 나왔던 영화 ‘두 여인’
연합군에 강간 당하여 넓적다리에 피를 흘리는 모녀.
개천에서 서로 그것을 씻어 주는 두 여인, 어머니와 딸.
전쟁과 능욕 당한 여인, 이것은 멜로가 아닐세.
그러나 멜로일세그려.
멜로를 경멸하는 폼을 잡는, 이를테면 멘탈이 강한 부류에게는.
오늘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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