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 作-
***동우***
2010년 2월 8일
책부족(冊部族)이번달 독회소설(讀會小說)
'아베 코보(安部公房, 1924~1993)'의 소설 '모래의 여자'
소설을 읽고 웹하드에서 다운받아 영화 '모래의 여자'를 보았다. (좋은 세상아닌가, 무시로 원하는 영화를 감상할수 있으니)
그 옛날 '청구문화사'에서 간행한 10권 짜리 '전후세계문학전집'이라는 한질의 책이 있었다.
생각이 덜 여문 어린놈에게 그 전집은 경이로움이었고 혼란이었고, 그리하여 의식의 확장이었다.
그 전집 '일본편'에 실린 '아베 코보'의 '벽- S 칼마씨의 범죄' 역시. (단절, 고독, 실존, 비트족, 자유... 그런 이미저리들이 아슴한 기억 속에 어지러이 남아있다. 그 작품으로 아베 코보는 아쿠다가와 상을 받았다)
영화 '모래의 여자'는 '히로시 테시가하라(勅使河原, 1927~2001)' 감독이 1964년에 만든 작품. (칸 영화제에서 무슨 상을 받고 아카데미상 후보에도 올랐다던가)
어두운 톤의 흑백 화면, 영화는 원작의 내러티브와 분위기를 충실하게 영상화하였다.
영화가 보여주는 모래 구덩이 속의 실존.
그 상황적 현실.
거기에는 '미켈란제로 안토니오니'도 있었고 '오발탄'도 있었고 '고스타 가브라스'도 있었다.
그리고 예전 내 먹고사니즘의 조선소의 암담한 노동의 현장도 있었다.
소설‘모래의 여자’의 '모래'.
그 디테일은 매우 사실적인 물질이며 감각이었고, 또한 추상이며 일견 지독한 관념이었다.
우리의 의식 속에‘모래’는 물질명사인지, 아니면 보통명사로 자리잡고 있는지.
혹 추상명사는 아닐까.
1mm도 안되는 암석파편 한알갱이.
접사(接寫)렌즈를 끼워 극확대(極擴大)로 그 피사체를 잡는다.
PAN OUT, 서서히 뒤로 빠지는 카메라.
차츰 차츰 넓은 범위가 카메라의 파인더에 들어온다.
백개, 천, 만, 억, 천억개의 모래의 집단.....
모래의 그 디테일한 물질로서의 포름은 점점 몽롱한 이미지가 된다.
모래라는 물질은 시나브로 희미해지고, 모래밭이 되고 이윽고는 백사장(白沙場)이 되었다가 필경은 사막이 되어 버린다.
사막(砂漠)은 추상화된 모래의 은유(隱喩).
오, 그대 아는가, 사막은 추상이다.
스물즈음 나를 흠씬 반하게 하였던 인물이 있었다. (책상 앞에 신문에서 오려낸 조그만 그의 초상을 붙여놓고 자나깨나 들여다 보았었다.)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그의 ‘전기(傳記)’와 ‘일곱기둥의 지혜’인가 하는 그의 책을 읽어 보았고, 그 보다 데이빗 린이 연출하고 '피터 오툴'이 로렌스로 粉하였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
‘피터 오툴’의 푸른 눈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듯 그윽하게 사막을 바라본다.
"당신은 사막을 왜 그토록 사랑하느냐" 고 기자가 묻는다.
로렌스의 한소절 대답,.
"청결해서"
생각컨대 사막(砂漠)은 바로 로렌스의 내면, 그는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몸서리치게 매력적인 스토익(stoic)한 그의 내면(內面)의 그림, 나는 그 사막을 들여다보고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를 흠모하였던 것이다.
자기애(自己愛)에 함몰된 정신은 외부를 향하여 극기(克己)의 몸짓으로 나타나고, 그 폼이 내 젊은 객기(客氣)는 그토록 좋았던가 보았다.
그렇지만 아베 코보의 ‘모래’는 사막이 아니었다.
이제 늙어버린 내 객기의 대상이 되기에는 참 절박하고 암담한 느낌만 자아내는 모래구덩이 속의 실존이었다.
물건(물질)이란 사람을 제외한 유체물(有體物)을 이름함이다.
유체물에는 고체와 액체와 기체가 있다.
안개는 기체이고 물은 액체이고 모래는 고체이다.
유동하는 것들이다.
김승옥의 ‘안개’는 사람을 감금하지는 않았고, 필립 로스(애브리맨)의 ‘물’이란 유영(遊泳)함의 자유였지만, ‘모래의 여자’의 ‘모래’는 인간을 감금하여 압살한다.
그 실존의 모습에 숨이 막힌다.
아베 코보의 ‘모래’는 단절과 폭력과 허무의 메타포다.
그 디테일은 즉물적이고 섬세하여 ‘모래’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감각적이다.
예전 조선소, 여우같은 마누라 토깽이같은 새끼들의 입을 위하여 내일도 모레도 행위하여야 하는 시지프스의 몸짓.
좁은 탱크안을 기면서 그 숨막힘에 나는 숨을 허덕였다.
그것은‘호모 사피엔스’가 갇혀버린 ‘호모 파베르’의 구덩이에 대름 아니었을 것이다.
‘유동이 모래의 생명이다. 절대로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모래는 절대로 쉬지 않는다.’
모래 구덩이 속, 집이 파묻혀 버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매일매일 삽질을 해야 하는 반복적인 행위에게서 '노동하는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움은 어디에도 없다.
가득한 허무뿐이다.
제목이 ‘모래의 여자’이지만, 모래구덩이 속의 집에는 ‘생활하는 여자’와 ‘갇힌 남자’가 있다.
모래에 순응하는 여자와 모래에 저항하는 남자.
왜 모래구덩이 속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느냐는 남자의 물음에 대답하는 여자.
"하지만, 밖에 나가봐야, 딱히 할 일도 없고...."
"걸어다니면 되잖아!"
"걸어다녀요?"
"그래, 걷는 거야. 그냥 걸어다니기만 해도 충분하잖아. 내가 여기 오기 전까지는 당신도 마음대로 나다녔을 것 아니야?"
"하지만 볼 일도 없는데 나다녀봐야, 피로하기만 할 뿐이니까요......"
"무슨 그런 웃기는 소리를 하는 거야! 자기 마음을 열어보라고, 모를 리가 없으니까!. 개도 우리 속에만 갇혀 있으면 미쳐버려!"
"걸어봤어요."
여자는 불쑥, 껍질을 닫은 조개처럼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지, 끔찍하도록 걸었어요...... 이곳에 올 때까지...... 애를 안고, 오래오래....... 이제, 걷는 데는 지쳤어요......"
종장에는 남자 역시 모래에 ‘순응하는 남자’가 되므로, 그래서 제목 ‘모래의 여자’는 적절하다.
<딱히 도망칠 필요는 없다. 지금,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왕복표는 목적지도 돌아갈 곳도, 본인이 마음대로 써넣을수 있는 공백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유수장치에 대해 누군다에게 말하고 싶은 욕망으로 터질 듯 하다. 털어 놓는다면, 이 부락 사람들만큼 좋은 청중은 없다. 오늘이 아니면, 아마 내일, 남자는 누군가를 붙들고 털어 놓고 있을 것이다.
도주수단은 그 다음날 생각해도 무방하다.>
물리적으로 남자는 모래구덩이 속에 살고 있을 터이지만.
7년후, 민법규정에 의한 실종선고 판결로서, 법률적으로 남자는 사망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내 좋아하는 작가 서영은은 소설 ‘꿈길에서 꿈길로’.
서영은은 그 소설에서 ‘요강’과 ‘푸른 점’에 대하여 썼는데 그 알레고리는 내게 하나의 각성을 주었다.
서영은은 허장강류(類)의 세리프 ‘마담,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한번 할까’식의 어떤 분위기로 김동리의 여자가 되었고, 김동리가 죽자 그의 비속(卑屬, 김동리의 자식)으로부터 ‘당신은 아버지의 요강이었어’라는 지독한 모멸을 뒤집어 쓴다.
아, 요강.
먼 훗날 서영은의 소설 속 주인공은, 긴 세월 고적(孤寂)이 그대로 고여있는 사막을 걷는다.
적멸(寂滅)의 푸른 점으로서.
요강이라는 매체로 클로즈업 된 그 디테일한 인간의 모습이란 광대한 사막속에 원경의 푸른 하나의 점으로 치환되는 존재이다.
요강과 푸른 점 그 사이에 필연은 없다, 귀결이 아니라 공존이다.
알레고리... 모래가 요강이라면 사막은 푸른 점이다.
그건 어쩌면 삶속에 내포된 죽음이고, 그리하여 인간은 살아있는 죽음인 것이다.
모래구덩이 안과 밖의 단절은 단절이 아니다.
모래의 폭력과 남자가 떠나온 구덩이 밖 도시의 폭력은 결국 다름이 아니다.
흔히 인생에 무슨 아기자기한 논리라도 있는 것처럼 여기지만, 삶이란 필경 맹목(盲目)이다.
모래의 서걱거림, 맛대가리가 없는 삶의 서사(敍事).
우연과 혼돈이 버무러진.
아마 그럴 것이다.
요강이고 푸른 점이다.
삶이란 물질이며 추상이다.
추상이 물질로서 사는 형식이 필경 모래구덩이다.
나남없이 그러하고 안팎없이 그러하다.
뫼비우스의 띠.
‘모래의 여자’.
상당히 암담하다.
그래도 삶은 살만한 것이고 삶은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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