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화 편력기 -其 15->
2011년 5월 15일
1967년10월17일 나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육군에 지원입대하여 1970년 8월 31일 전역하였네.
거의 만 3년 꼬박 짬밥을 먹은 셈인데, 이등병 때인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까부시려고 김신조(20여명 모두 사살되었지만 유일하게 생포된 그는 지금 목사가 되었다지) 일당이 북한산기슭 청와대 턱밑에 까지 짓처들어 왔던 덕분으로 30개월의 복무기간이 35개월로 늘어났던 것이지.
새까만 쫄병의 엉덩이 위로는 졸지에 5개월이나 더 썩어야 했던 왕고참들의 울분으로 밤마다 빳다가 춤을 추었지.
한동안 살벌한 쫄병생활이었네. 그렇지만 일등병 이후로는 대체로 탱자탱자하게 군대생활을 보냈다네,
그러구러 3년을 떼우고 막상 제대하고 보니, 그 기간은 나에게나 별(別)스런 세월이었던가 보아.
세상은 그저 심드렁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더군.
나는 좆뺑이 쳤는데.. 좀 억울한 느낌 없지 않았다지. ㅎ
극장들도 옛 자리에 그대로 포진하고 있었고, 극장 외벽에 걸린 울긋불긋한 영화간판도 여전한 설레임으로 나를 유혹하였지.
광복동에 다시금 생겨난 나의 아지트(음악다방 코지코너).
다시 꼬여드는 친구라는 이름의 녀석들, 저물녁부터 막걸리는 과장된 우정으로 호기롭게 흥청댔고, 되지도 못한 변설(變舌)이 술청에 낭자하였다네.
그 현장을 떠올리려니 다시금 부끄럽네.
흐음, 그 시절 무식해빠진 놈들에게 난도질 당하지 않은 사조나 철학이나 정치나 문학이나 음악이나 영화나 연극이 있으면 나와 보라지.
무지(無知)하고 유치한 어휘들로 갑론을박 목청 높히던 난장이들의 기고만장.
빈약하기 짝이 없는 독서(讀書)는 잔뜩 부풀려 똥폼을 잡았고, 실존이니 사르트르니 누벨바그니 앙가주망이니 어디선가 주어들은 쪼가리 풍월(風月)은 유치하게 치장되어 마치 제것인양 게거품을 물었지.
그 꼬라지들 얼마나 볼만 하였을꺼나.
근처에 식자(識者)라도 있었으면 그 무식(無識)들의 게거품이 얼마나 꼴사나웠을까.
입으로는 고상 박학한척 똥폼을 잡았으나, 막상 감정모체는 매우 유치하고 감각적인 것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수 없구만.
대중스타에 꺄악 소리지르면서 환호하는 요즘 청소년들과 하등 다를바 없었다네.
스물 넘도록 말일세.
1960년대 말부터 스물 넘어까지 나를 압도적으로 매혹시킨 헐리웃 무비스타.
나의 아이돌(idol), 그는 바로 ‘제임스 딘’이었네.
제임스 딘이 나오는 영화라면 개봉관 재개봉관 동시상영관을 돌면서 몇 번씩이나 보았고, 그의 브로마이드나 일본스크린 잡지에 실린 사진이나 기사들 수집에 열을 올렸고, 부지불식간 그의 표정과 몸짓과 의상을 흉내내고 있었던 걸세.
알다시피 본격적인 제임스 딘의 영화는 단 세편뿐이라네.
‘자이안트’와 ‘이유없는 반항’. 그리고 최고의 영화로 꼽는 ‘에덴의 동쪽’.
이 세편의 영화가 그가 스물 서넛 무렵 죽기 전까지의 불과 2, 3년 동안 출연하였던 영화의 전부라네.
제임스 딘은 1955년 가을, 스포츠카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충돌사고로 그야말로 홀연히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지.
1931년생이니까 스물네살의 청춘 그대로.
요절함으로 그는 더욱 신화가 되었을걸세.
그리고 1960년대 말 즈음부터, 내게 불사(不死)의 아이돌로 되살아 났던 것이지.
‘자이안트’에 함께 출연한 커단 덩치의 록 허드슨과 대비되는 크지 않은 동양적인 체격, 날카로운 실루엣의 얼굴윤곽, 삐딱하게 올려다보는 시니컬하고 반항적인 눈매, 윗 단추가 풀린 셔츠를 입고 건들건들 불량끼 가득한 걸음걸이...
외형적인 그런 것들만이 나를 그토록 흠취케 하였을까.
아, 그 뿐이 아니었을걸세.
젊은놈의 무력감... 제임스 딘의 아우라로 어른거리는 고독과 반항의 이미저리... 또는 제임스 딘의 내면에서 만져질듯한 모순적 인간성...허무한 그림자...
잘 살아보세의 열기가 뜨거웠던 개발독재 시절, 내 자아 바깥에서 질펀하게 벌어지고 있는 세속적 현실이 나는 도무지 자신이 없었을걸세.
사뭇 무섭고 징그러럽기도 하였을거야.
우물안 개구리, 정중지와(井中之蛙)의 호리건곤(壺裏乾坤)이었던 나.
우물 밖을 향하여 감자를 먹이는 시늉이란, 필경 두려움이 내지르는 경련이었을거네.
제임스 딘.
삼류 대학생, 따라지 젊은 놈의 자의식이 투사되어 ‘제임스 딘’이라는 상징으로 육화된, 일종의 방어기제는 아니었을런지. (작금, 지나치도록 아이돌스타에게 몰입하는 청소년들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떤 정신적인 갈등구조가 만져질듯 하이. 오로지 경쟁으로, 줄세우기로 내모는 이 눔의 사회이니 말일세.)
어쨌거나.
주변에는 신성일도 있었고 배호도 있었고 나훈아 남진도 있었고, 다방의 마란츠 스피커에서는 비틀즈, 밥 딜런, 롤링 스톤즈, 에디뜨 피아프, 슈프림스, 윤복희가 울리고 있었지만 즐기기는 하였어도 그들이 내 아이돌이 될수는 없었다네.
심지어는 ‘제임스 딘’의 냄새가 좀 배어있는 듯한 배우들을, 단지 그 냄새 때문에 나는 그리도 좋아하였다네.
‘워터 프론트’‘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난폭자’의 말론 브란도,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피터 오툴에게서 비교적 짙은 제임스 딘의 냄새를 맡을수 있었고, ‘찬손의 루크’‘허슬러’‘허드’의 폴 뉴먼이나 ‘초원의 빛’의 워렌 비티, 그리고 ‘콜렉터’의 테렌스 스탬프에게서도 조금은 제임스 딘을 맡을수 있었지.
하아, 잡설 제하고 그가 출연한 영화 얘기나 함세.
*자이안트* '조지 스티븐스'감독, '제임스 딘' '록 허드슨' '엘리자베스 테일러' 출연. 드넓은 텍사스 평원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애증(愛憎)의 드라마였지. (요즘도 자주 연주되는 빠른 박자의 주제가는 모두즐 알고있을걸.) 텍사스 대지주인 '록 허드슨' 그의 고용인 '제임스 딘' 그리고 동부에서 시집 온 록 허드슨의 아내 엘리자베스 테일러. 먼 발치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사모하는 제임스 딘. 유정을 발견하여 홀연 부자가 된 '제임스 딘', 그러나 그의 마음은 언제나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향하고 있었지.
기억하나? 자네.
유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석유를 뒤집어 쓰면서 환호하는 제임스 딘. 그리고 부자가 된 그가 만취하여 에리자베스 테일러에 대한 사랑의 안타까움을 내뿜으면서 펼치는 연기.
그의 연기는 하나의 무도(舞蹈)였어.
선망과 열정, 사랑과 격정, 성취와 몰락이 녹아있는.
*이유없는 반항* ''니콜라스 레이'감독, '제임스 딘' '나탈리 웃' '살 미네오' 출연. 청춘의 방황과 반항이라는, 주제야 상투적인 거지만 이 영화는 '제임스 딘' 만의 독무대였지. 표정, 몸짓, 의상, 사소한 제스추어까지도.
'제임스 딘'의 영화라면 뭐니뭐니해도 단연 *에덴의 동쪽* 일세. 원작은 '존 스타인벡'의 소설. '엘리아 카잔' 감독, 엘리아 카잔은 헐리웃에까지 불어닥친 반공 이데올로기의 ‘매카시 광풍’때 매우 비겁한 행태를 보였다지만, 영화감독으로서 그는 참으로 뛰어난 예술가였다네. 그가 감독한 '초원의 빛' '원터 프론트'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배역은 '제임스 딘'(작은 아들 ‘칼’역), '레이몬드 마시'(아버지 ‘아담’역), '리차드 다발로스'(큰 아들 ‘아론’역), '줄리 해리스'(형의 애인이었다가 칼을 사랑하게 되는 ‘에이브라’역).
구약성서 창세기. 아담의 두 아들, 형 카인과 동생 아벨... 하나님 야훼의 아벨에 대한 편애(偏愛)... 질투로 아벨을 처죽이는 카인...인류 최초의 살인... 카인은 도망 가 숨은 곳이 바로 에덴의 동쪽일세.
등장인물의 이름에서도 엿볼수 있듯이 바로 그 성서의 내용을 '존 스타인벡'은 ‘에덴의 동쪽’이 주제로써 차용했던 걸세.
‘엘리아 카잔’과 ‘제임스 딘’이라는 천재적인 두 불꽃이 만나 일으키는 휘황한 작열.
자네 기억하나? 그 명장면을.
아버지의 생일날... 칼은 콩을 심어 번 돈을 아버지에게 선물하지... 작은 아들의 그 선물이 전쟁을 이용하여 벌게 된 부정한 돈이라고 받기를 거절하는 모랄리스트 아담... 돈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어깨를 들썩이며 오열하면서 아버지에게 닥아 가는 칼, 제임스 딘...절절하게 아버지의 사랑을 구걸하는 아들.
그 연기를 누가 제임스 딘처럼 연기할수 있을까.
그 장면에서 자네의 감성이 범상하였다면 자네는 참으로 인간성에 대하여 무감각한 사람일걸세.
그네에 앉아 거부당한 부정에 대한 반항과 분노의 몸짓. 시네마스코프의 길다란 화면의 카메라 앵글도 이리저리 삐딱하게 움직이면서 칼의 내면을 그려 내고 있었지.
형(형은 어머니가 오래전 죽은줄 알고 있었지)을 끌고 유곽을 경영하는 어머니에게 데려가는 칼. 오래전 집을 나간 어머니의 방탕한 현실을 목격, 충격적인 사실에 절망하여 입대하는 아론. 전쟁터로 떠나는 열차의 유리창문을 이마로 받아 깨뜨리는 광태(狂態)의 아론. 그 충격으로 쓰러지는 아버지.
의식을 잃은 병상의 아버지 곁, 칼은 귀를 아버지 입에 바짝 갔다대지. 그리고 아버지의 귀에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속삭이는 칼.
부자의 눈에 고이는 눈믈. 아,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칼,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을 얻었던 것일까.
에덴의 동쪽.
이 영화는 제임스 딘과 더불어 영원한 나의 고전일세그려.
다시 내가 보았던 옛 영화들을 늘어 놓음세.
*황야를 걸어라* '제인 폰다' '캬프 시느' '로렌스 하베이' 출연. 미국 남부를 무대로 한, 테네시 윌리엄스적 분위기 가득한 영상이었지.
*맨발로 뛰어라* '신성일' '엄앵란' 출연. 맨발의 청춘 이후 전성기를 구가하던 커플 신성일 엄앵란의 맨발 시리즈 영화.
*부러진 창* '에드워드 드미트릭'감독, '스펜서 트레이시' '로버트 와그너' '리차드 위드마크' 출연. 이 영화도 편애가 주제였을거야.
*명동 44번지* '신영균'이 출연한 국산 갱스타 영화.
*퀵건* 실제 2차대전의 전쟁영웅인 '오디 머피'가 출연한 서부영화.
*누구를 위한 폭력인가* '제라르 부랑'주연의 프랑스 갱스터 영화였지.
*무기여 잘있거라* '헤밍웨이' 원작, '찰스 비더'감독, '록 허드슨' '제니파 존스' 출연.
이탈리안 네오 리얼리즘의 거장 '비토리오 데시카'가 이 영화에서는 연기자로 출연하였었지.
전쟁에서 벗어나 어렵게 마련한 행복의 장소 스위스, 제니퍼 존스는 병원에서 죽어 버리지. 빗속에서 흐느끼는 록 허드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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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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