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채털리 부인의 연인>
D.H 로렌스 作
***동우***
2010년 3월 9일
'D.H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1885~1930)'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 (Lady Chatterley's Lover)'
사춘기, 거뭇한 거웃이 은근히 자랑스럽던 무렵.
소년들(소녀들은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의 손에서 손으로 은밀하게 돌아다니는 경전들이 있었으니, ‘플레이보이’ ‘허슬러’의 뜯겨진 페이지 조각.
그리고 ‘벌레먹은 장미’‘고금소총’과 더불어 한켠에는 조악한 인쇄본의 '차탈레이 부인(채털 리가 정확한 발음)'이 있었다.
성불구 남편과 매혹적인 귀부인, 그리고 말처럼 건장한 산지기.
그런 구도는 한창 성적 호기심 충만한 사춘기를 자극할 코드였을테고, 정사 대목만을 확대과장하여 묘사한 엉터리 천박한 번역은(기억속 채털리 부인은 중년을 넘은 여인, 산지기는 젊은 청년) 소년들의 설익은 성의식을 도착적(?)으로 달뜨게 만들었을 것이다.
두편의 영화도 보았다.
아주 오래전 본 영화는 당시 섹스심볼 ‘실비아 크리스탈’이 채터리 부인 역이었는데 기억하는바 운위(云謂)할 가치가 없다.
근자 비디오로 본 ‘레이디 채털리(Lady Chatterley)’는 파스칼 페랑 감독, 마리나 핸즈, 장-루이 쿨로쉬, 이뽈리뜨 지라르도, 엘렌 알렉산드리디스등 출연한 프랑스 영화.
프랑스 여성감독이 원작에 충실한 섬세한 연출의 秀作... 소설보다 능동적인 모습의 채털리 부인... 롱쇼트의 화면... 클로즈업된 性愛의 황홀한 아름다움...
불만이 있다면, 채털리 부인은 지극히 영국적인 캐릭터인데 영화에서 구사하는 불어가 원작을 흐렸다는 것.
근자 책부족이 읽었던 ‘채털리부인의 연인’.
고백하는바, 이처럼 작가의 사유의 깊이가 웅숭하고 빼어나게 아름다운 소설인줄은 몰랐다.
1960년대 초엽까지도 동서양 여러나라에서 시끄러운 외설논쟁에 휘말렸던 사실과 이 소설을 성애소설로 읽는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
성적으로 개방된 시대라서(이른바 예술취향 영화에서도 남녀의 성기가 예사롭게 스크린에 비추이는 요즘이다) 2010년을 살고있는 나의 성적감수성이 진화하여 그러한 것은 아니다.
저속한 에로티시즘을 초월한 시대적 인식과 통찰, 작가의 철학적 사유는 시대를 관통하여 실로 격조높은 작품이었다.
철없던 때 저급한 것들과 싸잡아 훼(毁)하였던 채털리 부인에게 사죄한다.
“현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의 시대이다.”
소설의 모두(冒頭)는 이렇게 시작되거니와, 이 작품의 집필시기인 1920년대를 바라보는 작가의 현실인식은 상당히 비극적이다.
소설의 배경은 작가의 절망적 시대인식이 배어있는 암울한 색조(色調)였다.
1920년대.
1차 세계대전은 종전되었지만 모더니즘은 괴상한 여러 모양으로 데포르마숑되어 신음하고 있었다.
산업자본은 갈수록 비대하여지고 (영국은 바야흐로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면모를 일신) 신흥자본주의 미국 문화는 노도같이 유럽에 범람하였고, 맘모니즘(물질주의)과 헤도니즘(쾌락주의)은 사람들 의식 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볼세비키 혁명이 성공하여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 연방이 수립되었다.
당시 영국 상류계급층에서는, 공산주의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사회주의 사상이 편만하게 퍼져 있었다. (그 반세기전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집필된 고장이 바로 영국이었고, 소설의 주인공 자매-코니(채털리)와 린다(채털리의 언니)-도 사회주의자임을 표방하고 있다.)
파업이라는 무기를 가진 노동자계급(특히 그 유명한 영국의 광산노동자)의 저항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런 시대적 상황이 부르주아지는 물론 귀족들에게도 그지없이 불안하였지만, 일반적으로 그들이 사회주의에 대한 생각은 매우 표피적이고 관념적이어서, 영국의 하이라키적(계급적) 기질은 여일(如一)하게 영국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작가가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표현하는 볼세비즘에 대한 영국 부르주아지의 인식이란 다분히 감상주의적이었다.
<볼세비즘이란, 그들이 이른바 부르주아라 부르는 것에 대한 최대의 증오 그것이야. 그런데 부르주아란 또 뭔가 하는 것은 분명히 정의되어 있지 않아. 그것은 결국 자본주의지. 감정이니 열정이니 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부르주아의 것이니까. 그런 것을 갖고 있지 않은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내야만 하는 것일세. 그 다음에 개인, 특히 인격 있는 개인은 부르주아적이야. 그런 것은 억압해야 하네. 소비에트 사회라는 위대한 전체 속에 자기를 묻어 버리지 않으면 안되네. 유기체라는 것도 부르주아의 것일세.”>
어쨌거나 소설의 무대는 혁명을 꿈꿀수 없는 나라, 바로 영국인 것이다.
물질주의는 이미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계층간 벽은 높고 소통은 없어 하층민의 계급적 불만은 분출되지 못한채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편만하게 퍼져있는 욕망, 돈(맘모니즘)과 연애(헤도니즘)에 대하여 작가는 말한다.
<“이 세상 어디서도 도움은 나타날 것 같지 않았다. 사회는 끔찍하게도 미쳐 버린 것이었다. 문명사회라는 것은 광란상태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돈과, 소위 말하는 연애가 사회의 두 가지 매니어였다. 그 중에서도 돈이 훨씬 심했다. 개인은 제각기 떨어져서 미친 듯이 이 두 가지에 열중하고 있다,” (21세기와 무엇이 다르랴)>
커다란 변동의 갈림길, 가치관의 혼돈, 도덕적 방종, 범람하는 물질주의와 박제화된 정신주의, 계급간의 갈등과 긴장, 인간성에 대한 편견, 경직된 양성관(兩性觀).
당시의 현대문명(당시라고 나는 썼지만 작가가 제시하는 문제의식은 작금의 현대에도 유효한 액츄어리티이다)과 산업주의는 인간성을 왜곡시켰고, 정신과 지성은 허위의식으로 가득차 버렸으며, 진정한 인간성의 소통은 없어졌고 사회는 병이 들었으며 근원적인 생명의 문제는 완전히 소외되어 버렸다.
이러한 것들의 대척점.
바로 그곳에 코니(채털리부인)와 멜러즈의 아름답고도 아름다운 섹스가 있었던 것이다.
채털리의 남편인 귀족 클리포드.(전쟁으로 인한 성불구자)
<멀지 않은 곳에 탄광의 굴뚝에서 증기와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이고 축축한 안개에 싸여 있는 아스라한 언덕에 테버셜 마을(하층민의 마을)의 조잡하게 흐트러진 집들이 보이는 옛 장원 속 언덕 위에 서 있는 그의 저택.>
그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정신적 생활에 우위를 둔 차디찬 기계적인 질서다. (또한 불구자로서의 자의식도 강하다. 결국 코니는 남편의 그런 것들을 생명이 없고 따뜻함이 결여된 차디찬 '조합적인 무질서'라고 혐오하여 따뜻한 생명에 가득찬 멜러즈에게 이끌리게 되지만)
클리포드의 생각은 내게 (동양적 모랄에 젖은 내가 아니라 자존적 인간으로서의 나) 엽기적이다.
<“우리는 낡은 잉글랜드를 보존해 둬야 해. 그래서 아이가 갖고 싶어지는 거야. 나는 다만 쇠사슬 고리의 하나에 불과하니까.”>
<"당신이 다른 남자의 아이라도 가진다면 그것도 좋아, 만약 우리들이 그 아이를 라그비 저택에서 기른다면 그애는 우리 아이가 될 것이고 우리 집안의 아이인 거야. 나는 부성이라는 것을 그다지 믿지 않아. 만약 우리에게 키을 수 있는 아이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아이일 것이야.">
<“부부란 일생의 반려라는 게 중요한 것. 매일 매일을 함께 산다는 것이지 한두 번 함께 자는 것이 아니오. 나와 당신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부부란 말이오. 우리는 서로의 습관을 잘 알고 있어. 습관은 이따금 생기는 어떠한 흥분보다도 더 생명 있는 거요.”>
<“그 아버지가 누구인가 하는 것보다는 어떤 환경에서 자라느냐는 게 문제인 거요. 어떤 아이라도 지배계급 가운데서 자라 보구려, 틀림없이 자신의 능력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지배자가 될 거요. 귀족이란 하나의 직능이고 일종의 운명이오. 그리고 대중이란 다른 운명의 역할을 해내는 거요. 개인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소.”>
<"표면적인 직능이나 실천적인 직능에 관해선 통치 계급과 근로 계급과의 사이에는 간격이, 절대적인 간격이 있다고 믿소. 두 가지 직능은 서로 상대적인 거요. 그리고 그 직능이 개인을 결정하는 거요.">
그러나 자의식에 사로잡힌, 자기애가 아니라, 진정한 소통(성적 합일)과 자유를 맛본 코니(채털리).
그는 산지기 멜러즈. (하층계급이지만 독서가이며 교양인이었다. 만일 그와의 섹스에 오로지 동물적 쾌락만 있을뿐 교양이 내포되어 있지 않은 것이었다면 코니는 결코 그를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코니는 멜러즈의 아이를 임신하였고 남편 대신 사랑의 기쁨으로 멜러즈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숫컷끼리의 게임이라면 하반신 불구사나이와 건장한 사나이의 구도는 매우 불공평하다.
그러나 적어도 클리포드는 아내에게서만은 저 징그러운 관념에서는 벗어나야 했었다. (타인과의 동침을 권하는, 동성애를 그린 한국영화 ‘쌍화점’ 만큼의 뜨겁고 격정적인 갈등과 모순의 마음밭 같은건 조금도 클리포드에게서는 엿보이지 아니 하였다)
유아회귀, 클리포드는 그 성적만족을 볼튼 부인(가정부)이 아닌 아내 코니에게서 구현하였어야 옳았다. (클리포드는 아내에게는 씨잘데기 없는 영국적 폼만 잡을줄 알았지, 그 짓을 못하였네 그려. 쯧쯧, 가엾은 클리포드.)
D.H 로렌스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흠취하였다고 한다.(클리포드와 볼튼부인의 유아적 성적유희에서 그것이 잠시 엿보였지만 소설의 다른 대목에서 리비도의 냄새를 나는 맡지 못하였다.)
섹스.
여성의 감각과 관능에 관하여, 여성의 감정의 세미한 떨림과 감동의 격한 울림에 관하여.
화성에서 온 사람인 나(남자)로서는 (금성에서 온 사람(여자)에 관하여) 알수없는 장르이겠으나, 여성의 입장에서 쓰더라도 이 이상 적실하게 묘사할수는 없었으리라.
D.H 로렌스와 그의 아내 프리다 (스승의 아내였던), 두 사람의 속궁합은 그야말로 찰떡이었을 것이고, 부부간에 실로 심도있는 성적인식을 공유하여 이 부분에서는 아마 프리다의 입김이 매우 강력하게 들어갔을 것 같다. (확신컨대 남성 작가가 감히 상상만으로 이만큼 여성입장에서의 성적 디테일을 묘사할 수는 없다.)
잉글랜드사람(클리포드)보다 스코틀란드사람(코니)은 좀 더 진취적인 기상이 있었던 모양, 멜러즈 이전의 남자들과의 정사는 모두 실패하였지만 처녀시절부터 코니는 성적으로 활달하고 개방적인 여성이었다.
처녀시절의 여체는 아직 관능에 눈 뜨기전인지라 그녀는 오히려 정신적이었고 육체적 교접에는 심드렁하였다.
정신적인 것에서 약간 발을 헛디딘 것이라고 생각할 뿐인 그녀와는 달리 남자들은 동물적으로 달려들었다.
순수한 자유란 어떠한 성적인 연애보다도 경탄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녀에게 남성은 마치 헐떡이는 개처럼 그 짓에만 코를 박고 열중하려 하였던 것이다.
싹트려던 애정은 사라지고 남자가 마치 자신의 비밀이나 내적자유 속에 침입이라도 한 것처럼 느껴져 결국은 남자를 미워하게까지 되어 버렸다.
클리포드의 아내가 된후 러그비 저택에서도 그녀는 바람을 피웠다.
남편의 방문객인 극작가 마이클리스. (남편 클리포드와는 달리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얄팍한 재능으로 벼락출세한, 그야말로 아메리카나이즈한 꿈을 이룬 남자)
그러나 이 남자 역시 코니와 성적합일(?)을 이루어내지 못한다. (오르가즘의 순간을 함께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주창하는 섹스는 정서를 왜곡하지 않는 참다운 섹스라는데, 그것은 무엇일까.
극단의 쾌락 속으로 도피하는 성은 참다운 성이 아니다. (작금 범람하는 섹스산업-현대인은 섹스 속으로 도망간다 그러나 섹스는 도피가 아니다, 코니와 멜러즈의 섹스는 창조였고 혁명이었다. 인간관계를, 나아가 사회를 향한.)
정신적 우위를 표방하면서 관념적 가치에 함몰되어 바라보는 성(클리포드의 성)이나 자의식에 사로잡힌 자기애적인 성도 참다운 성이 아니다.
상대에게 봉사한다는 투철한 의식으로 매너에 충실한 성 (본능에 충실하지 않는 레이디 퍼스트 따위, 상대에 대한 배려로 이루어지는 위선적인 성-마이클리스의 성) 따위도 참다운 섹스가 아니다.
하, 내 무슨 성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이나 감성이 지대하다고 길게 지껄이랴.
다만 이것 하나.
얼마나 완벽하게 아름다운가. 숲속 오두막에서의 코니와 멜러즈의 섹스는.
판타지와 리얼리즘이 어우러진 한편의 서사적 서정시.
지성으로서는 결코 느낄수 없는 생의 신비를 내포한 성, 상대에게 봉사하는 성이 아니라 투쟁하는 성.
인간성 사이에서 우러나는 따뜻함이란 자기희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노예에서 벗어난, 원시의 자아를 주장하며 불꽃을 일으킬 때 찾아오는 말할수 없이 부드러운 느낌의 인간교류.
세상에 절망하고 여자에게 절망한 고독한 사나이 산지기 멜러즈가 갈구하는 따뜻함.
<"나는 세상을 믿지 않소. 금전도 진보도, 우리 문명의 장래도 믿지 않소. 만약 인류에게 미래가 있어야 한다면 지금 있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오.">
<“남성은 남성다워야 하고 원숭이 같아서는 안돼오. 그렇소, 그것은 바로 부드러움이오. 그건 다만 성교에 대한 인식인 거요. 섹스는 온갖 접촉 가운데서도 진정한 유일의 접촉이지요. 확실하게 인식해야 하오. 특히 영국 사람은 서로 접촉해야하오. 좀더 다감하게, 좀더 부드럽게. 그것이 가장 필요한 일이오.">
<"아니, 나는 무엇인가를 믿지요. 나는 따뜻한 마음을 믿습니다. 특히 사랑으로 부터 생기는 따뜻한 마음, 따뜻한 마음으로 교섭하고, 여자가 그것을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모든 것이 잘 되리라고 믿습니다. 차디찬 마음으로 교섭하는 것은 다만 죽음과 어리석은 행위밖에 낳지 못하오.">
<"조금이라도 따뜻한 마음이 있으면 그것이 모든 것을 해결하지요. 그러나 여자는 그걸 좋아하지 않소. 당신도 정말은 좋아하지 않소. 당신네들은 훌륭하고, 날카롭고, 꿰뚫는 듯한 차디찬 마음의 섹스를 좋아하지요. 그것을 가지고 감미로운 체하는 거요. 말해 두지만, 부드러우면서 따뜻한 마음을 가지려면 두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섹스를 매우 좋아하지만, 당신은 섹스가 자부심을 만족시키는 무언가 신비스러운 것이 되기를 바라고 있지요.">
허, 이와 같은 위선의 섹스.
처음에 멜러즈의 남성이 코니의 육체의 내부에 남겨졌을때, 아직 남아있는 코니의 허위의식은 정신적으로는 그것을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려 하였지만 차츰 순수한 그의 남성을 순수한 여성으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코니의 '제인부인'(여성성기)은 비로소 멜러즈의 '존 토마스경'(남성성기)의 진정한 의미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고독감이, 완전히 고독한 인간이라는 느낌이 그녀를 압도해 버렸다, 정신적으로 완전히 고독하게 살고 있는 인간의 완전하고 하얀 외로운 육체, 게다가 또한 순결한 인간이 갖는 순결한 저 아름다움. 그것은 미의 재료도 미의 실체도 아닌 하나의 영롱한 광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윤곽 속에 표현된 한 생명의 따뜻하고 하얀 불꽃, 하나의 육체인 것이다. 코니는 눈으로 들어온 그 충격을 자궁 속에서 받았다. 스스로 그것을 알았다,>
<그의 남성이 차분하게 가라앉지 못하고 움직이는 것, 그의 허리께의 불꽃이 꿈틀거리는 것이었다. 아아, 만약 저 외계의 불꽃 튀는 전기를 물리치고 생활의 부드러움, 여성의 다정함, 욕망의 자연스러운 풍부함을 보호하기 위하여 함께 싸울 사람만 있다면! 함께 싸워 줄 사람만 있다면! 그러나 인간은 모두 저 세계의 '물질' 속에 득의만만하게 들어가 있든가, 어떤 사람은 의기양양하고, 어떤 사람은 기계화된 탐욕이나 탐욕스러운 기계화의 물결 속에 짓밟혀져 있다>
<그녀는 자신의 알몸이 그에게 그토록 황홀감을 주는가 하고 의아해했다. 그가 자신의 육체에서 발견한 아름다움, 자기의 싱싱하게 약동하는 은밀한 육체를 어루만짐으로써 발견한 아름다움, 이 황홀한 아름다움이 과연 어떤 것인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오직 정열만이 이 황홀한 아름다움에 눈을 뜰 것이다. 정열이 식었거나 없어질 때 그 훌륭하게 율동하는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어렵게 되고 심지어는 다소 비열한 것이 되고 만다.>
<그녀는 마지막 황홀경에서 자기도 모르게 부르짖은 가냘픈, 그리고 거친 신음 소리도 의식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 그러나 너무 빨리 끝나 버리고 말았다. 너무나 순간적이었다,
그러나 이 이상 자기 자신을 움직여서 자신의 결말을 및을 수가 없었다. 전과는 달랐다 아주 딴판인 것이다. 이 이상 더 자신의 만족을 위해 그를 잡고 늘어질 수는 없었다, 다만 기다리고 기다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점점 오므라지며 마침내 자기에게서 슬쩍 빠져나가고 마는 그 무서운 순간에 이른 것을 느꼈을 때 마음 속으로 신음했다. 그 동안 그녀의 자궁은 활짝 열려서 부드러워지고, 마치 조수에 밀리는 말미잘처럼 펄럭이면서 어서 되돌아와 그녀의 욕구를 채워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가버리려 하는 것이다.>
<그녀는 정열에 넘쳐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매달렸다. 그는 아직 완전히 미끄러져 나가지는 않았다. 그녀는 흥분된 자신의 몸 안에서 그의 부드러운 봉오리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이상한 율동적인 힘찬 힘으로 그녀 속에 달아오르는 야릇한 리듬이 부풀고 커져서 산산이 쪼개진 그녀의 의식을 완전히 채웠다. 그러자 정말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형용할 수 없는 동작이 모든 육체 조직과 의식 속으로 깊이깊이 파고드는 순수하고 깊은 흥분의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하자 마침내 그들은 하나의 환전 무결한 격정의 불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그녀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무의식적으로 냈다. 심야에 울려나오는 소리! 생명의 소리였다.>
<코니는 그날 밤 목욕을 하지 않았다, 그의 맨살이 자기에게 닿았던 느낌, 그가 그녀 위에 밀착하고 있었던 느낌은 그녀에게 귀중한 것으로 느껴졌고,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신성한 것이었다.>
<그녀는 하나의 여성으로서 탄생한 것이다. 오! 끝없는 황홀함! 힘이 빠져나갈 때 모든 아름다움을 깨달았다. 이제 그녀의 몸은 온통 부드러운 사랑에 가득 차, 이 미지의 남성에게 매달렸다.>
<이제 그녀의 마음 속에서는 그에 대한 기묘한 놀라움이 눈뜨고 있었다. 남자! 자기를 지배한 남성의 신비로운 힘! 아직 두려워하면서도 그녀의 손은 그의 몸을 더듬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이상하고, 적의를 느끼고, 다소 냉랭한 존재였던 한 사나이였다. 그러나 그녀가 만져 보니 그것은 신의 아들이었다.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웠고 세포의 순수함이 느껴졌다. 그 감각적인 육체의 고요함이란 말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강하고 민감했다. 이토록 우아하고 힘찬 육체의 고요함이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그녀의 손은 그의 등을 머뭇거리듯 쓰다듬으면서 그 보드랍고도 조그만 엉덩이의 곡선을 미끄러져 갔다. 아름답다! 참으로 너무나 아름답다! 이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의식의 작은 불꽃이 갑자기 그녀의 온몸을 스쳤다. 그 따뜻하고 발랄한 엉덩이의 감촉,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여! 생명 속의 생명, 그야말로 따뜻한 힘, 참다운 생명의 약동, 그리고 그의 두 다리 사이에 있는 남성의 야릇한 중량감! 얼마나 신비로운가! 손으로 만지면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한 신비로운 중량감! 그것은 바로 근뭔, 사랑스러운 모든 것의 근원, 완전한 아름다움의 태고적부터의 근원인 것이다. 그녀는 거의 두려움에 가까운 놀라움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에게 매달렸다.>
<의식이 되살아오자 그녀는 그의 가슴에 매달리면서 "오오! 내 사랑! 내 사랑!하고 소곤거렸다. 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가슴에 몸을 움츠렸다. 모든 것이 그저 완전하기만 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결합, 육체의 합일, 정신의 합일, 영혼의 아름다움과 육체의 황홀함.
인용한 본문의 대목에서 음란함만을 느낀다면 당신은 천박한 사람이다.
그것은 코니의 혁명이었고 또한 멜러즈의 혁명이었다. (다만 어울릴수 없는 두 신분의 외면적 결합만이 혁명적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이제 이 여자는 내 반려자다. 그리고 이것은 금전과 기계와, 그야말로 원숭이 같은 무자각한 세계에 대한 싸움이다. 이 여자는 이 투쟁에서 내 방패가 되어 주리라. 한 여성을 얻었다니 이 얼마나 기쁜가! 나와 함께 있고, 부드러운 마음을 갖고, 나를 이해해 주는 여성을 얻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 여성이 악녀도 인형도 아닌 것이 또 얼마나 고마운가. 게다가 그녀가 부드러운, 그리고 자신을 잘 분별하는 여성이니 더욱 고마운 일이다.'>
코니에게 보내는 멜러즈의 편지. (클리포드의 자존심의 상처는 아직 코니와의 이혼을 용납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을 요구하는 내 마음을 사라지게 할 수 없을 것이며, 당신과 나 사이에 있는 조그만 불꽃을 꺼뜨릴 수도 없을 것이오. 내년엔 함께 살수 있소. 나는 공포는 느끼고 있지만 나와 더불어 있는 당신을 믿고 있소. 우리들 사이에 있는 그 조그마한 불꽃을 믿는 거요.>
<내게 있어서는 그것이 이 세상에서 전부니까요. 내게는 친구, 내면적인 친구가 없소. 당신뿐이오. 그리고 지금에도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다만 그 불꽃뿐이오.>
<당신과 나 사이에 있는 이 조그마한 불꽃. 그것은 진짜요. 클리포드나 버더나 탄광 회사나 정부나, 금전욕에 사로잡힌 대중과 상관없이 나는 그것을 지키고, 앞으로도 그것을 지키며 살아갈 작정이오.>
<그것은 내 영혼 속에 서늘한 물이 흐르듯 기분좋은 일이오. 나는 지금 우리 둘 사이에 흐르고 있는 이 깨끗함을 사랑하오. 그것은 신선한 물이나 비 같은 것이오. 돈 주안 같은 사람은 얼마나 비참하오. 그에게는 평화로운 접촉이 없소. 조그마한 불꽃이 타오를 때의 그 서늘한 휴식 동안 강가에 몸을 담그는 그런 깨끗함을 맛볼 수 없소.>
<우리는 진실로 이 작은 불꽃을, 그리고 그것이 꺼지지 않도록 지키고 있는 이름 모를 신을 믿고 있소.>
<정말 당신의 커다란 부분이 여기서 나와 함께 살고 있소. 다만 당신의 전부가 나와 함께 없는 것이 유감이구려. 우리 그것을 지켜서 하루 속히 재회할 수 있도록 합시다. '존 토머스'는 약간 고개를 수그린 모습으로, 그러나 희망에 차서 '제인 부인'에게 편히 주무십시오, 하고 인사하고 있소.>
‘자연으로 돌아가자’(평등, 자유)라고 외쳤던 18세기 계몽주의의 빛.
그러나 그 빛은 원시적 인간관계에 내재된 원시적 욕동에 까지는 비추지 못하였다. (아, 작금도 여일한 장식되고 치장된 섹스여)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소외되고 있다. (프로이트도 설파하는 바이지만, 인간성의 본질은 성적인 것이다. 성적인 것들이 왜곡되어 인간성 역시 왜곡되어 스스로 소외된다)
아아, 무릇 현대여. 도시여.
모더니즘. 획일화. 개념화. 보수주의, 진보주의, 좌파주의, 우파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기술주의, 기능주의, 배금주의, 황금만능주의, 쾌락주의, 획일주의. 결과주의. 실적주의. 한탕주의. 독신주의, 회의주의, 염세주의, 연애지상주의, 토건주의, 환경주의, 배짱주의, 아부주의, 주의. 주의. 주의...
규정되어지는 인간성이 가지는 또 다른 비극적인 이름들.
그런 인문적 평가에 손상되는 생명의 본질, 소외되는 자아.
실로 생명본능의 전인적인 측면, 원시적 생명에 충실한 인간성은 우리의 내면에서 시나브로 사라지고 있다.
로렌스는 말한다.
건전한 동물로 돌아가라.
이 절망적인 시대, 이성보다 피와 살을 믿어라.
거기에서 길을 찾아라.
남성과 여성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권력의 문제가 아니다. 아, 귄터 그라스의 '넙치'가 생각난다. 남성영역의 점령 따위 혹은 여성의 남성화 따위 작금 횡행하는 ‘여성해방’‘패미니즘’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숙고해야 하리라)
젊은 벗들이여.
다 늙어서 '채터리 부인의 연인'을 읽은 늙은이의 말일세.
섹스는 성숙한 자의 진정한 도덕이라네.
저물기 전.
서로 사랑하는 아름다운 반려를 향하여.
그의 '존 토머스경'에게 헌화하고 '존 토머스경'의 위용에 감동하고 '토머스경'을 찬미하기를.
그녀의 '제인부인'의 숲을 꽃으로 장식하고 '제인부인'의 어여쁨에 경탄하고 '제인부인'을 찬미하기를.
무한한 신비로움을 간직한 양성(兩性)중 하나를 선택하여 그 몸뚱이를 우리에게 주신 조물주께 찬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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