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분노의 포도 (1,4,3,3)

카지모도 2019. 9. 25. 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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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분노의 포도>

-존 스타인벡 作-

 

***동우***

2011년 8월 19일

 

[분노의 포도 (The Grapes Of Wrath)]

저자 : 존 스타인벡 (John Steinbeck, 1902~1968)

발표년도 : 1939년

 

영화 : 분노의 포도

제작년도 : 1940년

감독 : 존 포드

출연 : 헨리 폰다, 제인 다웰, 존 캐러딘, 찰리 그레이프

 

존 포드 감독의 ‘분노의 포도’

흑백화면의 이 사실주의 영화가 1940년에 제작되었다는 사실과,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의 실질적 전개시점이 1945년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라. (로베르토 로세리니의 ‘무방비 도시’)

영화사조의 한 획을 그은 ‘네오 리얼리즘’이 헐리웃 영화 ‘분노의 포도’로부터 전혀 영향이 없었다고 말할수 있을까. (존 포드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다. 그 후 그가 만든 많은 서부영화중 범작도 없지 않았지만>

이 영화는 지금이라도 유튜브에서 자유로이 볼수있으니, 감상을 적극 권한다.

 

‘존 스타인벡’의 장편소설 ‘분노의 포도’

이 소설이 발표되자 미국사회가 한동안 시끄러웠다고 한다.

'존 스타인벡'은 당시 FBI 수장 ‘에드거 후버’로부터 요시찰인물로 감시의 대상일 만큼, '분노의 포도'는 좌익적 색채 짙은 소설로 낙인 찍혔던가 보았다.

내 읽기에, 소설의 외피(外皮)는 한편의 비참한 사회주의적 시각의 르포르타쥬이지만 소설의 기조(基調)에는 인간성을 향한 긍정의 따뜻함이 흐르고 있었는데...

짙은 리얼리즘으로 형상화 된, 고난의 시대를 겪는 가난한 사람들의 수난사(受難史).

 

놀랍도다, 아메리카의 근세사에 이토록 참혹한 대목이 있었다니. <노예 잔혹사에 버금가는>

1930년대초 세계적 대공황(大恐慌)의 진원지 미국.

해마다 수천개의 은행들이 문을 닫았으며 천만명의 실업자가 쏟아져 나왔고, 흉년이 겹친 농민들은 저당채권으로 땅을 빼앗기고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북간도 아닌> 캘리포니아를 향하여 떼지어 밀려들고 있었다.

허지만 캘리포니아의 땅은 젖과 꿀이 흐를지언정, 자본이 지배하는 인정(人情)은 북극보다 차가운 한냉지였던 것이다.

 

고향에 땅과 집을 갖고 아메리카의 양민(良民)이었던 오키(오클라호마의 난민의 속칭)들.

땅은 은행에 빼앗기고 집은 트랙터에 짓밟혀 무너지고, 창졸(倉卒)간에 낯선 땅을 떠돌면서 헐벗음과 굶주림으로 그들은 허덕였다.

떠도는 중에 한사람 두사람 차칸에서 죽어 이방의 길가에 아무렇게나 묻힌다.

그리고 혁명이 두려운, 삐까번쩍 배부른 소수의 부자들은 굶주린 자들이 무서워 전전긍긍한다.

당시 쏘련의 스탈린은 미국을 향하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보라. 역사의 변증은 어김없이 이루어지지 않는가. 자본주의는 이제 프로레타리아 혁명에 의하여 종언(終焉)을 고하고 곧 공산주의가 도래할 것이다.’

 

1998년 우리나라의 IMF가 떠오른다.

금융과 기업의 탐욕, 과잉자본과 과잉생산, 엄청나게 과다한 차입금의 부실채권들, 기업의 줄도산은 은행의 줄파산으로 이어졌고, 넘쳐나는 실업자.

돈있는 놈들은 오히려 고리(高利)로 띵까띵까 하였던....

알량한 회사를 그만 둔 나 역시 무척 힘들었던 세월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내 지인(知人)도 있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경제학이란 인간의 욕망을 기반으로 하는 학문이다.

번영과 풍요를 가져다 주는 에너지의 원천은 바로 개인의 이기심.

그 이기심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절묘한 시장 매커니즘을 창출한다는 애덤 스미스의 통찰력은 늘 나를 감탄케 한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에 대하여 그가 믿었던 인간의 덕성(德性), 곧 그가 국부론에 앞서 설파하였던 ‘도덕감정론(道德感情論)’은 그토록 나이브한 것이었을까.

그의 철학은 청교도적 모럴리즘에 기반 한 것, 인간이란 애덤 스미스가 생각하였던 것처럼 그다지 ‘합리적인 경제인’이 아니었던 가 보았다.

 

자유방임의 시장경제.

현실의 시장이란 언제나 불완전경쟁시장이고, 탐욕때문에 시장은 실패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 무조건 만능은 아니었던 것이다.

시장의 실패에는 국가권력이 개입해야 옳았다.

통제받지 않는 탐욕은 독점자본을 추구하고 이윽고는 제어못할 괴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의 신자유주의, 그에서 촉발된 리브먼사태 역시 제어되지 못한 탐욕의 산물이었지 않나?.

 

자본이라는 괴물은 잠시라도 성장을 중지하면 죽어 버리고 만다.

<아시겠소? 이 괴물은 공기로 숨쉬는 것도 아니고 고기를 먹고 사는 것도 아니오. 무얼 가지고 사느냐 하면 말이요. 이익을 숨으로 들이마시고 돈과 이자를 먹고 산단 말이오. 그놈이 돈이나 이자를 못 먹으면 그냥 죽어요. 당신들이 숨 못 쉬고 고기 못 먹으면 죽듯이 말이오.>

 

‘분노의 포도’에는 자유방임(自由放任)에 겨워 만족한 자본만이 있었고 그것을 통제하는 국가(國家)는 없었다.

66번 도로의 혼돈을 교통정리할 권위주의(權威主義)는 어디에도 없었으며, 오키(오클라호마 난민)들의 처참한 천막촌의 비참함을 위무(慰撫)하는 그 어떤 국가적 손길도 없었다.

 

애덤 스미스에 몰입한 경제.

의지는 있었더라도 국가권력이 나서서 어쩌구 할 그 방법 자체를 몰랐을 것이다.

미국에서 맑시즘이란 경기(驚氣)를 일으킬 대상이었고, 케인즈주의는 그때까지는 삼류 경제이론이었을 뿐이었다.

 

자유방임의 경제시스템 속에 그냥 내어 던져진 채 방기(放棄)된 오키들의 모습은 눈물 겨웁다.

민중의 지팡이라는 경찰은 있는 자들 편에 버티고 서서 없는 자들에게는 박해자였을 뿐이었다. <실로 ‘분노의 포도’에 등장하는 경찰은 게슈타포를 방불케 하는 악랄한 모습이었다.>

 

자유방임의 자본이란 추상(抽象)의 괴물이고 경제적 효율만을 추구하는 금속성 매카니즘이었다.

<난 굶어 죽기전에 날 굶기는 놈을 죽일거야! 이건 천둥이나 지진 같은 천재지변도 아닐테고 모두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일 아닌가. 어디가 끝이야? 누굴 쏴야 하는거냐고? 난들 어떻게 압니까? 결국 쏘아 죽일 놈이 없을지도 모르지요. 결국 쏘아죽일 놈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구요.>

 

<말이 일을 마치고 마구간에 돌아가는 경우를 보자. 그래도 말에게는 생활이 있고 생명력이 있다. 숨소리와 훈훈한 입김이 있고, 마구간 속에는 훈훈한 생명의 입김이 있으며 생명의 기운과 냄새가 있다. 그러나 트랙터는 일단 발동이 꺼지면 쇳덩어리에 불과하며 금방 죽어 버린다. 트랙터는 간단하고 능률적인 것이다. 너무 간단하기 때문에 아무런 놀라움이나 신비스런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다. 너무나 능률적이기 때문에 경이의 감정이 땅으로부터 빠져나가 버린다. 점심을 먹기 위해 대지 위에 무릎을 꿇기도 하는 그 인간, 자기의 화학적 성분 이상의 그 인간이야말로 화학적 성분으로 분해될 수 있는 토지 이상의 토지를 아는 것이다. 그러나 땅위에 죽은 트랙터를 몰고 있는 그 기계는 땅을 알지도 사랑하지도 못한다. 그것은 땅을 경멸한다.>

 

자유방임의 자본은 이익에 몰입하여 필연적으로 착취에 맛을 들이기 마련이다.

도시의 근로자들은 노동조합이라도 있어 꿈틀이나마 할수 있었을 터이나 농투산이 오키들은 그야말로 속수무책 당할수 밖에는 없었다.

 

의식(意識)이 깨인 목사 케이시처럼 나부대다가는 경찰의 곤봉에 맞아 죽는다.

미래의 트로츠키의 싹을 무엇보다 경계하고 말살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던 자본의 생리는 본능적인 것이었다.

 

<당신은 아마 도랑가 같은 곳에 캠프를 칠거요. 당신 말고도 그런 천막이 한 50개는 더 늘어설 거요. 그러면 그 친구가 당신 천막에 찾아와서 당신들이 먹을 것이 있는지 없는지 살피고서, 만일 없다는 것을 알면 그럴거요. '일하고 싶소?' 그럼 당신은 혹하고 달려들겠지요. '예, 예, 그렇습니다. 일자리만 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 그 친구말이 뻔하지요. '그럼 당신 한번 시켜 볼까?' 물론 당신은 그러겠지요. '언제부터 시작할까요?' 그러면 그는 언제 어디로 나오라고 말하고서 가버릴거요. 그가 사실은 한 2백 명쯤 필요할 거요. 그러면 그는 5백 명쯤한테 그런 수작을 걸어 두는 거요. 그러면 그 5백 명이 또 다른 사람들한테 말을 옮기지요. 그래서 당신이 거기에 가보았을 때에는 한 천 명 가량이 모여 있게 되죠. 그래 놓고 그 친구가 한다는 소리가 걸작이지요. '한 시간에 20센트씩 주겠소.' 그제서야 모인 사람들 중에서 한 절반 가량이 되돌아 설 거요. 그래도 한 5백 명쯤은 남지요. 그 사람들은 너무도 배가 고파서 비스킷 쪼가리만 얻어 먹어도 감지덕지해서 공짜로라도 일을 할 사람들이라오. 그 친구는 이 사람들에게 복숭아를 따고 목화를 따는 일을 하도록 계약을 하는 거요. 당신 이제 내 말을 알아듣겠소? 그 친구가 사람을 더 많이 긁어 모으면 모을수록 당신은 그만큼 더 배고프고 품삯을 그만큼 덜 받게 되는 거요. 또 그 친구는 되도록 애들을 많이 거느린 일꾼을 구하려고 하지요. 왜냐구요? 글쎄, 당신을 속이 상하게 하는 이야기는 들려 주고 싶지 않대도 그러쇼. 그걸 알기까지 나는 1년이나 걸렸소. 그걸 알기까지 자식들을 둘씩이나 죽게 했고 마누라까지 죽여 버렸소. 하지만 그렇게 쉽게 말해 줄 수는 없는 일이오. 그걸 내가 좀더 일찍이 알았어야 했지요. 아무도 그런 걸 나한테 알려 주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누구라도 그런 얘기를 쉽게 가르쳐 줄 수는 없었겠지요. 어린 새끼들이 천막 속에 누워 숨이 차서 배만 불룩해 가지고 뼈에는 가죽만 남아서 꼭 강아지 새끼처럼 끙끙 앓고 있고, 나는 일자리를 구하느라고 사방으로 뛰어다녔다오. 돈을 벌려고 다닌 것이 아니라오!" 그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내 먹고사니즘의 강의(부동산학 개론)에 경제원론이 있어 좀 아는척 씨부린다.  

자본은 오로지 ‘수요와 공급 법칙’이라는 도그마를 신봉하는 교도들이다.

y축을 독립변수인 가격(price)으로 하고 x축을 종속변수인 수요공급량(quantity)으로 하여 수요곡선과 공급곡선이 교차하는 지점이 바로 균형가격.

공급량이 늘면 초과공급이 되어 가격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긂어 죽는 사람 곁에 먹을 것은 넘쳐난다.

<과일 썩는 냄새가 방방곡곡에 퍼지면 그 달콤한 썩는 냄새는 온 땅 위에 하나의 슬픔을 깔아 버린다. 트럭에 가득 실은 오렌지가 땅바닥에 마구 내동댕이쳐진다. 과일을 얻으려고 몇 마일씩이나 걸어온 사람들도 이것은 가져갈수가 없다. 차만 조금 타고 나가면 얼마든지 딸 수 있는 것을 무엇 때문에 여남은 개에 20센트씩 주고 사가겠는가? 고무 호스를 들고 있는 사람이 오렌지 더미 위에다 석유를 뿌려댄다. 그는 사람들의 죄악에 분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 과일을 얻으러 온 사람들에게 분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과일을 못 먹어서 굶주리고 있는 사람이 수백만 명이나 되는 판에 그 황금빛 산더미 위에 마구 석유를 뿌려 대는 것이다. 과일 썩는 냄새가 온 천지를 진동한다. 기선의 연료로 커피를 땐다. 곡식을 태워서 난방을 해도 좋다. 곡식은 잘 타고 불기가 좋은 것이다. 강물 속에다 감자를 쓸어 넣고 굶주린 사람들이 그걸 건져 가지 못하도록 강둑 양쪽에 감시원을 배치하라. 돼지를 잡아서 그대로 땅속에 묻어라. 고기 썩은 것이 땅속에 그대로 스며들게 해야 한다. 법으로는 어떻게도 적발해 낼 수 없는 범죄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무리 울어 보아도 다 나타낼 수 없는 슬픔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이 모든 성공을 거꾸러 뜨리는 실패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땅이 기름지고 나무들이 줄을 지어 똑바로 서있고 든든한 나무 둥우리 위에 백 가지 열매가 무성하게 여물어도, 펠라그라로 죽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검시관들은 사망증명서를 떼어야 한다. 영양실조라고, 왜냐하면, 음식은 썩어 문드러져야 하고 썩도록 강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강물 속에서 감자를 건지려는 사람들이 어망을 들고 나온다. 망을 보는 사람이 그들을 제지한다. 배고픈 사람들은 덜거덕거리는 차를 타고 와서 버린 오렌지를 주우려 하지만 석유가 뿌려져 있는 것이다. 그들은 묵묵히 서서 물에 떠내려 가는 감자를 지켜보고 도랑가에서 잡고 있는 돼지 멱따는 소리에 귀를 귀울여 보지만, 그것은 곧 땅속에 파묻혀서 그위에 석회가 겹겹이 발라진다. 산더미처럼 쌓인 오렌지가 썩어 물이 질컥질컥 흐르는 것을 빤히 쳐다 보고 있다. 사람들의 눈에는 낭패의 빛이 떠오르고 굶주린 사람들의 눈에는 분노가 서린다. 사람들의 눈에는 분노의 포도가,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분노가 충만하고 그 포도 수확기를 위하여 알알이 더욱 무겁게 영글어 가는 것이다.>

 

사회과학적인 냉철함으로 현상의 배후를 묘파(描破)하면서 예술가적 감성으로 현실을 묘사한 존 스타인벡.

나는 분노와 따스함이라는 이중적 감동으로서 이 소설을 읽었다.

작가가 의도하는 바도 바로 그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뒷장 해설에 의하면 이 작품에 대하여 인간존재 자체에 대한 진지한 통찰이나 문제제기가 없는 프롤레타리아적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는 등 식자들간에 혹독한 비판이 있다는데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는 듯한, 엄정한 사회비판적 긴장의 끈이 중동무이 된 듯한, 터질 듯 터질 듯 터지지 않고 분노(忿怒)로서만 탱탱하게 여물어 가는 포도.

감상적으로 마무리된 듯하여 불만이 있을 법 하지만 그것은 이 소설 겉의 모습이다.

존 스타인벡의 눈길은 그윽하고도 깊었다.

 

다시 살인을 저지른 톰 조드가 어머니와 이별하면서 내뱉는 대사는 좀 상투적이기는 하다.

<그리고 그 뒤는 상관없어요. 나는 어둠 속에서 아무데나 돌아 다니겠어요. 아무데나 다 가보겠어요. 어머니가 찾으시는 데는 아무데나 다 가 있겠어요. 배고픈 사람들이 먹기 위해서 싸우는 그런 곳에는 어디든지 가있겠어요. 경찰 녀석들이 선량한 사람들을 두들기는 그런 곳이라면 말예요. 케이시가 안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분노에 못이겨 미쳐 날뛰며 고함을 치는 그런 데에 가 있겠어요. 굶주린 어린 아이들이 저녁밥을 얻고서 웃고 있는 그런 데에 가겠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자기들 손으로 가꾼 음식을 먹고 자기들 손으로 지은 집에서 살고 있는 그런 곳에 가있겠어요. 아시겠어요? 그러다 보니까 나도 케이시같은 얘기를 늘어놓고 있군요. 그 사람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까 어떤 때는 그 사람을 실제로 보는 것 같아요.>

 

종장에 로자샨이 굶주린 사내에게 젖을 먹이는 대목이 좀 감상적이기는 하다.

<그녀는 천천히 그의 옆에 누웠다. 그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로자샨은 덧이불의 한쪽을 풀고 자기의 한쪽 젖가슴을 드러냈다. "이걸 빠세요. 그래야 해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더 바싹 몸을 들이대고 그 남자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자, 됐어요. 어서요!" 그녀의 손이 그의 머리 아래로 들어가서 그를 받쳐 주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부드럽게 그의 머리카락 속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헛간 위쪽과 건너 쪽을 쳐다 보았다. 딱 다물어진 그녀의 입술은 신비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존 스타인벡이 소설에서 설파하는바 인간긍정의 드라마적 감동의 힘은 강렬하였다.

톰 조우드의 도피의 대사가 그저 피상적인듯 하였지만 그것은 미국적 비젼의 표상이었다.

굶주린 노인에게 젖을 물리는 로자샨이 하냥 감상적인 마무리로만 치부할수 없다.

인간성의 연대라는, 휴머니즘의 메타포였다.

 

‘분노의 포도’에서 내가 미국이라는 나라의 저력(底力)을 보았다면 좀 억지일까.

저와 같은 참혹한 상황, 오키들의 짐짝에는 저마다 라이플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아메리카에 혁명은 없었다.

미국은 고난을 이겨 냈다. <케인즈주의를 취하여 그러 하였건. 그리하여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에 기인하였건, 때마침 터진 이포크 포인트, 제2차 세계대전 덕분이었건.>

혹은 미국인들의 저변에 자리잡은 기독교정신이라 해도 좋고, 낙천주의라 해도 좋다.

 

인간이란 각성하고 개선되는 존재이다.

인간이란 고통받는 존재이지만 고통을 통하여 성장한다.

그러므로 희망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 희망이란 인간에 대한 신뢰, 인간성에 대한 신뢰에 기인한다.

 

망나니 톰 조드는 목사 케이스의 정신으로 성장하였다.

촌마누라였던 어머니는 얼마나 강인하고 현명한 여성으로 변모하였는가.

철부지 누이는 유산 후 타인을 동정하는 완숙한 여인이 되었다.

강변에 남아 고기나 낚으면서 살겠다고 낙오하는 형 노아의 모습과 큰 아버지의 지나친 죄의식 또한 인간성에 대한 긍정적인 메타포는 아니었을까.

 

흑인 대통령.

말콤 엑스와 알렉스 헤일리를 읽고서 나는 내 생전에 미국에서 흑인 대통령이 나올 것은 무망하다고 생각하였었다.

그러나 21세기 초반에 검둥이 대통령이 탄생하였고, 불과 십여년 전만 하여도 생각조차 할수 없었던 흑인대통령의 통치에 순복하는 미국인들이 나는 놀라웁다.

 

생각은 진보하고 기술은 개척되고 제도는 진화하는 것이다.

영국이 그러하듯 미국인도 혁명을 용납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혁명(revolution)이 아니라 개선(evolution)에 의하여 변모한다.

변화와 개척과 개선과 성공을 꿈꾸는 자 누구에게서나 그 기회를 박탈하지 않는다. 

그것이 프론티어 스피릿이고 그것이 미국적 가치일 것이다.

 

나는 예전에 '분노의 포도'를 읽었었다고 생각하였는데 전혀 새롭게 읽혀졌으니, 착각이었나 보다.

아마도 존포드의 영화를 보아서 그 기시감이 그렇게 기억을 오도하였는가...

영화는 소설에 비하면 지엽이었을 뿐이었다.

 

평자들이 무어라하든 내게 '분노의 포도'는 노벨상의 권위에 합당한 존 스타인벡의 노작(勞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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