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싯다르타 (1,4,3,3)

카지모도 2019. 9. 25. 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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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作-

 

***동우***

2011년 7월 25일

 

소설 : 싯다르타(Siddhartha)

저자 : 헤르만 헤세(Hermann Karl Hesse,1877~1962)

발표년도 : 1922년

 

조르바를 읽었다.

인간 조르바... 그러나 그는 내게 요원(遼遠)하였다.

헤르만 헤세의 ‘삿다르타’를 읽었다.

임권택의 영화 ‘만다라’를 다시 보았다. <유튜브에서 공짜로... 기억의 오류, 소설처럼 종장에 주인공 법운이 파계하는 줄 알았는데, 영화의 법운은 새로운 구도의 길을 찾아 길을 떠난다.>

그리고 김성동의 소설 ‘만다라’를 꺼내 다시 읽었다. <오래되어 너덜너덜한 책, 한국문학사에서 1979년도 출판한 붉은 표지의 초판본>

만다라의 한 대목. (영화에서 안성기가 독백하는)

아름다운 문장이다. (내 수준, 몽롱한 채로..)

얼어죽은 파계승 지산을 태우면서(다비, 茶毘) 주인공 법운이 읊조리는 모놀로그.

++++

<지산화상이여, 어디로 가시는가? 이 뜨겁고 괴로운 三界의 業火를 마다하고 어디로 가시는가? 도솔천으로 가시는가. 孤獨地獄으로 가시는가?

四大가 인연따라 왔다가 인연따라 흩어지며 본래 한물건(一物)도 없다 했거늘 화상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이제 어디를 향해 가시는가?

사는 것도 한마당 꿈이요 죽는 것도 또한 한마당 꿈이며, 山河大地. 日月星辰. 頭頭物物이 다 부처 아닌 것이 없고, 산따라 물따라 다 몸이요 풀마다 꽃마다 다 마음이라 했거늘, 무엇을 일러 화상의 本來面目이라 하겠는가?

석가세존께서 마갈타에서 관문(關門)을 닫으시고,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을 들어 보이시고, 달마존자께서 소림굴에서 면벽구년을 하셨으며 총령 고갯길에서 신 한짝을 들고 가신 도리를 아시는가? 아시는가 화상이여.

불법을 의지하여 도를 닦는 자는 불국토(佛國土)에서 태어나고, 십선(十善)으로 복을 짓는 자는 天上에서 태어나고, 인과(因果)를 믿는 자는 인간에 태어나고, 성내는 業,이 무거운 자는 지옥에 떨어지고, 탐내는 업이 무거운 자는 아귀도(餓鬼道)에 떨어지며, 어리석은 업이 무거운 자는 축생(畜生)으로 태어난다 했거늘.. 화상의 낙처(落處)는 과연 어디인가? 어느 따에 그 몸뚱이를 나타낼것인가? 대답하라 화상이여! 한마디,일러라, 화상이여!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불길은 이제 맹렬한 속도로 솟아 오르고 있었다. 한 칸 암자는 그대로 한송이 만개한 꽃송이였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정토만다라(淨土曼茶羅)였다. 일체가 타고 있었다. 빛(眼)이, 소리(耳)가, 냄새(鼻)가,맛(舌)이,느낌(身)이,마음(意)이...

욕정(地)이 타고 있었다. 슬픔(水)이 타고 있었다. 분노(火)가 타고 있었다. 그리움(風)이 타고 있었다.

아아 팔만사천 번뇌가 타고 있었다.

어느새 굵어진 눈발이 소낙비처럼 퍼부어 내리고 있었다.

눈송이는 타오르는 불꽃 위에서 부르르 진저리를 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눈물은 뜨거운 불길에 닿아 이내 말라버리고 있었다. 서걱거리는 소금기 위로 또다시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화상이여, 서방정토(西方淨土)로 가시는가? 오탁예토(汚濁濊土) 버리고 니르바나의 정토로 가시는가?.. 오오 부디 다시 태어나시라. 사바탁세에 사람의 아들로 태어 나시라. 출격대장부(出格大丈夫)가 되시라. 그리하여 사람의 아버지가 되시라.>

++++

 

한마디 일러라, 보살이여.

‘싯다르타’

당신의 진면목은 무엇인가?

자아(自我).

너의 정체는 무엇인가?

육신(肉身)의 어느 부위에서 ‘나’라는 존재가 호흡하고 있는걸까.

뇌인지 심장인지, 내 몸 안 어떤 장기에서.

내 생물학적 핵(核)은 세세(世世) 어떤 식으로든(정액인지, 피인지, 세포인지 그런 것들로) 남겨지는걸까. 이기적 유전자에 의하여.

그러나 분열된 내 DNA에 내 자아는 없음은 명확하다. (내 새끼들, 그것들은 연민들이지 내 자아는 아니다. 그 살을 꼬집으면 나는 전혀 아프지 않고 그 생각을 나는 전혀 인지할수 없다,)

내 존재론적 자아는 내 육신의 한계 속에 갇혀있음은 너무도 분명하다.

또 하나, 무형무체(無形無體)의 ‘자아’라는 존재.

의식(意識)으로 느껴지는 ‘나’라는 존재 말이다. <‘마음’‘정신’, 또는 ‘넋’이나 ‘영(靈)’이나 ‘혼(魂)’, 무엇이라 칭(稱)하건.>

‘나’라는 주체를 규정하여 인식하는 자아.

말하자면 인식론적인 자아.

그 자아는 죽음(존재론적 자아의 소멸)의 불가피성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마음’은 '몸의 죽음’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그 인지(認知)가 집단무의식에 의한 생래적(生來的)인 것인지, 사는 동안 경험한 학습에 의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죽음의 불가피성을 ‘인식’하는 유일한 생물학적 존재가 인간이라고 한다.>

인식론적 자아 역시 존재론적 자아와 더불어 완전히 소멸하지 싶은데... 그러한가.

그렇다면 '육체의 소멸'을 좇아 마음도 죽고 싶어야 하는데. ‘마음’이야 어디 그런가 말이다.

보라, 그대의 육체는 죽음을 승복할지언정 ‘마음’은 죽고 싶어하는가.

인식론적 자아는 어떤 형태로든 존속하기를 원망(願望)하는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자아의 절망, 그리고 존속하기를 바라는 자아의 원망(願望).

절망과 원망(願望) 사이의 간극.

그 간극(間隙)을 우리의 삶은 견뎌내야 한다.

그건 지독한 불안(不安)함이며, 부자유(不自由)함이다.

끊임없이 죽음을 인식하면서 살아내야 한다는 것, 인간으로 태어난 죄(罪)에 대한 천형(天刑)이다.

그 불안함이 인간의 실존이다.

그러므로 자연사(自然死)란 없다.

죽고싶지 않은 죽음을 죽으므로, 모든 죽음은 언제나 타살이다.

불가사의한 타의(他意)에 의하여 우리는 죽임을 당할 뿐이다.

우리는 근원적으로 부자유한 존재이다.

어쩌겠는가.

마음의 저항은 있으되 그렇게 죽는 것이다.

존재의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로서 어영부영 살다가, 이윽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강제성에 끌려가 그렇게 죽어 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종교에 의탁하여 그 불안에 대한 위무(慰撫)를 얻고자 한다.

그리하여 어떤 이가 말하였다.

<종교란 불가지(不可知)한 캄캄한 심연(죽음)을 향한 자포적(自暴的) 공포가 선택한 자의적(恣意的) 신념체계>라고.

속(俗)된 늙은이 하나, 지근(至近)에 뵈이는 뉘엿뉘엿 지는 해.

네 기독교는 어디 있느냐.

그로부터 떠났다면 조르바가 획득한 정도의 자유만이라도 꿈 꿀 깜냥이나 되느냐.

두루 아득하도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도대체 뉘란 말가.

해탈(解脫).

대자유(大自由)를 향하여 온 존재를 내어 던지는 저 사람들.

한살이의 ‘존재론적 자아’가 누리는 영화(榮華)의 헛됨을 깨닫고, 환생이거나 해탈이거나 '인식론적 자아'의 불멸을 꿈꾸는 사람들.

무문관(無門關)에 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긴 세월 용맹정진(勇猛精進)하는 승려들.

'화두' 하나 부등켜안고 끙끙대면서 ‘존재론적 자아’를 뛰어 넘으려는 사람들.

‘인식론적 자아’로서 자연이나 시간과의 통일성을 온 존재로 체득하려는 사람들.

이윽고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경지에 이르러, 훨훨 신선이 되려는 저 사람들.

도대체 뉘란 말인가.

 

젊은 날 읽었던 ‘싯다르타’

‘데미안’이 그러하듯, 영원과 내면을 응시하는 깊은 사유(思惟)의 모습에 감동은 있었지만 그것은 피상이었다.

낫살들어 다시 ‘싯다르타’를 펴든 소이(所以), 부처님의 발가락이라도 만질까 하여?

아아, 좌우당간 조르바도 만다라도 싯다르타도 아득한 것들이다,

 

내가 좀 안다는 기독교.

칼빈신학의 요체는 오로지 ‘믿음’이다.

믿음에 의해서만 의(義)에 이른다.

자아니 깨달음이니 하는 것들은 믿음에 있어서 아무런 소용이 닿지 않는 물건들이다.

‘자아’란 본시 죄에 가득 찬 것이므로 인간이란 근본 ‘죄인’인 것이다.

‘죄인’임을 자각하는 것이 곧 기독교적 깨달음이다.

하나님만이 신성하시고, 하나님만이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지혜와 완전한 정의를 가지신 분이다.

죄인들은 다만 하나님께 자신이 죄인임을 자백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완전함에 투사해야만 한다.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나 은총을 간구하여야 한다.

그를 통해서만 구원(救援)이 가능하다.

인간에게는 존재를 사유(思惟)함 따위는 조금도 필요치 않다.

하나님은 누구,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나라는 존재의 근원 따위는 이미 명징하게 말씀으로 계시되어 있는 것이다.

천지간에 인간이 사유함으로써 도달할 진리 따위는 따로 있지 아니하다.

죽음까지도 이미 계시(啓示)로써, 자아와는 아무런 인과(因果)가 없는 말씀으로써, 이미 하나님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들이다.

인간은 완벽한 믿음만 획득하면 만사 오케이이다.

실존적 불안따위, 안중에 두지 않아도 무방하다.

죽은 다음 천당은 떼어 논 당상이니까.

그런데 그 믿음은 아무나 얻을수 있는게 아니다.

하나님의 성별(聖別)로 태초에 선택된 자들만이 획득할수 있다.

그들은 도그마의 가르침에 의하여 믿음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싯다르타’는 얼마나 사유적(思惟的)으로 고등(高等)한 인간인가.

그에게는 절대자의 인도나 선택이나 가르침 따위는 필요가 없다.

스스로 깨치고 스스로 도달할 뿐이다.

‘석가’(소설속 고타마)의 가르침조차 거부하고 싯다르타는 길을 떠난다.

<친구, 고빈다여. 우리는 떠나올 때 생사를 함께하자고 맹세했었다. 그러나 나는 떠나겠다. 깨달음이란 가르쳐질수 없다. 오직 체험될 수 있을 뿐이다.>

싯다르타의 목표.

갈증으로부터 벗어나고, 소원으로 부터 벗어나는 것.

꿈으로부터 벗어나고, 기쁨과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것.

자기를 비우는 것. 자신을 멸각(滅却)시키는 것.

경이로움에 마음을 열어 놓는 것.

자아로부터 벗어나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아닌 상태로 되는 것.

그리하여 범아일여(梵我一如)에 이르는 것.

 

싯다르타는 저자거리로 들어가 사랑을 배우고 쾌락과 부에 탐닉하고 여자 뱃속에 자식을 잉태케 한다.

그리고 다시 저자거리를 떠난다.

강가에서 뱃사공 ‘바수테바’를 만나, 이제 강에게서 배운다.

종장에 싯다르타가 이른 곳은 어디였을까?

<현세(現世)의 모든 것들, 곧 육신이거나 저자거리이거나에 대하여 부정(회피)도 긍정(집착)도 초극하는 것.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이미 열반에 이르러 있다는 것.>

대충 이런 깨달음이었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

문맥을 머릿속으로 이해하여 고개는 주억거리지만, 그 의미를 나의 부박한 지혜로서는 깨닫기 난망하도다.

장황하지만 일단 베껴쓸 밖에 없다.

<그 순간 싯다르타는 운명과 싸우는 일을 그만두었으며, 고민하는 일도 그만두었다. 그의 얼굴 위에 깨달음의 즐거움이 꽃피었다. 어떤 의지도 이제 더 이상 결코 그것에 대립하지 않는, 완성을 알고 있는 그런 깨달음이었다. 그 깨달음은 함께 괴로워하고 함께 기뻐하는 동고동락의 마음으로 가득 찬 채, 그 도도한 강물의 흐름에 몸을 내맡긴채, 그 단일성의 일부를 이루면서 그 사건의 강물에, 그 생명의 흐름에 동의하고 있었다.>

<“기다리는 것, 인내심을 갖는 것, 귀 기울여 드는 법을 나는 강가에서 배웠네. 이 세계는 매 순간순간 완성된 상태에 있으며, 온갖 죄업은 이미 그 자체내에 자비를 지니고 있으며, 작은 어린애들은 모두 자기 내면에 이미 백발의 노인을 지니고 있으며, 젖먹이도 모두 자기 내면에 죽음을 지니고 있으며, 죽어가는 사람도 모두 자기 내면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자네 농담을 하는 건가? 고빈다가 물었다. 농담하고 있는 게 아닐세. 나는 내가 깨달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걸세.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할 수가 없는 법이야. 우리는 지혜를 찾아낼 수 있으며, 지혜를 체험할수 있으며, 지혜를 지니고 다닐 수도 있으며, 지혜로써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지혜를 말하고 가르칠 수는 없네. 모든 진리는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진리일세. 진리란 오직 일면적일 때에만 말로 나타낼 수 있으며, 말이라는 겉껍질로 덮어씌울 수가 있네. 생각으로써 생각될 수 있고 말로써 말해질수 있는것, 그런 것은 모두 다 일면적이지. 모두 다 일면적이며 모두 다 반쪽에 불과하며, 모두 다 전체성이나 완전성, 단일성이 결여되어 있지. 그리하여 세존 고타마께서도 이 세상에 대하여 설법을 하실 때에 이 세상을 윤회와 열반, 미혹과 진리, 번뇌와 해탈로 나누지 않을 수 없었던 거야. 달리 어떤 방법이 없지.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 방법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그러나 이 세계 자체, 우리 주위에 있으며 우리 내면에도 현존하는 것 그 자체는 결코 일면적인 것이 아니네. 한 인간이나 한 행위가 전적인 윤회나 전적인 열반인 경우란 결코 없으며, 한 인간이 온통 신성하거나 온통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란 결코 없네. 그런데도 그렇게 보이는 까닭은 우리가 시간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네. 시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네, 고빈다, 나는 이것을 몇 번이나 거듭하여 체험하였네. 그리고 시간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현세와 영원 사이에, 번뇌와 행복 사이에, 선과 악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간격이라는 것도 하나의 착각인 셈이지. 어째서 그렇다는 거지? 고빈다가 겁먹은 소리로 물었다. 잘 들어봐, 나도 죄인이고 자네도 죄인이야. 그러나 그 죄인이 언젠가는 다시 브라흐마(바라문교의 창조신)가 될 것이고, 그 죄인이 언젠가는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고, 부처가 될 거야. 그런데 이걸 알아두게. 이 언젠가라는 것은 착각이고 다만 비유에 불과한 것임을 말이야. 그 죄인은 불성(佛性)으로 나아가고 있는 도중에 있는 것이 아니야. 그 죄인은 어떤 하나의 발전 과정 속에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야. 비록 우리의 사유라는 것이 만사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고 달리 생각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지. 그 죄인의 내면에는 지금 그리고 오늘 이미 미래의 부처가 깃들여 있다, 바로 그런 이야기야. 그 죄인의 미래라는 것은 모두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네. 자네는 그 죄인의 내면에 깃들여 있는, 자네의 내면에 깃들여 있는, 아니 모든 중생 개개인의 내면에 깃들여 있는, 바로 그 생성되고 있는 부처를, 바로 그 부처가 될 가능성을 지닌 부처를, 바로 그 숨어 있는 부처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되네. 고빈다, 이 세계는 불완전한 것도 아니며, 완성을 향하여 서서히 나아가는 도중에 있는 것도 아니네. 이 세계는 매 순간순간 완성된 상태에 있으며, 온갖 죄업은 이미 그 자제 내에 자비를 지니고 있으며, 작은 어린애들은 모두 자기 내명에 이미 백발의 노인을 지니고 있으며, 젖먹이도 모두 자기 내면에 죽음을 지니고 있으며, 죽어가는 사람돌 모두 자기 내면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아무도 다른 사람에 대하여 그 사람이 스스로의 인생행로에서 얼마만큼 나아간 경지에 있는가를 감히 이러쿵저러쿵 말할수는 없네. 도둑과 주사위 노름꾼의 내면에 부처가 깃들여 있고, 바라문의 내면에 도둑이 도사리고 있으니 말이야. 깊은 명상에 잠긴 상태에서는 시간을 지양할 수가 있으며, 과거에 존재하였던, 현재 존재하고 있는, 그리고 미래에 존재할 모든 생명을 동시적인 것으로 볼수가 있어. 그러면 모든 것이 선하고, 모든 것이 완전하고, 모든 것이 바라문이야.”>

<“돌멩이 하나, 그것은 또한 짐승이기도 하며, 그것은 또한 신이기도 하며, 그것은 또한 부처이기도 하다네. 내가 그것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그것이 장차 언젠가는 이런 것 또는 저런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고 항상 모든 것이기 때문일세. 그러니까 그것이 돌멩이라는 사실, 그것이 지금 그리고 오늘 나에게 돌멩이로 보인다는 사실, 바로 그러한 사실 때문에 나는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며, 돌멩이에 나 있는 갖가지 줄무늬와 움푹 패어있는 구멍 하나하나, 노란색이나 회색을 띠고 있는 돌멩이의 빛깔, 돌멩이의 단단한 정도, 두드릴 때 돌멩이가 내는 소리, 말라 있거나 물기가 있는 돌멩이의 표면, 그런 것에서 나는 돌멩이의 가치와 의의를 발견하게 돼. 돌멩이를 만져보면 그 중에는 촉감이 기름이나 비누처럼 미끌미끌한 것도 있고, 나뭇잎 같은 것도 있고, 모래 같은 것도 있지. 모든 돌멩이는 하나하나가 제각기 독특한 것이며, 제각기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옴’을 읊조리고 있으니, 모든 돌멩이 하나하나가 바라문인 셈이지.”>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 오직 이것만이 중요할 뿐이야. 윤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삶과 세계를 오직 긍정하고 사랑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아아, 느끼건대 이건 불교가 아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부처가 되었다,

종장에 노인들이 되어 다시 만난 옛 친구 고빈다는 싯다르타의 미소가 부처(고타마)의 미소와 다르지 않음을 보았다.

싯다르타는 드디어 부처가 된 것이다.

내 가슴이 이해를 못하니 해설에 의존한다.

<이 소설에서는 인간 존재에 놓인 양극성, 즉 사유와 감각, 정신과 욕망의 배후에서 탐구되는 단일성이 어느 한쪽에 편중되지 않도록 한다.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모든 면에서 자기인식을 위한 명상의 수련은 진리의 심연에 돌입하기 위하여, 우선은 세상과의 인연을 끊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참선의 경지에서 수련을 닦는 자는 자기 내부와 마찬가지로 외부도 인정하며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현실 속에서도 신을 인식한다. 외부의 현상계가 내면의 세계와 모순되지 않고 내부와 외부가 신비적으로 합일된다.

헤세는 그의 유리알 유희에서도 ‘예술과 학문의 단일성뿐만 아니라 인생의 모든 영역에 대한 단일성의 상징’인 유리알을 가지고 행하는 유희의 이념으로 우주의 온갖 대립성과 그 너머에 존재하는 단일 사상을 탁월하게 구현하였다.

그는 결국 생애의 막바지에는 세계 단일성의 환상 속에서 자기 완성에 이른다. 영원히 지속적으로 변화하며 존재하는 것에 대한 상징인 강물을 보면서 단일 사상을 깨달은 싯다르타에게는 정신과 자연, 사상과 육욕, 선과 악의 대립이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단일성의 한 극으로서 똑같이 긍정된다. 싯다르타는 사랑을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이 세상과 자기 자신과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 오직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신적인 총체성을 환성하는 이러한 사랑이야말로 ‘싯다르타’가 지니는 고유하고도 본질적인 면이다.

싯다르타는 자기 존재의 내면속에 삼라만상과 하나이자 불멸의 존재인 ‘아트만’이 있음을 깨닫는다. 세계 단일성의 체험을 통한 참다운 인류 발전이라는 테마는 ‘싯다르타’에서 가장 설득력 있게 문학적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그것은 인간에게 지워진 윤회의 고통을 깨뜨리고 고양된 의식 속에서 삶을 지양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적인 총체성 속으로 몰입하여 그 속에서 안정을 얻는 데에 있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노력과 목표는 주 하나님 안에서의 영원한 안정’이라는 서구적인 사유와 일치하는 것이다. 이 소설에 형상화된 싯다르타의 모습이 ‘예수와 부처의 종합’이라든가 이 소설이 ‘동양의 신비적 구원의 도에 기독교적 색채가 담겨져 있다’든가 하는 지적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데아와 현상계, 악과 선, 육체와 정신, 사유와 감각, 내면과 외면, 로고스와 에로스, 형이상과 형이하, 순수와 세속, 존재론적 자아(감각적 인식)와 인식론적 자아(관념적 인식).

언제나 이원론(二元論)의 골짜기 사이에서 방황하면서 고뇌하였던, ‘토마스 만’.

대립된 것들의 합일, 단일성(單一性)에 대한 깨달음에 이르러,

헤르만 헤세는 토마스 만의 고뇌를 정녕 극복한걸까.

모르겠다.

결국 내 수준으로는, ‘싯다르타’이 소설은 여전히 ‘교양소설’에 머물 뿐이다.

나는 여전히 ‘토마스 만’에 머물러 있다.

책을 읽던 중, 문장의 행간(行間)에서 어렴풋하게.

나를 향하여 연민의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다.

냉담에서 벗어나 교회로 나아오라는 암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