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베니스에서의 죽음> 前
-토마스 만 作-
***동우***
2011년 10월 29일
베니스에서의 죽음 (Death in Venice, 原題 Morte a Venezia)
저자 : 토마스 만 (Thomas Mann, 1875~1955)
발표년도 : 1912년
영화 : 베니스에서의 죽음
감독 : 루키노 비스콘티
출연 : 더크 보가드, 비요른 안데르센
제작년도 : 1971년
‘루키노 비스콘티’는 ‘비토리오 데 시카’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함께 소위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3대 작가중 한사람으로 평가되는 영화감독.
그런데 내가 그의 영화를 본 것은 ‘베니스에서의 죽음’이 유일하다.(내 영화애호라는 것도 이처럼 실속이 없다)
타지오 役의 미소년 ‘비요른 안데르센’. (당시 굉장한 화제였다.)
아센바하 役‘의 ’더크 보가드’, (소설에서는 작가지만 영화에서는 음악가>
원작의 분위기와는 결이 다른, 감독의 미학적 심미안이 배어있는 유니크한 스크린이었다.
‘베니스에서의 죽음’ (유튜브는 화질이 안좋지만 공짜로 볼수 있다)
나는 슈베르트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진정으로 찬미한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가 부르는 (제럴드 무어의 피아노 반주), 아련한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소박하고 청아한 슈베르트의 리트(Lied)들.
슈베르트의 음악이 있어 세상은 한결 내게 미쁘다.
허지만 독일소설들에게서는 슈베르트의 소박한 푸르름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내 선입견으로 독일소설은 영불(英佛)소설에 비하여 대체로 로망이 결여되어 있는 듯 하다.
관념적사유(觀念的思惟)가 건조하게 서걱거려서 책읽는 속도감은 마냥 더디다.
예전에 토마스 만의 ‘마의 산 (魔의 山)’을 반의 반이나마 읽었을까, 중동무이하고 책장을 덮어 버렸다. (이런게 소설이람, 난삽한 철학책도 이보다는 읽기 쉽겠구만, 투덜대면서.)
내 허황한 지적허영으로도 읽어내기가 몹시 버거웠던 것이다. (‘마의 산’을 소화해 낼만한 지적바탕이 없었으니 당연지사.)
그래서, ‘토마스 만’은 내게 두려운 작가중 한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책부족 과제로 읽는 토마스 만은 그닥 두렵지 않아도 좋았다.
내 지적(知的) 깜냥이야 예나 지금이나 그게 그거일터이지만, 낫살이란 것이 쬐끔의 통찰력이라도 가져다 준걸까. <내리 두 번을 읽고서야 말이다.>
‘토니오 크뢰거’‘트리스탄’ ‘베니스에서의 죽음’등 ‘토마스 만’의 단편집 (중편에 가깝다)
예술가적 열정과 소명의식... 삶과 죽음... 젊음과 늙음... 로고스와 파토스에... 그런 것들에 대한 작가의 고뇌와 찰학적 사유가 조금은 만져졌던 것이다.
철학적 상징의 어휘들은 그닥 어렵지 않았지만 대화체가 적은 만연체의 문장은 쑤욱쑤욱 읽히는 문체는 아니었지만.
어쩄거나 ‘토마스 만’은 철학자가 아니라 소설을 쓰는 작가임은 여실하였다. (서사 플롯 스토리 구성 묘사등 소설적으로 모자람이 없었다.)
‘토니오 크뢰거’
나의 속물, 나의 딜레당트를 한없이 부끄럽게 하는... 치열한 예술정신.
시민과 시인, 생활인과 이상인(理想人), 이데아와 현상계(現象界). 혹은 로고스와 파토스, 계몽주의의 자손들과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보수와 진보....
실존의 본질적인 두가지 명제... 실존을 지배하는 이원론(二元論) 사이의 인식과 고통...
토마스만은 두 간극(間隙) 사이를 고뇌하면서 배회(徘徊)한다. (스스로 중간자(中間者)로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양심적 고뇌, 작금 이 땅에서 간곡하게 필요할 그 양심.)
그는 행동인(行動人)으로서의 단호한 면모를 보여주지 않는다.
사유인(思惟人)의 모습으로서, 마냥 고뇌하는 고독한 실존의 모습으로서만 서성거리는 예술가, 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를 비롯한 다른 소설들의 독후감은 생략하고,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는 좀 장황해지고자 한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빼어난 소설이었다. (두 번을 읽고서야 이 지적인 작가의 소설 읽는 맛을 쬐금 맛보았음직..)
피상적으로 생각건대, ‘토마스 만’의 ‘니체’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니체’와는 색깔을 달리 하였고.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아센바하’는 결코 ‘조르바’가 될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토마스 만’의 탐미(眈美)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관능(官能)과 층위(層位)가 달랐고 결코 미소년 ‘타치오’는 꼬마 요부(妖婦) ‘롤리타’와 오버랩 될 수 없었다.
베니스에서의 죽음.
이 소설, 내게 엄습한 강렬하고 몽환적인 느낌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소설의 주인공 ‘구스타프 폰 아센바하’
그는 대가(大家)의 반열에 오른 완벽주의 예술가. 단호한 도덕성과 소명의식. 로고스적 통제의 엄격한 자기관리. 극기(克己)로써 억압되는 파토스. 천박한 어휘들을 추방하여 갈고 닦아 빈틈없이 구사하는 문장들. 국가적 모범이 되어 독일 국정교과서에 실린 그의 글들. 일찍이 독일영주로부터 부여받은 귀족의 칭호.
그의 재능은 특출한 천재적 소산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진부한 것도 아니었다,
그가 이룩한 예술의 세계는 <소소하게 솟아나는 개별적 영감들을 매일같이 조금씩 세공하여 층층이 쌓아 성취한 장려하고 탁월한 업적, 그것은 주도면밀함과 세밀함이 요구되는 힘겹고 까다로운 작업의 결과>였던 것이다.
소설 속에서 ‘아센바하’가 내게 이렇게 내게 말하는 듯 하다.
<나는 혼돈속에서 섬광처럼 번득이는 예술가적 영감 따위는 믿지 않아. 예술이란 오르가즘이 토해낸 정액이 아니야. 천재가 훌륭한 예술가가 되는게 아니란 말이야. 예술가란 감각에의 종복(從僕)을 거부하여야 해. 오로지 이성적인 노력을 기울여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이 진짜배기 예술가지. 이성이 아닌 감각을 통해서는 정신에 도달할수 없어. 썩어 없어질 육체에 근거한 아름다움이란 환각이야. 인간을 타락시킬 뿐이지. 진짜배기 아름다움과 순수(純粹)함의 창조행위란 오로지 정신이 궁극을 향하여 추구하는 그것이야.>
그의 인생에 있어 디오니서스적 낭비(浪費)란 있을수 없었다.
그것은 그에게 악덕이었다.
육체가 영위하는 삶의 존재양식이란 정신이 도달하여 인식한 영구불변한 어떤 것을 모방한 가변적(可變的) 양식(樣式)일 뿐.
오로지 ‘로고스’로서 도달한 순수한 아름다움의 세계. 변치 않는 것, 영원한 것.
절대미(絶對美)와 절대순수(絶對純粹).
존재의 한계를 뛰어넘어 드높은 곳에 존재하는 관념의 세계. 형이상학의 세계.
이데아(idea)의 세계.
아센바하는 이를테면 플라톤의 아류였던가...
더불어 아센바하는 육체적으로는 쇠잔한, 고독한 노인이었다.
자기 삶이 점점 저물어가고 예술적 완성을 이루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이 그를 엄습한다.
그 두려움의 억압으로부터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모계(母系)로부터 유전된 보헤미안적 기질의 충동질이었을까.
어느 늦은 봄 뮌헨거리를 산책하는 도중 이방의 나그네를 보고는 남녘으로의 여행을 갈망한다. <해설을 보니까 소설속 나그네의 모습은 바로 저승사자, 명부의 안내자인 헤르메스를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베니스로 가는 여정(旅程)에서 시나브로 아센바하의 의식을 침식하는 낯선 느낌의 풍경화들.
여객선 안에서 만난 술에 잔득 취한 웬 늙은이. 늙어빠진 주제에 젊은이들 틈에 섞여 키득거리는. 늙고 주름 가득한 낯짝은 도깨비마냥 짙은 화장으로 떡칠을 하고서. 틀니가 턱뼈에서 빠져서 아랫입술에 떨어져 있는 모습. 가래낀 목소리로 청춘과 사랑을 구가(謳歌)하며 건들거리는 영감탕구. 아센바하는 그 모습을 보고서는 그 던적스러움에 질색을 한다. (영화에서도 인상적 장면들이었다.)
<저런! 젊음에 빌붙어 던적거리는 저 육체의 노추(老醜)함이라니! 역시 삶의 모습이란 끔찍한 것이야.>
그러나 그 모습이 종장에 바로 자신의 모습의 암시임을 그때 아센바하는 깨닫지 못한다.
베니스는 전(前)에 그가 찾아왔을 때처럼 태양이 찬연한 그런 여름이 아니었다.
납처럼 흐릿한 하늘, 간간이 내리는 안개비, 잿빛 하늘에 떠도는 습기먹은 바람, 저 멀리 아득한 수평선, 황량한 바다,아무런 경계도 없는 텅빈 공간...
또한 베니스 당국이 관광객들에게는 숨기고 있었지만 베니스에는 전염병(콜레라)이 퍼지고 있었다.
죽음의 이미저리들.
곤돌라. 그 옛날부터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 기이한 배. 관처럼 생긴 형태는 죽음의 이미지. 관대(棺臺). 음울한 장례식. 마지막 떠나는 침묵의 여행. 한밤중 진행되는 은밀한 범죄...
베니스 교외의 리도 섬. 사람들 뛰노는 해수욕장. 환상적인 건축물의 휘황찬란한 구조물들. 궁정의 가벼운 듯한 웅장함. 탄식의 다리. 사자상과 예수 그리스도상이 있는 물가의 주랑들. 동화에나 나옴직한 사원, 성문 길과 거대한 시계탑...
‘죽음’에의 충동과 갈망, 베니스, 전염병이 떠도는 습기찬 분위기, 미소년, 그리고 죽음...
‘에로스’는 필경 ‘타나토스’의 또 다른 얼굴이다.
아센바하는 시간을 재는 감각의 상실됨을 느끼고 잠시 그는 몽롱한 의식에 빠져 든다.
그가 여장을 푼 고급호텔에는 러시아, 폴란드, 프랑스, 독일, 영국의 귀족들과 부자들이 묵고 있다.
벚나무 원목가구가 비치된 아늑한 방. 진한 향기를 내뿜는 꽃으로 된 장식들, 높은 유리창들로부터 내다보이는 탁 트인 바다...
꼼꼼하게 만찬을 위한 의상을 차려입은 아센바하.
그곳에서 아센바하는 운명적으로 ‘타치오’를 조우(遭遇)하게 된 것이다.
<보아하니 열다섯 살에서 열입곱 살 정도까지 돼 보이는 소녀 셋과 열 네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하나였다. 아센바흐는 소년이 완벽하게 아름답다는 걸 알아 차리고는 흠칫 놀랐다. 창백하면서도 우아함이 깃들이고 내성적 면모를 보이는 얼굴은 연한 금발머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곧게 뻗은 코와 사랑스런 입술, 우아하고 신성한 진지함이 어린 표정을 담은 그의 얼굴은 가장 고귀했던 시대의 그리스 조각품을 연상시켰다. 그것은 가장 완벽하게 형식을 완성시킨 모습이었다.>
흡사 파로스섬의 노란색 광택을 지닌 대리석으로 깎아놓은듯한 에로스 신의 두상과 같은 용모.
그러면서도 아센바하는 미적인식(美的認識) 그 너머 육체가 지닌 멸망의 허무함을 떠올린다.
필경 소멸하고야 마는 아름다움, 그 아름다운 소년의 용모 뒤에 서성거리는 죽음.
<저 애는 어디가 아픈걸까? 저 애 얼굴색이 얼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어두운 금발 고수머리와는 대조적으로 새하얀데 말이야, 아마도 일찍 죽을지 몰라.>
그리고 그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추상적인 것, 아니 정말이지 선험적인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서 법칙적인 것과 개성적인 것이 맺고 있을듯한 비밀스런 연관관계에 대하여. 어쩌면 그렇게 해서 인간의 아름다움이 생기는 건지도 몰랐다. 거기서부터 형식과 예술에 관한 일반적인 문제들로 생각이 옮겨가서 결국 그의 생각과 발견은 꿈속에서의 묘한 암시와 같아졌다, 한데 그것은 말짱한 지각 상태일 때는 완전히 허무맹랑하고 쓸데없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곧이곧대로 직역(直譯)한 번역의 냄새, 좀 곱씹어 쉽게 풀어 의역(意譯)하였더라도 좋았을걸.
나름대로 늘어놓자면, ‘추상적 선험적 법칙적’이라는 어휘는 ‘이데아’에 다름 아닐 것이고, ‘개성적인 것’은 ‘현상계’로서 소년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일게다.
이데아의 ‘절대적 형식미(形式美)의 모방으로서 구현된 현상계, 일반적인 가변미(可變美).
토마스 만의 문장을 읽으면서 내 감정이 에로스적 도취에 빠져드는 이건 도무지 무어란 말인가, 창피하게스리.
이건 감각의 허깨비일 뿐. 아암, 내가 제정신일 때는 어림반푼어치도 없지.
삿된 것아 물럿거라.
<베니스에서의 죽음> 後
열네살짜리 미소년 ‘타치오’.
처음 아센바하에게 인식된 타치오의 아름다움이란 한 객체(客體)가 갖추고 있는 완벽한 ‘형식미(形式美)’였을 것이다.
이데아(혹은 創造主)의 이념이 구현(具顯)한 완벽한 조각품.
관조(觀照)하고 감상하여 찬미케 하는 하나의 정물, 활짝 핀 한송이 꽃.
<소년은 달리면서 역류하는 물을 다리로 걷어차면서 물보라를 일으켰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물결을 가르면서 돌아왔다, 비할 바없이 숭고하고 준엄한 표정에, 물방울을 뚝뚝 떨어지는 고수머리를 한 그 생명력 넘치는 모습은 하늘과 바다 깊숙한 곳에서 내려온 귀여운 신과 같이 아름다웠다. 그 광경은 마치 태초의 시간, 형식의 기원과 신들의 탄생에 관한 시학 자체와 흡사하였다. 아센바하는 눈을 감고 자기 마음 속에서 울리기 시작하는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아센바하의 관념으로부터 감각(感覺)의 영역으로 점점 침식해 오는 타치오.
계속 주목하고 관찰하면서 점점 소년의 생동하는 생명미(生命美)에 아센바하는 속절없이 침잠(沈潛)될수 밖에 없다.
이제 그의 오관이 수렴한 아름다움이란 이데아가 아니라 역동적인 생동감이었고, 감각이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속절없이 빠져들수 밖에 없는 수렁이었다. (그의 관념은 점점 여위어지고 그의 에로스는 점점 살이 찌고 있었던 것이다.)
타치오를 객관으로서가 아니라 ‘주관적인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는 아센바하.
아, ‘주관’이란 근본적으로 배타적인 것이다.
‘좋아함’이란 객관이지만 ‘사랑함’이란 소유욕이 욕동(慾動)하는 주관의 영역이다.
아센바하에게 있어서 관조의 대상으로부터 에로스의 존재로 전이되고 있었던 타치오.
아센바하는 중얼거린다.
<“나를 기다린건 바다와 해변이 아니었구나, 네가 머물러 있는 동안 나도 여기에 머물러 있겠다.”>
그러자 아센바하는 그 에로스의 감정에서 혼돈과 불길한 파멸을 예감한다.
무의식적으로 그의 불안한 예감은 이렇게 중얼거렸을 것이다.
“어이쿠, 이러다가 큰일나겠다. 나는 이 감각이 기승하는 감정밭으로 부터 벗어나야 한다. 저 소년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그러나 저명인사 아센바하의 체면이라는 방어기제(防禦機制)는 이렇게 능청을 부린다.
<“이번 여름 베니스의 날씨는 좋지 않아, 건강을 위하여 베니스를 떠나자.>”라고.
그 여름의 베니스... 아센바하에게 치명적인 타치오의 美...
골목들마다 깔려있는 역겨운 무더위, 시로코 열풍과 뒤섞인 바닷바람에 의해 야기된, 흥분과 이완이 공존하는 역겨운 상태, 풍겨오는 석호(潟湖)의 썩은 냄새, 죽음. 멸망...
호텔측에 떠나겠다고 기별한 것을 후회하여, 슬프고 괴로운 감정에 사로 잡혔지만 그는 의지는 이를 이겨낸다.
<안녕 타치오, 내 너를 본 것은 잠깐 동안이었군, 주님의 은총이 있기를.>
그러나 수하물 운송지의 착오로 그의 짐이 엉뚱한 곳으로 부쳐졌다는 사실을 알고서, 철도관리인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면서 단호하게 선언한다.
<“짐 없이는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
타치오를 떠나지 않아도 좋을 핑계꺼리가 생겨서 속으로는 기뻐 환호하였을 늙은 예술가 아센바하.
다시 베니스의 호텔로 돌아와 창문너머로 해변의 타치오를 바라보는 아센바하.
피가 끓는 감동과 기쁨으로, 영혼의 고통을 느끼면서 중얼거리는 아센바하.
<“보아라 타치오, 너도 역시 다시 여기에 있구나.”>
그는 매일 빈틈없는 복장을 차려입고 타치오를 바라보았다,
호텔 창문으로, 해변의 의자에서, 베니스 거리를 미행하면서.
언제나 타치오에 머물러 있는 아센바하의 눈길.
고통과 환희로 충혈된.
<그의 노란 고수머리는 불어 닥치는 동풍에 마구 휘날렸다. 휘뿌옇고 비단처럼 부드러운 빛이 느릿느릿 물결치는 광대한 바다 위에 놓여 있었다. 모래사장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찰자는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는 이 고귀한 신체의 온갖 선과 몸짓을 다 알게 되었고, 이미 친숙한 모든 아름다움에 대해 반갑게 인사했으며, 그 아름다움을 바라 볼때의 감탄과 정다운 감각적 기쁨은 끝이 없음을 느꼈다.>
<몸통에 꼭 끼에 두른 목욕수건 때문에 소년의 섬세한 갈비뼈 자국과 균형잡힌 가슴이 유난히 드러났다, 그의 양쪽 겨드랑이는 아직 털이 나지 않아 조각상처럼 매끄러웠고, 두 무릎은 윤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무릎 밑으로 보이는 푸르스름란 혈관은 그의 몸이 마치 투명한 소재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 쭉 뻗은 완전히 젊은 육체에는 얼마나 훌륭한 규율과 명징한 사고가 표현되어 있는가! 드러나지 않게 작용하여 이 성스러운 조각상을 이 세상에 내어 놓을 수 있었던 그 엄격하고도 순수한 의지! 그러나 이와 같은 의지는 예술가인 그가 친숙하고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게 아닌가? 그 역시 냉혹한 정열에 가득 차서 언어라는 대리석 덩어리에서 미끈한 형식을 해방시켰다, 그 역시 정신적에서 통찰한 것을 정신적 아름다움의 전형과 귀감으로서 사람들에게 미끈한 형식으로 형상화하였다, 그러니 그도 또한 그와 같은 의지 속에서 창조하고 작용해 온 사람이 아닌가?>
<전형과 귀감이라! 그의 두 눈은 저기 푸른 바다의 가장자리에 있는 그 고귀한 형상을 얼싸 안았다. 그리고 그는 열렬한 황홀감에 빠져 이 형상을 보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움 그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라 믿었다, 그 아름다움은 신의 사고로서의 형식이고, 정신 속에서만 사는 유일하고도 순정한 완전성이었다, 그런데 그 완전한 아름다움의 한 비유적 모상이 한 인간으로 화해서 여기 경쾌하고도 아리땁게 우뚝 서서 경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도취였다, 그리하여 그 늙어가는 예술가는 여러 생각할 것 없이, 아니 탐욕적으로 그 도취를 기꺼이 받아 들였다. 그의 정신은 산고의 고통을 겪게 되었고, 그의 교양은 격랑에 휩쓸렸으며, 그의 기억은 아주 오래 된 사고ㅡ 즉 젊은 시절에 섭렵은 해 놓았지만 지금까지 한번도 자기자신의 점화로 불을 당기지는 않았던 사고들을 새로이 떠올리게 되었다.>
급기야 아센바하는 이런 고백에 이른다.
<그렇다, 영혼은 육체의 도움을 받아서만이 더 높은 관찰을 할수 있는 주체로 고양될수 있다.>
<늙어가는 사람이 각성을 원하지 않았고 도취를 너무나 귀중하게 생각하는데, 누가 예술가기질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규율과 무절제의 오묘한 본능적 결합을 이해할 것인가, 나는 표현할수 없다.>
속으로 부르짖는 아센바하.
<널 사랑해!>
그러나 에센바하의 사랑은 결코 소년과 접촉하지 않았다.
죽는 순간까지, 아센바하는 소년을 향하여 말 한마디 손끝 한번 스치지 않았다.
다만 끊임없이 타치오를 도찰(盜察)하면서 그의 거친 숨소리는, 발기(勃起)를 동반한 그런 종류의 헐떡임이 아니었다.
정신만이 황홀함에 젖어 타지오의 육체와 교접(交接)할 뿐이다.
정신과 육체의 이종교배(異種交配).
불순한가. 부도덕한가. 타부인가.
어린 소녀 ‘롤리타’를 향한 중년사내 ‘험버트’의 사랑, 부도덕함에 있어서 그 층위(層位)가 어떻게 다를까.
베니스에는 관광객들에게만 숨기고 있는 사악한 비밀이 있다.
성수기의 관광철인지라 당국과 베니스사람들은 베니스에 번지고 있는 전염병을 은폐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니스 골목 곳곳에 오염된 것들을 태우는 불길, 허옇게 뿌려진 소독약과 냄새.
그 비밀을 알아낸 아센바하는 갈등한다.
이 사실을 타치오네 가족에게 알려야 할것인가 말것인가하고.
타치오가 떠나 버린다면 견딜수 없는, 사랑의 열병에 헐떡이는 아센바하.
<아무말도 하지 않아야 해!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거야!>
<불행이 닥치고 타락한 도시의 모습이 황폐해진 채로 그의 정신 앞에 어른거리면서 그의 마음 속의 희망, 도저히 납득할수 없고 이성의 영역을 넘어서는 엄청나게 달콤한 희망에다 불을 붙였다, 혼돈의 장점, 파멸. 죽음... 예술과 미덕 도덕과 윤리가 무슨 소용인가?>
아센바하는 꿈을 꾼다.
전염병.. 미친카니발.. 화염.. 연기..광태의 성교, 사디즘.. 매조히즘.. 식인.. 흡혈..
단테의 색욕지옥보다 끔찍한 색지옥(色地獄)의 현장.
<밤의 세계..타치우를 부르는 우의 발음,,,낯선 신...자욱한 빨간 연기... 부서져 내리는 불빛 속엑서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인간들, 동물들... 화염과 소란과 비명... 북소리... 우우 하는 고함소리... 달콤하면서 야만적인 소리들... 은은한 피리소리...혼돈의 카니발...상처와 전염병의 냄새...둥둥 울리는 북소리...현혹, 모든 것을 마비시키는 정욕, 음탕한 상징물들...가시가 달린 막대기로 서로의 몸을 쑤셔대며 사지에 흐르는 피를 핥아먹는 사람들...김이 무럭무럭 나는 고기 살점을 게걸스럽게 뜯어 먹는.., 음탕과 광분...>
그리고 죽음이 떠돌고 있는 베니스.
그 분위기와 문체가 풍기는 뉘앙스는 독자들을 몽환으로 이끈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환각적인 두 이미저리의 절묘한 배합.
'토마스 만'은 소설가로서 탁월하다.
소년과 마주칠때면 아센바하는 자신의 늙어가는 육체가 스스로 역겹다.
젊어 보이도록 양복에다 보석을 달고 향수를 뿌린다.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늙은 얼굴에다 화장(化粧)을 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낸다,
아센바하는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어린 파이드로스에게 에로스의 진실에 대하여 자신의 목소리로 얘기한다. (내 책장에도 플라톤의 파이드로스가 있는데 완독은 언감생심, 해설을 대충 읽었을 뿐)
<아름다움은 느낄수 있는 자의 길이란다, 어린 파이드로스여. 그것이 예술가가 정신에 이르는 길이란다, 감각적인 것을 통과하는 길, 그 위험스럽고 쾌적한 길은 죄악의 길이라고 생각하느냐? 그것은 우리 시인들은 에로스가 옆에 와서 안내자로 나서주지 않고는 아름다움의 길을 갈수 없다는 사실이야. 열정이 우리를 고양시켜 주는 것이며 우리의 동경은 반드시 사랑에 머물러 있어야 한단다.>
<우리가 쓰는 문체에서 엿보이는 대가다운 태도는 허위이고 어릿광대의 짓이야. 우리에 대한 대중들의 신뢰는 지극이 우스꽝스러운 것이며, 예술을 국민과 젊은이들을 교육시키겠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야. 명성과 영예로운 지위는 일종의 익살극이야.>
<인간이란 천성적으로 타락의 심연으로 빠져드는 경향이 있고ㅡ 우리는 해체시키는 인식 같은 것을 거부하지, 그 까닭은 파이드로스, 인식이란 것이 결코 품위도 엄격함도 아니기 때문이란다. 그건 뭔가를 알면서 이해하고 용서할수 있을 뿐 정신적인 태도나 형식을 지닌게 아니란다. 인식은 타락의 심연에 대하여 공감을 가지고 있어. 그러니까 인식 그 자체가 타락의 심연인 셈이지.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인식을 단연 거부하는 거란다. 이제부터 우리의 노력은 아름다움에만 경주되지. 말하자면 단순성과 위대성 그리고 새로운 엄격성과 제2의 자유와 형식을 존중한다는 것이지. 그러나 파이드로스, 형식과 자유는 도취와 탐욕으로 치닫게 되고 고귀한 사람을 무시무시한 방종의 감정에 빠뜨린다. 고귀한 사람 자신의 아름다운 엄격성이 그러한 방종을 불명예스럽다고 배척하는데도 말이다. 형식과 자유는 고귀한 사람을, 고귀한 사람까지도 타락의 나락으로 끌고 간다. 내 말은 그것들이 우리 시인들을 그리로 끌고 간단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상시킬수 없고 단지 방종한 생활을 할수 있기 때문이란다,>
<이제 나는 가겠다. 파이드로스. 너는 여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거라. 그러다가 네가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거든, 그때 비로소 너도 떠나거라.>
난삽한 문장이지만, ‘소크라테스(파이드로스)’를 빌어 얘기하는 아센바하의 절절한 이야기들을 이해 못할 바도 없을 것이다. (나의 부박(浮薄)한 지식과 사유(思惟)가 더 난삽하여 번역 탓할 것 없다)
아센바하는 절망하고 있었다.
육체 그 너머 정신이 있는 것도 아니며 궁극의 정신이 구현한 것이 육체가 아니라는 깨달음.
육체가 영화(靈化)되는 과정 따위도 없으며 정신이 육화(肉化)되는 과정 따위도 없다.
육체가 정신으로 사는, 정신이 육체로서 사는 그 과정이 바로 삶이다.
으흠, 디오니서스는 정신을 포괄한다.
그리하여 아센바하의 절망은 에로스로서 구원받았을까.
그러나 그의 에로스는 필경 ‘조르바’와 달리 부도덕하고 치명적이다.
관념적 인식으로만 사유하는 생명은 실체없는 추상의 허깨비다.
그 허깨비가 홀연 시뻘건 현실로 화하여 생명에 부딪쳐 맞게되는 소스라침.
범부범부가 일상적으로 영위하는, 감각하는 인식이란 죄 허깨비가 아니란 말가.
답은 없다. 아니, 모르겠다.
태생적 먹물인 북구(北歐)의 안경낀 인텔리 ‘토마스 만’은 에게海 크레타의 사나이 ‘조르바’처럼 확신에 차서 말하지 않는다.
<내 머릿속에서는 가장 형이상학적인 문제까지도 바다와 흙과 인간의 땀냄새가 나는 따스한 실체의 형태를 취한다.개념은 나에게 이르려면 따뜻한 육체가 되어야 한다, 냄새맡고, 보고, 만질수 있을 때, 그때가 되어서야 나는 이해를 한다.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처럼 '토마스 만'은 단호하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센바하의 입을 빌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릴 뿐이다.
‘토마스 만’은 ‘지식’과 ‘사유’로서 영혼이 고통스러운 사람일 것이다.
이원론(二元論)의 두 골짜기 사이에서 방황하면서 고뇌하는 영혼.
‘이데아와 현상계’이거나 ‘정신과 육체’이거나 ‘천당과 지옥’이거나 ‘순수와 세속’이거나 ‘시민과 시인’이거나 ‘사유와 행동’이거나 ‘자본과 노동’이거나 ‘보수와 진보’이거나.
아, 뉘에게나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을 두 골짜기 사이에서의 고뇌.
관념적 인식(觀念的 認識)과 감각적 인식(感覺的認識)
무엇이 선험적(先驗的)이고, 무엇이 진짜배기인가.
쾌락이 영위하는 삶은 이성이 영위하는 삶보다 행복한가.
아폴론이 복(福)인가, 디오니서스가 복인가.
힘에 부친다.
머릿속 엉킨 것들 가리사니 잡아 지껄이려 하였는데, 정연(整然)함은 커녕 난삽하기 그지없는 횡설수설이 되어 버렸다.
천학비재(淺學菲才)의 한계이니 어쩌랴.
'비스콘티' 영화의 라스트씬을 떠올리면서 그만 접을란다.
빈틈없는 백색정장의 ‘더크 보가드’(아센바하)는 해변 그늘집 의자에 앉아 저멀리 바닷가에서 뛰어노는 타치오를 바라본다.
그 모습은 밝은 햇빛에 녹아 가끔 실루엣으로 변한다.
화장(化粧)으로 허옇게 분칠한 아센바하의 얼굴, 머리를 염색한 검정 구정물이 땀에 섞여 뺨으로 흘러내린다.
점점 햇빛으로 녹아가는 타치오의 실루엣.
아센바하는 마지막 숨을 헐떡인다.
타치오를 잡으려는듯 손을 들어올린다.
덜컥 숨을 거둔다.
죽음을 눈치 채고 달려 온 종업원, 그의 주검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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