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2011년 12월 단상 (1,4,3,3)

카지모도 2019. 9. 25. 0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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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2011년 12월 단상>

 

***동우***

2011.12.20

 

1.

한 3, 4년 쯤 부려 먹었나.

싼게 비지떡인지라 ‘데이시스템’에서 만든 저가(低價)의 24인치 모니터가 시름시름하더니 열흘전쯤 그예 주저앉고 말았다.

들창이 없는 P/C는 먹통이나 다름없어 엊그제 큰맘먹고 ‘삼성’꺼루다 개비하였다.

삐까번쩍 좋은 화면에 첫개시, 영화가 없을쏘냐.

삼성 모니터는 영화 ‘다우트 (doubt)’가 개시(開始)하였다.

존 패트릭 셰인리’ 감독. 출연은 메릴 스트립 (알로이시스 수녀 역),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플린 신부 역), 에이미 아담스(제임스 수녀 역).

영화 ‘다우트’에서 세 배우의 연기는 빛을 튀겼다.

 

아래는 다음(daum)의 영화 소개.

++++

‘존 패트릭 셰인리’는 진실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변화를 강요하고, 도덕적 신념에 의해 한정된 맹목적 정의의 통렬한 결말을 보여주는 연극 <다우트>를 각색해 스크린으로 옮겼다.

영화는 1964년 브롱크스의 성 니콜라스 교구 학교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활기에 가득한 ‘플린 신부’는 철의 여인이며 공포와 징벌의 힘을 굳건히 믿고 있는 교장 수녀 ‘알로이시스’에 의해 한치의 빈틈도 없이 이어지던 학교의 엄격한 관습을 바꾸려고 한다.

당시 지역 사회에 급격히 퍼지던 정치적 변화의 바람과 함께 학교도 첫 흑인 학생인 도널드 밀러의 입학을 허가한다.

하지만, 희망에 부푼 순진무구한 제임스 수녀는 플린 신부가 도널드 밀러에게 지나치게 개인적인 호의를 베푼다며, 죄를 저지른 것 같다는 의심(소년 추행)스러운 언급을 하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알로이시스 수녀는 숨겨진 진실을 폭로하고 플린 신부를 학교에서 쫓아 내려는 계획을 세운다.

자신의 도덕적 확신 이외에 단 하나의 증거 하나 없이, 알로이시스 수녀는 교회를 와해시키고 학교를 곤란에 빠트릴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는 플린 신부와의 은밀한 전쟁을 시작한다.

++++

 

오로지 도덕적 잣대로써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알로이시스’ 교장수녀.

그러나 ‘플린’ 신부에 대하여, 소년을 추행했을거라는 의구심 이외에는 그 어떤 확증적 증거도 그녀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평소 신부의 신앙적자세의 모호함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온 그녀로서는 신부의 부도덕함은 스스로에게 진실이 되어 버렸다.

부도덕한 신부를 파멸시켜야 한다는 소명의식과 그 심리적 갈망.

그녀의 편향적 사고체계와 집착은 일종의 광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의심암귀(疑心暗鬼)에 사로잡혀버린 교장수녀.

그것은 종교적 양심따위도 파괴하여 버린다.

과거 행적에 대한 거짓말로서 신부를 압박한다.

결국 신부는 떠나고 알로이시스 수녀는 승리하였다.

라스트 시퀜스.

정원의 벤치에 앉아 제임스 수녀를 맞는 알로이시스 수녀.

“교장 수녀님께서 거짓말까지 하셨다니 믿을수 없어요.”

“그러나 그 거짓말로 인해 증명되었어요. 그는 떠났잖아요? 그는 내가 생각했던 그런 류의 사람이 맞았던 겁니다.”

묵주의 십자가를 어루만지면서 울먹거리기 시작하는 알로이시스 수녀.

“그런데 저도 그 댓가를 치루고 있어요.”

점점 흐느끼기 시작하는 교장수녀.

“오! 제임스 수녀님.”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는 울음이 터져 나온다.

“오오! 제 믿음에 회의가 들어요.”

오열하는 늙은 알로이시스 수녀, 그런 그녀를 연민하여 그 무릎에 얼굴을 묻는 젊은 제임스 수녀.

기대었던 유일한 도덕적 근간은 신앙이었는데, 스스로의 신앙에 대한 회의로 괴로워하는 알로이시스 수녀.

그녀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오르는 엔딩 크레딧.

 

2.

 

소유편향

무조건적으로 ‘내 것이 옳다는’ 요지부동의 확신.

소통에 있어 ‘열린 마음’이 없다는 것.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심리적으로 거부한다는 것.

'내가 생각한 것, 내가 믿고 있는 것이 틀린 게 아닐까? 상대 논리가 더 옳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아예 들지 않는다는 것.

자기 의심이라거나 자기 검증은 애시당초 꿈도 꾸지 않는다는 것.

비이성적인 심리적 매커니즘.

이른바 확증편향(確證偏向)에 의한 선택적인지(選擇的認知).

그렇게 고착된 신념체계는 자신에게 적합한 것만을 선별적으로 선택하여 지각(知覺)한다.

 

3.

 

야 살아있지? 만나자 우리.

올해 가기 전에 얼굴들이나 봅시다.

연말인데 한번 뭉쳐야지.

 

세밑이면 ‘관계’들은 조급해진다.

갈 날 멀지 않아, 낫살 먹은 축들이 더욱 그러하다.

연말, 이름난 주식점(酒食店)에는 단체예약이 몰린다.

 

더러 반가움 없지 아니하고, 더러 어울려 즐거움 없지 아니하고.

그렇지만 2차로 3차로 연이어지는 술자리의 우의(友誼)는 지독하게 과장되어 있다.

 

해마다 나는, 연후(然後)에야 ‘괜히 어울렸다’고 뇌이고는 한다.

몰취향한 떼거지 술이 괴롭고, 그보다 주탁에 낭자한 사설들이 나는 피곤하다.

늙을수록 고즈넉한 독작(獨酌)이 좋은 까닭이다.

 

경상도 노털들에게 진보적 대체세력을 논하기는 아직 요원하다.

리영희의 한페이지도 읽은적 없으면서 리영희는 그저 빨갱이, 진중권 조국 유시민 이정희가 쓴 글 한줄 읽지 않았으면서 그들은 그냥 재수없는 놈년들이다.

순정한 인상비평(印象批評)도 아니라 근원적으로 그들이 역겨운 것이다.

 

한미 FTA, 쇄국, 개방, 통제, 자유, 개발, 환경, 자유교역, 글로벌, 신자유주의...

주탁에 홍건한 사설들은 중구난방 나름의 논리로 시글벅쩍하다.

많은 부분 진실도 아닐뿐더러 사실관계도 오류 투성이다.

신자유주의의 정체에 대하여는 기본적 지식도 모자르고, 한미 FTA의 독소조항 같은 것도 꼼꼼하게 들여다 보지 않은 것 같다.

주석(酒席)에 난무하는건 흑백의 단순명료한 것으로만 무장되어 있는 표피적인 지식들뿐이다.

그에 대응하여 어줍잖은, 내 발언이 있었다. (나 또한 한미 FTA에 반대하는 쪽은 결코 아니었는데)

딴에는 주석의 대화다운 유연한 톤으로 반대적 논거에 대하여 몇마디 씨부렸더니.

이 친구들 보게나, 그 진지함이라니.

예제서 집중포화로 내게 퍼부어지는 요란한 변설들.

나는 이내 입을 닥치고 이내 주눅이 들었다.

소유편향에 사로잡힌 무리들을 향하여 씨잘데기없이 지껄인 내 언어들의 참담함.

모욕감과 자괴감.

이른바 갱상도(경상도)의 정서와 기질은 뚜렷하고 강직하다.

그렇지만, 정서가 무슨 사상인가? 기질이 무슨 신념인가?

북한의 김정일이 죽었다.

얼마나 사설들 낭자할까.

다음주 부동산 지인들 모임.

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