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밤으로의 긴 여로 -유진 오닐- (1,4,3,3)

카지모도 2019. 9. 25. 0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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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 리뷰-

 

<밤으로의 긴 여로>

-유진 오 닐 -

 

***동우***

20111127

 

밤으로의 긴 여로 (Long Day's Journey into Night)

작가 : 유진 오닐 (Eugene O'Neill, 1888~1953)

발표년도 : 1956(유언에 의하여 사후발표)

 

미국 극작가 유진 오닐은 내게 특별하다.

내가 최초로 관극(觀劇)한 본격연극이 중2 삼일당’(진명여고 강당)에서 중동고 연극반이 공연한 유진오닐의 '고래'였고, 처음 배역을 맡아 무대에 섰던게 유진오닐의 '위험지역'에서 '코키'이었다.

무엇보다 유진 오닐밤으로의 긴 여로로 인하여 내게 더욱 각별하다.

작가가 죽고나서야 세상에 알려진 희곡 밤으로의 긴 여로

유진 오닐은 이 작품을 탈고하고서 아내 칼로타에게 이렇게 썼다.

해묵은 슬픔을 눈물과 피로 쓴 이 원고를 당신께 바칩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은 후 25년간 발표도 하지 말고 무대에도 올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해묵은 슬픔을 눈물과 피로 쓴 원고라니.

얼마나한 슬픔과 아픔이 녹아 있길래.

고백건대 밤으로의 긴 여로는 내게도 해묵은 슬픔을 눈물로 불러오는 작품이다.

 

젊은 시절, 소극장운동을 한답시고 껍죽댄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맛을 들였던지 나는 희곡(戱曲)읽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희곡의 플롯은 기승전결(起承轉結)의 짜임새가 분명하고 등장인물의 캐릭터가 명확하게 드러나서 소설보다 이해가 빠른 편이다.

드라마트루기에 충실한 자연주의극뿐 아니라, 부조리극 따위도 난해한 실존주의 소설보다는 내 감상판(鑑賞板)에 비교적 수월하게 접수되는 편이다

 

많은 연극을 보았고 더 많은 희곡을 읽었다.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세익스피어, 몰리에르, 브레히트, 입센, 체홉, 존오스본, 헤럴드 핀터, 이오네스크, 베케트, 숀 오케이시, 유진 오닐, 에드워드 올비, 칼 비트링거, 아서 밀러, 테네시 윌리엄스, 피터 셰퍼, 그리고 우리나라 극작가의 수많은 작품들...

특히 체홉의 벚꽃동산은 희곡의 전범(典範)으로서 나름 분석적으로 공부하기도 하였었다.

 

아시다시피 희곡이란 본시 연극대본, 그러니까 대사(臺詞) 위주의 포맷으로 꾸며져 있다.

말하자면 대사에 모든 것이 담겨있는 것이다.

권컨대 희곡은 눈으로만 읽지 말고 웅얼웅얼 소리내어 읽어보라.

그러면 어느 정도 전지적(全知的) 시점의 객관에서 벗어나 그 인물의 주관 속으로 들어갈수 있을 것이다.

연기자처럼 표정과 몸짓을 싣지 않더라도, 씹히는 말 맛으로 그 인물에게로의 감정이입의 느낌은 사뭇 다를 것이다. (연극배우들이야 말로 자신이 연기하는 그 배역의 인물을 속속들이 꿰뜷어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연출자보다도, 어쩌면 그 인물을 만들어낸 작가보다도.)

 

옛날 출판된 삼중당(오화섭 역)의 책이 있지만 이번에는 문예출판사의 책(박윤정 역)을 구입하여 읽었다.

신협 공연을 비롯하여 이 연극을 나는 서너 번 관람하였을 것이고, 이 희곡은 적어도 다섯 번 이상은 읽었을 것이다.

어느 소년이 통과하였던 밤으로의 긴 여로

그 여로의 어느 모롱이에 이 연극의 메리처럼 모르핀에 취하여 흐느적거리는 나의 메리가 있었던 것이다.

읽을 적마다 들쑤셔지는 상처, 기억 속의 그 리얼리즘은 내게 익숙한 아픔이노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수 없다.

 

가족.

부부 사이, 부모자식 사이, 형제 사이라는 2이내의 혈족(血族)이라는 것.

순혈주의(純血主義)로 엮어진 공동체의 기본단위.

가족(食口)이란 어쩌면 자아(自我)가 확장된 '자기애적 사랑'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서로간 숨결이 가장 가차운 모듬살이의 따순 동굴이며 또한 동앗줄로 꽁꽁 묶인채 갇혀버린 감옥이기도 하다.

 

무릇 팔자(宿命)의 근원적 씨앗이 거기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안온한 보금자리이기도 하지만 자아가 해체되는 참혹한 분열의 현장이기도 한 가족.

엄마를 부탁해’(신경숙 소설)의 애틋한 그리움이고 엄마를 증오해’(엊그제 보도된, 엄마를 살해한 고교생)의 증오 가득한 전쟁터다.

 

비숍의 홈 스위트 홈’, ‘반딧불의 무덤에서 어린 오라비가 굶주려 죽은 누이를 화장할때 성하(盛夏)의 짓푸름을 배경으로 반어적(反語的)으로 이 노래가 흐른다.

홈 스위트 홈그 노래의 대척점에 있는 것들은 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이다.

그 상처들은 부끄러움이나 죄의식이나 치욕이 되어 감정모체 깊은 곳 금기(禁忌)의 영역으로 숨어 든다.

그것들을 의식의 영역으로 끄집어 내려 할 때에 흔히 수치심과 죄의식이 작용하여, 정신적 방어기제에 걸려서 흔히 왜곡(歪曲)되거나고 치장(治粧)된다.

주지화, 합리화, 내향화, 부정, 억제, 억압, 반동형성, 취소, 승화, 상징화 등으로...

 

스스로에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타인을 향하여 그것을 털어놓는 것이 어떻게 수월하겠는가.

뉜가 그때 내 엄마는 창녀였다고 단문(短文)의 외마디 소리를 내질렀다면 그것은 필경 위악적(僞惡的) 레토릭이기 십상이다.

자신의 어머니에 대하여 창녀라는 단어는 쉽사리 갖다 붙일수 있는 어휘가 아니다.

아마도 그는 한시절 자신의 고통에 대하여 얘기하고자 하였을 것이고, 사람들도 그렇게 알아 들어야 옳도다.

창녀라는 단어는 일종의 위악적 수사(修辭)일 뿐이니까.

 

의식하던 않던 간에, 가족사의 고통스러운 부분을 끄집어 낼때는 합리화로 장식되고 음악적 변주로서 치환된다.

나는 예전 그것을 변명(辨明)이거나 위장(僞裝)이거나 신음(呻吟)이라고 한 적 있거니와, 대부분 위악(僞惡)이거나 파라독스이거나 반어(反語)이거나 은유나 상징으로 얼버무려져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상징적인 운문(韻文) 속으로 숨을게 아니라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시한 산문(散文)으로서 고백되어져야 한다.

유진 오닐밤으로의 긴 여로처럼.

모월 모일 모시(소설에는 정확한 날자와 시간이 적시되어 있다)에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하였다로 시작하는 아니 에르노의 소설 부끄러움처럼.

 

이번 책부족의 텍스트 밤으로의 긴 여로’(실은 내가 추천한 책이다)

이 희곡은 사실주의 연극이면서 일종의 심리극이다.

극적 비약도 없고 극적 감동도 옅은 단순한 구성의 연극이다.

단 네 사람(하녀를 제외하고),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두 아들이 출연하여 단 하루 동안의 일상사를 보여줄 뿐이다.

 

아버지 제임스 티론 : 60, 한때 촉망받던 세익스피어 전문배우였지만.... 돈에 집착하는 구두쇠. 병든 아들의 치료에 있어서도 수전노 노릇...

어머니 메리 티론 : 50, 모르핀 중독자...과거의 환상에 몽롱하게 잠겨...

큰아들 제임스 티론 : 30, 알콜중독자... 주색잡기에 빠진...

작은 아들 에드워드 티론 : 20, 폐병쟁이... 작가 유진오닐 자신이 투영된...

 

서로 증오하면서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네 가족.

희망과 좌절, 부자간의 대결, 자아상실, 죄의식, 도피의식...

 

마지막 장면.

밖에는 안개 자욱한 한밤중.

백발을 소녀처럼 땋아늘이고 웨딩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메리는 모르핀에 취하여 몽아상태에 빠져 있다.

과거 속으로 침잠해 몽롱한 정신의 메리.

그런 아내와 어머니를 바라보며 죄책감으로 비탄에 빠져버리는 남편과 큰아들과 가족의 미래에 좌절하는 작은 아들.

 

나의 밤으로의 긴 여로읽기.

그것 역시 유진 오닐처럼 해묵은 슬픔을 읽는 것이고 눈물과 피로 쓴 상처를 더듬는 것이며 그의 부끄러움을 나 자신의 것으로 느끼는 것이다.

연민과 그리움, 사랑과 미움, 후회와 죄책감...

 

가족사의 지독한 아픔과 부끄러움. 기억으로 남아 있는 그것들.

기억과의 화해를 갈구(渴求)하고 기억에게 용서를 간구(懇求)하는 처연한 자기고백.

, 가족이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동앗줄의 포박이다.

유진 오닐은 이 작품을 씀으로써 그 포박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고 얼마나 구원받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알수 있을 것 같다.

 

내 어머니도 한때 모르핀 중독자였다.

내 나이 열넷 즈음의 어느 한동안.

약에 취한 모습을 한사코 숨기려 하셨지만, 아아, 메리는 바로 내 어머니의 모습 그것이었다.

어린 내 생명의 유일무이한 거처(居處)였던 어머니.

먼 곳을 보는듯한, 현실감 없는 몽롱한 눈동자의 어머니는 그때 전혀 내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딴 세상의 바람이었고 오리무중의 안개였다.

저 홀로 봄 꽃에 겨운 한 마리 나비였다.

 

그것은 내게 무시무시한 공포였으며 견딜수 없는 모멸감이었다

아아, 누가 나처럼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를 읽을수 있을꺼나

 

희곡의 한 대목.

에드먼드: (괴롭고 비참하게) 제일 받아들이기 힘든 건 엄마가 보이지 않는 벽에 둘러싸여 있는 거예요. 아니, 안개의 둑 뒤에 숨어서 헤매고 있다는게 더 맞겠네요. 일부러요. 정말 끔찍해! 엄마 내면의 무언가 때문에 일부러 그러고 있다는거, 아버지도 아시죠. 우리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가서, 우릴 지워버리고, 우리가 살아있다는 걸 잊어버리고 있어요! 사랑하면서도 우릴 증오하는 것 같다구요!

 

급기야 어머니는 부산의 시아버지(내 할아버지)에게로 소환되어 입원하였고, 정능의 내 홈 스위트 홈은 처절하고 파괴되어 버리고 말았다.

서울에서 학업중인 세 남매는 친척집으로 하숙집으로들 흩어졌다.

어머니를 향한 모멸감과 배신감과 부끄러움.

연민과 증오.

그런 감정은 필경은 죄의식이 되었다.

그 후부터 어머니 앞에서는 어딘가 모르게 나를 쭈볏거리게 하였던 것이다. (어머니 복권(復權)하여 할아버지의 병원을 이어받아 경영하게 된 그 후까지도.)

 

, 이제 어머니를 변증(辨證)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내 어머니는 감성의 결이 연하였지만, 그토록이나 나약한 분은 아니었다.

홀로 동경에 유학하여 의대를 졸업하여 의사로 살았던 분.

예술도 스포츠도 좋아하였고 음식과 옷 만들기등 손 솜씨도 대단히 뛰어났다.

그리고 부잣집 맏아들인 남편.

그는 경제학을 전공한 코뮤니스트였고 육이오 터지기 직전 예비검속의 바람을 피해 월북하였다.

그것은 바로 남편과 생사불명의 생이별이었던 것이다.

올망졸망 세 자식 거느린 마흔 줄의 과부 아닌 과부.

월북한 좌익의 아내.

방첩대로 어디로 끌려가 받았을 말못할 고초와 모욕. (그 무렵 연좌제는 얼마나 삼엄하였던지.)

세 자식의 장래도 암담함으로 엄습하였을 것이다.

정능에서 박의원이라는 동네병원을 운영하였던 어머니는 여기저기 빚을 끌어 2층으로 병원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병원은 뜻대로 경영되지 아니하였고 빚쟁이들의 성화는 빗발쳤다

그 무렵 부쩍 나약해 졌을 것이다, 어머니는.

진료실의 약장 문을 열어 모르핀병 고무 두껑에 주사바늘 찔러 넣었을 어머니.

어머니는 당신의 절망을, 그 고독을 찔러넣었던 것이다.

도망가고 싶은 당신의 현실을.

 

나는 그때 어머니의 삶의 자리’, 어머니의 현실을 결코 들여다 보지 않으려 하였다.

나는 오로지 공포와 배신감과 모멸감으로 허덕였을 뿐이다

 

어머니의 그 절망과 그 고독이 이제 조금은 보이는지.

예순넘은 아들놈은.

기억이여. 아픔이여. 슬픔이여.

봄하늘을 날아라. 나비야.

너의 몽롱한 비상(飛上)을 이제 사랑한다.

나는 기억과 화해하였고 기억은 나를 용서하였다.

 

'밤으로의 긴 여로'를 더듬는 초겨울의 새벽.

어머니가 그리워 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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