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안나 카레니나 前,後 (1,4,3,3)

카지모도 2019. 9. 25.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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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안나 카레니나> -前-

-톨스토이 作-

2012년 12월 31일 포스팅

 

 

1.

 

한해의 단락(段落).

겉사람은 후패할지라도

안사람, 내일 더욱 찬연하기를.

 

젊어 한때 나는 책 욕심이 승(勝)하였다.

월부 책장사(당시 흔한 직업)로부터 전집류(全集類)를 사들였다. (主로 어머니를 충동하여)

낱권마다 상자곽에 담겨있는 두꺼운 표지의 ‘호화 양장본(그때 전집류의 선전문구가 대개 그러하였다)'

아직 내 책장에는 헤밍웨이, 까뮈, 니체, 세익스피어, 토스토예프스키, 임어당, 톨스토이, 세계사상대계, 한국여류작가전집, 세계단편소설대계‘ 등등의 전집들이 먼지 뒤집어쓴채 꽂혀 있다.

반쯤이나 읽었을랑가, '언젠가는 숙독(熟讀)하리라'를 뇌이다가 삼사십년 세월만 흘렀다.

그러니까 승하였다는 책욕심이란 말하자면 ‘책껍데기 욕심’이 아니었나 싶기도하다.

졸부의 서가(書架)에 즐비한 금박(金箔) 번쩍이는 책들, 지적열등감이 불러온 공허한 과시와 무에 다를런지.

내 지적본질(知的本質)이라는게 이처럼 개기름 흐르는 허세의 꼬라지일 것이다.

부끄럽다.

 

톨스토이는 단행본으로 ‘참회록’과 ‘우화집’, 가지고 있는 전집으로는 ‘부활’과 ‘크로이체르 소나타’‘이반 일리이치의 죽음’ 정도를 읽었을 뿐이다.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는 영화로만 접하였다. <‘헨리 폰다’와 ‘오드리 헵번’이 출연한 ‘전쟁과 평화’, 그리고 ‘비비안 리’ ‘소피 마르소’가 주연한 ‘안나 카레니나’>

‘톨스토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얼마나 익숙한 이름인가.

문학사를 빛낸 대문호, 빼어난 문명비평가, 톨스토이즘이라는 하나의 사조를 창제한 불멸의 사상가, 위대한 기독교적 실천가, 지고한 도덕적 경지에 도달한 성자...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책 뒤에 있는 해설(解說)로부터 톨스토이의 연보(年譜)를 요약한다.

 

톨스토이는 1828년 8월 28일, 러시아 중앙부 '툴리스카야' 근처인 '냐스나야 폴라냐'에서 백작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 폴라냐는 톨스토이 문학의 풍토적 근원이었다.)

2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고 9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여 고모댁에서 성장하였다.

19살에 ‘대학은 학문의 장지(葬地)’라는 결론을 내리고 카잔대학 중퇴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 (합리적인 농장관리와 영지내의 농민생활 개선에 헌신하였으나 그의 이상주의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23살까지 3-4년간, 술과 여자와 도박등 향락에 빠진 전형적 도회 귀족의 바람둥이 생활을 하였다. (그의 내면은 이러한 방탕생활에 줄곧 저항하고 있으면서)

23살 때 군대에 입대하여 카프카스에서 사관후보생으로 복무하였다. (카프카스의 아름다운 자연에 파묻혀 이 때부터 문학에 열정을 기울였다.)

28살-33살,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야스나야 폴라냐와 외국을 전전하며 생활하였다. (특히 서유럽 여행에서 유럽의 부르주아 문명의 이기성과 물질주의에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34살 때 궁전시의(侍醫) 베르스의 딸 '소피아'와 결혼하여 자신의 영지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아내를 사랑하였고 이 무렵이 톨스토이에게는 완전한 행복과 찬란한 희망을 품고 편안한 생활 즐긴 시절이었다고 한다.)

36살-41살 사이 대하소설 ‘전쟁과 평화’를 집필 하였다. (이 소설을 발표하였을 때 ‘일리아드’에 견줄 유럽 근대문학 최대 걸작이라는 평판을 받았다. ‘전쟁과 평화’는 1805년 제1차 나폴레옹 전쟁 직전부터 15년 동안에 걸친 러시아 역사의 중요시기를 그린, ‘알렉산드로 1세’와 ‘나폴레옹’이라는 러시아와 프랑스의 두 황제를 비롯하여 수많은 역사상의 실재인물과 작가가 창조한 인물이 어우러진 웅대한 규모의 소설이었다. 재래의 장편소설 스타일을 깨고 역사소설과 가정소설, 역사비평과 전쟁철학을 소설 속에서 시도한 전례없는 장대한 문학형식을 창조하였던 것이다.)

43살-47살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집필하여 톨스토이는 세계적 대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톨스토이는 이 무렵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의 무상’에 잠겨 극심한 정신적 동요를 일으켜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53살 ‘참회록’ 발표하여 자신이 겪었던 심적투쟁을 고백하였다.

그 후부터 그의 문학활동은 주로 종교적 정신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톨스토이는 ‘오로지 선을 추구하고 촉진시키는 작품만이 참다운 예술’이라고 주장, 마침내 ‘소설 무용론’으로까지 발전하여 자신의 작품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스스로 허위의 예술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였다.

예술가로서의 톨스토이를 위압(威壓)한 것은 신에 대한 관심과 종교적인 생각들이었다.

그는 교회의 일체의 권위와 형식을 부정하고 모든 과학적인 발전에 회의를 갖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대중의 원시적인 신앙에 주목하여 농민의 마음 속에서 진리를 찾고자 하였다.

원시 그리스도교를 지향하여 무저항주의를 지상명령으로 보고 어떤 형식의 폭력도 비난했다.

그 교의(敎義)의 또 하나의 특징은 그 보편성에 있었는데, 기독교, 불교, 공자, 유대교등 모든 종교를 연구하고 모든 종교의 근본적인 진리에 합치하는 보편적 종교를 만들려고 하였다. (러시아 정교회만을 신앙하였던 ‘토스토예프스키’와는 판이하게 달랐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종교와 도덕과 교육에 관한 수많은 논문들을 쓰기 시작하였다.

빈민굴을 시찰하고 사회조직의 결함에 깊이 사색하여 그의 사상적 번민은 종교적 윤리적 문제에서 사회제도에 까지 미치게 되었다.

57살 무렵, 사유재산을 부정하려는 ‘톨스토이’와 그의 아내 ‘소피아’의 충돌이 있었고, 일체의 저작권은 소피아가 관리하게 되었다.

71살에 ‘부활’을 발표하였다.

‘부활‘은 톨스토이의 사상을 이해에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톨스토이즘’이 탄생하여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다.

톨스토이는 ‘부활’이 그리스정교에 대해 비판을 가하였다는 이유로 1901년 종무원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저작권 문제로 부부간 갈등이 심하여졌다.

1910년 10월 28일 그는 막내딸과 주치의와 함께 방랑길에 올랐다.

아스타포브(현 톨스토이 역)의 역장 관사에서 1910년 11월 7일 아침에 운명하였다.

향년 여든두살이었다.

 

2.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만큼은 아니지만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도 악처의 반열에 올라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여성이다.

영화 한편을 권한다.

‘톨스토이 마지막 생애 (The Last Station)’라는 제목의 ‘톨스토이’와 ‘소피아’의 사랑과 갈등을 그린 영화.

‘제이 파리니’가 쓴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을 영화화한 것이라는데 ‘사운드 오브 뮤직’의 트랩 대령역의 ‘크리스토퍼 플러머’와 ‘퀸’에서 오스카 주연상을 받은 ‘헬렌 밀렌’이 주연하였다.

영화에서, ‘톨스토이즘’의 교주(敎主)로 추앙받는 ‘톨스토이’가 아닌, 남편 ‘톨스토이’라는 한 남자를 지극히 사랑한 아내 ‘소피아’는 악처가 아니었다. (사실이 그러했을 것이라고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톨스토이 ‘부부’, 아니 ‘소피아’와 같은 아내가 참 부러웠기 때문이었다.)

‘안나 카레니나’의 뉘에게서 ‘톨스토이’와 ‘소피아’의 면모를 엿볼수 있을꺼나.

생각건대 ‘레빈’과 ‘키치’가 아닐까.

 

자잘한 옛 활자로 천페이지가 넘는 ‘안나 카레니나’

그러나 소설의 분량에 비하여 플롯은 심플한 편이다.

세 쌍의 부부(夫婦)를 병치(竝置)하여 전개되는 비교적 단선적인 이야기다.

세 쌍의 부부 (풀네임 러시아어는 어려워 약칭으로)

‘안나’와 ‘알렉세이’부부와 안나의 정부 ‘브론스키’

‘레빈’과 ‘키치’

‘오블론스키’와 ‘둘리’

‘안나’가 타이틀 롤(title role)이고 ‘안나’의 ‘불륜과 죽음’이라는 주제가 서사(敍事)의 중심 모티프임은 분명하지만, 내게는 ‘레빈’이라는 존재가 무겁게 느껴졌다.

안나의 죽음 후에도 그 죽음과 관계없는 ‘레빈’의 사유(思惟)가 한참이나 이어진다.

‘안나 카레니나’는 읽는 사람의 관심에 따라서 여러 측면에서 어프로치할수 있는 복합적인 요소가 강한 소설이 아닐까.

 

소설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행복한 가정마다 모두 서로 비슷하지만, 그렇지 못한 가정은 가정 나름대로의 불행이 있는 법이다.>

소설의 방향을 함축적으로 예시(豫示)하는 꽤 유명한 문장으로 회자(膾炙)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이 부분에서 이런 문장이 떠올려졌다.

<독신인 남자가 재산깨나 좀 있을 경우에는 같이 지낼 아내가 필요할 것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진리인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사적(私的)이고 여성적인 스케일의 소설 ‘오만과 편견’(제인 오스틴) 모두(冒頭)의 문장이다.

톨스토이와 같은 대작가를 영국의 자그마한 규수(閨秀)작가와 비유한다는게 가당할까마는, 내게는 '안나 카레니나'가 정일(靜逸)하게 짜여진 가정소설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3.

 

‘톨스토이’는 젊고 아름다운 유부녀의 불륜(不倫)과 파멸을 중심축으로 하여 1870년대 당시 러시아 귀족사회와 사회모습들을 유려한 필치로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었다.

톨스토이에 대하여 대문호나 대사상가라는 선입견은 일단 차치(且置)하기로 하고, 참 재미있게 읽었다. (세밑 아닌 느긋함이었다면 더욱)

‘안나 카레니나’는 소설적으로 정교하고 치밀하였다.

인물과 풍광과 상황과 사건에 대한 탁월한 묘사.

노련한 심리묘사로 작중인물의 캐릭터는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크의 도회적 풍광, 상류층 사교계의 풍속, 러시아 농촌의 정경, 농촌에서의 귀천(貴賤) 간의 삶의 모습 같은 것들이 리얼하게 소설 속에 녹아 있었다. (톨스토이 스스로 실제로 겪고 체험하고 느꼈을 터)

에피소드의 적절한 배치로 사건들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독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톨스토이는 그 사상적 스케일 전에, 그 정치(精緻)함으로 이미 뛰어난 소설가임이 여실하였다.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가 예술가로서 가장 원숙한 시기에 집필한 걸작’이고, ‘예술적 완성도에서 첫 번째로 꼽는 작품’이라는 세평(世評)이 무색치 않다.

책 뒤편의 해설을 보니,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평가가 과연 요란하다.

“완벽한 작품, 현대 유럽 문학중 비견할만한 것이 없다”고 당대(當代)의 ‘토스토예프스키’가 말하였다.

“전체의 구성에서부터 세부적인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지나친 점이 전혀 없는 작품”이라고 후대(後代) ‘토마스 만’은 말하였다고 한다.

“소설 속에서 ‘레빈’의 입을 통하여 이 반세기에 있어서의 러시아의 전환점이 어디에 있는지 매우 분명하게 표현한 소설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러시아 혁명의 거울이다.”

이것은 ‘레닌’의 말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레닌’은 소설의 행간에서 변증법적 역사발전의 어떤 필연성을 보았을 터이다. (1917년 10월 볼세비키 혁명에 ‘안나 카레니나’는 어느 만큼 녹아 있었을까.)

앞서 내가 ‘안나 카레니나’는 읽는 이에 따라 복합적인 요소가 있는 소설이라고 한 소이(所以)가 여기에 있다. <예전 책부족에서도 토론한 바 있지만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같은 소설에 있어서도, 당시 영국 빅토리아조의 배경을 도외시(度外視)하고는 재미도 떨어질뿐 더러 이해하기도 힘든 대목도 적지 않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당시 러시아 사회의 현실을 여러 측면에서 포착하여 소설의 배경과 재재(製材)로 삼았다.

 

해설에서 베껴 쓴다.

<러시아의 1870년대는 알렉산드로 2세에 의한 농노제 폐지(1861년)로 인해 낮은 기술 수준의 농업 경제에 의존했던 상류 귀족계급의 급속한 몰락과 함께 러시아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달을 가져온 시기였다. 1860년대에서 1870년대 초기까지 붐을 일으킨 철도 건설은 운반 수단의 확대에 의한 공업화의 급진전과 상품의 원활한 유통으로 러시아 자본주의 발달에 크게 이바지했다. 당시 러시아는 봉건적 농노제도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이행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로 혼란스러웠고 지배층과 국민대중의 이해와 갈등이 첨예화되어 있었다.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은 궁핍한 삼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진보적 문학인들은 사화적인 재변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고 구세계의 붕괴 및 사회정의의 실현이 가까이 도래하리라는 믿음을 지니게 되었다. 작가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당시 사회의 관심거리였던 이러한 많은 문제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였으며, 아울러 결혼과 가족의 문제, 귀족계급의 도덕 문제, 신흥 부르주아의 대두에 따른 귀족의 몰락, 형식에만 사로잡혀 있는 교회, 세르비아 전쟁을 둘러 싼 이웃 사랑과 애국심의 문제등 실로 갖가지 문제를 다루었다.>

 

톨스토이는 ‘안나’와 ‘블론스키’의 불륜적 사랑에 대하여는 비극적 결말로 징벌하였지만 ‘안나’의 그 파토스적 사랑을 향하여 ‘부도덕’으로 매도하는 사교계를 또한 경멸하였다.

‘안나’가 자살한 후 절망한 ‘블론스키’가 사재를 들여 편성한 의용군을 이끌고 세르비아 전쟁으로 출정하는 ‘블론스키’의 영웅적 행동(애국자라고 찬사받는)의 순애보에 대하여도 그 경박성을 ‘레진’의 입을 통하여 폄훼한다.

[좋다 나쁘다하는 것은 결국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당신이 당신의 앞마당에 정원을 만들려고 한다면 막상 측량을 해보니 마침 그 자리에 몇 백년 묵은 고목이 서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그때 당신은 가령 그 고목이 구부러진 노목이라고 할지라도 설마 작은 화단을 만들기 위하여 그 고목을 잘라버리지 않겠지요. 오히려 그 고목을 살리기 위해서 화단의 계획을 다시 세우려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등장인물의 입을 통하여, 기득권 세력의 입장도 얘기해 주고 있는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 스스로 혼돈스러운 명제들이 가득 제시되어 있는 느낌이다.

느끼건대 '안나 카레리나'는 톨스토이의 내적 방황과 혼돈을 대변해준다는 측면도 간과할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다음과 같은 고백이 어쩌면 이해될 듯도 하다.

<나는 지루하고 비속한 안나 카레니나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작품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 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계속-

 

 

<안나 카레니나> -後-

 

4.

 

‘안나’는 스무살 연상의 고위직 관리인 남편을 존경하고 어린 아들을 사랑하는 현모양처.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에서는 여왕과 같은 존재로 미모와 교양을 갖춘 귀부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여행길에서 만난 청년장교 브론스키에게 속절없이 빠져 버리고 말았다.

브론스키를 만나고 난 후 안나의 눈에는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저 이의 귀는 왜 저렇게 생겼을까? 머리를 너무 짧게 깎아서 그렇게 보이는 걸까?]

그동안 멀쩡하게 보이던 남편의 귀까지도 이상스럽게 보였다.

브론스키는 부유한 귀족에다 미남이고 행동주의자의 면모를 갖춘, 이를테면 터프가이 스타일.

명예를 존중하는 사내다운 사람이었지만 지적이거나 내면적인 남자는 아니었다.

안나에게 첫눈에 반한 브론스키가 먼저 유혹한 것이긴하지만, 첫 만남 후 얼마 되지 않아 안나가 임신을 고백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사랑은 폭풍(暴風)과 같았을게다.

어쩌면 안나의 무의식 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분방한 기질이 화산처럼 분출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성으로서는 제어할 수 없는 성적(性的) 파토스의 폭발이었다. <전에 읽었던 톨스토이의 ‘크로이체르 소나타’가 떠올랐다. 사랑의 본질이란 결국 불같이 이는 성욕이 본질이다. 때로 아름답고 때로 추악한.>

브론스키와의 사랑으로 안나의 모든 것이 변하였다.

그토록이나 사랑하는 어린 아들을 남편에게 양보하면서까지 기꺼이 자신의 모든 걸 포기한다.

그들은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와 이탈리아와 중앙아시아 브론스키의 영지(領地)를 전전하면서 사랑을 불태운다.

남편과 아이와 사회적 지위를 버리고 사교계에서마저도 배척 당하게 된 안나.

이제 그녀는 오로지 브론스키의 사랑에 기댈 수 밖에 없다.

근거없는 질투와 히스테리.

브론스키를 향한 안나의 이기적인 독점욕은 날로 더하여 가고 브론스키의 사랑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브론스키로서는 점점 사회생활의 제약을 느끼고 안나에 대한 부담감은 가중된다.

사소한 일로 말다툼이 벌어지고 그때마다 열렬한 포옹과 광적인 애무로 위기를 넘기지만 다음날이 되면 역시 똑같은 일이 되풀이 된다.

["아니 이젠 더 이상 못 참겠소!" 그는 이렇게 외치며 안나의 손을 홱 뿌리쳤다. ‘이 사람은 날 증오하고 있어. 틀림 없어’ 하고 안나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어. 확실해.']

[나에게는 애정이 필요해. 그런데 그게 없어. 이젠 모두 끝났어. 그러니까 끝을 내야 해. 허지만 어떻게 끝을 내지?]

[아아! 그 이와 화해할 수 있을까. 화해가 가능할까. 이 사랑이 파경에 이른다면 친지들은 뭐라고 할까. 카레닌(남편)은 이런 나를 어떤 눈빛으로 바라볼까]

[왜 나는 죽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 죽는 일이다. 카레닌과 세료쟈(아들)가 당한 치욕이나 불명예도 나의 지독한 수치도... 무엇이나 다 이 죽음에 의해서 구원되는 것이다. 그러면 브론스키도 후회를 하고 나를 불쌍하게 생각해 사랑해 줄 것이다. 나의 죽음으로 인해 괴로워할게 틀림없어]

 

안나의 자살은 이미 소설의 초입부 <모스크바 역에서의 어떤 사람의 기차사고>에서 이미 은유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실제 안나의 죽음은 지극히 충동적인 것이었다.

느끼건대 그 또한 안나의 기질적인 파토스의 발현이 아니겠는가.

[안나는 다가오는 두번째 차량의 바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침내 바퀴 사이의 중간 부분이 눈 앞에 들어왔을 때, 안나는 빨간 손가방을 내던지고 두 어깨 사이에다 머리를 틀어박고 두 손을 짚고 열차 밑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마치 곧 일어날 준비를 하는 것처럼 가벼운 동작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안나는 자기가 한 짓에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어디에 있는걸까?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했을까? 안나는 몸을 일으켜 뒤쪽으로 물러서려고 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사정없이 안나의 머리를 쾅하고 때리고 그녀의 등을 할퀴며 질질 끌고 갔다. ‘하나님, 저를 용서하시옵소서’ 안나는 자기의 저항이 소용없는 것임을 깨닫고 재빨리 중얼거렸다. 몸집이 작은 한 농부가 부대 위로 몸을 굽히고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면서 일을 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안나에게 불안과 기만과 비애와 사악으로 가득 찬 책을 읽게 해 주던 한 자루의 촛불과 어느 때보다도 밝게 타올라 지금까지 어둠 속에 묻혀 있던 모든 것을 비추다가 어느새 피식 소리를 내며 어두워 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영원히 꺼져 버렸다]

안나’가 자살한 후 ‘블론스키’는 절망하였다.<안나가 바랐던 바가 바로 이거였던가>.

브론스키는 사재를 들여 편성한 의용군을 이끌고 세르비아 전장(戰場)으로 출정하였다.

이혼을 안해 줄뿐, 속수무책으로 아내의 부정(不貞)을 방관할 수밖에 없는, 이를테면 오쟁이 진 안나의 남편 ‘알렉세이’.

그는 세속적인 명리(名利)에만 집착하는 속물이고 거짓된 생활에 길들여 진, 스스로에게 까지 위선적인 사나이다.

내가 느끼던대, 알렉세이는 기독교인의 너그러운 감정으로 위장하여 희생자(犧牲者)로서의 가련함을 스스로 즐기는 듯한 인상이었다.

 

‘레빈’과 ‘키치’

브론스키를 짝사랑하였던 ‘키치’와 키치를 짝사랑하였던 ‘레빈’은 우여곡절 끝에 부부가 되었다.

‘레빈’은 브론스키와 대비되는, 도시를 싫어하여 시골에서 정직하고 건강한 삶을 영위하면서 이상(理想)을 꿈꾸는 내면적인 사람이다.

키치는 예쁘고 영리한 여성, 과거 브론스키를 짝사랑하였던 것은 일순간의 미망(迷妄)이었다.

레빈과 키치는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고 존경하는, 이들의 부부생활은 성공적인 것이었다.

부부는 ‘레빈’의 영지(領地)에 정주(定住)하여 농업경영에 정열을 기울여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한다. <가끔 형이상학적 고뇌에 빠지곤 하는게 탈이었지만>

 

또 한 부부.

안나의 오빠인 ‘오블론스키’와 키치의 언니인 ‘둘리’

‘오블론스키’는 좋은게 좋은, 한마디로 호인(好人)이다.

아내 몰래 슬쩍슬쩍 바람을 피워 가면서 인생을 즐긴다. <나중 빚더미에 올라 안더라도>

[“재미있으면 가선 안된다는 법도 없지. 조금도 뒤탈이 생기지 않으면. 난 그저 재미를 좀 볼 뿐이니까 말이야...자기 자신을 스스로 속박할 필요는 없는 거야”]

‘둘리’는 결혼생활에 절망하면서도 자식새끼들 때문에 체념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이웃의 여늬 여편네에 다름 아니다.

[“나는 한시도 마음 놓을 틈 없이 임신하거나 아이들을 키우거나 하면서 일년 내내 화를 내어 투덜투덜 잔소리를 늘어 놓아 나 자신도 괴로워하고 남도 괴롭히며 남편에게도 미움을 사면서 일생을 지내고 있다...그래서 내 일생은 엉망진창이 돼 버리는거야”]

 

우리에게 내재된 파토스는 악이고 로고스는 선인가.

‘안나 카레니나’는 어떤 면에서 인생에 충실한 소설이다.

실제 인생의 한 단면을 보는 듯도 하였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결혼이란 무엇인가. 부부란 무엇인가.

그 본질은 성(性)인가, 윤리인가.

어쩌면 하늘의 뜻은 사람에게 그리고 인문(人文)에 내재되어 있을 것이다.

"순천자(順天者)는 흥(興)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하리로다."

역사를 통찰한 사마천의 말이라던가.

톨스토이도 필경 이렇게 말했으리라.

 

5.

 

문학은 학문적 연구의 결과물이 아니다.

철학(哲學)등 인문학이나 자연과학의 논문(論文)은 결코 문학이 될 수 없다.

작가의 인생관과 세계관은 작품에 용해(溶解)되어 있고, 작가의 사상이나 생각들은 작품에 <문학적>으로 구현(具顯)되어 있는 것이다.

문학이 소구(訴求)코자 하는 대상은 독자의 정서(情緖)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지만)

정서란 모방으로 습득되거나 학습으로 만들어지는게 아니라, 인간성에 내재된 감정영역(感情領域)에 속한 추상의 것이다.

작가의 사상적 논리가 생경하게(비예술적으로) 노정(露呈)되어 있다면 그것을 껄끄러워 하는 정서(情緖)는 그 작품에 대하여 문학성이 떨어진다고 혀를 찰 것이다.

그러면 우선 책읽기가 재미가 없어진다.

일일이 논리를 따져 결론을 유추해 가면서 책을 읽어 보라.

책읽기가 재미로울지. (으흠, 추리소설중 그런 재미도 없지 않지만)

사람의 정서나 기분은 확연하게 설명할수 없는 것이다.

문학이 소구(訴求)하여 우리의 정서에 접수되는 바 그 논리성이 몽롱하면 좀 어떤가.

막연하게나마 감동이 있으면 족하다.

그 막연한 느낌 속에서 무언가 명제를 나름 도출할수 있다면 더 할 나위 없다.

그 명제로서 비약하여 나름대로 비틀고 주물러 무언가 상상의 그림을 만들어 보는 건 엿장수 마음대로.

그것은 독자의 권리이며, 더불어 하나의 독서에서 유발된 또 다른 창조의 즐거움이기도 할 터이다.

 

6.

 

‘안나’의 죽음은 사회 환경적 희생이 아니라 자신의 파토스에 의하여 파멸한 것이지만 톨스토이는 ‘레빈’을 통하여 갖가지 사회적 철학적 명제를 제시하고 있다.

‘지문(地文)’과 ‘대화와 토론’과 레빈이 ‘사유(思惟)’하는 문장으로서.

[레빈은 하인과 문지기의 제복을 장만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백루불짜리 지폐를 헐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런 식의 제복은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고 넌지시 암시했을 때 공작 부인과 키치가 놀라던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아무래도 없어서는 안 되는 모양인 여름 제복은 여름철의 노동자 두 명 몫의 품삯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부활절 주간에 사순절이 시작될 때까지의 약 300일을 일한 중노동의 대가와 맞먹는 것인데...]

 

양극화(兩極化)의 문제는 언제나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어쩌면 대부분 문학의 주제는 불평등 불공정 부당함등, 확대하여 보면 양극화의 문제로 취급하여도 무방할듯.>

언젠가, 노동강도를 따져 볼 때 ‘기장(機長)’의 봉급이 ‘스튜어드(남자승무원)’의 두 배 이상이라는 것은 부당하다고 진보 쪽 인사 뉜가 투덜댄 적 있었다고 기억하는데, 이런 것에다 양극화를 갖다 대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노동강도’만 따질 터인가. 오랜 노력을 기울인 습득과정과 업무의 중요성과 책임성등 직책과 직무에 내재된 가치는? '스튜어드의 실수는 쏟아진 커피로 승객의 옷을 버리지만 기장의 실수는 엄청난 인명 재산의 손실을 가겨온다'고 당시 어떤 논설에서 읽은 어렴풋한 기억도 있다.

쪽방촌 할머니와 룸살롱에서 술값 몇백만원 호기롭게 뿌리는 부잣집 아들, 이런게 양극화다.

문학적 아웃풋은 빈약할지라도 사람 끌어 모으는 기막힌 재주 하나 지대하여 공적(公的)으로 몇십억 지원받는 소설가 아무개님과 문학적 아웃풋은 풍요롭지만 지지리 가난한 시인 아무개님.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함민복->

예술을 빙자하여(진정한 예술적가치 따위는 아랑곳 없이) 정파적 이기주의나 정치적 상업성에 오로지하는 정책적 행태들, 나는 이런 것도 암묵적으로 조장되고 있는 이 나라의 왜곡된 문화적 양극화라고 생각한다.

보혁(保革)의 입장 여하를 막론하고 말이다.

 

[농민의 지위를 자본 임금 지대(地代)라는 세가지 관점에 기반하여 메트로프가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대체 어떤 점에서 러시아 농민의 특질을 인정하고 계십니까? 이를테면 그 동물학적 특성에서입니까 아니면 그들이 처해있는 조건에서입니까?” 레빈이 말하였다 “토지의 개념에 있어서 러시아 농민은 다른 나라 국민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토지 문제.

나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조지 헨리’의 이름을 접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하였다.

정말 뜻밖이었다.

조지 헨리는 톨스토이보다 10년 뒤에 태어 난 미국의 경제학자, 그의 책 ‘진보와 빈곤’은 토지공개념을 얘기할 적에 가장 먼저 거론되는 책이다.

<검색하여 보니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를 집필 할 때에는 ‘진보와 빈곤’은 출판되지 않았던데>

책으로 출판되기 전 벌써 조지 헨리의 이론을 어떤 경로로 톨스토이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미 고전경제학파의 잉여지대설이나 마르크스의 절대지대설을 숙지(熟知)하고 있었을 것이다. <부동산학을 공부한 덕에 나도 쬐끔 알고 있는바>

얼마나 토지소유 문제에 관한 톨스토이의 천착(穿鑿)이 있었던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나는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나는 내가 이 세상에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를 알지 못하고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야 살아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 나는 그것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가장 깊게 사유한 것은 바로 종교적 명제였다.

인생에 대한 허무, 살아있음의 절망감, 형의 죽음으로 인하여 ‘레빈’은 심각한 고뇌에 빠져 버렸다.

사랑하는 아내 키치가 곁에 있었지만 레빈은 이 절대적 명제 앞에 서서 자신의 무력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레빈은 자주 자살의 유혹에 빠진다.

[그리하여 행복한 한 가정의 주인이요, 건강한 인간의 한 사람인 레빈도 여러 번 자살의 문턱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목을 매달기 두려워 끈 같은 것을 숨기기도 하고, 권총 자살을 두려워한 나머지 총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무서워하게 되었다.]

차츰 그의 관심은 신의 문제로 옮아 간다.

[사람은 대체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신은 존재하는가.]

[죽음..유기체의 파괴..물질의 영원성..에너지 보존의 법칙..진화론.. 이러한 유물론적 단어들은 이전의 그의 신앙과 대치되는 말이었다.]

[이와 같은 말과 그 개념은 지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아주 좋은 것이었다. 허지만 인생을 위해서는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했다.]

 

레빈은 속으로 중얼거린다

[무한한 시간 속에, 무한한 물질 속에, 무한한 공간 속에, 물거품같은 하나의 유기체가 창조되었다. 그 물거품은 잠시 그대로 있다가 마침내는 사라져 버린다. 그 물거품이 다름 아닌 ‘나’인 것이다.]

괴로움과 번민에 잠긴 레빈은 유물론자에게서는 해답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다시 형이상학적 철학서적을 탐독한다.

플라톤, 스피노자, 칸트, 셀링, 헤겔, 쇼펜하워... 그러나 레빈은 여기에서도 만족하지 못하였다.

[영혼이니, 의지니 자유니 하는 그런 애매모호한 말의 따분할 정도의 장황한 정의.... 언어의 함정은 아닌가.]

이 회의(懷疑)라는 사악한 힘으로부터 빠져 나오려고 필사적인 레빈.

레빈은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어느 때 부터인가 그의 눈에는 자연에 순응하고 소박하게 삶을 영위하는 농민들이 들어 오고 있었다.

[아, 이들은 삶과 죽음과 신(神)에 대하여 회의하는가. 아니로구나. 그들은 나와 같은 의문 따위는 조금도 품고 있지 아니 하구나. 그냥 정직한 마음으로 신의 뜻에 따라 살아가고 있구나.]

[이전에 모든 사람을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러시아를 위해서, 마을을 위해서 무언가 도움이 되는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했을 때에는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확신이 사라졌다.]

[그리하여 그는 나라는 존재는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잘 알지도 못한채, 아니 그것을 알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은채 그 무지를 가지고 번민한 나머지 자살을 두려워 하게 된 상황에 빠지면서도, 그와 동시에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을 자기 툭유의 일정한 길로 착실하게 개척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

[그뿐 아니라 자신이 지금까지 신념이라고 믿고 있던 것은 단순히 무지일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알게 되는 것을 용납지 않는 사고방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그 의문은 ‘만약 내가 나 자신의 생명에 대한 문제에서 기독교가 주장하고 있는 해답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는 도대체 어떤 것을 인정하고 있는 걸까.’]

[‘저 푸른 하늘이 무한한 공간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하늘은 옛날 사람들이 말했듯이 둥그런 천장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보아도 둥그런 천장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천체의 무한한 공간을 인식하고 있다. 그렇지만 내가 하늘을 푸르고 단단하며 둥그런 천장이라고 말해도 그건 틀린 말이 아니다.인간은 무리하게 무한한 공간을 보려고 애쓰기 보다는 차라리 아름다운 둥근 천장을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것을 신앙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이성의 지배에 의해서 이웃사람을 사랑한다는 진리에 도달한 것인가. 아니다. 내 영혼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성은 아니다. 이성이 발견한 것은 생존경쟁으로ㅡ 나의 욕망을 채우는데 방해를 하는 사람은 누구나 목을 졸라 죽여 버리라고 요구하는 법칙이 아닌가. 남을 사랑하라는 법칙을 이성이 발견할 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건 불합리한 것이니까. 그렇다. 오만이다. 아니, 지혜의 오만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우둔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기만이다. 다름 아닌 지혜의기만이다, 아니 지혜의 속임수다.]

[내 마음 속에는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지식이 틀림없이 계시되어 있는데, 나는 아직까지 그 지식을 이성과 언어로 표현하려 하고 있었구나.]

 

신앙.

[아아, 하나님 당신에게 감사합니다 ! 그는 북받쳐 오르는 흐느낌을 참고 넘쳐 흐르는 눈물을 두 손으로 닦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레빈은 이제 확고하게 더 성실한 생활인으로서의 자기 일에 함몰하려 노력하였다.

[농사일, 농민이나 이웃사람들과의 관계, 가정, 그의 손으로 돌보아야 하는 처형이나 동서의 문제, 아내와 친척들과의 관계, 갓난 아기를 위한 배려, 이번 봄부터 부쩍 늘기 시작한 새로운 양봉업등이 그의 시간을 전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제 그는 마치 ‘쟁기’와도 같이 자신의 의지에 반하면서도 점점 더 깊이 대지로 파고 드는 것이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그렇게 해 온 것처럼 가족을 위해서 살아 간다는 것도 결국 그들과 똑같은 교양 속에서 생활하고 그들과 똑같은 조건에서 아이들을 양육하는 일을 의심 할 나위없이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먹고 싶을 때 식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

[사색은 의문에 대한 해답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 해답을 찾게 해 준 것은 생활 그 자체였으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냐 하는것 역시고 나 자신의 지식 속에 이미 계시되었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러한 지식은 내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서(사색고 같은) 얻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다름없이 내게 주어진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대미(大尾)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것이 신앙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감정은 역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고뇌와 함께 내 영혼 속에 스며 들어와 그 곳에서 힘차게 뿌리를 내리고 말 것이다. 앞으로 나는 변함없이 마부 이반에게 화를 내기도 할 것이고,여전히 토론을 하거나 이치에 맞지도 않는 내 사상을 주장하기도 할 것이다. 아니, 전과 변함없이 내 성스러운 영혼과 다른 사람 사의 영혼 사이에는, 설령 그것이 아내의 영혼이라 할지라도 분명히 벽은 있을 것이다.그리하여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이 가진 공포로 인하여 아내를 힐난하기도 하고 금세 그것을 후회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나 여전히 자신이 무슨 이유로 모른 채 계속해서 기도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의 생활 전체는 내게 무슨 일이 발생하더라도 그것과 아무런 연관없이 그 한 순간이 이전에 느꼈던 것과 같이 무의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의심할 여지없이 선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내 자신의 생활 속에 부여 할수 있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이 명작에 대하여, 나 따위, 무에 부언할 말 있을런가.

이만 그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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