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2010년 1월 단상 (1,4,3,3)

카지모도 2019. 9. 25.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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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2010년 1월 단상>

 

***동우***

2010년 1월 18일

 

1.

 

바베트의 만찬 (Babette's Feast)

제작년도 : 1987년

감독 : 가브리엘 엑셀스테판

출연 : 오드랑(바베트), 버짓 페더스피엘(마티나), 보딜 카이어(필리파)

 

덴마크의 작은 마을.

굳건한 신앙과 금욕과 헌신으로 살아가는 늙은 두 자매.

젊은이들이 떠나버린 마을의 노인들은 돈독한 신앙생활에도 불구하고 서로 헐뜯고 할퀴어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어느 폭풍우 치는 밤, 프랑스 혁명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고 간신히 목숨만 건져 두 자매의 집을 찾아 온 바베트.

두 자매와 함께 살면서 성실한 하녀가 된 바베트.

바베트는 파리의 최고급 식당 엉글레 카페의 수석 요리사였다.

 

1만 프랑의 복권에 당첨된 바베트.

두 자매의 돌아가신 아버지인 목사님의 100번째 생일 만찬을 제안하는 바베트.

12명의 마을 노인들을 초대하여.

“프랑스요리를 만들고 싶어요. 이번 한번만요. 정식 프랑스요리로요.”

먹는 것으로 감동을 느껴본 적 없는 두 자매는 그 만찬이 마녀의 집회가 될 것만 같아 두렵다.

바베트는 화려한 은식기와 도자기, 메추라기와 바다거북 등 온갖 식재료와 와인을 장만하는 데 그 돈을 아낌없이 쓴다.

정찬(正餐)의 프랑스 요리,

이토록 사치스러운 음식을 먹으면 지옥에 던져질 것이라며 곤혹스러운 두 자매.

아름다운 음식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조심스럽게 맛을 보는 노인들.

시나브로 경직된 얼굴이 풀어지면서 미소가 번진다.

이윽고는 환희로움과 행복한 표정, 먹는다는 것의 기쁨이 차오른다.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을 나눈다.

바베트 역시 기쁨이 가득하다.

음식은 먹는 사람보다 요리하여 대접하는 사람에게 더 큰 행복감을 준다는 사실…

 

두 자매는 바베트에게 감사한다.

“일만 프랑을 모두 다 써버렸죠.”

“그 돈을 몽땅 우리를 위해 써버리면 어떡해? 이제는 계속 가난하게 살아야 하잖아?”

“예술가는 가난하지 않아요. 자신이 최선을 다하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죠.”

정찬이 끝나고 바닷가에 모인 마을 사람들, 손을 맞잡고 할렐루야를 부른다.

으흠, 맛있는 음식은 예술이다.

신앙보다 강한.

 

2.

 

2010년1월 토요일.

부산역 앞에서 전세버스에 오른다.

형과 나란히 앉아 창원으로.

불경기일지라도 대형 교회는 붐빈다.

고종사촌동생 성호 아들이 오랜 연애 끝에 혼인을 한다.

성호는 본과 4학년 예비의사 며느리를 맞았다.

성호 아들 턱시도 모습이 멋지구나.

몇 년만, 어쩌면 몇십년만인가.

성호의 형제들. 정자누나와 의호형과 애경이.

그리고 친동생과 같았던, 사촌여동생 주희.

주희도 어느덧 쉰아홉이란다.

 

모두 늙었다. 쑥스럽게 혹은 자랑스럽게 그렇게들 늙었다.

‘왜 이렇게 늙었어요?’는 옳은 인사법이 아니다. ‘우리 이제 늙었구려’가 옳은 인사법이다.

주름진 얼굴은 변장이 아니다. 분장도 아니다. 한올한올 그렇게 늙어갔을 뿐이다.

기인 세월 살아냈지 않은가.

훈장처럼 서로 자랑하고 서로 축복해도 무방하다.

켄터키 옛집, 유년의 여름.

마루를 구르며 노는 어린 것은 세상을 모르고노나.

 

주희에게서 5년전 함안댁 사망한 소식을 듣는다.

오래전 보생의원의 대식구에게 그토록 선의 가득한 노동을 베풀었던 함안댁과 애순이.

안방의 아랫목에 길게 누워있던 고양이 ‘아나’를 부르는 목소리.

주희는 애순이를 몹시 그리워 한다.

아아, 애순이. 큰 눈망울, 이미자의 노래를 간드러지게 불렀던 애순이..

뒤늦게 세상을 좀 알았을 때는 필경 사랑하는 내 누이였던 애순이.

주희야. 나도 그 누이가 그립다. 가슴 시리게 보고 싶다.

늙을수록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는 건 젊었을 적의 꿈일 뿐이다.

식은 재를 뒤져 살려 낸 빠알간 불씨 하나, 서늘하게 시린 그것. 그것만이 아름다울 뿐.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옛날 직장생활의 시험실.

강철의 인장시험.

일정한 규격으로 가공한 강편(鋼片)의 양끝을 시험기에 물려 서로 반대쪽으로 당긴다.

어느 지점까지는 잡아당겨 늘리더라도 원상태로 복구하려는 힘인 응력이 작용한다.

그러나 탄성한도를 지나면 응력은 없어지고 늘어난 변형은 그대로 고착되고 만다.

이것을 항복점(降伏點)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항복하는 지점이다.

이를테면 고문실에서 “더 이상 고문하지 말라. 몽땅 다 불겠노라”하는 순간.

인생도 그러한가.

불혹 지나 지천명에 이를 즈음 도달하는 마음의 상태.

인생에 길들여 진다는 것..

흐음. 어린 왕자가 말했던가.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라고.

새로운 관계에는 새롭게 길들여 질뿐 더러, 묵은 관계는 켄터키 집으로 돌아가 함께 마루를 구르며 노는 것..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세리프.

‘잊지 않겠어요’와 ‘잊을수 없을거에요’.

이를테면 ‘까먹지 않을께’와 ‘까먹지 못할거야’.

의지와 예감. 어느 것이 그럴 듯 한가. ㅎ

인생에 유치함이란 없다.

‘날아가는 새의 무엇을 보았나’하고 농을 하지만 새의 몸짓이 어디가 유치한가. 풋내기 연인들의 언어들이 어째서 유치한가. 새주먹 뽐내는 소년의 과장된 몸짓에 어디 유치함이 있는가.

황석영 ‘몰개월의 새’에서 하룻밤 풋사랑 주막집 작부의 순정이 유치할 리가 없다.

주인공은 월남전에서 목숨을 건 전투를 치르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던 걸 나는 불혹 즈음에서야 깨닫게 되었으니 나야말로 그 즈음까지는 얼마나 유치하였을까.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때’의 어떤 부분을 완벽하게 이해한다.

죽은 것의 무거움을 지고 가는 산 것들의 징그러움을.

‘오메, 징한 것’하는 외마디 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관계의 현장은 때로 징그럽다.

내 속 징그러움이 더욱 징하다.

내 현장에도 켄터키 옛집은 없다.

혼자 깨달은척 아는척 착한척 아무리 폼을 잡고 뇌까려 봐도 나는 여전히 아름답지 아니하다.

여전히 유치하다. 징그럽다. 욕지기가 나온다.

앤시가족이 싣고 가는 저 무거운 관을 어이 할거나.

호옷, 우째 쓰까나. 이 작 것들. 오메 징한 것. 이 숭한 놈들아. 이 숭한 년들아.

그러나 또 한끝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이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아, 켄터키 옛집은 여적 우리에게 있다. 아름다움은 여적 우리 것이다.

우리는 유치하지 아니하다.

 

눈물은 마음이 비어져 나오는 것이고 똥누는 것은 몸이 비어져 나오는 것이다.

눈물은 똥이 되고 똥은 눈물이 된다면... 하하하.

그날따라 속은 거북하고 변비가 심하여 혼인예배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교회의 변기에 앉아 있었다.

계획도시 창원의 도로는 반듯하고 넓직한데, 내 똥누는 오장육부는 이토록 비좁다. 눈물샘은 널널하건만.

하하. 사람이란 때로 눈물을 똥꼬로 흘리고 싶은 때도 있는 법이니라.

일모도원 (日暮途遠).

낫살이 자꾸 옆구리를 찌른다.

'네 날은 저무는데 네 갈길은 이토록 멀구나' 라면서.

부산 도착, 부평시장에서 형과 막걸리를 마셨다.

 

월요일이다.

나는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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