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오일의 마중 (1,4,3,3)

카지모도 2019. 9. 25. 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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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2014년 11월 11일 포스팅

 

<오일의 마중>

 

근자(近者)에 인상적으로 감상한 두 편의 영화.

중국영화 '오일(五日)의 마중'과 일본영화 '최후의 추신쿠라'

두 영화를 함께 언급하는 것은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두 영화에 공히 관통하는 맥락(脈絡)이 있어서가 아니다.

색감은 달리하였지만 영상미학의 파토스로서 두 영화가 내게 준 감동의 울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영화는 애잔한 따뜻함으로, 일본영화는 비수같은 써늘함으로 내 안일함 속에 숨어있었던 쾌고(快苦)의 감정을 자극하였던 것이다.

 

장예모 감독, 공리와 진도명이 출연한 '오일의 마중' <원제 : 귀래(歸來) -Coming Home->

적역의 캐스팅이었고 빼어난 감독의 솜씨였다.

 

중국 대륙에 불어닥친 미친 바람, 문화혁명(1966~1976).

지식인 '루옌스'는 반동(反動)으로 몰려 하방(下放)되었다.

사랑하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 '펑위안'

반동인 아버지로 인하여 자기 재능의 나래를 펴지 못하여 아버지를 원망(怨望)하는 딸 '단단'

 

어느날 유배지로부터 탈출한 '루'가 은밀하게 돌아온다.

도처에서 번득이는 감시의 눈초리.

그 때문에 아내 '펑'은 남편에게 문을 열어줄수 없었다.

그리고 붉은 치파오를 입고 주인공으로 춤을 추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힌 딸 '단단'은 아버지를 고발할수 밖에 없었다.

 

기차역에서 남편에게 도망가라고 소리치다가 공안에게 떠밀려 넘어지면서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는 '펑'

'루'는 체포되어 끌려가고 만다.

 

바닥에 머리를 부딪친 충격때문인지, 남편에 대한 죄의식 때문인지 '펑'은 그때 기억을 잃고 말았다.

심인성 기억장애.

남편에 관하여 특정된 어떤 기억만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녀의 기억 속에는 남편의 모습이 몇몇 가해자들과 혼동된 형태로 얼버무려져 있었다.

남편의 모습에 대한 기억은 몽롱할 망정, 기억 속에 각인된 사실로서 남편(아빠)을 고발한 딸을 용서할수는 없다. <나중에 딸은 "아버지는 기억하지 못하면서, 내가 잘못한 것만 기억하는 어머니"라고 아버지에게 토로한다.>

 

3 년후, 문화혁명의 광풍은 가라앉고 복권(復權)된 '루'가 돌아왔다.

그러나 '펑'은 자신의 남편을 기억해 내지 못한다.

"내가 바로 당신의 남편이요" 라고 하는 '루'를 문 밖으로 쫓아내는 아내.

"저 사람은 '루'가 아니예요. 문을 잠가요. 내 남편은 이제 5일이면 살아서 돌아올거예요. 저 사람은 내 남편이 아니에요."

 

그녀의 남편은 '5일이면 돌아가겠다'고 언질한 편지속의 그 남편 뿐이다.

남편이란 존재는 언제까지나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5일의 마중.

그녀는 매월 5일이면(편지에는 특정한 달이 지정되어 있지 않다) 정거장으로 나가 남편을 기다린다.

플랫홈 육교에서 사람들이 밀려 내려오다 시나브로 사람의 자취가 끊기고 역무원이 철문을 닫는다.

남편은 오늘도 돌아오지 않는다.

 

아내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남편의 지난한 노력이 눈물겹다.

어느 날 오후.

집안에는 역광의 햇살이 너울거린다.

5일의 마중을 갔다가 그 날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아 실망하고 돌아오는 아내.

창밖으로 그 모습을 본 남편은 피아노 앞에 앉는다.

피아노 선율이 햇살과 어울어진다.

'루'가 연주하는 선율에 취하여 아내는 계단을 오른다.

이 익숙한 느낌은 무엇일까, 저 사람은 누구일까...

꿈에 취한듯 아내의 아련한 손길이 남편의 어깨에 닿는다.

두 사람에게 익숙하였던 어떤 정서의 합일...

남편은 오열하면서 아내를 부둥켜 안는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을 밀어낸다.

다시 망각의 늪 속에 빠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무의식 속에 꽁꽁 숨어있는 그 정서는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하고 만다.

이 사람은 여전히 낯선 사람일 뿐이다...

 

유배지에서 아내에게 썼던 수많은 편지들.

이제 남편은 아내에게 편지 읽어주는 사람이 되었다.

그로 인하여 아내와 좀 더 가까운 사이(편지 읽어주는 사람으로서)가 되고, 아내로 하여금 딸을 용서하도록 하는등 부수적 효과는 있었지만.

 

아내의 기억 속에 자신은 고작 '편지 읽어주는 사람"으로 고착될까봐 걱정스러운 아버지에게 딸은 말한다.

"아빠가 엄마에게 그토록 헌신하는 건 엄마를 곁에서 돌보기 위해서잖아요? 그 이상 뭐가 중요해요? "

 

'루'는 더이상 '펑'이 자신을 남편으로 인식해 주기를. 그런 아내를 염원하며 아내의 얼굴을 안타깝게 바라보지 않기로 한다.

아내를 마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보는 그 방향으로 함께 눈길을 주기로.

아내를 획득하려는 그것, 더이상 무망(無望)한 아내의 기억속에다 자신을 인식시키고자 함에 연연하지 않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세월이 흘렀다.

기차 정거장에는 눈발이 날린다.

붉은 마후라를 두른채 자전거인력거에 앉아 하염없이 남편을 기다리는 '펑'

그녀의 눈가에는 자글자글 주름이 졌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외투입고 털벙거지 쓴 남편 '루'가 서 있다.

자신의 이름 '루옌스'가 적힌 팻말을 들고서 아내와 함께 기다리는 것이다.

5일이면 돌아오기로 한, 아내의 남편을.

 

그저 아내 곁을 묵묵히 지키고 서있는 남편.

플랫홈 육교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사람들.

아내의 기다림, 사람들 사이에 섞여 돌아올 '루옌스'.

남편은 아내와 함께 그 방향으로 눈길을 줄 뿐이다.

정거장 플랫홈 육교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은 뜨아해지고, 이윽고 정거장 철문이 닫힌다.

 

'루'가 오늘은 돌아오지 않는구나.

 

눈발 날리는 세상은 아득하게 너르다.

그렇지만 부부의 표정은 조금도 무연(憮然)하지 아니하다.

무표정의 늙은 두 얼굴, 무언가 충일하다.

그들 가시버시는 오히려 몹시 행복해 보인다.

 

아내 '펑'이 애오라지 기다리는 남편 '루',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

그녀의 편도체에 각인된 정서기억.

정서가 복합된 추상의 몽롱한 포름이었을까, 구체화된 이미지의 형태였을까, 관념화된 어떤 서사적인 이미저리였을까.

으흠, 그건 어떤 따뜻함의 덩어리였을 것이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따뜻함이다.

우리에게 내재(內在)된 선험적가치, 공맹의 윤리(倫理)가 별것이랴.

따뜻함이 바로 윤리(倫理)다.

 

딸 '단단'이 추는 '붉은 낭자군'의 춤은 너무 생동적이고 기상이 넘쳤다.

원색의 붉은 구호, 이념의 춤....

감독 장예모가 그리고자 하는 패러독스일런지.

그건 라스트 신, '기차역의 부부'에 비하면 얼마나 천잡(舛雜)한지

나는 그렇게 보았다.

 

문화혁명.

개별들을 통일된 색채로 세뇌시키려는 집단의 미친 바람.

그 바람은 시대의 천박성이다.

인간의 존엄함 위를 구르는 마른 잎이다. <마른 잎은 굴러도 대지는 살아있다. (오래전 읽었던 중국소설의 제목)>

집단의 작위적 인식의 세계, 그것은 윤리가 아니다.

그 곳의 관계, 개별도 없고 따뜻함도 없다.

'관계'를 이루는 건 '인식'이 아니라 따뜻함, 사랑이다.

 

이 영화, 참으로 아름답다.

인간에게 깃든 따뜻함을 깨닫게하는 영화(예술)의 효용이여.

인간이란 그다지 천박하지 아니한 것이고 관계란 제법 중후한 것이로구나.

내가 지니고 있었던 생각보다.

 

시대를 묘파하고 상황을 그려내는 솜씨.

카메라에 담긴 배우들의 연기와 빛과 소리와 색채.

섬세함과 절제됨.

 

'영화는 미장센이다' 라는 명제.

엑스트라 한사람 한사람, 낡은 편지뭉치, 가방, 보따리, 문짝... 의상과 분장과 소도구 하나하나까지.. 육교 자전거 버스 노점상 세세한 장치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때로 엑스트라의 어설픈 분장 하나가 드라마를 망치는 경우를 보아왔던 나로서는. 완벽주의 디테일은 감탄스러웠다.

 

장예모는 테크니샹이고, 분명 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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