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2010년 5월 단상 (1.4.3.3)

카지모도 2019. 9. 26.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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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2010년 5월 단상>

 

 

***동우***

2010년 5월 23일

 

5월의 나날.

 

1.

 

5월2일,둘째정민이첫돌.봄의어여쁨푸름의싹오월요정고운아가튼튼함의뿌리행복함의나무기쁨의숲으로우거져라.

5월5일,장인생신.여든일곱맞으신어른.학처럼여위어학처럼늙으셨는데예순넘은사위놈몸이불어80킬로를넘어섰고나.

5월22일,여동생생일.주원이도어느덧예순두번째날을맞는고나.섭리는이토록어김없는데형제의오월은부박하도다.

5월24일,가신지어언십이년.백골이진토되어넋이라도있고없고.어머니당신은지금어디계시는가.

5월25일,서른네번째맞는아들놈생일.동경셋집에서미역국이나끓여먹을터인지.도무지장식적이지않는아들놈,전화통너머목소리는하냥심상하여그것이더욱쓸쓸해뵈는아비짜리.

 

2.

 

한창훈의 소설 ‘홍합’

작금 문화만방에 표방하는 구호, 휴머니즘 아니 들어간 것이 있을까.

레토릭과 클리세.

하다못해 근세쯤이라면 모를까 작금의 휴머니즘은 식상하다.

그러나 한창훈 소설의 휴머니즘은 식상하지 않는다.

필경 작가의 경험에서 우러나왔을 힘있는 리얼리즘.

기승전결의 드라마트루기를 따르지 않는 현장냄새 짙은 노동소설.

경향성(傾向性) 같은건 조금도 띄고 있지 않은.

살아가는 사람들의 땀과 웃음과 눈물과 냄새만으로도 충분히 느끼게 되는 본원적인 휴머니즘이다.

진짜배기 저자거리의 현장.

그건 절망하거나 비평하거나 저항하는 곳이 아니라 삶이 그저 수렴되는 현장이다.

돈없고 빽없고 권력없는 사람들은 한창훈처럼 얘기한다.

‘홍합’의 드러나지 않은 휴머니즘은 그래서 감동이었다.

한창훈, 그를 기억하려 한다.

 

3.

 

이보 안드리치의 소설 ‘드리나 강의 다리’

오래전 책부족 굿바이님이 선물하여 준 책.

며칠전에야 완독하여 책장을 덮고 나서 한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독후(讀後)의 여운은 소설처럼 그렇게 내 마음속에서 유장한 여운으로 넘실거렸다.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접경에 위치한 작은 도시 비셰그라드를 가로지르는 드리나 강.

특정주인공이 부각되지 않는 소설.

실제 주인공은 ‘드리나강의 다리’였다.

그 다리를 배경으로 400여년 유장하게 펼쳐지는 인간사.

발칸반도.

발칸을 지배하였던 동서의 제국들.

동서 문명의 충돌지역, 인종간의 분쟁지역, 종교간의 갈등지역.

폴란드처럼 슬픈 나라. 지금은 사라진 유고슬라비아.

유장하게 펼쳐지는 대서사, 실로 명작이다.

틈내어 따로 독후감 쓰기로 하고, 여기서는 사족 한마디 부언.

이 소설은 ‘문학과 지성사’에서 펴낸 ‘대산세계문학총서’중 한권인데 번역도 편집도 제본도 매우 깔끔하였다.

그런데 책부족 이번 달 텍스트, 독서중인 민음사의 ‘거미여인의 키스’.

257페이지에서 272페이지까지 자그만치 16페이지가 몽땅 빠져(대신 241페이지~256페이지가 중복되어) 제본되어 있었다.

기획의 의도를 참신한 새로운 번역을 기치로 내세운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몇몇 책에서 번역의 불쾌함에 볼이 부었었는데 제본마저 이 모양을 만나니 다시 붕어우는 소리 아니 나올수 없겠다. 새발새발.....

 

4.

 

부산시립미술관 ‘모네에서 피카소까지’

오리지널의 명작들을 감상하는 기회가 쉽게 오지 않을 듯 하여, 아내와 딸 그리고 아직 갓난장이들인 정빈이 정민이를 유모차에 태워 밀어 가면서 관람하였다.

십수년전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 그림 장사를 한 적이 있어서 나는 물론 아내도 그림에 대하여는 아주 쬐끔의 안목이라도 생겼음직은 하다. <인쇄가 잘 된 화집의 그림을 고해상도 스캐너로 스캔하여 플로터로 출력한 그림들. 관건은 빛의 원색인 RGB를 색의 원색인 CMYK로 변환시키는 것이었는데, 말하자면 포토샵(당시에도 경이적인 프로그램)으로 해상도 명도 채도등을 조정하여 특수약품을 입힌 캔버스에 출력하는 것. 사악사악 스치는 플로터 헤드에 의하여 인상파의 그림들이 유화 마티에르로 출력되는 순간은 감동이었다.>

4개의 전시실(사실주의, 인상주의, 피카소와 아방가르드, 미국미술)에 걸린 60여점의 작품들.

감동이 있었다면 그 정체는 무엇인가, 과연 화집에서 보던 느낌과는 명확하게 무엇이 다르던가, 작가의 터치와 마티에르의 느낌이 그토록 확연하던가 하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오리지널이라는 선입견이 작용한 허영적 감상 또한 없지는 않았을 것.

그러나 몇몇 그림에게서는 걸음을 떼어 놓지 못하게 꽂힌 무엇은 분명하게 있었다.

위트릴로와 샤갈의 그림에서.

설령 작가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내게만 꽂히는 그 무엇이.

세 살짜리 정빈이는 미국작가 조지아 오키프의 ‘붉은 산과 뼈’라는 그림을 ‘소뼈그림’ ‘소뼈그림’하면서 찾아 몇번이나 그 그림 앞을 찾아가 섰었다.

지극히 주관적인, 독해가 불가능한, 설명할수 없는 그 무엇.

롤랑 바르트가 이야기한 사진예술에서의 ‘풍크툼’이라는 개념이 그런거랄까.

정빈이가 성장하여 유년의 기억, 그 노스탈직한 추억, 풍쿠툼으로서 문득 할비할미를 느껴준다면 갓난장이의 관람경험은 성공일 터이다.

 

5.

 

5월 23일

노무현 전대통령도 작년 이 날 목숨을 버렸구나.

비가 오고 날이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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