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2010년 12월 단상, 아이다 (1,4,3,3)

카지모도 2019. 9. 26.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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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2010년 12월 단상>

 

***동우***

2010년 12월 25일.

 

1.

 

‘SOS 긴급출동’인가하는 지난(재방송)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두 사람의 노인.

며느리와 아들이 자신이 혼자 사는 집에 침입하여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는 어떤 할머니.

또 아파트에 독거하는 할아버지 한분은 윗층에서 일부러 층간 소음을 일으킨다고 노상 쇠막대기로 천정과 벽을 쿵쿵 쳐대고 있었다.

외양(外樣)으로는 그 어떤 정신적 흐트러짐이 전혀 보이지 않는 지극히 멀쩡한 두 분의 노인.

그러나 자식과 며느리가, 윗층의 젊은 부부가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은 추호도 거짓아닌 진실로서 두 노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작 엄청난 괴로움을 당하는 장본인은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윗층의 젊은 부부들이였다.

어머니의 집에다 CCTV를 설치하여 일일이 확인하여 드리는 아들부부와 집안에서는 까치발로 생활하는 윗층 부부.

두 노인의 망상고착(妄想固着)에 의한 포악(暴惡)에 고스란히 당하고 있는 그들.

정신과의사가 진단한바 그 정체(正體)는 외로움이란 놈이었다.

그토록 사랑하였던 아들을 며느리에게 빼앗겼다는 헛헛한 상실감은 심장에 구멍이 뚫린듯, 알콩달콩 행복한 젊은 가정을 윗층에 둔 독거노인의 상대적 고독감은 뼈까지 시린듯.

노추(老醜) 노악(老惡)한 늙은이로 만드는 것은 다름아닌 그 외로움이었던 것이다.

늙은이들의 심리근저(心理根底)에는 알게 모르게 모종의 망상고착(妄想固着)을 가지고 있기 쉽다고 한다.

그것이 외로움 때문이라면 그 외로움은 관리(管理)되어져야 한다.

서른이 안된 이혼녀 ‘카타리나 블룸’은 한가한 시간이 생기면 무작정 차를 몰고 멀리 드라이브를 한다.

자신 안에 도사린 외로움이라는 그 괴물(怪物)이 티브이 앞에서 술이나 홀짝거리는 여자로 만들까봐 그게 두려워서.

술만이 외로움 관리의 방법론이 아니다.

또 한해 저물어 낫살먹은 마음들은 스산하다.

세밑의 음주(飮酒)는 잦다.

그예 토사곽란(吐瀉癨亂), 아래로 쏟고 위로 범람하고, 며칠을 앓았다.

자못 진정되어 살만 하니까 또 찾게 되는 술.

왜 마시는가? 술.

외로움이라고 말하지 말라.

그럼 시간의 중압을 견디기 위하여라고?

변(辯)은 보들레르에 맡기자.

++++

<취하라. 항상 취해 있으라.

핵심은 바로 그것이다.

그대의 어깨를 짓누르고 그대의 허리를 땅으로 굽게 하는 무서운 시간의 중압을 느끼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

끊임없이 취하라.

무엇으로?

술이나 시(詩) 또는 덕(德), 그대의 취향에 따라.

그리하여 그대가 때로 고궁의 계단이나 도랑의 푸른 잔디 위에서, 또는 방안 삭막한 고독 속에서 취기(醉氣)가 슬슬 깨어날 때 물어보라.

바람에게, 물결에게, 별에게, 새에게, 벽시계에게.

달아나는 모든 것. 노래하는 모든 것. 말하는 모든 것에게 물어보라.

지금 몇시냐고?

그러면 바람은, 별은, 새는, 벽시계는 대답하리라.

“지금은 취할 시간이다! 그대가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쉬지 말고 취하라! 술로, 시로, 또는 덕으로. 그대의 취향에 따라.”>

++++

 

2.

 

다른 곳보다 문화도시라고는 할수 없을 터일 부산.

그 중에서도 문화적 척박함으로 이름난 내 고장 영도.

그런데 영도 봉래산자락에 울리는 '아이다'라니.

오래전 서울 시민회관에서 보았던 김자경 오페라단의 아이다, 레나타 테발디가 노래를 불렀던 영화 ‘아이다’. 티브이나 동영상으로 접하는 아이다 공연.

한때 클래식음악에 심하게 경도(傾倒)되었던바, 내게는 지금도 ‘아이다’ LP를 넉장쯤 가지고 있다.

며칠전 삼십년도 넘은 고물 아날로그 오디오시스템에 전력을 넣어 아이다를 턴 테이블에 얹어 들어 보았었는데, 여태 작동되는 기계도 기특하였고 LP를 긁는 아날로그 음색은 참으로 신선하였다.

기라성같았던 카라얀, 솔티, 베르곤찌, 파바로티, 테발디, 프라이스....

그랜드 오페라의 정점, 바라이어티한 무대의 현란함.

오페라하우스를 꿈꿀수 없을 후진 영도문화회관에서 감히 그런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솔 오페라단’은 처음 들어보는 단체.(다른 오페라단이라고 하나도 아는바 없는 주제에)

영도문화회관.

오케스트라피트도 없는 공간의 공연장과 좁디좁은 무대와 그 규모를 뻔히 아는바.

관람료 기만원에 500석 남짓한 객석.

꽉 차보았자 얼마? 도무지 수지(收支)를 따질 계제는 아닐 것이다.

내가 본것은 2010년 12월 22일 오후 3시 공연.

관객이 없어 활력없는 무대가 될까봐 조마조마하였는데 마침 고등학생들의 단체관람이 있어 객석은 거의 만석이었다.

또 하나 걱정하였던 것은 (천만 실례의 말씀이지만) 오케스트레이션을 혹시 녹음버전으로 처리하는건 아닐까하는...

그건 아니었다. 30여명의 오케스트라는 있었다.

음악전공 학생들 같아 뵈는 젊은 그들, 무대와 객석 사이 비좁은 공간에 어깨를 부딪치며 들이찼다.

그리고 내 아마추어적 귀에는 그 사운드가 아마추어는 넘어서 있었다.

턱시도의 뒷모습이 어울리는 잘생긴 중년의 미남. 지휘자 외국인 알폰소 아무개(발음이 어려워)의 콘덕팅은 멋있었다.

라마데스는 덩치가 좀 컸으면 좋았을걸, 미성(美聲)의 테너였는데 아리아 '청아한 아이다'를 열창하던중 고음에서 목소리가 그만 갈라져 버리고 말았다. 연습부족이었는지.

아이다의 소프라노의 날카로움도 괜찮았고, 암네리스의 메조도 좋았다. 바리톤들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높은 곳에서의 무녀장의 가무(歌舞)는 참 좋았다.

두루두루 규모를 확 줄여버린 오케스트라, 합창파트와 무용파트도 옹색한대로 썩 나쁘지는 않았지만, 스케일이 작을수 밖에 없는 영도문화회관 무대에 출연자들의 동선은 너무나 뻣뻣하였다. 출연자들이 좀 다이나믹한 움직임이 있었더라면.

그러나 정작 문제는 스케일을 줄인데 있지는 않았다. 아이다 전편(全篇)중 몇몇 대목을 빠뜨려 축약시켰다는 점이 영 기분에 좋지 아니하였다.

이모저모 사정이야 이해할 법 하지만 사전에 이런 사정을 고지(告知)하였더라면 불쾌하지 않았을 터인데. 드라마의 맥만 끊지 않으면 그럭저럭 넘어 가리라고 여겼다면 '영도사람'으로서 자존심 상한다.

오페라가 무슨 드라마트루기를 따르는 장르는 아닐 뿐더러 그 죽어버린 오페라적 디테일은 어디 가서 찾으랴. 축약으로 인하여 암네리스의 캐릭터는 확 죽어버리고 말았다.

암네리스 뿐 아니라 모든 출연자들의 개성이 드라마틱하게 드러나지는 아니하였지만..

또 하나, 무대 장치랄 것도 없는 무대였지만 커다란 결점 하나.

주로 은박지 같은 반사물로 꾸민 장치였는데 조명의 움직임에 따라 그 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도무지 무대 몰입을 방해하는 이 짓거리는 무엇이람? 이집트 왕국 위엄의 휘광이 아니라 어린애 색종이의 반짝이 놀이 같았다.

차라리 영도문화회관과 같은 작은 무대에서.

의상도 갖추었겠다, 무대 아래 오케스트라도 포진하였겠다, '아이다' 갈라 콘서트같은걸 기획하였더라면 더 좋았을걸..

그러나 나는 문화 회원인지라 3만원짜리 티켓으로 관람하였지만, 치룬 값어치는 건졌다.

술값에 비할 바가 아니다.

영도 봉래산자락에 울린 초라한 '아이다'. 그 문화적 향취를 소박한 감성으로 즐겼음에 만족한다.

생선 배따는 동네로 알려진 영도에서의 이만큼의 문화 향연.

주위에 그득 앉아 함께 본 우리 영도의 젊은 아이들, 베르디의 '아이다'의 실연(實演)을 아름다운 정서로들 간직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세밑, 술 대신 찾아 들은 스스로의 문화적 성취, 그것은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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