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등대로 (1,4,3,3)

카지모도 2019. 9. 26.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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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2014년 12월 10일 포스팅

 

<등대로>

-버지니아 울프 作-

 

'버지니아 울프(Adeline Virginia Woolf, 1882~1941)‘는 내게 친숙한듯 격조(隔阻)한 작가다.

귓가에 무성(茂盛)한 바 있지만 실제로 작품은 별로 읽어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유령들의 따스함을 환상적으로 그린 짧은 소설 '유령의 집'과 여성성의 사회적 자각에 관한 글 '집안의 천사'를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고, 그 전에는 버지니아 울프와 관련된 두편의 영화 '디 아워즈'와 '댈러웨이 부인'를 보았었다.

'디 아워즈'에서 '버지니아 울프'로 粉한 '니콜 키드먼'(커단 코를 만들어 붙인 분장이 좀 우스꽝스러웠다), 흑백영화 '델러웨이 부인'에서는 키다리 여배우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의 모습에서 버지니아 울프를 연상할수 있었을런지.

'버지니아 울프'

심오한듯 도발적이었고 현란한듯 우울한 색감의 막연한 인상을 가지고 있는, 이를테면 그녀는 내 독서에서 방외(方外)의 작가였을 것이다.

무(無) 로망, '의식의 흐름' 운운.. 몹시 난해하다는 선입견으로 책을 펼치기가 지레 꺼려졌을런지도 모르겠다.

 

버지니아 울프가 1927년(45세)에 발표한 장편소설 '등대로'

지난 달 책부족의 텍스트였는데, 본격적으로 버지니아 울프를 읽어 보고자하여 내가 이 책을 선정하였던 것이다.

250여 페이지의 짧은 소설인데도 책장은 술술 넘어가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일견 재미가 없는 소설이었다.

로망은 커녕 흥미로운 서사의 전개도 크라이시스도 없었으니 카타르시스도 있을 리가 없었다.

등장인물의 독백인지 작가가 읊조리는 세리프인지, 사물과 관계에 관한 인상(印象)을 반복하여 변주하는 문장은 너무나 차분하고 지루하였다. <제임스 조이스나 윌리엄 프크너의 '의식의 흐름'에는 그래도 다이나믹한 맛 없지 않아, 이토록 가라앉은 지리함은 없었는데.>

재독(再讀)까지 하여 어제서야 책을 덮었지만 제대로 읽은 것인지 모르겠다.

 

'등대로'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전적 요소가 가장 강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등장인물의 의식의 흐름, 이를테면 독백이라거나 인상(印象)의 나열은 삶에 대한 버지니아의 내면적 음성일 터.

늘 그러하듯 본문을 읽기 전 책 뒷부분의 해설을 먼저 펼쳐 읽었다.

그는 1925년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 소설은 비교적 짧은 것이 될 것이다. 나는 이 소설에서 아버지를 완벽하게 묘사하고자 한다, 그리고 어머니, 세인트 아이브즈 그리고 나의 유년시절을 그려넣을 것이다, 그리고는 내가 늘 작품에 담아내고자 하는 것들, 즉 삶과 죽음등을 담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배를 타고 앉아 죽어가는 고등어를 짓이기면서 "우리는 모두 외롭게 죽어간다"라고 읊조리는 아버지이다.>

 

버지니아는 13살때 사랑하는 어머니와 사별하였다.

'등대로'에서 묘사한 '렘지부인'에게서 어머니라는 한 인간을 해석하여 깊이 이해하고자하는 그의 눈물겨운 사랑의 깊이를 느낄수 있었다.

어머니 사후, 나름 홀아버지를 뒷바라지하면서 성장하였는데, 아버지를 사랑하였으면서도 한편 아버지를 짐스럽게 여기는 감정도 없지 않았나 보았다.

'등대로'에서 묘사한 '렘지씨'는 그의 아버지가 분명할 것이다.

아버지마저 죽은 후, 버지니아는 부모에 대한 복잡미묘한 감정의 정리를 할 필요를 느꼈고, 그녀는 일종의 살풀이로서 '등대로'를 썼다고 한다.

의식 속에 축적된 부모 형제로부터의 강박 뉜들 없을까.

에고로 부터 벗어나서 부모형제를 제3자적 눈길로 그윽하게 파악하여 치밀하게 묘파해내고자 하는 의욕과 재주는 아무나 꿈꿀수 없겠지만 말이다.

 

배를 타고서 죽어가는 고등어를 짓이기면서 '우리는 모두 외롭게 죽어간다'고 읊조리는 아버지... (오버랩되는 렘지씨..)

삶의 고독이거나 허무로움이거나 무의미함에 관한 메타포일까.

삶과 세상에 대한 눈길이 낙관주의가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이는데, 이 문장 하나만으로도 이 소설은 지레 어렵다.

그래서 일단 '등대로'를 접었다.

 

마침 도서관 서가에 버지니아 울프의 평전(評傳)이 있길래 그것부터 먼저 읽기로 하였다.

'나이젤 니콜슨'이 쓴 '시대를 앞서간 불온한 매력, 버지니아 울프' (2000년 출간)

책을 쓴 사람은 '버지니아 울프'가 스스로 '생애의 사랑'(Love of Life) 이라고 하였다는 여성작가 '새크빌 웨스트'의 둘째아들이다.

나이젤 니콜슨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 어머니와 함께 한 버지니아와의 추억을 갖고 있었는데, 버지니아와 새크빌 웨스트의 동성애 관계는 유명한 것이라도 한다.

 

영국 상류계급 출신인 버지니아 울프(앞으로 버지니아라 한다), 그런데 그의 가계(家系)는 복잡하였다.

양친 모두 다른 배우자로부터의 소생이 있는, 버지니아는 재혼으로 부부가 된 양친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아버지에게는 이복언니 로라(버지니아 보다 12살 위, 정신병으로 사망)가 있었고, 어머니에게는 오빠 조지(14살 위)와 언니 스텔라(13살 위) 그리고 오빠 제럴드(12살 위)가 있었다.

양친의 재혼으로, 버지니아 자신을 비롯하여 언니 바네사 (3살위) 오빠 토비(2살위), 남동생 에드워드(1살 아래)가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버지니아는 책을 그리도 좋아하였고, 뛰어난 지능과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소녀였다고 한다.

방대한 장서가 있는 아버지의 서재는 그의 놀이터이면서 최상의 안식처였다.

버지니아는 관찰력이 매우 뛰어나 나비와 나방의 채집을 좋아하였다.

그녀는 당시 영국의 상류층 여성들이 그러하였듯 공식적 교육을 받지 않았다.

천재적 두뇌를 가진데다가, 방대한 책이 있는 환경과 지적분위기, 그리고 당대 지식인들과의 지적교류.. 그런 환경이라면 제도권의 교육이 무에 그리 절실하게 필요할까.

게다가 버지니아는 굉장히 지적욕구가 강한 여자였다.

결혼전은 물론 결혼후에도 남편 레너드의 출판사업에 진력하면서도 한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버지니아를 얘기할 적, 어린시절에 이부(異父)오빠 (조지와 제럴드)로부터 당했다는 성적 학대가 흔히 회자(膾炙)된다.

그 사건이 그녀의 페미니즘적 사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버지니아가 직접 쓴 서한이 있거니와, 나 역시 들은 풍월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실은 실제 겁탈에 이른 사건은 아니었다고 한다.

사춘기 소년의 호기심으로 다소 에로틱하게 여동생의 몸을 더듬는 정도였을 거라는 것이 평전 저자의 말이다.

정황으로 보나, 무엇보다 그 후 그 오빠들과의 범상한 교류로 보나 심각한 트라우마(傷痕)를 남길만큼의 성적 사건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실제적 사실을 증언했다기보다 소소한 경험이라도 극적인 것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작가적 상상력.

누구보다 예민한 자의식이 불러온 여성성에 대한 짙은 모독감.

일종의 지적 트라우마로 과장되게 수렴한 버지니아의 사유의 깊이.

그로 인한 버지니아가 의식한 가공의 경험이었는지도 모른다.

복합적인 감정이었지만 버지니아는 아버지와 남편 '레너드 울프'를 사랑하였다.

그리고 그녀와 교류하였던 남성들은 모두 상류층의 교양을 갖춘 신사들이었다.

그녀에게 남성에 대한 특별한 혐오감이 있어야 할 이유는 없어보였다

버지니아의 페미니즘.

그건 남성중심적 상징조작의 편만한 문명적 상투성에 대한 저항이었을 것이다.

 

결혼과 섹스에 대하여 그녀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결혼과 성적 결합을 놓고 난리를 피운다고 생각해요? 내 생각에는 절정(오르가즘)이라는 것이 끝도 없이 과장된 것 같은데...>

그녀에게 섹스는 결혼에 전제되어야 할 요소는 아니었다. (그녀의 동성애 성향은 어떤 색감의 것이었을까.)

버지니아 부부는 결혼 후 몇 달 동안은 한 침대를 썼지만, 그 다음 몇년 동안은 한 침실을 썼고, 그 뒤로는 부부가 한 지붕아래서 잠을 잤지만 같은 방을 쓰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에게 키스와 포옹등 가벼운 애정표현을 늘 원하였고 그것을 행복해 하였다.

그들 부부가 주고받은 편지에 의하면 30년 동안 부부관계가 없었다고 한다.

레너드는 남편으로서의 정절을 지켰는데, 그가 섹스에 대하여 둔감한 사람이었던지 모르겠지만 아내에 대하여는 늘 일편단심 민들레였다.

레너드에게 있어 버지니아는 깨지기 쉬운 소중한 유리그릇, 취급주의품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아내의 발작이 두려웠다.

의사들이 그에게 경고한바. <버지니아의 정신과 신체가 너무 예민해서 아이를 낳을수 없으며 성적인 흥분이 새로운 정신병의공격을 불러올지도 모른다...>는.

 

바늘끝 같이 예민한 신경의 소유자, 버지니아 울프.

레너드 울프는 그녀의 광기를 <분노와 절망과 폭력으로 이루어진 악몽의 세계>라고 표현하였다.

그녀의 정신은 수시로 광증(狂症)의 경계선, 극점에까지 이르렀던가 보았다.

1915년에 정신병의 첫 발작이 있었지만, 그 전에도 버지니아는 때때로 자신이 미쳐버릴까봐 두려워 하였다고 한다.

으흠, 스스로 예감하는 광기라니.

미치려는 기미(氣味), 발작의 징후, 광기의 전조(前兆)...

불안과 공포, 광증이 자신의 내면 어딘가에서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느낌...

그런 느낌은 어떤 것이었을까. <내게도 그런 징후가 있었던 듯 하기도 하다만>

그것은 버지니아에게는 천형(天刑)이었을 테지만, 어쩌면 그녀의 문학을 위하여서는 천혜(天惠)였을런지.

비약일진대, 광기란 객관으로부터 주관으로의 함몰이다.

주관에 익숙한 그녀가 '의식의 흐름'을 구사하여 소설을 쓴 것은 이에 무관하지 않을 것같은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녀의 문학에 있어서 의식의 흐름은 필연이지 않았을까.

'빈센트 반고흐'의 광기, 노오란 햇빛.

고흐의 그림은 조화롭고 아름답다.

고흐의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의 광기는 보이지 않는다.

외적 사물과 상황적 관계가 한 인간의 심상(心象)에 접수되는 인상(印象).

독립적 자아가 수렴하는 끊임없이 변하고 이어지는 주관적 인상들...

아를르의 햇빛... 오브젝트의 위치에 따라 눈의 각도에 따라 변주되는 햇빛, 그 햇빛은 일관적 패턴이 아니다.

한 인간을 총체적으로 평가함에 있어 하나의 성격적 특성으로 규정할수는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착하다, 악하다, 보수적이다, 진보적이다, 관대하다, 인색하다....

그러나 한 인간이 처(處)하고 관계하는 상황적 내면을 파악하는데 있어 일관적으로 정립된 인상으로 규정할수는 없다.

인간의 내면에서는 끊임없이 밝음과 어둠이 교차하여 외부의 것을 받아들인다.

모더니즘의 눈으로 보면 그 어지러움은 하나의 광증이다.

그 질료는 어떤 기억이거나 상념이거나 연상이거나 기분이거나 오관의 감각이거나 무의식이거나일 것이다.

지극히 개별적인 모순된 감정.

긍정과 부정, 안심과 불안, 사랑과 미움, 수긍과 반발, 기쁨과 짜증...

그 변화무쌍한 파노라마를 무슨 재주로 하나의 정지된 인상으로 찍어낼수 있으랴.

 

이를 묘사할 적에 인과적 법칙과 문법의 논리로서 객관화하여 설명될수 없는, 전적으로 '의식의 흐름'을 구사하는 문학의 주관성에 의존한다.

들여다 보라, 한 개별의 어느 순간의 실존적 모습은 지극한 난해함일지니.

그 난해함이 바라보는, 논리로서 설명되어지는 명징하게 일관적인 세계가 오히려 혼돈스럽다고 힐런지도. 순수한 주관의 세계가 오히려 정연(井然)한 질서의 세계일런지도.

천재적 자아의 원(願)이거나 연(然)이거나로서의 광증은 위대한 예술일런지도. 그와 같은 주관의 축적이 이윽고 통찰의 조화로움이 될런지도.

끊임없이 우리에게 엄습하는 상황적 양면성.

사실과 가정, 예스와 노, 낙관과 비관, 긍정과 부정, 무식과 유식, 원칙과 비겁, 안심과 불안....

무엇으로 결정하여 실존을 규정하려는가.

 

‘등대로’의 ‘렘지부인’은 우리나라 대가집의 음전한 마나님, 이문열의 소설 ‘선택’의 '장씨부인'이다.

남편을 섬기고 여덟아이들을 치마 폭에 감싸 키우는, 매사에 긍정적이고 주위 사람에게 친절하고 헌신적이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여성.

그러나 그런 것들은 '집안의 천사'의 강박이며 자기위선적이다.

 

본질적으로 그녀가 세상을 보는 눈은 비관적이다.

<그러다 이따금 사색에 빠져들며 “어둠의 쐐기”가 되는 상상을 하고, 조바심과 초조한 마음이 사라진 후에 차분히 등대의 빛줄기를 바라보면서 “다 끝날 거야, 다 끝날 거야.”라고 읊조리곤 한다. 그녀에게 세상은 “이성이나 질서, 정의라고는 전혀 없고, 오직 고통과 죽음, 빈곤이” 있는 곳이다. 눈앞에 펼쳐진 만의 풍경에 어린애처럼 큰 소리로 “아, 너무 아름다워요!”라고 외치는 그녀이지만, 속으로는 “세상이 아무리 비열한 배반도 능히 저지를 수 있”다는 위협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렘지씨’는 가부장적이이고 원칙적이고 유식한척 하지만 그의 내면은 유약하기 짝이 없으며 위선적이다.

<램지는 어느 어둑한 날 아침에 비틀거리며 복도를 따라 걷다가 양팔을 내밀지만 전날 밤 램지 부인이 갑작스레 죽었기에 “그의 팔은 텅 빈 채로 남고” 만다.>

등대에 가고 싶은 아들 제임스, 어머니가 "그럼, 내일 날씨만 좋다면 등대에 가자."라고 말하지만, 곧바로 램지는 날씨가 궂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아이는 “도끼나 부지깽이, 아니면 아버지의 가슴에 구멍을 낼 수 있는 어떤 무기라도 가까이 있었다면” 하고 격렬히 아버지에게 반응하지만, 그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버지니아 울프’와 형제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불룸즈버리 클럽'

그 모임은 때로 멤버들간의 유치한 갈등과 애증의 표출도 있었지만, 당대의 내로라하는 지식인이 어울려 20세기 여성운동과 사회주의와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자연발생적 모임이었다. <버지니아의 남동생(조카였던가)은 스페인 내전에 자유주의자의 의용군, 국제여단으로 참전하여 전사하였다.>

그러나 당시 요동치는 사회 정치 국제정세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진지한 입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녀는 <나는 전쟁이 만들어낸 어떤 감정도 좋아하지 않는다. 애국심, 진짜 감정에 대한 감상적이고 감정적인 모방들....>이라고 썼다.

그렇지만 개별을 비껴가는 역사가 어디 있는가, 버지니아의 '사적영역'(私的領域)에서도 그것이 도외시될 리는 없다.

10년이 흘렀고, 전쟁을 겪으면서 지나간 시간을 통해 성숙해진 아이들은, 평범한 노인인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고 아버지를 이해하고, 램지는 아들에게 칭찬을 함으로써 자식과 화해한다.

 

작가의 분신일듯한 릴리 브리스코는 종장에 이렇게 말한다.

<끝났다, 그래. 부러쉬를 내려놓으면서, 극도의 피로를 느끼면서, 나는 드디어 통찰력을 획득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등대로'의 해설.

시간의 무상함과 그 속에 위치한 인간 존재의 허무함을 비관적인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것의 아름다움을 서정적으로 그려낸 걸작... 전후시대 실존의 풍경화...

 

그런데 이 소설이 서정적이고 아름다웠던가.

글쎄, 나는 침울한 감정밭으로 읽었는데.

 

배를 타고 앉아 죽어가는 고등어를 짓이기면서 " 우리는 모두 외롭게 죽어간다" 라고 읊조리는 아버지.

외투 주머니에 돌덩이를 집어넣고 우즈 강물에 걸어들어가 자살한 버지니아 울프.

로드밀의 정원, 무덤의 비문. (버지니아의 소설 '파도'의 문장이라고 한다)

<나는 정복되지도 굴복되지도 않은채 너에게 나 자신을 던질 것이다. 오, 죽음이여>

 

다시 읽어보니 핵심도 맥락도 없는 횡설수설.

뻔한 밑천, 그냥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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