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영화 화장 (1,4,3,3)

카지모도 2019. 11. 1.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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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2015 5 14일 포스팅

 

영화 화장 (영어제목: Revivre)

개봉일 : 2015 4

감독 임권택

출연 안성기김규리김호정전혜진

 

원작 김훈(金薰, 1948~ )

 

김훈의 소설 '화장'은 재미있지만 어려운 소설이다.

화장(化粧)과 화장(火葬)은 이중노출로 나타나는 상징적 아이콘이다.

삶과 죽음조락과 무성소멸과 생성건더기와 껍데기구체성과 추상성사실과 관념무거움과 가벼움...

그 알레고리는 스모키(smoky, 소설 속에 자주 나오는 표현)하기 짝이 없다.

 

우리가 인식 가능한, 분명하게 존재하는 뚜렷한 현상적 존재들.

그리고 만질수 없는 관념의 것이지만 존재 속에 확실하게 내재하고 있는 것.

너무나 명확한 실체적 사실인데도 존재론적 실체가 가 닿을수 없는 곳.

산 것들 속에 너무나 명확하게 내포되어 있는 진실죽음이 그러한 것이다.  

어째서 닿을 수도 만져질 수도 없는 것이 그토록 확실하게 삶과 더불어 존재하고 있는가.

그 매커니즘은 의학 과학 생물학이 밝혀낼 물리적인 영역이 아닌듯 하다

 

화장의 주인공 오상무(안성기)의 아내.

살과 뼈만 남은 그녀의 모습.

코를 날카롭게 찌르는 말기 환자 배설물의 악취.

오상무의 아내의 몸뚱이가 지향하는 종착역(죽음)은 너무나 확고한 것이다.

그러나 그 곳은 너무나 아득하여 닿을수 없는 곳산 것들로서는 얼마나 미지(未知)의 곳인가.

말기암으로 죽어가는 아내는 그러한 확실함과 모호함 사이에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살아있음은 여적 찬란한 생명이다.

아내라는 이름의 고유명사로서.

실체적 존재가 곧 죽음이라는 보통명사가 되어 아지못할 곳으로 사라져 버리는 순간까지는.

 

낮과 밤직장(화장품회사)과 아내의 병상을 오가는 오상무의 일상.

그 틈새를 비추는 한줄기 햇살이 있었다.

회사의 부하 여직원 추은주(김규리).

쇠멸(衰滅)하는 아내와 성장(盛裝)한 생명 추은주의 대비.

펄떡이는 건강한 젊음은 감각을 자극하는 관능이지만그 관능은 관념을 넘나드는 환각이기도 하다.

추은주는 리얼리즘의 실재적 관능이었으며 또한 관념으로 상상하는 관능의 이미저리.

빗장뼈와 그 위에 드러난 푸른 정맥,  어머니의 젖냄새음식을 넘길 때마다 흔들리는 턱 밑의 흰 살들추은주 아기의 분홍빛 입 속.. 

감각이 인지하는 확실한 것들에서 추은주라는 이름은 2인칭으로 불리울 고유명사였다.

한편 상상하여 관념으로 감각하는 것들...

체액에 젖는 노을빛 살들과 그 살들이 빚어내는 풋것의 시간들과 볶음밥 낱알들의 체내에서의 행로.. 여체의 깊은 몸 속의 나라 <이름이 상징하는바 은()나라 주()나라와 같은 고대 전설적 왕국처럼>, 풍문처럼 전설처럼 실제로는 닿을수 없이 모호한 것들이다.

그때 추은주는 3인칭이 되고 추은주라는 이름은 보통명사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추은주 역시 확실함과 모호함 사이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

그것은 모호함인가 확실함인가.

존재의 무거움인가가벼움인가.

현대의 이마골로기(imagology, 쿤데라의 造語)는 이데올로기보다 실체적이라 하지 않는가.

소설 속에 화장품이라는 상품에 대한 설명이 등장하는데 그 메타포는 참으로 적실하다.

<건더기는 없고 껍데기뿐이었지만 이 업계에서 건더기와 껍데기가 구별되는 것도 아니었고 껍데기 속에 외려 실익이 들어 있는 경우는 흔히 있다>

여성이 화장품에 매혹되는 것은 어쩌면 포장때문인지 모른다.

어느것이 껍데기이고 어느 것이 건더기인가.

아름다움이 이데올로기가 되고 포장이 이마골로기가 된 시대.

껍데기가 무거운가건더기가 무거운가.

火葬이 삶을 규정짓고 化粧이 삶을 살게 하는 것인가.

 

火葬 化粧의 은유가 여기에도 있다.

방광에 가득찬 오줌으로 오상무의 몸은 무겁지만몸 전체는 설명되지 않는 결핍으로 가득 찼다.

확실성과 모호성이 중첩적으로 내포된 삶.

주인공은 그 이중성이 당혹스러운 것이다.

주인공은 아내의 쇠멸(衰滅)에도 추은주의 생명에도 동참할수 없다.

 

추은주와의 사이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내는 죽어 스러졌고추은주는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존재로 스러졌다.

오상무는 중얼거린다.

<''는 추은주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는데추은주는 나에게 무엇이었었던가.>

아내가 죽자주인공 오상무는 가벼워지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비로소 깊은 잠을 이룬다.

필경 그것은 깊디깊은 체념이고 포기이고 수긍이고 그리하여 허무였을 것이다.

관계는 관계로서 아름답고 관계는 관계끼리 뒤섞이되 생명은 관계끼리 뒤섞이지 않는다.

생명에서 생명으로 건너갈 수 없고 이 건너갈 수 없음은 생명현상이다.

뷴명한 것은관계는 생명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화장'

영상언어는 문학과는 다른 장르의 언어이다.

그러므로 영화가 얘기하고자 함이 원작과 반드시 일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영화적으로 재해석하거나 재창조 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원작을 지정하고 표방하여 영화를 만들 적에는 적어도 원작이 말하고자하는 큰 줄기의 색감은 맞추어줘야 할 것이다.

생각건대 임권택의 영화는 화장(火葬)과 화장(化粧)의 컨트라스트를 완성시키지 못하였다.

영상(그림)은 영화 장르의 장기(長技)임에도.

한마디로 생명의 그림보다는 관계의 그림에 치중하였다는 느낌이었다.

큰 결이 그러려니와 디테일에 있어서도 그러하였다.

'죽음에 가찹게 닥아간 환자와 건강한 젊음그리고 化粧 <화장은 소설의 중요한 모티프인데 살결과 화장의 질감과 같은 디테일함을 묘사하기보다 화장품회사의 시스템이나 직장의 분위기같은 겉모습에 치중하였다> 에 대한 것들은 소설에서 오히려 영상적으로 치밀하게 묘사되었다는 느낌이다

 

이 소설이 영화로 만들기에는 쉽지 않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간다.

또한 영화란 장르가 흥행을 생각하여 대중에게 소구하여 먹힐만한 드라마적 요소를 강조해야 함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영화는 주인공의 내면이를테면 '생명현상보다는 지나치게 '관계'를 주축으로 하여 전개되어 나갔다는게 내 생각이다

오상무는 병실에서 밤을 지새며 아내의 식사를 볼보고 똥오줌을 받아내고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힌다.

아내가 잠들면 병원 창밖을 내다보면서 쓸쓸하게 소줏잔을 기울이면서.

빈 침대에서 쪼그리고 누워 잠시 눈을 붙이고는 낮에는 회사에 출근하여 잡다한 업무에 시달린다.

아내 또한 오로지 남편만을 부려먹으면서 투정하고 엄살(?)하고 남편에게만 기대려고 한다.

수술을 위하여 머리 깎는 것도 남편이 해주어야 했고그 몸으로 남편에게 섹스까지 요구한다.

아내의 죽어감이 사랑하는 남편의 생명을 질투하고 있음이 여실해 보였다

딸이나 동생이나 간병인에게는 하지 않던 엄살남편이 있으면 통증을 아우성하며 심술을 부리고 어리광을 부린다.

외동딸은 엄마가 변을 지리면 인상을 찡그릴지언정 뒷처리 할 염도 품지 않는다.

그런 것은 당연히 아빠의 몫이다.

처제 또한 형부의 출장중 잠시동안의 언니 간병을 투정한다.

그러면서도 엄마의 유품을 처리하는 아빠를 보고 '그리 빨리 잊을수 있느냐'고 아빠를 힐난하고 처제는 언니의 주검을 꽃상여가 아니라 화장으로 처리하였다고 형부를 힐난한다.

그래도 오상무는 일말의 불만이나 불평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일을 할 뿐이다.

투정하고 안달하고 심술부리는 아내를 딱해하고 안타까워 할지언정 한번도 그런 아내를 핀찬하거나 투덜거리지 않는다

아내가 죽고난 후에도 주검 앞에 통곡하는 딸과 처제 옆에서 오상무의 표정은 오히려 더욱 묵묵할 뿐이다.

가족과 직장사람들 등 주위의 과장되게 표출되는 연기가 오상무에게서는 대비적으로 시종 절제되어 있다.

그런데도 그의 내면적 처연함이 관객에게 전달될수 있었던건 안성기의 연기의 공로일 것이다

안성기는 세상에 보기드문 남편을 연기하였다.

여성 관객들은 저런 남편에게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오상무의 아내에 대한 지극한 성실성과 헌신적 봉사의 태도와 아내의 남편을 향한 전폭적인 의지(依支).

아내의 의지함과 남편의 의무감(또는 윤리의식)은 오로지 부부라는 인연에서 우러나는 것일까.

죽어가는 아내가 살아있을 남편에 대한절대적이라고 믿는 인연의 절대성에 기인한 일종의 질투와 투기는 아닐까.

반대로 남편은 그에 기인하여 자신만 살아있음에 대한 미안함이었을까.

영화는 그것이 사랑에 기인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데 그 정체는 모호하였다.

 

오상무를 연기한 안성기는 역시 뛰어난 배우이다.

시종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오상무의 표정을 잘 연기하였다.

기왕 소설과는 다른 관계의 영화이니추은주를 향한 어떤 열망의 표현이 좀 아쉬웠지만

<蛇足안성기는 물론 훌륭한 배우이지만 간혹 느끼는 바 나는 안성기에게서 드라마와 관련이 없는 묘하게 ''한 표정을 읽을 때가 있다.> 

 

추은주라는 여인소설에서의 추상성 대상성이 영화에서는 구체적 적극적으로 드러난다.

소설에서의 보통명사 부분까지도 영화에서는 추은주라는 고유명사로 치환된다고나 할까.

기왕 그러하였으면  김규리는 좀 더 감각적이어도 좋았을 건데이쁘고 새침하기는 한데 그다지 관능적이지는 아니하였다.

안성기가 아내와 정사하면서 떠올리는 김규리의 나신(裸身)에서도

더불어 영화에서 화장하는 여인의 디테일이 없었음을 나는 매우 아쉽게 생각한다.

클로즈업 된 살결의 돌기들기초화장과 색조화장과 덧붙이는 화장과그리하여 차츰 변모하는 관능의 향연이 없었다

소설과는 다른 시각적 표현은 영상으로서의 특권이었을 터인데.

 

주검에 이르는 아내역 김호정의 연기는 훌륭하였지만연기와는 다르게 주검으로 변해가는 몸뚱아리나 주검의 관능 (나는 네크로필리아가 아니지만 주검의 참혹한 디테일도 역설적 관능이다이 없었다.

분장으로 좀 더 참혹한 모습을 연출하였더라면.

영화속 가상장면의 상여 속에 누운 시체는 죽기 전의 환자보다 더욱 젊고 아름다웠다

 

옛날 1998년 어머니의 임종무렵죽음 깃든 병실에서 잠시 벗어나 어떤 젊은 여자에게서 화악 끼처지는 화장품 냄새에 나의 관능은 부르르 진저리를 쳤었다.  

그리고 며칠후 어머니의 주검을 알콜 솜으로 닦아드릴 때 주검에서 느껴지는 참혹한 슬픔에 살이 떨렸다.

영화에는 그런 관능이 없었다

첫장면과 끝장면의 상여와 만장이 줄 지은 장례행렬검은 상복차림 행렬의 흑백 톤에 유일하게 양장차림의 붉은 색조의 김규리의 칼라 톤이 섞여있다.

성대하게 치장한 죽음의 의례주검의 化粧.

인연 죽음 소멸 관념 과거와 같은 흑백 이미지그리고 흑백의 톤에서 더욱 선연하게 부각되는 리얼리즘 현재 관능 생동 같은 이미지...

컨트라스트인가.

 

진돗개 보리(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라는 의미의 이름이라고 한다)에 집착하였던 아내빈소에 울려 퍼지는 염불소리별장지기 거사님..

카르마와 환생과 윤회의 의미를 담으려는지영화에는 불교적 색채가 짙게 배어 있었다.     

그러나 그 은유하는 바를 나는 잘 알수 없었다.

별장마당에서 안성기는 아내가 남겨놓은 흔적들을 태우고 정원으로 김규리의 차가 들어서는 것을 본다. (김규리는 안성기를 사모하였던가그 또한 모르겠다)  

안성기는 도망치듯 집을 나선다.

슬리퍼를 직직 끌면서 허적허적 걷는 안성기 곁을 안성기와의 조우를 단념하고 돌아가는 김규리의 차가 스쳐 지나간다.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는 듯 서로 모르는 척

보리를 안락사 시키는 안성기.

모든 인연은 끝났다.

소설과 영화는 비로소 한길로 들어선다.

화장품의 광고 카피는 가벼움으로 결정되었다.

주인공은 현재의 가벼움만을 남기고 무거움을 덜어내었다.

 

영화의 오상무가 짊어진 무게는 관계의 '무게'였지만소설속 ''가 짊어진 것은 삶에 내포된 모호성 그 불가해함의 무게였다.

소설의 모호성을 영상적 명료성으로 치환하는데도영상적 추상성으로 치환하는데도 영화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소설 화장을 더욱 쉽게도 더욱 어렵게도 만들수 있었을터인데영화는 소설과는 다른 또하나의 임권택의 모호한 '서사'였다.

 

죽음.

이반 일리이치는 죽음으로서 죽음을 끝장내 버렸다.

그러나 여기 끝장나지 않는 죽음이 있다.

죽은 자에게는 죽음이 종결되었지만 산 자는 현재진행형인 죽음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죽음이다.

 

++++

 

***홍애(虹厓)***

2015.05.14 08:48

소설을 읽고나서 영화를 보면영화적 처리나 배우의 한계가 더 잘 보여버리는 것 같아요.

저는 안성기와 김규리라는 배우 때문에라도 영화는 보지 않게 되겠구나 하던 참이었어요.

안성기의 때로 맹한 표정,,, 그게 무언지도 알만해요ㅎㅎ

 

***동우***

2015.05.15 05:04

홍애님은 안성기와 김규리가 별로 탐탁치 않으신가보군요.

이 영화에서 안성기는 굉장히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런대로.

그런데 떄로 그 맹한 표정... <안성기의 떄로 맹한 표정홍애님도 느끼셨군요ㅎㅎ>

김규리는 풍만하고 이쁘기는 합디다.

소설속 추은주는 썩 미인은 아닌듯하지만보편적 여성성이 갖는 독특한 육체적 질감같은게 넘치는..

어느 여배우가 그럴듯할까ㅎㅎ

요즘 카페에서 작업하시는 홍애님의 재미 엿보아 압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까뮈의 페스트 펴들기 시작했습니다.

 

***eunbee***

2015.05.15 00:03

메일로 보내주신 영화 '화장'

감사한 마음으로 보았어요.

김훈의 소설을 읽을 적엔 무언가 자꾸만 미진하고 찜찜한 것이

산다는 게 참으로 허전쿠나하기도 하고다 읽고 나니 모든것이 끝나버렸다는 일말의 시원함마져 느껴지는..

일상을 버겁게 하던 모든것으로부터 놓여나 깊은 잠에 든 것이 시원함이었을까요?

마른잎처럼 버석거리는 아내의 몸뚱이가 영화에서는..소설 속 이미지를 너무나도 떠올려지지 않게 설정한 것부터,

추은주에 대한 아름다운 문장 속에 잠겨있던 모든 이미지며

주인공이 가지는 미묘한 감정선 또한 영어디로 가 버렸는지.

영화를 보면서지루했어요영화가 끝나자심심하고 맹숭맹숭했어요무어 이렇게 만들었을까?하면서.

화장을 듬뿍해서 변장을 시킨 정도를 넘어아예 성형을 했던걸요.

임권택 감독님의 한계를 보는 건 아니겠지요.ㅋㅋ 그래도 좀 실망이어요.

김훈의 소설적 깊이와 맛을 임감독님의 영상언어가 따라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소설을 다시 한번 더 읽는 것으로 입가심을 할까요?ㅎㅎㅎ

고마워요동우님.

소설도영화도...

파리의 빈곤한 부분을 동우님이 채워주십니다.

 

***동우***

2015.05.15 05:09

보셨군요영화.

동감공감.

은비님이나 나나 이 영화 보는 눈이 같아 기분 좋습니다.

위에서도 말하였지만.

이 영화 관능이 없었어요.

에로틱(비너스적)한 관능과 타나토스적(저승사자적관능...

임권택 감독은 아마 팔순을 넘겼을걸요.

얼마전 김인주님도 말씀하셨는데노장들 말년작품에 걸작 없었다는..

모르지요임권택감독님 마지막 기백으로 걸작을 남겨둘런지.

하하은비님파리의 빈곤한 부분이라니.

그 퐁요로운 파리의 5월에 어찌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