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등대.바다.사막 <상기네르의등대.공룡과등대.등대지기.간부> (1,4,3,3)

카지모도 2019. 11. 2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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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등대, 바다, 사막>

 

 

<상기네르의 등대>

-알퐁스 도데-

 

***동우***

2015.07.13. 05:04

 

태풍 ‘찬홈’은 간밤에 다소 요란을 떨더니 싱겁게 지나가버렸다.

그래도 태풍, 창밖에 우짖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태종대 등대를 생각하였다.

포효하는 바다를.

부산하고도 영도의 태종대 등대와 코르시카 연안의 섬에 있는 상기네르 등대.

두 등대를 혹 어떤 선박이 오갈지라도 등대는 각각 한자리에 우뚝 붙박혀 있는 그대로 그 상거(相距)함은 천리만리다.

등대를 에워싼 천만년 변화무쌍한 것은 오로지 바다와 하늘과 구름이다.

상기네르 등대는 알퐁스 도데가 찾아 낸 훌륭한 은신처였나보다.

몽상과 고독을 즐기기 위한.

 

<그 곳에서 내가 했던 것은 무엇인가? 이 곳에서의 생활과 별로 다른 것은 없었다. 도리어 한층 한가했다. 바람이 거세게 불지 않을 때는 수면과 나란히 놓인 두 바위 틈에 앉아 갈매기와 티티새와 제비들과 함께 하루를 보냈다. 그 곳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온몸이 나른하게 감미로움 속으로 잦아드는 것이었다. 아마 여러분도 영혼의 그 황홀한 도취를 알고 있을 것이다. 무슨 생각에 심취해 있는 것도 아니요, 몽상에 잠겨 있는 것도 아닌 상태, 스스로의 존재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하늘 높이 날아 오르는 듯한 기분 말이다. 물 속으로 잠수하는 갈매기, 태양 속에서 파도와 파도 사이를 떠도는 물거품, 멀어져 가는 우편선의 하얀 연기, 빨간 돛을 단 산호선, 진주 같은 물방울, 흩어져 있는 안개나 그 외의 온갖 삼라만상이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아,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나의 섬에서 도취와 망아(忘我)의 행복에 잠겨보냈었던가! >

 

첩첩(疊疊) 두메.

절해고도, 외로이 곧추 선 등대.

바다와 하늘과 바람과 구름의 풍광 속 홀로 있는.

그 도취와 망아(忘我)의 느낌을 나도 좀 안다.

그러나 알퐁스 도데의 상기네르 등대와 나의 태종대 등대, 상황에 따라 이미지는 같지 아니하다.

고요한 일락과 격렬한 카오스.

태종대 해원(海原)을 마주하고 서면 지구는 확실히 둥글다.

가없는 수평선은 완만한 너름(廣)의 추상이고 관념이다.

그 바다는 고요한 일락이기도 할 터이다.

그러나 폭풍의 태종대는 다르다.

너른 둥금(圓)은 마구 무너져 내리고 바다의 디테일은 리얼리즘이 되어 미쳐 날뛰면서 내 파토스를 때린다. 

요즘은 뜨아하지만 나는 날씨가 궂고 바람 불어째끼는 날이면 자주 태종대를 찾았다.

요동치는 바다를 느끼고 싶어서다.

카오스의 축제, 그 바다가 나는 황홀하였던 것이다.

 

여성 감독 '캐서린 비글로우'('전쟁터의 긴장'에 마약처럼 중독된 사나이를 그린 영화 '허트 로커'로 아카데미를 거머쥔, '제임스 카메론'감독의 前妻)가 만든 영화 '폭풍 속으로'.

거칠고 자유로운 남성적 로망으로써 최후를 맞기를 갈망하는 '패트릭 스웨이지'의 수갑을 풀어주는 키아누 리브스.   

패트릭 스웨이지는 윈드 서핑의 보드에 몸을 얹고 폭풍우 속 거대한 파도의 산더미 속으로 몸을 던진다.

그의 마지막 대사. 

<"궁극의 맛을 보기 위해선 궁극의 댓가를 지불해야 해. 좋아하는 걸 하다 죽는건 비극이 아니야.">

고공(高空)에다 또는 산더미 같은 파도에 몸을 내던지는... 

궁극의 맛, 자유의 오르가즘.

 

옛 직장.

태풍이 오는 날은 정말 고된 비상근무였지만 그때 정면으로 맞는 태풍은 거침없는 위대함.

그건 감동이었다.

미친바람(狂風)은 천지사방 무한으로 질주하였고, 가로세로 미친년 머리카락처럼 퍼붓는 빗줄기는 얼굴을 따갑게 때렸다.

몇겁으로 고박(固縛)하였는데도 안벽의 수만톤급 선박들은 미친듯 날뛰는 파도에 들까불면서 종이배처럼 춤추었고, 광포한 바람은 주먹 굵기의 와이어로프를 현악기마냥 날카로운 음색으로 울부짖게 하였다.

부숴라 날려라 사라져라.

아플론 따위 어림없다, 디오니서스여 노래하고 춤추어라.

대자연의 광연(狂宴) 속에 한점 티끌로서 동참한채 나라는 존재는 가뭇 사라져도 좋았다.

디오니소스적 도취, 그 오르가즘에 이르려는 헐떡임이었다. 

 

그러나 필경 태풍은 북녘 어딘가에 이르러 열대성 저기압으로 스러지고 만다.

태풍이 지나간 하늘은 코발트빛으로 더욱 푸르고 태양은 더욱 찬란하게 빛난다.

세상은 다시 안돈되고 정돈된다.

그리하여 내 파토스는 어딘가로 숨어버렸다.

망아, 도취, 매몰....

 

태종대 등대에 숙박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지금도 운영하는지 모르겠지만 오래 전에 태풍경보가 발효될 즈음에 예약하렸더니 거부되었었다.)

아, 좀팽이여 이제 늙어, 태풍의 등대가 그리운가.

시인 정호승은 스스로 폭풍이 되어 머리를 풀고 하늘을 뒤흔드는 한 그루 나무를 보라하고 스스로 폭풍이 되어 폭풍 속을 날으는 한 마리 새를 보라하는데.

내가 스스로 폭풍이 되었는데, 제가끔 저마다 폭풍이 된 한그루 나무와 한마리 새가 눈에 보일까.

그렇지만 나 늙었으니, 이제는 보일까.

 

++++

<폭풍>

-정호승-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은 옳지 않다

폭풍을 두려워하며

폭풍을 바라보는 일은 더욱 옳지 않다

스스로 폭풍이 되어

머리를 풀고 하늘을 뒤흔드는

저 한 그루 나무를 보라

스스로 폭풍이 되어

폭풍 속을 날으는

저 한 마리 새를 보라

은사시나뭇잎 사이로

폭풍이 휘몰아치는 밤이 깊어 갈지라도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은 옳지 않다

폭풍이 지나간 들녘에 핀

한 송이 꽃이 되기를

기다리는 일은 더욱 옳지 않다

++++

 

 

<공룡과 등대>

-레이 브래드버리-

 

***동우***

2018.08.11 15:04

 

'레이 더글러스 브래드베리' (Ray Douglas Bradbury, 1920~2012)

그는 SF 작가라기보다 그의 문학적 에토스는 차라리 시인입니다.

 

나도 무적(霧笛)소리를 좀 압니다.

안개 자욱한 태종대의 숲, 그 너머 아득한 해원 어디선가 들려오는 뚜우~하는 길고 긴 여운.

절벽 아래 태종대 등대에서일까, 해무(海霧)에 묻혀 외로운 어느 선박에서일까.

모차르트의 호른 협주곡.

논배미를 적시는 늙은 황소의 게으른 기인 울음소리.

아니, 그보다 뚜릿뚜릿 핏발 선 소의 슬픈 눈망울.

넘실거리는 시퍼런 바다.

그 바닥은 어느만큼 깊이 잠겨야 닿을수 있을까.

깊고 어두운 그 뻘에 반쯤 몸을 묻고 몇십만년을 꿈틀거리는 커다란 짐승.

아련한 파장으로 들려오는 무적 소리.

제 목숨의 시원(始原), 어미가 부르는 소리.

커단 짐승은 이윽고 몸을 일으켜 그 소리를 찾아 물살을 헤칩니다.

이윽고 외로운 섬 하나에 몸을 얹어, 그는 등대가 됩니다.

안개 자욱한 날이면 그는 먼 바다를 향하여 길게 울지요.

튜바 음색으로.

너무 오래여서 슬픈 짐승, 너무 커서 순한 짐승...

 

여름날 오후, 하하, 나따위도 이렇게 시인이 되올시다.

 

 

<등대지기>

-솅키에비치-

 

***동우***  

2015.04.02 09:00

 

'쿼바디스'를 쓴 폴란드의 작가, 노벨상을 수상한 '헨리크 솅키에비치' (Henryk Sienkiewicz, 1846~1916)

디아스포라의 외로운 여생을 자족하면서 등대시기로 사는 일흔 넘은 스칸빈스키.

자나깨나 고국 폴란드를 그리워하면서..

 

폴란드.

무시로 폴란드의 대지를 휩쓸었던 흉흉한 바람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코사크 타타르 스웨덴 투르크 나치 러시아...

소피의 나라 뀌리의 나라 쇼팽의 나라...

폴란드는 참 슬픈 나라다.

아시아 동녘 한반도처럼.

 

<스팅고, 앞으로 언젠가 폴란드에 가서 직접 보고 폴란드에 대하여 글을 써 봐요. 정말 아름다운 나라예요. 그리고 정말 슬픈 나라고요. 상상해 봐요. 내가 거기서 자란 이십 년이 폴란드가 자유로왔던 유일한 기간이었어요. 공부하고 배우고 음악듣고 봄여름 일요일이면 교외로 나가 즐길수 있었고, 아래층에서 들리는 어머니가 치는 피아노소리, 슈만과 쇼팽과 베토벤과 스카를라티와 바흐... -윌리엄 스타이런의 '소피의 선택'->

 

고국산천. 고향...

<보고 싶어요. 붉은 산이- 그리고 흰 옷이. -김동인의 '붉은 산'->

슬픈 유랑자는 슬프게 떠나 온 고향의 노래가 그립고 소중하여 저토록 사무친다.

풍랑 심한 캄캄한 밤이면 깊은 바다 속에서 들려오는 고향의 노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쫒기어난 눈물의 왕더러 풍덩 몸을 던지라고 저리 손짓하는데.

호사수구(狐死首丘), 내 죽을때 머리 둘 언덕은 어디런가.

 

***eunbee***  

2015.04.02 11:38

 

고향을 떠나온지 40여년, 파란만장하게 일생을 떠돌던 칠십고령의 백발노인,

이제는 한곳에 붇박이고 싶어 등대지기가 된 스칸빈스키.

바다를, 갈매기를, 바위를, 등대를 사랑하며 세상만사 잊고 사는, 자신마져 잃어버린

半死狀態의 노인에게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은 그리도 깊고 절절함인가.

자기 앞에 배달되어진 폴란드어로 된 책 몇 권. 시집을 들어 그속에 파묻히는 노인의 향수.

'자, 이제는 나를 데려가 주오

저 우거진 수풀 언덕으로,

저 푸른 초장으로

고향 그리운 나의 영혼을.'

시집에 적힌 글자는 노을빛 속에 묻히고

고향처럼 다가온 시집에 묻힌 노인의 향수는 파면을 가져온다.

다시 뉴욕행, 방랑의 길 위에 선 스칸빈스키. 가여워라.

'새로 시작하는 방랑의 길에서도 노인은 가슴에 모국어로 된 시집을 꼭 껴안고 있었다. 마치 큰 보물덩어리라도 안은 듯, 혹시 뺏기지 않을까, 행여 잃지 않을까 가슴 조이며, 그 시집을 가슴에 힘껏 부둥켜안고 있었다. 모국어로 쓰여진 시집을―.'

고향은, 조국은 한 개인의 삶을 규정하는가.

동우님의

아스팔트킨트의 서글픔.

예제서 많이도 만나게 되는 쓸쓸한 그 독백들.

그러나 나 또한 '내 죽을때 머리 둘 언덕은' 확연하던가.

무엇보다 '내 죽을 때 곁하고 있는 그 누군가'가 확실하게 머리 둘 향방이며 고향이 아니런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고향이다'

eunbee의 즉흥 개똥철학.ㅎㅎㅎ

동우님,

창밖이 밝습니다. 어제보다 더 환하게 촉수 높아진 벚꽃이 눈부십니다.

오늘은 아들이 선물한 태블릿 피시로 리딩북 읽은 첫날입니다.

내 독서를 위해 좀더 편한 도구를 마련해준 아들에게도

내 독서를 위해 글 올려주시는 동우님께도

감사, 감사, 감사의 비쥬를 드립니다.^^

 

***동우***  

2015.04.04 04:35

 

촉수 높아 더욱 선연한 봄의 색감.

개나리와 벚꽃.

다시 방랑의 길 위에 선 스칸빈스키. 가여워라.

어제 바람 거세어 벚꽃잎들 눈발처럼 쏟아져 내립디다.

화무 십일홍일지니. 방랑이거나 정착이거나. ㅎ

비쥬는 내가 은비님께.

파리는 언제 출발?

 

 

<간부>

-카뮈-

 

***동우***

2016.10.08 04:24

 

<그녀는 다만 언젠가는 그 왕국이 자기에게 약속되어 있으면서도 결코 자기의 것이 될 수 없으며, 다만 요지부동인 하늘과, 흘러넘치는 햇살의 물결위에 눈을 뜬 순간만이 영원히 자기 것이 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랍인 촌락에서 들려오던 사람들의 말소리가 갑자기 잠잠해지는 순간, 세월의 흐름이 정지된 듯이 느껴졌다. 따라서 순간부터 늙지도 않고 죽지는 않을 듯이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괴로움과 감격에 울던 자기 마음 이외의 생명은 정지된 것만 같았다.>

 

<그리고 죽는 것이 두려웠다. '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녀는 곧 까닭 모를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남편에게서 몸을 떼었다.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극복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행복하지 못하다.' 사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마음의 짐에 눌려 질식할 것 같았다. 그 짐은 20년 동안

이나 무의식중에 지고 오다가 갑자기 깨닫게 되어 힘껏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남편이나 다른 사람은 벗어나지 못할 지라도 그녀만은 그 무서운 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자닌느의 머리 위에 있는 하늘이 육중하게 선회하는 어떤 힘에 휘말리는 것같았다. 차갑고 건조한 밤의 짙은 어둠 속에서 수천개의 별들이 끊임없이 돋아나고, 그 반짝거리는 얼음덩어리들은 또렷한 윤곽을 드러내자마자 어느새인가 지평선으로 미끄러져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자닌느는 하늘에 표류하고 있는 이 불들을 바라보는 데 완전히 정신이 나가 헤어날 수가 없었다. 자닌느는 그들과 더불어 선회했고, 부동의 전진을 통하여 차츰 가장 깊은 자신의 존재와 한덩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깊은 곳에서는 지금 추위와 욕망이 서로 다투고 있었다. 그녀 앞에서 별들은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서 이윽고 사막의 수많은 돌들 가운데로 꺼져갔다. 그럴 때마다 자닌은 조금씩 더 밤을 향해 스스로를 열었다. 그녀는 숨을 쉬었다. 그녀는 추위며, 존재들의 무게며, 광란하는 혹은 얼어붙은 삶이며, 삶과 죽음의 기나긴 고통, 그 모든 것을 잊어가고 있었다. 공포를 피하느라고 목적도 없이 미친 듯 달리기만 했던 오랜 세월 끝에, 드디어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뿌리를 발견한 듯싶었다. 이제는 더 이상 떨리지 않는 그녀의 몸 속에 수액이 다시금 솟아오르고 있었다. 난간 벽에 배를 꽉 누르면서 움직이는 하늘을 향하여 전신을 긴장시킨 채 자닌은 아직도 뒤흔들린 상태인 그녀의 마음이 마침내 가라앉고 자신의 내면에 침묵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성좌의 마지막 별들이 사막의 지평선 위 좀더 낮은 곳으로 그 떨기 송이들을 떨어뜨리더니 가만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때 참을 수 없는 보드라움과 함께 밤의 물이 자닌느를 가득 채우기 시작하면서 추위를 뒤덮어버리고 차차 그녀의 존재의 불가해한 중심에서 용솟음쳐올라 그칠 새 없는 물결이 되어 신음소리로 가득찬 그녀의 입에까지 넘쳐나고 있었다. 푸른 하늘이 그녀 위에 확대되자 그녀는 그 순간 차디찬 대지 위에 쓰러졌다. 잠시후 하늘 전체가 차가운 땅 위에 벌렁 넘어진 자닌느의 몸 위로 내려와 덮치면서 활짝 펼쳐졌다.">

 

사막과 밤과 별.

생텍스(생텍쥐페리)에게도 강렬한 이미지가 있지만, 카뮈와는 좀 다른 질감인듯 합니다.

자닌느의 저 아름다운 간음.

저것은 일탈이 아니라 자연 속에 현존(現存)하는 생명에 대한 모종의 깨달음일테지요.

카뮈에 의하면, 나라는 존재가 적멸할지라도 세상은 여일하게 돌아간다는, 삶에 대한 질투 때문에 죽음이 무서운 것입니다.

이토록 살아 펄떡펄떡하는 세상 목숨으로부터 쇠멸(衰滅)하여 이윽고 까맣게 망각되는 존재.

어차피 허무한 존재...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이러구러 대충 살다가 가는거지 무어 따위...

느끼건대 그런 매가리없는 노래는 읊지말라고 카뮈는 강변하는 것입니다.

자아의 본연은 현존의 순간으로서 빛나는 것, 존재 자체로서 존재는 희열이라고.

 

<나를 온통 휩싸는 것은 자연과 바다의 저 위대한 무분별의 사랑이다... 우리들은 이 세계와의 결혼한 것이다.. 그 일체감으로 그 기쁨을 껴안는, 그것이 사랑이다.. 거침없이 사랑할수 있는 특권이야말로 실존에 부여된 유일한 영광이다 -카뮈->

 

우리에게 내재된 찬연한 본성...

실존적 자각.

카뮈의 오의에 닿기에는 요원할지라도.

 

전에 본문을 지워버린(댓글만 남겨놓고) 카뮈의 아름다운 수필, '티파사에서의 결혼'.

'리딩북'(친구공개)'에 전문을 다시 올립니다.

이 소설과 함께 일독을 권합니다.

 

좋은 주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