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단종애사> -前-
-춘원 이광수 作-
***동우***
2014.11.27 04:33
처음 올리는 역사소설입니다.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의 단종애사(端宗哀史)
제목 그대로 열일곱살에 죽임을 당한 소년왕 단종의 슬픈 내력, 역사적 이야기입니다.
권력욕의 화신 수양대군과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
수양대군을 비롯한 신숙주 권람 한명회 정인지...
그들에게 죽임을 당한 정의로운 사람들, 단종 김종서 사육신 왕방연 엄홍도...
이 소설 읽었었던가 기억 아슴하지만, 어렸을적 부터 예제로부터 들어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
그 옛날 엄앵란(단종妃)이 출연한 영화를 보면서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후에 읽었던 김동인의 '대수양'에서는 정반대더군요.
반역의 무리는 오히려 김종서 양평대군등이고 수양대군은 영웅의 면모.. (이광수의 이 소설은1928년 즈음발표, 김동인의 '대수양'은 1940년 즈음 발표)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정사(正史), 민중의 정서로 구전되는 야사(野史), 그리고 작가적 눈길의 해석...
조선 초엽, 형제의 난(亂)이라는 피바람이 없었다면 세종대왕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
그리고 왕권을 확립한 세종대왕의 아들 수양대군은 암군(暗君)은 아니었을겁니다.
우리와 일본, 심정적 개념의 주군(主君)이라는 대상, 충절이라는 것, 그리고 마키아벨리즘....
생각나는대로 차츰 지껄이기로 하고.
이광수의 단종애사, 10번 쯤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대체로 역사소설은 줄거리를 따라가는 단선적 구조인지라 쉽게 읽힐듯.
재미있는 사극 드라마 감상하듯, 함께 읽어요.
***동우***
2014.11.28 04:52
문종 승하시 수양에게 고명(顧命)이 있었다면, 수양은 성왕(成王)의 주공(周公)이 되었을까요?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으로 분(紛)한 '이정재'의 야심에 찬 패기 가득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종실의 어른 양녕대군은 좌의정(左議政) 남지(南智)를 '약은 것'이라고 속으로 혀를 차지만 단종에게 양녕 할아버지 또한 그닥 믿을만한 어른은 아니로군요.
다음은 <국어국문학자료사전>에서 업어 온 이 소설의 간단한 해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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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애사(端宗哀史)
1928년 11월 30일부터 1929년 12월 1일까지 《동아일보》에 총217회에 걸쳐 연재되었던 이광수의 역사소설.
1972년 우신사에서 발간한 《이광수전집》에 각각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은 작가가 민족정신을 일깨우기 위하여 집필한 일련의 역사소설들과 같은 의미에서 창작되었다.
단종이 태어나서 영월에서 사망할 때까지의 연대기 소설이다.
<단종애사>는 단종의 탄생과 성삼문 신숙주에 대한 고명, 그리고 수양대군과 권람의 밀의의 고명편(顧命篇)과, 수양대군과 한명회가 김종서와 안평대군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을 죽여 등극의 기반을 마련하는 실국편(失國篇), 정인지 등이 단종의 선위를 전하여 세조가 등극하고 사육신이 죽음으로 충의를 바치는 충의편(忠義篇), 노산군이 영월에서 죽음을 당하는 혈루편(血淚篇)의 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441년(세종23) 7월 23일 자시 경복궁 안에 있는 동궁이 거처하는 자선당에서 태어난 단종, 병약한 문종이 죽자 단종이 등극하지만 한명회의 계책대로 수양대군의 등극을 위한 정리 작업이 시작되어 김종서와 그 아들이 죽고 단종을 옹위하는 수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하여 세조가 등극하고 단종은 상왕으로 남게 된다.
병자옥사가 있은 뒤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곧 서인으로 폐출되었다가 영월로 귀양을 가게 된다.
도사 왕방연이 한양을 떠나 청령포에 단종을 가두고 떠나기 전날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라고 읊은 시조는 간장을 끊고도 남는다.
정축 10월 24일 왕방연이 사약을 가지고 왔으나 단종이 없어서 울고만 있는데, 유시에 공생이 활줄로 단종의 목을 매어 한 많은 숨을 거두게 된다.
공생은 문을 나가다 피를 토하여 죽고, 노산군의 시체는 금강에 띄운다.
밤에 영월의 호장 엄흥도가 몰래 시체를 건져 싸 두었다가 관에 넣어 평토장을 하고 돌을 얹어 표를 하여 두었다.
이 작품은 세종과 문종을 모시던 수구파와 세조를 옹위하던 개혁파 사이의 다툼에서 희생된 단종의 슬픈 생애를 예리한 필치로 쓴 작품이다.
한편, 단종에 초점을 맞춘 이 작품은 세조의 입장에서 본 김동인의 <대수양>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작가 자신도 이 작품에서 세조를 너무 악하게만 표현하였다 하여 <세조대왕>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이광수는 동아일보(1928. 11. 24) <작가의 말>에서 정사와 야사를 중심으로 작자의 환상을 빼고 사실 그대로 써서 실재 인물을 문학적으로 재현시키기에 애썼으며, 다른 소설보다 더 많은 정성과 경건한 마음으로 써 갔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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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명숙***
2014.11.29 05:07
긴 글 잘 읽었습니다. 익히 알고있는 내용이라 더 술술 잘 익히고 보는 관점에 따라 인물이 다르게 묘사되는 소설을 읽으면서 흥미를 더 느끼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에 있어서 싸움은 똑같은 현실
유리한 조건에서 자기들의 합리화를 이야기하겠지요
사람이 모이는곳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흔한 풍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크고 작은 차이라고나 할까요 요즘은 역사소설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계속 기대할께요.
***동우***
2014.12.02 05:07
그렇지요? 송명숙님.
권력이 무엇이관대.
권력을 쟁취하는 왕조시대 교언영색(巧言令色)의 저 대의명분.
저 관념의 공허함과 참혹함.
뒤에 사육신의 대목에 이르면 송명숙님, 하나의 가치를 위한 형식의 의연함과 그 참혹함에 가슴이 울렁거리실거에요.
***동우***
2014.11.29 05:02
인물들의 캐릭터와 심리묘사, 정인지 신숙주등이 수양대군에게 넘어 오게 되는 경위라던가...
정변을 일으켜 세상을 뒤집으려 하는 수양, 그리고 제갈량 버금가는 모사꾼 한명회.
좀 감정적이고 충동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없지 않네요.
김동인의 '대수양'이 그런 소설적 묘사에 있어서 좀 더 정치(精緻)하다는 느낌도 있습니다만. 오래 전 읽은 것이라서 지금 읽으면 어떨런지..
어쨌거나 수양은 드디어 야욕의 칼을 뽑았습니다.
점입가경, 이제 끔찍한 피바람이 몰아치겠지요.
***동우***
2014.12.02 04:55
왕조시대의 역성혁명(易姓革命)도 좀 그럴까마는 (맹자의 당위), 혁명이라면 적어도 어떤 식으로든 '시대정신과 세상(민중)'이라는 시공(時空)의 조응이 없이는 성공할수 없을 터이다.
수양의 저 짓거리는 혁명은 커녕 쿠데타도 무엇도 아니고 한낱 반란이다.
양의 탈을 쓴 늑대, 종친의 반도가 내세우는 것은 언제나 열성조(列聖朝)운운의 대의명분.
수양대군과 한명회류의 저 피바람은 지략도 도략도 아니다.
오로지 탐욕과 그에 걸맞는 배짱과 전광석화와 같은 작전, 내 눈에는 전략도 아니보이고 다만 전술뿐이다..
'신군부'의 12.12 사태가 생각난다.
그런데, 수양은 정말 저토록이나 제어못할 야심과 탐욕의 덩어리였을까.
모진 놈 곁에서 황금이냐 벼락이냐 운때만 기원하는 그 수하 무리들의 의식구조는 저토록 천박하게 낄낄거리는 시정잡배의 그것이었을까.
이광수는 너무나 수양일파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느낌이다.
이 소설의 바탕이 된 것은 18세기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이라는데 세조실록의 기록은 어떠한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김동인의 '대수양'는 무엇을 텍스트로 하여 쓴 소설일까.
숨어 있는 실제적인 권력, .
청와대의 비선조직 정아무개 어쩌구. 어제 십상시(十常侍) 얘기로 시끄럽다.
내시(환관)들, 충신도 있구나.
연산군의 화살에 죽은 '김처선'도 그렇거니와, 수양대군의 칼에 죽는 저 김연이나 한숭..
***동우***
2014.12.02 05:03
“군자(君子) 다 집어치위라 얘. 쇠몽둥이로 사람 잡는 놈이 군자는 무슨 빌어먹다 죽을 군자야, 군자.”
저 무뢰배들이 뒤에 정란공신이 되고 군(君)으로 봉함을 받는다.
끔찍하다, 저 야만의 연좌제.
훗날 사육신 때는 더욱 참혹하다.
6.25 때, 어딘가에서는 아들을 잡으러 갔더니 도망가고 없어서 아버지를 끌고가서 죽였다고 한다.
그것은 연좌도 아니고 대살(代殺)이었다.
***동우***
2014.12.03 04:46
이광수는 어둡게만 그렸는데, 수양에게는 오로지 조자룡 헌칼 쓰듯 맘껏 한번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들끓는 욕구만이 기승하였으랴.
피묻은 손으로라도.
자신의 카리스마와 용단력으로.
그리고 정인지 신숙주등 정책 테크니샹들의 행정력과 한명회등 정략가들의 정치력의 보필로써.
태평성대를 위하여 힘껏 경륜을 펼쳐 보고자 하는 드높은 이상도 없지 않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또 피를 흘리려 한다.
득롱망촉(得隴望蜀: 끝없는 욕망을 빗댄 고사성어)이라.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가지고 싶은, 끝없는 탐욕이 인간이라는 동물의 비극일지니.
생각해 본다.
광화문 앞 역사의 거인으로 정좌하신 세종대왕.
수신(修身)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성군(聖君) 현군(賢君)일진대.
제가(齊家)에 있어서는 명군(明君)이 아니되시지 않는가....
친형제들과 이복형제들.
저 범같은 수많은 자식들 생산하셨으면 그 명철하신 지혜로 이모저모 장치를 마련하여 단도리를 잘 하셨어야지....
불길한 어떤 예감도 없지 아니하셨으면서.
***동우***
2014.12.05 05:08
여말(麗末)의 신료(臣僚)들, 왕씨에 대한 충절과 변절은 무상하였을거라.
고려가 멸망하고 60여년, 사육신의 죽음.
이씨왕조의 열성조(列聖朝), 그 정통성을 대하는 충절이 저와 같구나.
10년이면 강산이 변하고, 저토록 단심(丹心)이 무르익는 세월이니, 내 살아온 60여년의 시간이란 결코 짧은 것이 아니로다.
단호한 선택과 결연한 의지로 수행하는 죽음의 형식.
아코의 무사들, 다케야마 신지 중위와 그의 아내 레이코, 미시마 유키오...
하라키리, 사적으로 조작된 관념적가치에 기쁨으로 스스로 죽음을 완성하는 사람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지독한 악형을 견디면서 실사구시로써 오로지 대의를 바라보면서 죽음을 완성하는 사람들..
생각건대 일본의 충절이 사적(私的) 명분의 좁은 대의(大義)라면, 우리는 보편하게 넓은 명분의 대의이다.
전자에 화려하게 장식하는 미학적 메타포는 있을지언정, 삼각산 봉우리 독야청청하는 한그루 낙락장송은 없다.
하나의 가치에 헌신하여 마감하는 한살이의 형식.
어린아이나 아녀자까지도 저리 의연하다.
작금의 세상에 서서 옛 의로운 이들 바라보자니, 참으로 숙연하게 아름답다.
<단종애사> -後-
***동우***
2014.12.06 04:07
사이버의 정보과잉이 오히려 지식의 빈곤을 초래한다는 역설이 있다네요.
그렇지만 딜레당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나와 같은 시로도(しろうと)에게는 사이버야말로 지식의 보고가 아닐수 없지요.
인터넷은 실로 놀라움이고 고마움입니다.
손가락 몇 번 까딱함으로 방대한 왕조실록을 검색하여 읽을수 있으니.
한참을 조선왕조실록을 읽었습니다.
단종조(노산군일기)와 세조조.
아래 댓글란에다 초록(抄錄)을 올립니다.
이 소설의 텍스트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더불어.
이광수의 '단종애사'는 내일 11회로 마치겠습니다.
***동우***
2014.12.06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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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실록>]
《단종실록》의 편찬 경위 및 체제
《단종실록》은 조선 제6대 국왕 단종의 재위 기간(1452년 5월 ~ 1455 윤6월) 3년 2개월간의 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원래 이름은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였으나, 숙종 때 그를 단종(端宗)으로 추존한 후에는 《단종대왕실록(端宗大王實錄)》이라고 하였다.
세조 때에 편찬된 원편(原編) 《노산군일기》 14권과 숙종 때에 편찬된 《단종대왕실록》 부록 1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산군일기》는 문종이 승하한 1452년 5월 14일부터 단종이 양위(讓位)하기 전날인 1455년 윤6월 10일까지를 수록하였다.
현존하는 《단종실록》의 표제에는 ‘단종대왕실록’이라고 표기되어 있고 부록의 각 내면 권차(卷次)와 판심(版心)에도 ‘단종대왕실록 부록’이라 표기되어 있으나, 원편 14권의 각 내면 권차와 판심에는 ‘노산군일기’라는 제명(題名)이 붙여져 있다.
《단종실록》의 원편인 《노산군일기》의 말미에는 다른 역대(歷代) 국왕 실록에 명기되어 있는 바와 같은 편찬(編纂) 연월일과 편찬자들의 성명·직위 등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노산군일기》의 편찬 연도와 편찬자들을 알 수 없으나, 단종이 살해된 세조 3년(1457) 10월 이후 세조의 재위시에 편찬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단종은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억울하게도 반역죄인(叛逆罪人)으로 몰려 비명(非命)에 죽었으므로 세조 재위시에 편찬된 그의 실록은 ‘실록’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라고 불리워졌다.
그의 죽음 후 2백 4년 만인 숙종(肅宗) 24년(1698) 무인(戊寅) 11월 8일에 영의정 유상운(柳尙運) 등의 주청으로 노산군에게 ‘순정 안장 경순 돈효(純定安莊景順敦孝)’라는 시호(諡號)와 ‘단종(端宗)’ 이라는 묘호(廟號), ‘장릉(莊陵)’이라는 능호를 올리고, 종묘에서 복위 고유제(復位告由祭)를 올림로써 왕위를 복구하게 되었다.
6년 후인 숙종 30년(1704) 갑신 11월에는 사관의 상언에 따라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를 《단종대왕실록(端宗大王實錄)》이라고 개칭하게 되었다.
《노산군일기》의 편찬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세조 10년(1464) 10월에 《정난일기(靖難日記)》를 편찬하면서 함께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노산군일기》의 편찬자들도 《정난일기》를 편찬한 신숙주·한명회·최항·노사신 등 정난공신(靖難功臣)들이 주축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예종실록》 원년 4월 18일 신미(辛未)조에 “임금이 춘추관(春秋館)에 전하여 말하기를, ‘《노산군일기》’ 및 ‘계유 정난시 사초’가 입내 (入內)하였으니 내가 그 범례(凡例)를 보고자 한다.’ 는 사실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단종실록》의 말미(末尾)에 수록된 《단종대왕실록 부록》 1권에는 중종(中宗) 11년(1516)의 치제문을 비롯하여,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효종(孝宗)·현종(顯宗)조에 시행된 치체문, 대군으로 추봉(追封)한 숙종(肅宗) 7년(1681) 7월의 치제문과 24년(1698) 9월에 복위를 상소한 전 현감 신규(申奎)의 상소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동년 11월 초8일 영의정 유상운(柳尙運) 등의 주청에 따라 ‘단종(端宗)’이라는 묘호를 올리고 복위한 사실과 6년 후인 숙종 30년(1704)에 《노산군일기》를 《단종대왕실록》으로 개칭한 전후 사정을 기록한 것이다.
이 부록은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송상기(宋相琦) 등이 숙종 30년 11월 7일에 정리하여 기록하였다.
2. 《단종실록》의 내용
단종은 휘(諱)는 홍위(弘暐)이며, 문종(文宗)과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權氏)의 외아들이다.
세종 30년(1448)에 8세의 나이로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문종 즉위년(1450) 8월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문종이 2년(1452) 5월 14일에 승하함에 따라, 5월 18일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단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문종은 유언으로 영의정 황보인(皇甫仁)·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어린 임금을 보필하게 하고 집현전 학사를 지낸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 등에게 협찬(協贊)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단종의 숙부(叔父)였던 수양대군(首陽大君)은 한명회(韓明澮) 등과 결탁하고, 이듬해(1453) 10월 10일 황보인·김종서 등을 격살(擊殺)하고 안평대군 부자를 강화도로 추방한 후, 다음날 스스로 영의정이 되고 정인지(鄭麟趾)를 좌의정, 한확(韓確)을 우의정으로 삼는,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켰다.
정권을 잡게 된 수양대군은 그 달 18일 첫째 동생인 안평대군에게 사형을 내리고, 다음 해 윤6월 11일에는 넷째 동생 금성대군 등이 반란을 꾀하였다 하여 삭녕(朔寧:경기도 연천(京畿道漣川))으로 귀양보내고, 단종으로부터 대보(大寶)를 물려받아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에 따라 단종은 상왕 (上王)이라 불리우고 창덕궁(昌德宮)으로 이거(移居)하게 되었다.
이러한 수양대군의 왕의 찬탈 행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집현전 학사를 지낸 성삼문·박팽년·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 등은 세조 2년(1456) 6월 1일에 고명(誥命)을 가지고 우리 나라에 오게 된 명(明)나라 사신 윤봉(尹鳳) 등을 위해 창덕궁에서 베풀어진 연회석에서 수양대군 부자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하려고 하였으나, 김질의 밀고로 실패하고 모두 극형(極刑)을 받게 되었다.
이에 세조는 동생 금성대군을 경상도(慶尙道) 순흥(順興)으로 귀양보내고 집현전을 혁파한 다음, 3년(1457) 6월 21일에는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여 강원도 영월(寧越)로 귀양보냈다가 그 달 24일 목매어 죽이게 하였다.
조선 왕조의 제6대 왕이던 단종은 12세에 즉위하여 3년 2개월간 왕위에 머물러 있다가 숙부인 수양 대군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고 2년 동안 상왕(上王)의 자리에 있다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4개월 동안 귀양살이를 하던 중 17세의 나이로 목숨을 잃게 되었다.
본 실록에는 주로 이러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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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14.12.06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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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1.《세조실록》의 편찬 경위와 편수관
《세조실록》은 조선 제7대 국왕 세조의 재위 기간(1455년 윤6월 ~ 1468년 9월) 14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이다.
정식이름은 《세조혜장대왕실록(世祖惠莊大王實錄)》이며, 모두 49권 18책으로 간행되었다.
끝의 2권은 세조 대에 제작한 악보(樂譜)를 수록한 것으로, 《세종실록》의 악보와 함께 아악(雅樂)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세조실록》은 세조가 승하한 다음해, 즉 예종(睿宗) 원년(1469) 4월 1일(갑인)에 춘추관(春秋館)에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고,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를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최항(崔恒)을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강희맹(姜希孟)·양성지(梁誠之)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이승소(李承召)·김수령(金壽寧)·정난종(鄭蘭宗)·이영은(李永垠)·이극돈(李克墩)·예승석(芮承錫)을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에 임명하여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세조실록》은 처음에 6방(六房)으로 나누어서 편찬하였으나, 그 해 11월 예종이 승하하고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6방을 3방으로 줄이고 편찬을 계속하여 2년 후인 성종 2년(1471) 12월 15일(임오)에 완성하였다.
이어 《예종실록》을 편찬하고, 성종 4년(1473) 6월 8일(정묘)에 이르러 세종·문종 실록과 함께 세조·예종 실록도 인쇄하였다.
세조 12년(1466) 양성지의 건의로 당시 새로 주조한 소활자로 세종·문종 실록을 인쇄하기 시작하여 성종 3년(1472) 7월에 완료하였으므로, 계속하여 새로 편찬한 세조·예종 실록도 인쇄하여 성종 4년(1473) 6월에 출판을 완료하였다.
이때 각기 3부씩 인쇄하여 사본인 정초본(正草本)은 춘추관 실록각에 두고, 인본은 충주·성주·전주 사고에 1부씩 분장하였다.
2.《세조실록》의 내용
세조(世祖: 1417~1468)의 이름은 유(?), 자는 수지(粹之)이며,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의 둘째 아들이다.
처음 진평대군 (晉平大君)으로 봉해졌다가, 1445년(세종 27)에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개봉되었다.
자질이 영민하여 유교 경전과 사서(史書)에 능통하였고, 무술을 좋아하여 병학(兵學)·역산(曆算)·음률(音律)·의약(醫藥)·복서(卜筮)에 이르기까지 널리 통하였다.
세조는 즉위 후에 군비를 강화하여 두 번이나 압록강·두만강 건너편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이징옥(李澄玉)의 난(1453)과 이시애(李施愛)의 난(1467)을 진압하였다.
또한 안으로 국가의 모든 제도를 정비하고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하여 조선 왕조의 통치 기반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는 12세의 어린 조카 단종이 즉위하자, 한명회(韓明澮)·권남(權擥)·정인지(鄭麟趾)·한확(韓確)·최항(崔恒)·신숙주(申叔舟) 등과 공모하여 단종 원년(1453) 10월에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등을 죽이고 그 일파를 귀양보낸 ‘계유 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켰다.
단종 3년(1455) 윤6월 11일(을묘)에는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였다.
이와 같이 세조가 불법으로 왕위를 찬탈하자,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성승(成勝)·유응부(兪應孚)· 권자신(權自愼)·허조 등이 그 해 겨울에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고, 이듬해 6월 1일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자리를 이용하여 세조와 세자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하다가 동모자 김질의 밀고로 모두 체포, 처형되었다.
그 후 1년을 지나 세조 3년(1457) 6월 21일(계축)에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하여 영월(寧越)에 안치하였다가, 그 해 10월에 목매어 죽게 하였다.
이와 같이 세조와 세조조의 소위 정난·좌익 공신인 신숙주·한명회·최항·강희맹·양성지 등은 세조 즉위 당시에 불의한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예종 원년(1469) 4월 1일 《세조실록》을 편찬할 때, 혹은 그들의 비행을 기록한 사관(史官)의 사초(史草)가 있을까 하여 사초에 사관의 성명을 기록하게 하였다.
이렇게 이름을 쓰게 함으로 말미암아 민수(閔粹)의 사옥(史獄)이 일어났다.
민수의 사초 가운데에 양성지·신숙주·한명회· 임원준(任元濬)·홍윤성(洪允成)·윤사흔(尹士昕)·김국광(金國光)·강효문(康孝文) 등 세조조의 공신에 대한 비행을 기록한 것이 많았다.
그는 신숙주·한명회·양성지가 주가 되어 《세조실록》을 편찬하자 크게 불안하여, 실록청 낭청 중 친구였던 기사관 강치성(康致誠)을 통하여 사초를 도로 반출하여 위험한 문구를 개찬하거나 하여 바쳤다.
후에 이 사실이 발각되어 민수·강치성과 기타 관계자 10여 명을 하옥하고, 다른 사초도 조사한 결과 기사관 원강숙(元康叔)의 사초 가운데에도 당초 기록을 한 것이 발견되었다.
예종은 친히 이들을 국문하여 마침내 원강숙· 강치성을 사형에 처하고, 민수는 곤장 1백 대를 때려 제주의 관노(官奴)로 삼았다.
《세조실록》은 세조조의 소위 정난·좌익 공신인 신숙주·한명회·최항·강희맹·양성지가 주가 되어 편찬하고, 편찬 당시 사초에 사관의 성명을 기입하게 하여 민수의 사옥이 일어났으므로, 사관들은 모두 세조 즉위 당시의 일과 대신의 비행을 직필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세조실록》 중에는 세조 즉위 당시의 일이 모두 합법적인 것으로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조조 공신에 대한 비판 기사도 거의 없는 편이다.
그러므로 《세조실록》 중 세조가 단종을 폐하여 죽이기까지 한 권력 투쟁에 관한 기사는 그대로 믿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 때문에 김종직이 조의제문(弔義帝文)과 술주시(述酒詩)를 지어 세조가 단종을 폐하여 죽인 사실을 초(楚)나라 항우(項羽)가 의제를 죽인 데에 비유하여 기술하고, 그 제자 남효온(南孝溫)은 《육신전(六臣傳)》을 지어 세조와 신숙주·한명회 등을 통렬히 비난하였다.
++++
***동우***
2014.12.06 04:14
++++
[<연려실 기술 (燃藜室 記述)>]
조선 후기의 학자 연려실(燃藜室) 이긍익(李肯翊 1736(영조12) ~ 1806(순조6))이 지은 조선 시대 야사 총서(野史叢書)이다.
400여 가지에 달하는 야사에서 자료를 수집 ·분류하고 원문을 그대로 기록하였다.
조선 태조(太祖) 이래 각 왕대(王代)의 중요한 사건을 기사본말체 방식으로 편찬하되, 자기의 견해나 비평을 가하지 않고 여러 사서에서 관계 기사를 뽑아 기입하면서 일일이 출처를 밝혔다.
또 각 왕대의 기사 끝에는 그 왕대의 상신(相臣) ·문신(文臣) ·명신(名臣)의 전기(傳記)를 덧붙였다.
별집에서는 역대 관직을 위시하여 각종 전례(典禮)ㆍ문예(文藝)ㆍ천문ㆍ지리ㆍ대외 관계 및 역대 고전 등으로 편목(篇目)을 나누어 그 연혁을 기재하고, 출처를 밝혔다.
조선 시대 사서(史書) 중에서 객관적인 기사본말체로 되어 있다는 점과 명석한 사관에 입각하여 치우침이 없는 공정한 필치로 엮었다는 점에서 역사서의 백미라 하겠다.
구성
* 제1책 :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덕종
* 제2책 :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인종
* 제3책 : 명종, 선조
* 제4책 : 선조
* 제5책 : 광해군, 인조
* 제6책 : 인조
* 제7책 : 효종, 현종, 숙종
* 제8책 : 숙종
* 제9책 : 국조(國朝), 사전(祀典), 사대(事大), 관직
* 제10책 : 관직, 정교(政敎)
* 제11책 : 문예, 천문, 지리, 변어, 역대(歷代)
* 제12책 : 색인
++++
***동우***
2014.12.07 07:35
예제 검색하여 보니 수양이 권력을 찬탈함에 있어 역사적 당위로움 없지 않습디다.
조선건국한지 불과 반세기 정도 지난 당시, 세종이라는 거목은 사라졌고 신권(臣權)에 비하여 든든한 왕권은 아직 확립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린 임금(단종) 즉위 당시 왕실에는 수렴청정을 할 어른이 없었을뿐더러 연이은 국상(세종과 문종)으로 국정은 매우 침체되어 있었습니다.
안평과 김종서의 모반의 기미가 없었을테지만, 훗날 세조의 업적을 평가하면 그 때 왕권을 위하여 수양이 나서지 않을 수 없는 필연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세조대왕은 조카님에게는 참으로 무도(無道)한 숙부였습니다.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에서 나온 뒤로
짝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밤이 가고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단종-
춥습니다, 초겨울의 휴일...
이광수의 단종애사, 함께 읽어주어 고맙습니다.
-독서 리뷰-
[[이광수]]
<할멈> <영당할머니> <모르는여인> <소년의비애> <어린영혼> <거룩한이의죽음>
<할멈>
-이광수 作-
***동우***
2017.08.21 04:24
춘원 이광수의 '할멈'
마님(시어머니)과 서방님(남편)과 아씨(며느리)가 살고있는 서울의 어느 중산 가정.
그 집에 남의집 살이(食母)하고 있는 할멈.
서방님은 건너방에서 책을 읽고있고 아씨는 마루에 앉아 바느질, 귀 어두운 마님은 장독대에, 할멈은 제기(祭器) 놋그릇(鍮器)을 닦고 있는, 추석 즈음의 가을 무렵인가 봅니다.
한 세대 전 가정의 풍경, 할멈의 자식에 대한 애착 (못된 녀석이지만), 고향을 향한 향수, 죽음을 바라보는 두 노인의 모습...
질긴 관계로서 고즈넉하고 애틋한... 어떤 이조(李朝)의 잔영같은...
그런저런 정경(情景)들이 아슴하게 떠오릅니다.
어떤... 아픈 그리움으로.
짧은 소설 속에 깊은 느낌을 자아내는, 누가 뭐래도 春園은 문호(文豪)올시다.
<영당 할머니>
-이광수 作-
***동우***
2017.01.23 04:31
'이광수(1892~1950)'의 '영당 할머니'
일흔 여덟 동감내기 두 할머니.
지사(志士)와 교사, 두 사람은 왕년(往年)에 신여성(新女性)인듯 합니다.
<"터를 츨 시대겠지요.">
찾아보니 '츨'의 원형은 '치다', '고르다' '치우다'라는 뜻이로군요.
그러니까 ‘터를 츨 시대’라는 문장은 ‘터전을 닦은 시대’쯤이 되겠군요.
아직도 미모의 흔적이 남아있는 영당 할머니.
과거가 좀 수상쩍지만 지금도 이기적이고 던적스럽습니다.
그리고 시국담에 열을 내는 C할머니.
그러나 자기 것의 쌀 자루와 반찬 항아리를 끼니때마다 종이로 꼭꼭 봉하고 봉한 이에짬(사전 찾아보니 ‘두 물건을 맞붙여 이은 사이’)에다가 도장까지 박아 두는 쪼잔함.
두 할머니, 도낀개낀입니다.
대중이 우러러보는 인간이라도 아주 가까운 사람 눈에는 범속하기 짝이 없는 인간으로 비추이기 예사입니다.
내면의 지식과 이상은 훌륭하더라도 일상에 있어서는 형편없는 경우가 오죽 많습니까?
몹시 주색을 밝힌다거나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걸핏하면 성을 낸다거나 방귀를 뿡뿡 꾸어댄다거나...
예수께서도 고향에서 배척 당하지 않았습니까?
고향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범속해 빠진 예수였을테니까요.
인간이란 그렇습니다.
일상의 디테일, 던적스러움.
먹고 싸고, 좋다가도 싫고 싫다가도 좋고, 웃다가 울다가.
애통함 속에서도 날아가는 새의 무엇을 보면 풋 웃음이 새어나오는.
사람은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점철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편적인 어떤 모습으로 한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영당할머니와 C할머니.
인간 이해의 눈길.
이광수는 깊이 들여다 볼 줄 압니다.
그러한 이광수를 오로지 친일분자로 단죄하시렵니까?
<모르는 여인>
-이광수 作-
***동우***
2017.02.23 08:39
세 조손(祖孫).
팔십 가까운 할아버지와 열네살의 오라비 그리고 여덟살 짜리 누이.
보부어머니와 보부.
어쩌면 삼촌뻘이 될런지도 모를 아기 거북이.
내 손주, 작은놈 미니 또래의 계집아이와 우리 큰놈 비니보다 고작 두어살 많은 오라비.
시대와 환경이 저토록 아이들을 철 들게 하였겠지만, 놀라울이 만큼 성숙한 모습들.
하나의 에피소드로 읽어버리기에는 자못 애긍한 그림입니다.
<소년의 비애>
-이광수 作-
***동우***
2017.03.27 04:32
춘원이 1917년 발표한 소설 '소년의 비애'
양반가의 대가족.
풍부한 감성과 뜨거운 열정을 지닌, 다정다감한 중학생짜리 문학소년 문호.
그는 자신과 같은 기질을 가진 사촌 누이 난수를 아끼고 사랑합니다.
반면 문호의 친누이 지수와 난수의 친오라비 문해는 이지적이고 냉철한 성품이지요.
족친(族親)의 여러 소년 소녀들은 즐겁게들 어울리면서 그렇게 성장해 갑니다.
그러나 그 가문은 어디까지나 봉건적 유습이 지배하고 있는 집안이지요.
열 대여섯 나이의 조혼(早婚)
그리고 반편이와의 혼인약속마저도 파기치 못하는 양반체통이라는 것.
난수에게 서울로 도망가서 함께 공부하자고 권하지만 난수는 불만인채로 그 혼사에 순응하고 맙니다.
문호는 집안의 그런 행태에 분노하고 난수의 우유부단함이 슬프지만 어쩔수 없습니다.
<흥, 우리도 벌써 아버질세그려. 소년의 천국은 영원히 지나갔네그려.>
문호도 필경은 소년인채로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그려.
소년의 비애.
봉건적 유습에 좌절되고마는 청춘의 이상.
청춘의 강개와 의기 따위, 수백년 연연한 저 봉건의 빙벽 앞에서는 무위롭습니다.
계몽주의자 춘원의 안타까움이 녹아있는 듯한 소설입니다.
그런데 한켠, 나의 센티멘탈리즘은 이 소설의 분위기에서 아련한 향수같은걸 느낍니다.
한 세기 전, 저 대가족주의의 끈끈함, 관계끼리의 정애(情愛)와 결속감.
개별적 이기주의가 관계 속에 용해되는 그런 분위기.
내게도 친가 외가 쪽으로 많은 사촌들이 있지요.
사촌누이를 향한 소년의 설레이는 감정도 없지 않았을테지요.
<어린 영혼>
-이광수 作-
***동우***
2017.04.10 09:04
춘원에게는 민며느리로 들어갔다가 죽어버린 누이가 있었답니다.
어린누이에 대한 춘원의 슬프고 아픈 회억(回憶)이 가슴을 에이게 하는군요.
나는 왠지 '오누이'라는 어휘가 슬픕니다.
같이 늙어가는 연년생의 누이동생이 있지만 남매 간에 무슨 슬픈 사연이 녹아 있는것도 아니건만.
아마 내 감정모체에는 동화나 영화에서 접하여 자리잡은 모종의 촉촉한 정서가 아로새겨 있음직 합니다.
오래전 KBS 이산가족 찾기에서 어느 오누이의 상봉장면에서는 얼마나 흐느껴 울었던지.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 '반딧불의 무덤'을 보면서는 사뭇 오열하였지요.
전쟁통에 굶주려 죽는 네살짜리 세츠코,
죽은 누이를 태우고 역전 기둥에 기대어 역시 굶어 죽는 열네살 짜리 오라비 세이타.
"니짱!(오빠) 아무데도 가지마!"
"아무데도 안 가, 세짱 약속할꼐."
오누이라는 어휘에는 목숨의 어여쁜 관계가 애긍함(哀矜)으로 은유되어 있는듯, 그렇게 슬픕니다그려.
아아, 내 마음 속에 있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未知의 내 조그마한 누이여.
<거룩한 이의 죽음>
-이광수 作-
***동우***
2017.04.17 04:15
'춘원'의 '거룩한 이의 죽음'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의 마지막 순간을 그린 단편소설.
두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봄이 깊어갑니다.
밝은 한주의 시작을.
***동우***
2017.04.18 04:18
수운 최제우의 최후.
마르코 복음서의 예수의 최후를 보는 듯.
춘원의 어떤 의도가 깃들어 있을까요?
춘원 역시 어린시절 동학에 입도하였었습니다.
백범도 동학의 접주로 활동한 적이 있었지요.
동학.
최제우 최시형 전봉준 김개남 손병희...
박경리의 '토지'는 동학농민혁명의 실패로부터 도도한 大河의 서사가 시작됩니다. (김개주와 윤씨부인과 환이와 별당아씨...)
황석영의 '여울물소리'도 동학혁명을 배경으로 한 여인의 애잔한 사랑이 펼쳐집니다 (이신통과 박연옥...)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라.
고문으로 엉망진창인 모습, 옷고름이 획 돌아가 찍힌 해월 최시형과 포박되어 수레에 실려 끌려가는 전봉준의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동학사상에 대하여 내 한조각도 아는바 없으리다만 그들 두 눈은 처절한 결기로 형형하였습니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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