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대지 -펄벅- (1,4,3,3,1)

카지모도 2020. 1. 11.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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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대지>

-펄 벅 作-

 

***동우***

2017.12.20 00:22

 

펄 사이든스트리커 벅 (Pearl Sydenstricker Buck,1892∼1973)

그녀의 장편소설 '대지'

 

15회 정도로 나누게 될것 같습니다.

연말연시의 리딩북은 펄벅의 '대지'로 채우게 되겠군요.

 

고전적인 감동에 다시 젖어 보아요.

 

***동우***

2017.12.22 05:19

 

얼마 전 조선일보, 다섯명의 문인이 '내가 사랑하는 노벨문학상 작가와 작품'을 고백하였는데 다음과 같습디다.

 

김연수(소설가) : 마르케스 '백년 동안의 고독'

문태준 (시인) : 파블로 네루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전경린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장석주 (시인) : 헤르만 헤세 '데미안'

김동식 (문학평론가) : 펄 벅 '대지'

 

중국농부 왕룽과 그의 아내 오란.

미국인이 쓴 토착적 중국이야기 '대지'

그 미국인은 그러나 전혀 '오리엔탈리스트'가 아니었습니다.

 

펄 벅((Pearl S. Buck,1892∼1973)은 생후 석달만에 선교사인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말을 먼저 배우고 중국 전래 이야기를 들으며 중국 옷을 입고 중국인 학교에 다니며 중국인들의 사고방식과 문화방식 아래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그녀는 '내가 중국인인줄 알았다'고 얘기할 정도였다니까요.

 

++++

<펄 벅 연보>

 

1892년 6월 26일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주에서 태어남. 중국 선교사로 파견된 부모님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성장함.

1910년(18세) 미국으로 돌아가 버지니아 주(州) 랜돌프 매이콘 여자 대학에 입학.

1917년(25세) 선교사 '존 로싱 벅'과 중국에서 결혼.

1923년(31세) 평론을 쓰기 시작 <중국에 있어서의 미(美)>를 <액틀란트>지 1월호에 발표.

1930년(38세) 남경에서 <大地>를 집필. <동쪽바람. 서쪽바람>을 출판함.

1931년(39세) <大地> 출판.

1932년(40세) <大地>로 퓰리처상을 수상. <젊은 혁명가> <아들들> 출판.

1934년(42세) <어머니> 출판. 미국에서 영주할 결심으로 귀국. <멀고 가까움(단편집)> 출판.

1937년(46세) 3월 노벨 문학상 수상. <諸神들>, <자랑스런 마음> 출판.

1963년(71세) 한국을 소재로 한 <갈대는 바람에 흔들려도> 출판.

1973년(81세) 3월 6일에 영면. 펜실베니아 버그스에 묻힘.

++++

 

많은 연재분이 남았으니 차츰...

 

***동우***

2017.12.23 04:12

 

'펄벅'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입니다.

1960년대 즈음 펄벅재단을 설립하여 한국의 미군 사생아들을 돌보앗지요.

그녀 자신도 7명의 아이들을 입양하여 길렀다고 합니다.

 

더불어 펄벅은 사랑과 더불어 열정이 많았던가 보아요.

자신의 책을 출판한 출판사 사장과 재혼하였고, 늙마에는 한참이나 어린 젊은이와 사랑에도 빠졌다지요. ㅎ

 

크리스마스 연휴, 좋은 날들을.

 

***동우***

2017.12.24 04:41

 

중국의 내륙(內陸) 안휘성의 농투산이 왕룽일가, 굶주림을 면하러 허위허위 찾아 들어간 도회지.

강소성의 상해쯤 되려나 모르겠습니다.

 

집에서 거적덮고 자던 기층민들.

부자집으로 짓처 들어갑니다.

1911년 신해혁명 즈음 될테지요.

 

바야흐로 왕룽의 팔자가 바뀌는 순간일까요...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며, 메리 크리스마스.

 

***동우***

2017.12.25 04:27

 

유아적부터 중국에서 성장하고 중국에서 생활하였던 펄 벅.

중국땅에서 자신이 이방인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을겁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은 결코 중국인이 될수 없다는 자각을 하게 된 것은 1927년 일어난 국공내전 때, 온 가족이 몰살을 당할 위기를 겪고나서부터 였다고 합니다.

 

펄 벅의 '대지'와 박경리의 '토지'

두 소설의 색감은 극명하게 다릅니다만, 생각건대 땅에 근거한 인간의 삶을 조망한다는 점에서 상통하는바 없지 않습니다.

 

소설 도입부도 얼추 비슷한 시대를 그리고 있지요.

 

조선 경상도 땅.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 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어른들은 해가 중천에서 좀 기울어 질 무렵이래야, 차례를 치러야 했고, 성묘를 해야 했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누다 보면 한나절은 넘는다. -토지의 프롤로그->

 

중국 안휘성 땅.

<왕룽(王龍)이 결혼하는 날이었다. 그는 칙칙한 휘장으로 둘러싸인 침대 위에서 문득 잠을 깼을 때, 기분이 왜 다른 날과 다른가에 대해 얼핏 생각이 나지 않았다. -대지의 프롤로그->

 

성탄절 새벽.

다시 한번 메리 크리스마스~

 

***동우***

2017.12.26 04:32

 

부자가 된 왕룽.

여색에 눈을 뜨는군요.

어쩔수 없지요, 그도 사내니까.

 

남자 욕망을 분해해보면 결국은 ‘재색명리(財色名利)’랍니다.

돈이 있으면 여색을 찾게 되고 명예를 탐한다는..

 

뭐니뭐니 해도 그 욕망의 바탕이 되는건 필경 재물일테지요...

 

***동우***

2017.12.27 04:19

 

집안에 첩을 들이는 왕룽.

열 계집 마다할 사내 없다고는 하지만 열 사내 마다할 여자 없다는 말은 없습니다.

 

첩, 소실. 측실, 후궁.

근세까지만 하여도 당연하게 인정된 페니스중심 사상.

지금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제도지만 축첩을 하였다고하여 무슨 형사처벌을 받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중국은 더하지요, 사회가 자본화되면서 돈 좀 있는 자들은 당연한듯 '얼나이(二奶, 첩)을 두는듯 하더군요.

동양의 첩은 한 남성에 전적으로 종속된 관계이지만 유럽의 정부(情婦)는 좀 다른가요?

비교적 정조의무에서 자유롭다는 의미에서. ㅎ

 

그렇지만 왕룽은 농사꾼입니다.

첩의 품속보다 흙의 품속에서 자유와 보람을 느끼는.

 

<그의 깊은 가슴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소리가 있었다. 애욕보다 더 깊은 농토에 대한 심각한 외침 소리, 그것은 그의 생활의 어떤 부분보다 가장 높은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부르짖은 그는, 입었던 두루마기를 벗어 버리고 우단 신과 버선 따위도 벗어 던지고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기운차게 일어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괭이는 어디 있나. 쟁기는?...... 보리씨를 뿌려야지. 여보게, 칭 서방! 여보게 모두들 불러 주게. 들로 가세!">

 

***동우***

2017.12.28 00:19

 

펄벅의 대지.

소설을 먼저 읽었는지 영화를 먼저 보았는지 모르겠는데, 가슴이 기억하는 영화의 감동은 남아있습니다.

흑백화면,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메뚜기 떼의 습격이었지요.

구름처럼 하늘을 덮으면서 밀려와 소나기처럼 내리 쏟아지는 메뚜기떼들.

메뚜기 떼와 싸우는 농투산이들, 왕룽과 아들의 갈등은 해소되고 오란은 죽음을 맞습니다.

왕룽의 마지막 대사가 '당신이 바로 대지였어'...였던가.

 

그런데 후에 들은바 펄벅은 이 영화를 무척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왕룽을 비롯한 출연자들은 죄 미국인이 연기하였고, 내용을 한낱 멜로드라마로 만들었다고.

나는 당시 전혀 느끼지 못하였는데, 그렇게 헐리웃의 전횡과 헐리웃적 공식에 나 또한 쇠뇌되어 있었던 거지요.

 

화이트워싱(Whitewashing, 어떤 인종인던지 흰둥이들이 연기해야 최고라는).

'대지' 뿐이리까.

헤아릴수 없이 많습니다.

 

어떤 영화들이 있었는지 그거나 더듬으면서 자렵니다.

굿나잇.

 

***동우***

2017.12.29 04:21

 

이 번역본이 故 장영희 교수의 것인지 확인하지 못했는데, 참 매끄러운 번역입니다.

내가 옛날 읽었던 책은 아마 장영희의 아버지 장왕록 교수의 번역본이었을 겁니다만..

 

장영희 교수가 소아마비 장애가 있었듯, 펄벅의 외동딸(친자) 역시 장애인이였지요.

 

아래, 장영희 교수의 글을 덧붙입니다.

 

++++

펄벅의 대지 /장영희

 

내가 제일 처음 배운 우리말 글자는 ‘오’자였다. 아주 어렸을 때 펄 벅의 ‘대지를 번역하시면서 끝없이 교정을 보시는 아버지(고(故) 장왕록 박사) 곁에서 어머니, 언니 오빠가 원고 정서에 매달려 정신없을 때, 심심해하는 내게 ‘오란’ ‘왕릉’ 등 몇 개의 이름을 적어주면 나는 흉내내어 써보곤 했다. ‘대지’를 비롯해서 스무 권에 가까운 펄 벅의 작품을 번역하셨던 아버지 덕에 내가 자라나는 동안 ‘펄 벅’은 늘 이웃집 할머니처럼 친숙한 이름이었고, 후에 내가 영문학도가 되어 처음으로 ‘원서’로 읽은 작품도 ‘대지’였다.

 

불후의 명작 ‘대지’ 외에도 80권에 달하는 작품을 쓴 작가, 여성으로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 작가, 중국에서 자랐고 동서양의 벽을 허물고 인류전체의 복지 사회를 꿈꾸었던 평화주의 작가, 자선사업가로서 우리나라에도 혼혈아를 위한 재단을 세웠던 인도주의 작가 등 펄 벅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많다. 그러나 내가 읽은 그녀의 작품 중 가장 인상깊은 책은 1951년 발표한 ‘자라지 않는 아이’이다.

 

펄 벅은 한국고아를 포함, 국적이 다른 아홉 명의 고아들을 입양했지만, 그녀의 친자는 중증의 정신지체와 자폐증이 겹친 딸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가장 어렵게 쓴 책”이라고 고백한 ‘자라지 않는 아이’는 최고의 명예를 누리는 작가로서가 아니라 장애 자녀를 낳아 길러본 어머니로서의 체험을 마음으로 토로한 책이다.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의 행복감, 그러나 정신지체아로 일생 동안 ‘자라지 않는 아이’로 남게 되리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의 절망― “차라리 죽음이 더 편할지 모릅니다.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내 딸아이가 지금 죽어준다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까지의 기대와 실망, 끝없는 고통, 그러나 결국 그 딸에게서 배운 점― “나는 그 누구에게도 존경과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내 딸이 없었다면 나는 분명히 나보다 못한 사람을 얕보는 오만한 태도를 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능만으로는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없음도 배웠습니다. ” 담담하게, 그러나 ‘마음 속으로 피를 흘리며’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결론적으로 말한다. “나는 결코 체념하지 않고, 내 딸아이를 ‘자라지 않는 아이’로 만든 운명에 반항할 것입니다. ”

 

그녀가 말하는 “운명에 대한 반항”은 무지로 인해 출산 전 실수로 장애아가 태어나는 것을 예방하고, 장애를 가진 아이들도 교육받을 권리,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음을 “자나깨나, 어디를 가나 외치는” 것이다. 장애아에게 더불어 살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은 비단 부모의 책임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의 의무라고 역설한다. “우리 모녀의 모든 것을 바쳐 다른 사람이 이런 괴로움을 겪지 않도록 힘쓸 수 있다면 우리의 생애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그러한 희망에서 위안을 찾는다고 책을 맺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생각하는 사람은 물론 나의 어머니이다. 기동력 없는 딸이 발붙일 한 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목숨 걸고 “운명에 반항”하여 싸운 나의 어머니. 무엇보다 이 땅에서 배움의 기회를 얻는 것은 부모님, 그리고 내게 너무나 힘겹고 고달픈 싸움이었다. 업어서 교실에 데려다 놓고 밖에서 추위에 떨며 기다리시던 나의 어머니. 장애를 이유로 입학시험 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학교들을 찾아가 제발 응시만이라도 하게 해 달라고 사정하며 다니시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를 기다리며 초조하게 문간을 서성이던 나의 어머니. 조금만 도와주면 나 잘 해낼 수 있다고, 제발 한몫 끼어달라고 애원해도 자꾸 벼랑 끝으로 밀쳐내는 이 세상에 악착같이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때문이었다.

 

노벨문학상의 위업도 그 위대한 이름, ‘어머니’에 비할까.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를 만들었다”― 어디선가 본 책의 제목이다. 사회와 국가가 의무를 소홀히 해도 지금도 어디에선가 “운명에 반항”하여 싸우고 있는 모든 장애를 가진 자식을 가진 하느님 같은 어머니들의 외로운 투쟁에 사랑과 갈채를 보내며 나의 어머니와 그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

 

***동우***

2017.12.30 00:33

 

<"때리지 마세요. 다시는 쟁반에 있는 것을 집어먹지 않겠어요." 그리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어머니...">

옛 상처를 뇌이고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면서 오란은 죽습니다.

 

2017년, 한 해가 저뭅니다.

세월은 얼마나 공평한지요.

있는 놈도 없는 놈도 잘난 놈도 못난 놈도 묵은 해를 보내는 세밑입니다.

 

++++

<새해 첫 기적>

-반칠환-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12월>

-황지우-

 

12월의 저녁 거리는

돌아가는 사람들을

더 빨리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무릇 가계부는 家産 탕진이다

아내여, 12월이 오면

삶은 지하도에 엎드리고

내민 손처럼

불결하고, 가슴 아프고

신경질나게 한다

희망은 유혹일 뿐

쇼윈도 앞 12월의 나무는

빚더미같이, 비듬같이

바겐세일품 위에 나뭇잎을 털고

청소부는 가로수 밑의 生을 하염없이 쓸고 있다

12월 거리는 사람들을

빨리 집으로 들여보내고

힘센 차가 고장난 차의 멱살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

 

***동우***

2017.12.31 03:49

 

2017년.

세밑의 끝자락 새벽.

 

모두 복된 새해 맞으소서.

 

***즈키***

2017.12.31 23:00

 

이선생님.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뜻하는 바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오늘 처음으로 블로그에 방문했습니다

 

김상용

 

***┗동우***

2018.01.01 00:21

 

아, 김형.

우리 노가다 시절 가장 高級하였던, 나의 同類여. ㅎ

두루 척박하였던 그 때지만 때로 그립습니다그려.

클래식 애호는 여전하시리라.

 

김형.

늙으니 뭐니뭐니 해싸도 가장 절실한건 건강.

새해, 모쪼록 몸 건강하고 마음밭 평안합시다 우리.

 

자주 들러주세요.

 

***즈키***

2018.01.03 13:34

 

나이가 들어 시력이 안 좋으니 책 읽는 것은 포기 하고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대충 훓어서 읽습니다

 

***동우***

2018.01.01 00:18

 

부자 왕룽.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듯이 재물 많은 사람 근심 떠날 날 없습니다.

 

재물 잃을까 노심초사 전전긍긍하는 사람을 보고 거지가 자식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저것 봐라. 넌 애비 잘 만난 덕에 저런 걱정 없지 않니?"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자연의 본성은 절대 고통스러운게 아니랍니다.

그러니까 부(富)라는 것이 행복의 원천은 분명 아닐겝니다.

 

아타락시아.

육체에 고통이 없고 마음의 근심이 없는. 상태적(常態的) 쾌락..

 

새 해.

모쪼록 행복합시다.

 

***동우***

2018.01.02 17:58

 

<"우리들은 땅을 파 먹고 살아왔어. 그리고 또다시 땅속으로 돌아가야 돼. 너희들도 땅만 가지면 살 수 있어...... 누구라도 땅만은 빼앗을 수 없어......" 눈물 자국이 노인의 늙고 메마른 얼굴에 허옇게 드러나 있었다. 그럼에도 노인은 닦을 생각을 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는 몸을 굽혀 흙을 한줌 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쥔 채 중얼거렸다. "만일 땅을 파는 날에는 그것이 마지막이다." 형제는 양편에서 아버지를 부축했고 노인은 한줌의 부드러운 흙은 손으로 힘껏 쥐었다. 형제는 몇 번이고 아버지를 위로했다. "걱정 마십시오. 아버지, 절대로 땅은 안 팝니다." 그리고 그들은 노인의 머리 너머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왕룽에게 있어서 대지는 원초적 생명력이며 외경의 대상이고 삶의 뿌리를 이루는 최고최선의 가치로서 땅에 대한 그의 욕망은 본능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첫째와 둘째는 아버지의 머리 너머로 눈을 마주치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습니다.

 

펄벅은 '대지'에 이어 장편소설 '아들들'과 '분열된 일가' 를 썼는데, 독립된 작품이라기보다 '대지'의 연작소설이라는 편이 맞지 싶습니다.

'아들들'은 아들代, '분열된 일가'는 손자代 이야기로서 이를테면 '대지'의 3부작 대하소설이라 하여도 무방할 것입니다.

<'분열된 일가'의 텍스트 파일은 있는데 '아들들'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만, 언젠가 구하게 되면 올리지요>

 

오란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농사일과 가사노동, 시아버지와 남편 수발, 도움없이 여러아이 출산과 산후처리, 기근 속에 출산한 갓난 딸을 목졸라 죽이면서까지... 한번도 자기주장을 한적 없는, 억압적 운명을 지긋이 수렴하는, 노동과 행운과 아들들을 주어 헌신하였지만 남편으로부터 존경은 커녕 그 어떤 보상이나 한마디 치사도 없었고 바라지도 않았던...한 세기 전의 여인상.

한반도 땅에서도 익숙한 土地的(?) 여성.

 

땅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노동과 인내와 가족과 책임감과 팔자와 결합된 땅의 가치.

내가 자주 뇌이는 세리프 '아스팔트 킨트, 내게는 고향이 없습니다'

도회의 아이들에게는 땅이 없으므로 고향이 없습니다.

고층 아파트에 주소를 둔 아이들, 그들이 근거하는 곳은 땅이 아니라 하나의 유동성입니다.

 

나는 도로명 주소라는게 못마땅합니다.

사람 사는 곳(살住, 터所)은 ‘터’이지 ‘길’이 아니지요

살이를 떠돌이의 가벼움으로 경화(輕化)시키는 도로명 주소...

 

<뱀이나 기차가 그러하듯이 길이란 바닥으로 수평으로 길게 뻗은 형상으로 길이란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나 나무와 같이 위아래로 수직으로 길다란 것들은 한자리에 머물도록 만들어 진 것이야. -윌리엄 포크너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몇세대 지나면 입술에 장엄한 발음 대지(大地)란 얼마나 왜소해 지려는지.

空中이며 水上이며 水中, 대기권 밖으로까지.

그리하여 인간도 장엄해지는겐지.

 

펄 벅의 대지.

함께 읽어주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