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이병주 1.2.3 (1,4,3,3,1)

카지모도 2020. 2. 24.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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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겨울 밤 (어느 황제의 회상)> -前-

-이병주 作-

 

***동우***

2016.06.28 04:16

 

이병주(李炳注, 1921~1992)

마흔 넘은 뒤늦은 나이로 문단에 나와 27년 동안 80여 권의 책을 냈다고 하니, 우리나라에 이병주처럼 박람강기(博覽強記)로 많은 글을 쓴 작가가 달리 있을까.

그의 많은 소설을 읽었는데, 수작(秀作)이 있는가 하면 범작(凡作)도 있었고 심지어 졸작(拙作)도 없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그의 단편 <겨울 밤 -어느 황제의 회상->을 세 번으로 나누어 올린다.

이 소설은 황석영의 한국명단편 101중 하나이기도 하다.

 

차츰 지껄이기로 하고..

아래는 이병주에 관하여 업어온 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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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 백과>

 

이병주(李炳注, 1921~1992)는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소설가이다. 본관은 합천. 호는 나림(那林)이다.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의 이명산 자락에서 태어났다. 일본에 유학하여 메이지 대학 문예과를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 불문과에서 수학했다. 와세다 대학 재학 중 태평양 전쟁에 학병으로 징집되어 중국 전선에 투입되었다.

전쟁이 종전된 뒤 귀국하여 경남대학교의 전신인 해인대학 교수를 지냈다. 이 대학에 재직 중이던 1953년에 《부산일보》에 장편 《내일 없는 그날》을 연재하였으나, 정식으로 중앙 문단에 등단하지는 않았다.

1955년부터 부산에서 국제신보사 편집국장 및 주필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러나 1961년에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면서 필화 사건에 휘말려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2년 7개월 동안 복역했다.

1965년 중편 소설인 〈소설 알렉산드리아〉로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한 이래 《지리산》, 《산하》, 《그해 5월》, 《관부연락선》 등 현대사를 소재로 한 역사 소설을 즐겨 썼다. 선이 굵은 남성적 소설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정식 등단은 늦어졌으나 이후 많은 작품을 집필한 다작 작가이다.

권위주의 정부 하에서 금기시된 소재인 이데올로기 문제를 둘러싼 지식인의 고뇌를 앞장서서 다루어, 유신체제 하인 1970년대 중반에는 “이제 이병주를 읽은 사람과 안 읽은 사람으로 나누자”라는 말이 있었을 만큼 영향력이 컸다.

실제로 그의 소설 《그를 버린 여인》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일 경력, 계획없는 경제 정책, 유신독재 치하의 인권 침해 등을 다루고 있다.

실제로 소설에서는 유신 독재 치하에서 대학생들조차 읽은 적이 없을 정도로 금서 취급받던 안네의 일기와 역사적 배경인 홀로코스트에 대해 토론하는 모임이 행동하는 양심을 가진 다방 마담이 장소협조를 하고, 지식인인 기자가 강의하는 방법으로 진행되는 이야기, 돼지를 많이 키우라고 해서 키웠는데 가격이 급락해서 농민들이 몰락한 이야기, 박 대통령이 친일 경력에 대해 변명으로 일관하는 이야기 등이 나온다.

1992년 4월 3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숙환으로 인해 향년 7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고향이자 작품의 주요 무대가 되었던 경남 하동군에는 이병주문학관이, 섬진강 강변에는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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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16.06.28 04:19

 

다음은 2006년 ‘한길사’에서 ‘이병주 전집’ 전30권 출간에 즈음한 작가 공지영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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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 가지는 진정한 이점은, 그것이 진정으로 참이라면 한 번 두 번 혹은 여러 번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더라도 오랜 시간이 흘렀을 때 그것이 다시 참임을 밝히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는 데 있다”는 존 스튜어트 밀의 말을 생각하며 나는 책장에서 이병주 전집을 들었다.

이병주…. 나는 그를 생각하면 하는 수 없이 나의 이십대를 함께 생각하고야 만다. 1980년대 초,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아래서, 젊은 날이 하염없이 한심해지고 있을 때 도서관 안에 도피하듯 틀어박혀 읽은 것이 그의 소설들이었다. 이 세상에서 되고 싶은 것도 하나 없고 되어야 할 것 하나 없던 것 같은 시절, 과연 생을 걸고 우리가 도전할 만한 것이 하나라도 있을까 하는 고민이 아마도 세상은 어차피 불의하고 불우하다는 확신으로 나른하게 굳어져 가고 있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 때 만난 그의 <지리산>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나에게는 조국이 없다, 오직 산하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구절 하나로 반공법 위반 혐의로 감옥에서 실형을 살고 나온 그의 마흔네살 늦깎이의 젊은 피가 갓 스물, 늙어가고 있는 나를 두드린 것이었다. 유신이라는 독재정권의 코미디 같은 억압과 그 현실의 틈새에서 어떻게든 역사의 잃어버린 한 결을 재현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을 행간으로 느끼며 나는 책에서 밤새 눈을 떼지 못했다. 1972년 유신이 시작되는 시절, <세대>지에 <지리산> 연재를 시작하며 그는 썼다.

“나는 <지리산>을 실패할 작정을 전제로 쓴다. 민족의 거창한 좌절을 실패 없이 묘사할 수 있으리라는 오만이 내게는 없다. 좌절의 기록이 좌절할 수 있을 수도 있을 법한 일이 아닌가. 최선을 다해 나의 문학적 신념을 <지리산>에 순교할 각오다.”

좌절하고 실패한 역사를, 스스로 실패하기 위해 쓰기 시작하는 이 용기는 어디서 오는가. 오직 실패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한다는 그의 말에 홀린 듯 나는 지리산 어귀와 섬진강 자락을 역사 속에서 버림받고 실패한 그의 인물들을 따라 배회하였다. 그는 햇빛과 달빛 이 둘을 날실과 씨실로 엮어 작가의 세계관으로 다시 역사를 써내려간다. 그는 그러므로 신화와 역사를 모두 아우르는 것이 소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태양만 빛나는 삶도, 어둠만 내렸던 삶도 실은 없기 때문이며 기록자로서의 소설가는 그 둘을 함께 엮어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소설 속에서 돌멩이 하나를 들고 골리앗 같은 거대한 역사 앞에 선 어린 다윗의 용기를 보았다. 작가라는 것이, 글이라는 것이 혹은 소설이라는 것이 다윗의 어깨에 내렸던 신탁만큼 거대하다는 비밀을 언뜻 훔쳐본 것이다.

당시 박경리의 <토지>가 모성적 글쓰기로 나를 매혹시켰다면 이병주의 <지리산>과 <산하>는 내게 남성적 글쓰기의 호쾌함을 알려주었으며, 그 둘은 함께 내게 소설은 진실로 서사, 즉 이야기이며 “역사의 그물이 놓치고 있는 인생에의 따뜻한 애정과 기록”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몇 개의 문장과 낱말의 빼어남을 논하는 잔재주로는 따라갈 수 없는 어떤 삶들의 충실한 기록이 그 자체로 존재의 아름다움을 뿜어낼 수 있다는 희망도 보았다. 실패한 삶도 영화로 가득 찼던 삶도 참으로 작아 보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삶을 살아감으로써 결국 위대해진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얼마 전 그의 문학제에 참가하기 위해 나는 섬진강가 그의 문학비 앞에 서 있었다. 때는 봄이어서 섬진강가에 서 있던 벚나무들이 일제히 꽃잎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날은 마침 그의 기일 어름이었는데, 태어나는 날도 중요하지만 죽는 날도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벚꽃 잎들이 산화하듯 떨어지며 연록색 이파리에 가지를 내어주는 동안 섬진강변에서는 흰 배꽃들이 힘차게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으며 다만 강물만이 짙푸른 빛으로 늘 그렇듯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강물도 어제의 강물은 아니니, 원고료를 셈하고 사소한 비난 앞에서 분해 떠는 나의 남루하고 치사한 일상이 산 자가 죽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실패가 성공으로 변하고 성공이 감옥으로 쫓겨가는 역사 앞에 선 듯했다. 지리산의 어깨가 북풍을 막아주고 섬진강이 버선목처럼 곱게 휘도는 그 여울목에서 나는 <산하>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리고 있었다.

“누렇게 나락이 익어 있는 들 사이로 은빛으로 반짝이며 강이 흐르고 있었고, 멀리 갈수록 추상적인 담청색이 되면서 산과 산은 파도를 이루고 있었다.

아아, 산하! 이 땅에 생을 받은 사람이면 좋거나 나쁘거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모두 이 산하로 화하는 것이다. 이미 이종문은 산하로 되어버렸다. 살아 있는 사람은 일단 산을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시심과는 먼 곳에 있는 이동식의 가슴에 시를 닮은 구절이 고였다.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지금 그 글을 쓴 이병주도 산하가 되었다. 지리산을 오르내리던 젊은 파르티잔 청년들도 산하가 되었다. 권력을 쫓아 부나비처럼 떠돌던 현대사의 인물들도 산하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 앞에 붙어다니던 ‘회색 분자’라는 딱지도 함께 산하가 되었다.

“한이 많아 글을 쓴다”라고 그는 말했다. 1921년에 태어나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살아내면서 한이 없다면 아마도 그는 진정한 회색분자였을 것이다. 그러니 세상 앞에서 작아지지 말자고 그는 말하는 듯했다. 남루해지는 것만이 삶은 아니라고, 그는 말하는 듯했다. “세상에서 영원한 진실은 단 한가지인데 그것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것이다”라는, 젊은날 나를 뒤흔든 구절을 생각하며 나는 문학이 나아갈 길을 그에게 묻고 있었다. 그는 사진에서처럼 그저 허허 웃을 뿐이겠지만 나는 그의 말대로 “산 자”이니 산을 내려가 붓을 들어야 했다. 산다는 것이 별처럼 외롭고 마귀처럼 비참한 것이니, 글은 그 둘을 모두 기록해야 한다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배낭을 메고 섬진강가를 지나가던 젊은이 둘이 자기들끼리 웃으며 물었다. 이병주가 대체 누구예요?

나는 그런 그들에게 이병주의 소설들을 가만히 내밀고 싶다. 그들이 그것을 읽든 그렇지 않든, 혹은 읽었다 해도 소중히 여기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삶은 계속되고, 어떤 이는 산으로 가고 어떤 이는 저자거리로 간다. 봄이 한뼘씩 오르고 있는 지리산에는 작가의 말대로 파시스트에 대항했다가 거룩하게 깨어진, 그러나 끝내는 현대사를 구제한, 스페인 인민전선의 열정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평론가 김윤식은 <지리산>에 붙인 글에서 스페인 내란 때 죽은 가르시아 로르카의 구절을 인용했다. 나도 그러고 싶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런 바람의 노래들이 지리산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어디에서 죽고 싶으냐고 물으면 카탈루냐에서 죽고 싶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어느 때 죽고 싶냐고 물으면 별들만 노래하고 지상엔 모든 음향이 일제히 정지했을 때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유언이 없느냐고 물으면 나의 무덤에 꽃을 심지 말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다.”

그는 산하가 되었지만, 그가 남긴 책들은 지리산을 타고 오르는 봄처럼 다시 소생하고 있다. 생을 걸고 싶은 몇 안 되는 것들 중 문학만은 살아 오늘도 산하가 된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내고 있다. 이병주의 소설들에 푹 빠져 지낸 며칠 동안은 참으로 위대한 것과 참으로 사소한 것, 참으로 실패한 것과 참으로 성공한 것이 무엇인지 내게 묻는 시간들이었다. 황사로 뒤덮인대도 꽃은 피어나고 계절은 봄으로 가는데…. 나는 문득 다시 섬진강으로 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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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霓鄕***

2016.06.28 07:30

 

한국현대사의 중심을 관통해온 '지식인 이병주'가 언론인으로 교사로 보다는 소설가로 자신의 직업을 바꾸어야할 당위, 그것은 그 많은 이야기를 뱉어 내어야 했기 때문이겠지요?ㅎ

 

감옥에 갇힌 영어의 신세 중 자기를 '황제'로, 혹은 그곳에서 만난 수인을 '황제'로 매김하는(부제로 보아하니 ㅋ)

이 소설이 궁금하고 흥미가 솟습니다. 이제 펼쳐질 이씨 이야기 뿐아니라, 황제다운 침묵의 진면목이 궁금하네요.  

 

90년대 초 어느날 나는 친숙한 서점 사장님에게 '태백산맥'을 주문했지요.

대학 다니는 딸의 과제가 태백산맥 독후감 제출.ㅋ

그러나 뜬금없이 이병주의 <지리산>을 들고온 서점 사장님,

싫다는 소리 못하고 그냥 받아둔 그 책 7권은 지금도 나란히 책꽂이에서 잠을 잡니다.ㅎ

'지리산' 한 질이 일곱권이었는지 아니었는지도 모르는채.ㅎㅎㅎ

 

***┗동우***

2016.06.29 11:54

 

그럴겁니다, 예향님

마음 속 간직한 그 많은 이야기들 뱉어낼 場이 언론인이나 선생으로서는 한계가 있었을테지요.

 

절륜한 이병주의 박람강기.

내 책꽂이에는 그가 쓴 '에로스 문화사'라는 섹스에 관한 책도 꽂혀 있답니다. ㅎ

그렇지만 이 소설도 그러하거니와, 그의 소설 속에서는 호방한 그의 기질로도 넘지 못하는 시대상황의 벽이 문장의 배후에서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90년대 따님이 대학에 다니셨다면 예향님은 거반 우리 또래쯤이리라 짐작합니다.

함께 읽고 느낌 나눌수 있어 기쁩니다.

고맙습니다, 예향님.

 

***동우***

2016.06.29 11:43

 

<지식인의 사상적 알리바이를 전제해야만 일정한 표현영역을 확보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상흔...>

황석영의 이 대목, 이병주의 글에 대한 황석영의 적실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건대, 이념구조가 직극히 편협할 수 밖에 없었던 엄혹한 시절,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한 지식인의 한계를 그래도 이병주만큼 호방하게 넘나든 작가도 흔치 않습니다.

 

아래 글은 ‘한국 명단편 101’을 선정하면서 이 소설에 대하여 쓴 황석영의 글입니다.

좀 길지만 댓글란에 나누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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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 없다, 산하가 있을 뿐이다>

-황석영-

 

우리는 논의하다가 ‘이병주’를 지난 3권에서 빠뜨렸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몇 가지 원인이 있었는데, 그가 1921년생으로 마흔네 살이 되던 1965년에 중편 「소설·알렉산드리아」를 발표하면서 자기네 또래들 보다 훨씬 뒤늦게 등단했던 것이 그를 놓친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나이로 따지면 손창섭 선우휘 장용학 또래였으니 이미 1950년대의 전후작가군에 들 만한 세대였지만 등단이 늦어서 1960년대 말부터 작품 발표를 시작했고, 1970년대에 와서야 본격적인 활동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4·19를 분수령으로 전후문학적 특성이 정리되면서 이후 등장하는 한글세대의 ‘새로움’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세대가 겪었던 식민지, 강제징병, 해방공간의 좌우 이념갈등, 한국전쟁, 5·16쿠데타, 필화사건에 의한 투옥 등을 체험한 사람이었지만 자유분방하고 박람강기(博覽强記)한 기질로 ‘사상가연한 딜레탕트’라는 평판도 들어야 했다. 혁신계로 알려진 언론인이었던 그가 유신정부와의 인연으로 변화무쌍한 필력을 내보인 것이 그 다양한 관점 탓에 오히려 시대적 초점을 상실하게 했던 점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의 문학에 대한 마니아도 많고 학병세대로서의 위치도 중요하다’ 하여 뒤늦게 이병주를 재독하면서 나는 그의 과도한 이념적 추구가 오히려 그의 상처임을 간파할 수 있었고, 그림자처럼 작가의 초상이 반영된 인물들을 통한 ‘사상 이념에 대한 빈정거림이나 공격’ 등은 어쩌면 아이러니로 작용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이러한 복잡한 내면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지금도 지식인의 사상적 알리바이를 전제해야만 일정한 표현영역을 확보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상흔으로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계몽적 수사는 훨씬 뒤에 또다른 상처를 지녔던 이문열과도 비교되면서 그가 어찌하여 ‘역사와 시대’라는 주제를 맴돌면서도 끝내 핵심에는 도달하지 못했던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이병주는 1921년 경남 하동군 북천면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진주공립농업학교를 나와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문과를 졸업했다. 이 무렵에 그는 발레리 보들레르 등 시인들이며 위고, 발자크, 졸라 같은 작가들의 문학에 심취하여 프랑스어를 열심히 공부했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학교 주선으로 파리에 가서 일주일을 머물기도 했다. 그는 책상 앞에 ‘나폴레옹 앞엔 알프스가 있고 내 앞에는 발자크가 있다’는 글을 써붙였다. ‘소설에 의한 사회사라는 거창한 구상을 펼친 발자크’를 자신이 넘어야 할 산으로 삼은 것이었다. 연이어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재학중이던 1944년 학병으로 동원되어 중국 소주(蘇州)로 가서 일본군 제60사단 수송부대에서 보초병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해방이 되어 귀향해서는 1948년부터 진주농과대학과 해인대학(현 경남대학)에서 영어, 불어, 철학을 강의했다.

1950년 6·25가 터지고 인민군이 진주를 점령하게 되자 이병주는 연행되었고, 자신을 책임지겠다며 보증해준 친구의 ‘호의와 입장을 저버릴 수 없어’ 그들이 시키는 대로 연극동맹을 맡아 연극 연습을 했다고 한다. 술자리에서 그 무렵 이병주의 체험담을 들었던 언론인 리영희의 회상에 의하면, 남한 남단까지 내려왔던 인민군이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총퇴각을 하게 되자 인공치하에서 문예공작에 협력했던 사람들이 전부 지리산으로 모여들었다. 거기서 그들은 전황이 완전히 반전됐으니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를 토론했다. 이병주가 전하기를, 햇살이 따스하게 비치는 지리산의 깊은 어느 골짜기 빈터에 모여서 회의를 했다고 한다. 퇴각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갈 것인가, 모두 하산해서 투항할 것인가를 놓고 열띤 토론이 여러 시간 계속되었다. 이병주의 말에 의하면, 그런 절체절명의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이 그 신념과 이념에서 훨씬 강직하더란다. 북에서 내려왔던 문화예술동맹 소속 여성들뿐만 아니라 남쪽에서 활동하다 입산한 여성들까지도 한결같이 그랬다고 한다. ‘상황이 바뀌었다고 해서 투항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끝까지 사상에 충실해야 한다.’ 한편 남쪽 출신 남성 문예인들은 온갖 구실을 찾아서 해산하자고 주장했다. 토론의 결말이 나지 않자 위원장이었던 이병주가 타협안을 제시하여 각자의 선택에 맡기자는 데 합의가 이루어졌다. 다만, 누가 어떤 길을 택하든 다른 동지의 결정과 행동에 대하여 일절 비판할 수 없다. ‘각자의 결심에 따라 자기에게 충실하게 행동하자’는 다짐을 모두가 하고 그 자리에서 뿔뿔이 헤어졌다. 그렇게 해서 하산한 이병주는 그후 투옥되었다.

이병주가 검찰에 체포당했다가 불기소 처분을 받고 풀려나던 일화는 그의 장편소설 『관부연락선』에 묘사되어 있다. 그는 정치보위부에 연행당한 일과, 그를 구명해준 친구의 도움으로 연극을 하게 된 것이며, 자신이 죄가 있다면 여기에 이렇게 살아 있다는 죄밖에 없다고 말했다. “당신들은 나를 왜 죽지 않고 살아 있느냐고 추궁하고 있는 셈이다”라고 그는 검사에게 부르짖는다. “나는 내가 살기 위해서 아무도 속이지 않았고 아무도 상하지 않았고 아무도 나로 인해 손해를 입게 하지 않았다. 내 체면을 깎고 내 굴욕을 견디고 겨우 내 생명 하나를 건졌을 뿐이다.”

 

-아래 계속-

 

***동우***

2016.06.29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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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받음-

 

1954 년 이병주는 정식으로 문단에 나오기 전에 이미 부산일보에 소설 『내일 없는 그날』을 연재했다. 뒷얘기에 의하면 그는 부산일보의 주필이던 황용주와 친했다. 황용주도 불문학을 좋아하여 딸 이름까지 불란서의 ‘란서’라고 지었을 정도였다. 이병주가 “요즘 신문소설의 수준이 형편없다”고 개탄을 하자 황 주필이 “그럼 자네가 부산일보에 연재를 하면 어떤가?” 하여 그의 소설쓰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1955년 이병주는 부산 국제신보 편집국장 및 주필로 언론계에 나왔고 자유당 정권을 비판하는 사설을 써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황용주는 박정희와 대구사범학교 동창생이었고 박정희가 1960년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박정희와 황용주 이병주의 인연이 얽히게 된다.

1960년 4·19 이후에 전국적인 교원노조가 결성되고 이듬해에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혁명검찰부를 구성하고 교원노조운동을 용공으로 매도하여 소속간부들을 체포했다. 이병주는 공교롭게도 교원노조의 고문을 맡고 있었는데다, 때마침 국제신보에 ‘조국은 없다, 산하가 있을 뿐이다’ 또는 ‘통일에 민족 역량을 총집결하라’ 는 제목의 한반도 영세중립국화를 주장한 ‘시대를 너무 앞질러 간’ 논설을 썼던 터였다. 1961년 그는 다른 혁신세력과 함께 군사혁명재판소에서 십 년 형을 선고받고 이 년 칠 개월 후에 출감한다. 출소 직후 이병주는 수감생활중에 구상했던 소설을 일주일 만에 원고지 오백여 장 분량의 중편소설로 썼다. 그는 1965년 중편 「소설·알렉산드리아」를 『세대』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이병주는 마흔네 살에 첫 소설을 발표한 이후 스스로 ‘프로작가’를 자처하며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여, 칼럼 르포 잡문에서 대중문학 분야까지 거칠 것 없이 써냈는데, 언제나 서너 군데의 잡지 신문에 동시 연재를 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의 한 달 평균 집필량이 원고지 천 매가 넘었다고 하는데 단행본으로 나온 책만도 백여 권이 넘고 장편소설은 서른다섯 편에 이른다. 그는 한창 왕성하게 일할 때에 보조작가까지 두었으며 같은 무렵 엄청난 집필량으로 알려진 일본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와 비교되곤 했다. 따라서 일부 작품은 너무 대중적이거나 설익은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주요 장편과 소설집으로 『관부연락선』(1972), 『예낭풍물지』(1974), 『망명의 늪』(1976), 『지리산』(1978), 『바람과 구름과 비(碑)』(1978), 『산하(山河)』(1979), 『행복어 사전』(1980), 『그해 오월』(1984), 『소설 남로당』(1987) 등의 문제작을 내놓았다. 소설집 『망명의 늪』으로 1977년 ‘한국문학작가상’과 ‘한국창작문학상’, 1984년 장편소설 『비창』으로 ‘한국펜문학상’을 수상했다. 1990년 이병주는 복간되는 신 경남일보의 주필 겸 뉴욕지사장의 직함을 갖고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뉴욕의 교포 동네인 플러싱에서 그는 낮에는 역사 다큐 장편소설 『제5공화국』을 쓰고 저녁에는 부근 공원 산책이나 술집을 주유하면서 지냈다. 1991년 3월에 건강이 나빠져서 그는 귀국하여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는데, 그때 폐암 선고를 받았다. 주변에 그 사실을 숨긴 채 다시 뉴욕으로 돌아간 작가는 1992년 4월 속기사를 소개받기로 한 날, 이국땅에서 별세한다. 향년 71세, 호는 나림(那林)이었다. 2006년에 ‘한길사’에서 『이병주 전집』 전30권이 출간됐다. 전집이라고는 하지만 작가로서 이십칠 년 간 팔십여 권의 작품을 간행했었으니 ‘선집’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해방공간에서 젊은 지식인들이 겪은 좌우익 갈등을 그린 『관부연락선』(전2권), 처음으로 빨치산을 정면으로 다룬 『지리산』(전7권), 이승만정권의 탄생과 몰락을 압축해놓은 『산하』(전7권), 박정희정권 십팔 년을 기록한 『그해 오월』(전6권), 나약한 소시민을 통해 1970년대의 암울한 사회상을 드러낸 『행복어사전』(전5권) 등 장편 27권과 중·단편선집 3권으로 구성돼 있다. 2008년 4월 그의 고향 경남 하동에 ‘이병주문학관’이 개관되었다.

이병주뿐만 아니라 그 무렵에 같은 시대를 통과한 이들 또래는 좌 또는 우를 선택하거나, 어느 쪽에서도 용납되지 못한 채 좌절하여 비명에 죽거나, 어중간한 사이로 헤엄치며 생존하거나, 스스로 굴욕을 감수하고 현실에 적응해야 되었던 세대였다. 이병주와는 와세다대학 불문과 시절부터 부산 언론인 시절까지 막역한 친구 사이였던 황용주의 삶을 보더라도 모순적이고 이율배반적이다. 박정희와 대구사범 동창생이었던 황용주는 1960년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산에 부임해온 박정희와 재회하여 ‘군사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을 탈피하고 새로운 근대국가를 만들 시기가 왔다’며 쿠데타의 정당성을 역설하고 의기투합한다. 서울법대 교수 안경환이 쓴 「황용주와 박정희의 시대」에 의하면 황용주는 ‘쿠데타로 집권 - 강력한 산업화로 근대화 - 통일을 위한 남북불가침조약 체결’의 로드맵을 박정희에게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는 두 사람을 ‘형법이론에서 말하는 이른바 공모공동정범이 된 것’으로 말한다. 4·19혁명과 5·16쿠데타의 복합적인 시공간에서 황용주의 행로는 모순에 차 있다. 4·19무렵의 황은 자유당에 저항한 언론인이었고 부산일보가 4·19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사건을 특종 보도했을 때 그는 편집국장 겸 주필이었다. 이는 국제신보의 편집국장 겸 주필이던 이병주와 같은 노선이었다. 앞서 1958년 조봉암 사형사건 때에도 그들은 반정부 반자유당 논조를 보였었다. 총독부 하급관리의 아들인 그는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황상규, 김원봉의 영향을 받았다. 학병 강제징집 때 일본 반전그룹이 뿌린 ‘전쟁은 인류 공동의 적이다’ 같은 삐라를 보며 아시아의 평화를 꿈꾸었다. 그는 일본군을 탈출해 김원봉이 이끄는 광복군에 들어갔다. 그는 서구를 동경하면서 서구적 민주주의는 한국적 상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아시아 국가들은 독재를 해서라도 강력하게 정부 주도로 경제개발을 추진해야 한다는 확신 속에서 박정희와 의기투합했다. 그러나 황의 내리막은 1964년 11월 월간 『세대』에 「군사대치 해소와 통일정부」를 주장한 글을 기고했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되는 것으로 현실정치에서 쫓겨난다. 당시 박정희와 황용주를 ‘빨갱이’로 의심하던 야당이 문제를 제기했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박정희라는 배경을 과신하는 황용주를 제거했다는 설도 있었다. 황용주는 이후 공식정치에서 배제된 채 배려 차원에서 주어진 정수장학회 이사 자리를 맡았다. 일설에 의하면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와 부산일보의 강탈에’ 개입했다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도 한다.

한때 그와 같은 길을 걸었던 이병주가 다행이었던 것은 언론인에서 그 이웃이나 다름없는 문인으로 비켜났던 점이었다. 근년의 수소문에 의하면 이병주가 부역 혐의에서 구명된 것은 김종삼 시인의 도움이었다고 하는데, 그의 동생이 지리산 토벌부대 사령관 김종문 장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경제학자 박현채(『태백산맥』의 모델)처럼 실제 빨치산 전투부대원으로 복무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이병주는 문화공작대의 일원이었고 집결지에서 빠져나왔다고 하니까. 그도 결국은 5·16 직후 통일에 관한 앞지른 논설로 반공법에 저촉되어 삼 년 가까운 영오의 세월을 보냈는데, 아마도 그가 정치인이 되었더라면 또다른 우여곡절의 인생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이병주는 일찍이 고향 하동에서 1954년 제3대 민의원선거에 출마했었다. 그는 무소속으로 출마했는데 경쟁자 측에서 꽹과리를 치고 다니며 ‘이병주는 빨갱이 운운’하며 전단을 뿌려대서 선거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는 것이었다. 3등인 이병주 후보는 5836표를 얻었다고 한다. 이때에 목포에서는 김대중이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역시 낙선한다. 5대 때는 참의원 민의원으로 나뉘었고 이병주는 민의원으로 출마했다. 4·19 이후의 격동적 상황에서 그는 무소속이지만 진보노선을 표방하며 출마했는데 당선자의 1만 3천표에 비해 그는 또다시 3등이었지만 8천4백여 표라는 고무적인 득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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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밤 (어느 황제의 회상)> -後-

 

***동우***

2016.06.29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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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가 진주농림학교에 재학하던 무렵이었다. 당시에 진주중학의 종치기 사환으로 있던 김현옥은 자전거를 타고 진농에 들어가 공문 서류를 전달하려는데 진농 학생들이 그를 때리고 서류를 빼앗는 일이 벌어졌다. 상급생인 이병주가 그때 나서서 “이놈들아 너희가 저지르는 일이 무슨 죄에 속하는지 아느냐, 공무집행방해다. 빨리 서류를 주워 간추려 줘라”라고 말려주었다. 김현옥은 하동 부잣집 아들이며 공부도 잘하는 이병주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 남한의 못 배우고 백 없는 젊은이들이 모두 출셋길을 찾아 국방경비대에 입대하던 예에 따라 김현옥도 그후 군대에 들어간다. 그는 1961년 5월에는 박정희 쿠데타의 영관급 장교로서 독재권력의 중추부에 진입하게 되었고 나중에 서울시장이 되었다. 이를테면 엄청난 계급 변동이었던 셈이다. 그 무렵 어느 날 국제신문 주필실에서 이병주가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김현옥은 거수경례를 하고 나서 자신을 밝혔고 까마득한 옛날 자신을 도와주었던 일을 상기시켰다. 이병주가 옥고를 치르고 나왔을 무렵 그는 서울과 한강 남쪽 일대를 개발하는 전권을 가진 서울시장이 되어 있었다. 리영희는 자신의 책 『대화』에서 당시 얘기를 전했다. 김현옥은 이병주에게 온갖 경제적 특혜를 베풀었다. 이병주는 덕분에 서울 시내 여러 곳에 활동 근거지를 만들어 주택사업도 벌였으며 용산 청과시장을 개발하고 그 안에 자신의 저택도 꾸몄다. 리영희는 그와 술을 마시다가 취하면 으레 그의 집으로 가서 토론도 하고 언쟁도 하며 책도 보고 하다가 밤을 새우는 일이 많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 마음대로 돈을 쓸 수 있었던 그는 한량으로 노는데도 그랬지만 귀한 책을 사 모으는 데도 돈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병주는 같은 언론인 출신인 리영희 외에도, 소설가이며 조선일보 주필이던 선우휘, 서울시장과 내무부장관을 지낸 김현옥, 청와대 비서실장과 중정부장을 지낸 이후락과도 친했고, 훨씬 후배인 남재희, 민음사의 박맹호, 송지영, 학병세대인 극작가 한운사, 언론인 임재경, 손세일 등과 술친구들이었다.

남재희는 회상하기를, 이병주는 의복에서 술에 이르기까지 명품을 고집했고 1960년대 말에 자가용도 변변히 없던 시절에 기사 딸린 볼보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그의 주변에는 여인도 많았고 ‘부인도 둘 이상으로 많았다는 것은 뒤집어보면 그가 모질지 못하고 마음이 유했다는 말도 된다’고 지인들은 말한다. 일본어는 물론 영어와 불어에 능통했던 그는 책을 사 모으는 것도 사뮈엘 베케트라든가 당시에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던 미셸 푸코의 책도 사들였다고 한다. 이병주 자신의 회고에 의하면 김수영이 죽던 날 밤에 자신과 몇몇 문인들이 만나서 만취했고 이병주의 볼보 자동차 범퍼를 김수영이 발로 차며 술주정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김수영은 신촌에서 버스를 타려고 보도에서 도로에 나서다가 진입하는 버스에 치여 죽는다.

리영희가 이병주의 변화를 사회안전법이 공표되던 1975년으로 보고 있지만, 사실 그 조짐은 그보다 훨씬 앞서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때부터였다. 이듬해 1974년에는 박정희 부인 육영수가 피살되었고 유신 선포와 함께 민청학련사건이 일어났다. 이 무렵 그는 일본에서 『문예춘추』와의 인터뷰를 통하여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해명과 유신 정국을 보는 작가로서의 의사를 피력했고 국내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만 암암리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당시의 정부에게는 매우 도움이 되는 처사였을 것이다. 1975년 ‘사회안전법’이 공표되었는데 과거에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으로 저촉이 되어 형을 마친 자라 할지라도 전향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재심사를 받고 구속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때 이병주는 ‘사회안전법 제정이 만시지탄의 감이 있다는 식으로’ 칼럼을 썼고, 단편소설 「내 마음은 돌이 아니다」를 쓴다. 이제 리영희의 회상을 다시 살펴보자.

“이병주는 애석하게도 군사정권의 악법 중 하나인 ‘사회안전법’에 해당돼서 전향서를 공표하느냐, 안 하고 청송감호소에 수감되느냐의 기로에 서게 됐어. 이것은 일제시대에 조선인 공산주의자 또는 좌익인사들을 박멸하기 위해서 신문지상에 자신의 사상 전향을 공고하게끔 했던 수법을 그대로 따른 것이야. 그래서 1975년과 이듬해쯤에 걸쳐서 국내 신문들에는 ‘본인은 무지의 탓으로 무슨 당, 무슨 단체에 가입하여 국가와 사회에 해악을 끼쳤고, 경거망동했던 행위를 충심으로 반성하고 철저한 자기비판을 거쳐서 대한민국의 충실한 국민으로 탈바꿈하고자 그 뜻을 공표합니다’ 라는 따위의 글이 매일같이 게재되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어요. 이병주가 1975년 사상전향을 기점으로 해서, 급속도로 박정희와 군부세력에 접근했어요. 그는 박정희의 종신대통령제의 법적 기틀을 닦은 유신헌법이 선포된 어느 날, 박정희의 자서전을 쓰기로 했다고 나에게 말하더라고. 이병주에 대한 나의 우정과 기대가 컸던 만큼, 그의 입에서 이 고백을 들은 순간 나는 큰 방망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현기증을 느꼈어. 이때부터 나는 이병주를 멀리하게 되었고, 그후 완전히 결별했지요. (중략) 나는 그렇게 친했고 많은 문화적 영향을 나에게 미쳤을 뿐만 아니라 서로의 고뇌를 알던 한 지식인의 양심과 신념이 포악한 권력에 의하여 유린되어야 하는 비극이 가슴 아팠어. 그러한 반문명적 반인간적 참상과 얼마 동안 계속될지 모르는 어려운 기로에 선 한 지식인의 처지가 마치 나 자신일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못 견디게 서러웠어. 이것이야말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선택의 고통이지. 이른바 ‘자유는 형벌이다’라는 명제가 실감나게 와 닿더구먼.”

< 리영희, 『대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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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16.06.29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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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8 뒤에 신군부가 등장하고 나서 남재희는 이병주와 관철동에서 술을 마시다가 “그들이 나보고 정당을 함께하자더군. 그래 참신한 사람들이 하겠다는 정당에 나같이 참신하지 않은 사람이 끼면 되겠느냐고 했지”라던 이병주의 말을 회상했다. 이병주가 박정희의 ‘군사정변’을 비판적 역사의식으로 다룬 것은 세월이 지나간 1982년 『그해 오월』에 와서야 가능했던 것이다. 이병주는 그의 지인들에게도 차츰 타락한 것으로 비춰지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문학정신을 엿보기가 어렵게 되었고 대중적인 에로티시즘 주변을 맴돌거나, 이를테면 「대통령의 초상」에서 12·12를 옹호하는 입장을 보이더니, 전두환 대통령이 백담사로 피신할 때 낭독한 성명서가 이병주의 글이라는 것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사실 우리 또래들은 당시에 잡혀가고 잠수타고 정신없던 시절이라 이병주의 고뇌와 그의 작품에 눈길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내가 그를 뒤늦게 발견한 것은 아마도 1980년대 중반 무렵이었을 것이다. 조선자유언론투쟁위의 해직기자 신홍범이 출판사를 내어 고군분투하고 있었는데, 마침 경기도 광주에 칩거하고 있는 나를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두툼한 원고 뭉치가 쥐어져 있었다. 지난 시기에 특별한 체험을 한 사람의 수기인데 한번 읽어보고 소설로 재창작할 수 있으면 손을 보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신홍범은 내게 이병주의 『지리산』이라는 소설을 읽어보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의 이름도 알고 언젠가 1970년대에 이어령과 더불어 점심을 먹은 적도 있지만 그의 작품은 거의 못 읽었노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기를 『지리산』의 기본 줄거리가 이 사람의 ‘수기’에 의하여 이루어졌는데 본인 말로는 보여주었을 뿐인데 그가 ‘활용’해버렸다고 했다. 아무튼 나는 사흘에 걸쳐서 그 원고를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 글을 섣불리 손을 대거나 문학으로 치장하는 것보다는 한 시대의 ‘생생한 기록’으로 발표하는 것이 훨씬 독자들에게 어필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대로 전했다. 이것이 나중에 세상에 나오게 된 이태의 『남부군』이었다. 이것은 전쟁 이후 처음으로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체험한 사람이 직접 기술한 최초의 객관적 기록이었고, 이 길을 따라서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에 이르는 신경지가 전개되었다. 나는 그래서 당시에 이태의 기록과 비교하기 위하여 이병주의 『지리산』을 읽게 되었던 터였다.

“『지리산』은 광범한 시·공간적 배경과 사건을 거느린 채, 좌우 이념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방황하는 지식인들의 고뇌와 파란만장한 인생유전을 다룬 작품이다. 일각에서는 주인공인 박태영이 자주 드러내는 공산주의에 대한 환멸을 들어 단순한 반공소설로 취급하는 평자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좌우의 갈등 속에서 좌익 지식인 청년층에 초점을 맞추고, 박태영이 좌익에 환멸을 느끼지만 우익으로 전향하거나 우익을 옹호하지 않으며, 결말에 가서도 전향 대신에 죽음으로 삶을 마감하는 점 등은 당시의 정치상황에 비춰볼 때 높게 평가할 만하다. 임헌영은 이병주의 소설을 ‘분단문학의 원점’이라고 보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역사 허무주의와 영웅주의가 역사 해석에 깊이 작용하고 있어 과거 복원의 객관성이 충분히 유지되지 못했다’는 등 평가가 엇갈린다. (중략) 이병주는 스스로의 냉정한 평가대로 혼돈과 미제(未濟)의 시대를 살면서 ‘양지 쪽으로만 걷는 인간, 위난(危難)의 저편에서 피해가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삶은 격동의 현대사 속에 끼어 어쩔 수 없이 시대의 부하(負荷)를 온몸으로 감당해야만 했고, 그 삶의 안쪽에 고난과 비극의 무늬가 아로새겨질 수밖에 없었다.”

‘지식백과’ 이병주 편 중에서>

나는 이 작품이 무엇보다도 엄혹하던 1970년대 초반에 잡지에 연재되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이병주라는 작가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내가 한국일보에 『장길산』을 연재하고 있던 무렵인 1978년에 조선일보에 『바람과 구름과 비』를 연재하고 있었다. 그의 역사소설이 구한말 시대를 담고 있어 근대의 출발에 대한 원대한 기획이 있는 것으로 보였으나 입헌군주국을 세우기 위해서라는 뜻만 남긴채 한량적 풍류사(風流史)에 그친 감이 있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그의 몇몇 중단편과 『관부연락선』을 읽어보고 틈틈이 이념적 부재증명을 하려는 그의 노심초사를 엿보게 되었다. 그리고 일단 무엇인가 꺾인 1970년대 말에 가면 차츰 세속적인 쾌락이나 호사 취미로 기울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이제 「겨울 밤」을 살펴보자. 비교적 긴 이 단편소설은 1974년 『문학사상』에 발표 되었던 작품이다. 「겨울 밤」은 사회안전법이 공표되던 1975년에 발표한 「내 마음은 돌이 아니다」와 더불어 두 얼굴을 가진 쌍생아와 같은 작품이다. 「내 마음은 돌이 아니다」는 사상범으로 무기형을 받고 이십 년을 살다 출소한 장기수 노정필과 ‘나’가 소통하려고 애를 쓰는 과정의 이야기다. 언뜻 보면 노정필의 방어적 침묵에 대한 나의 맑스주의 비판은 마치 장기수와 전향담당자의 역할처럼 겉으로는 담담하지만 대결적이다. 노는 목공소에 나가 일하여 임금도 받고 맥주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며 백화점에서 소비도 하게 된다. 나는 그가 자본주의 경제체제 안에서 생산과 소비를 체험하는 것을 보면서 더욱 열정적으로 사회주의 사상과 체제를 비판하고, 착각을 신념으로 오인하고 있는 폐인이라고 그를 몰아세우기도 한다. 나의 이러한 열성도 결국은 노정필을 원하는 대로 이끌지 못하고 노정필은 사회안전법이 통과되고 난 후 “살기 위해 떠난다”라는 말을 남기고 죽음을 선택한다. 나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세울 의도는 아니었고, 더구나 자신의 사상의 우월성으로 그를 지배하거나 계몽하려는 데에서 나아가 그의 인간성을 회복시켜주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안전법이 공표되면서 만인을 위한 법은 개인의 구구한 사정과는 관계가 없다는 식으로 끝나버린다. 과연 그러한가? 내부에 품고 있는 생각을 형법적 처벌의 대상으로 삼는 일은 정당한가?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타인이 억지로 바꾸려고 하는 행위가 과연 인간성의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데서 오히려 서로의 인간성을 회복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자유와 인권이라는 세계사적 보편가치로서의 휴머니티이며 민주주의의 기본 내용이다. 여기서 이병주의 내면적 고뇌가 소설에서는 사회안전법을 비꼬는 ‘알레고리’로 반작용하고 있음도 눈치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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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16.06.29 11:46

 

-위에서 받음-

 

이보다 한 해 앞서 썼던 「겨울 밤」은 아직은 사회안전법이 저승사자처럼 그를 옥죄어오기 이전의 작품인데, 구조는 「내 마음은 돌이 아니다」와 똑같은 것으로 보아 후자가 전자를 뚜렷히 의식하고 연이어 쓴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겨울 밤」에는 ‘어느 황제의 회상’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소설의 첫 대목은 뭔가 신념 때문에 감옥에 유폐된 자라야만 스스로가 황제임을 깨닫는다고 의미심장하게 시작한다. 자기의 운명을 인류의 운명과 결부시켜 명상하는 황제다운 습성을 익히고 번거로운 생활의 늪에 분실해버린 역사상의 자기 좌표를 되찾아 황제다운 고독을 오만하게 침묵할 줄 알게 되기 위해서도 사람은 감옥이라는 궁전에 가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가 만나서 대화하는 사람은 뒤의 작품과 똑같이 이십 년 동안 감옥에서 살고 나온 노정필이다. 나는 학병 시절에 목격한 일본군 장교 오오니시의 칼에 참수되는 중국 청년을 회상하고, 온갖 국가주의 폭력을 미화하며 위선적으로 늙어간 오오니시의 후일담을 떠올리고 오히려 그 칼 아래에서 고요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던 견결하고 순수한 무명의 중국인 청년과 노정필의 완강한 침묵을 동일하게 바라본다. 나는 한때 감옥에서 노정필이 어딘가 다른 사동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그의 아우 노상필이 이 년 선배였던 것도 기억해낸다. 그러고는 동료 수인들의 다양한 행태가 지나가고 그 가운데 민족일보사건으로 사형당한 조용수의 일화도 끼어든다.

‘나’가 노정필의 집을 찾아가 북한에서의 권력투쟁으로 몰락한 남로당 재판과 시인 임화의 이야기를 쓴 마쓰모토 세이초의 『북의 시인』을 빌려주었는데 석상과 같이 침묵하고 있던 그가 책을 돌려주러 와서 “이거 사실인가요?” 하고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한다. ‘나’는 노정필을 경화된 맑스주의자로 보고 맑스주의 이외에도 생생하고 보람 있는 인생과 역사에 대한 인식이 있고 가치 있는 문학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거 세워보고 싶었다. 노정필은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다가 ‘나’의 공산주의 비판에 대꾸한다. 인간의 참된 자유는 대다수의 사람이 물질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한 연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나. 그런 전제가 없이 들먹이는 자유란 모두 잠꼬대라고 그는 말한다. 노정필은 ‘나’가 빌려준 소설집에 나오는 무기수가 다른 죄로 사형당하는 처참한 일화를 짚으며 그의 이름을 아느냐고 물었으나 ‘나’는 감옥에서 들었을뿐 이름은 알아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노정필은 그게 자기 아우의 일이었다고 말하는데 그가 ‘지옥을 보아버린 자로서 석상 같은 침묵’에 빠진 것이 이념의 고수 때문이 아니라 아우의 비극적인 죽음 때문이었다고 믿게 된다. ‘나’의 글쓰기는 기록자이자 목격자의 임무를 감당하려는 것이다. 글쓰기란 충실한 역사와 인간의 기록이며 목격자로서의 증언이라고 한다. 그러나 노정필은 그의 글이 기록자가 쓴 기록이 아니고 시인이 쓴 시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기록이 되려면 시와 결별해야 하고 자기 속의 시인을 추방해야 할 거라고 말한다. 여기에 ‘나’는 기록으로 문학이 가능하자면 시심 또는 시정이 기록의 밑바닥에 지하수처럼 스며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반발하면서 나는 기록이자 문학을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때 ‘나’는 중국에서 자신의 위기를 구해준 사동수라는 중국 소년의 용기와 의지력을 떠올린다. ‘나’가 소년을 생각하는 것은 인생을 생각한다는 뜻이고, 용기를 생각한다는 뜻이며, 기필 내 인생을 보람 있게 해야 한다는 다짐으로 된다.

또한 개인적으로 온갖 인생의 간난고초를 겪으며 천진하게 살아온 친구를 안양에서 만나고 그가 고해할 신부를 찾아 교외까지 나왔다는 걸 알게 된다. 그는 자기의 천주를 친구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기껏 이런 말 정도다. “자네 모든 것이 다 좋은데 꼭 한 가지 탈이 있어. 그건 천주님을 모르는 일이다.” 노정필과 이 친구를 비교해서 우월을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적인 사람을 좋아하기 마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천주교를 믿을 생각은 없지만 그 친구의 천주만은 믿고 싶은 생각이 있다. 인간이 보다 인간적일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는 천주란 기막힌 존재가 아닌가.

결국 이 작품은 ‘글쓰기’에 대한 옹호이자 변명이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나는 언론인 리영희와 남재희의 이병주에 대한 회상을 보며 둘 다 옳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둘 다 글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병주에게 ‘문학’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기도 하고, 문학이 있어서 그의 실패도 의미가 있던 거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용서된다는 뜻은 아니고, 그의 모든 작품이 빛나는 것이 아님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많은 책들이 허섭스레기 따위일지도 모르지만 몇몇은 역시 그의 당대 속에서 이정표처럼 뚜렷하게 존재한다.

나는 망명 기간에 베를린에 체류하다가 1991년부터 1993년 초까지는 뉴욕에 머물렀다. 맨해튼에 옮기기 전에 플러싱의 베이사이드에 살고 있었는데, 부근에는 공원 가녘의 숲 모퉁이에 아담한 바가 있었다. 우연히 아는 이와 술집에 들어갔다가 한국인 주인마담과 인사하게 되었고 그녀는 내가 앉은 자리가 ‘이병주 선생님’의 단골 좌석이었다고 말해주었다. 카운터의 안쪽 끝이고 바로 옆으로는 아직도 노을의 잔영이 남은 하늘과 숲이 내다보였다. 망명자라는 것은 스스로 조심해야 하고 특히 한국에서 오는 친구들을 배려해야 되었다. 나를 만나는 일 자체가 그들에게는 위험한 짓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병주가 내면으로는 평생 망명자였으리라고 짐작해본다. 그가 뉴욕까지 가서 『제5공화국』을 쓰려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예의 객관적 거리가 필요했던 것인지, 지긋지긋한 코리아의 현실로부터의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싶었던 것인지? 그맘때는 이미 이병주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 고국에 묻힌 뒤였다. 나는 주인마담이 잠깐 돌아서서 휴지로 눈가를 훔치는 걸 보았다. 우리는 그가 어땠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기억이란 것이 있기 마련이고 시들어 치워버린 베란다의 화분도 남은 자리가 오래간다.

이상을 가슴속에 시들지 않게 간직한 채 현실주의자가 될 수는 없는 걸까?

 

++++

 

***하늘의소리***

2016.07.02 18:11

 

이병주.

기자로 작가로, 전설과 같은 이름이었지 

특히 부산사람들에게는.

감사!

 

***┗동우***

2016.07.03 04:12

 

읽어 주셔서 감사!

 

***동우***

2016.06.30 04:22

 

황석영은 지식인의 글쓰기에 있어서 '사상적 알리바이'운운하였다.

그런데 그 알리바이를 피력해야 하는 상대는 우(右) 뿐 아니라 좌(左)에 대하여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외형(外形)은 '나는 빨갱이가 아니노라'였지만 내면적으로는 "그러나 그 이념을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노라"는 스스로를 향한 필사적 자기변명.

순수(純粹)한 이념이야 얼마나 아이디얼한 것인가.

그에 대한 순정(純情)은 가슴 속 한구석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생각건대, 전향한 지식인에게는 그 자의식의 어떤 부분은 회색분자적 고뇌가 없지 않았을듯 하다.

노정필을 대하는 어느 부분의 이병주처럼.

 

<“기록은 철저해야만 비로소 기록이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소? 시인의 감상은 그것이 아무리 훌륭해도 기록은 될 수 없을 겁니다. 기록이 되려면 시와 결별해야 하오. 기록자는 자기 속의 시인을 추방해야 할 거요.” 나는 노정필씨의 이 말에 얼떨떨했다. 기록이 문학으로서 가능하자면 시심(詩心) 또는 시정(詩情)이 기록의 밑바닥에 지하수처럼 스며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문학이론이었다. 그래야만 설득력과 감정이입이 함께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노정필은 사실에 대한 시적 정서적 왜곡을 힐난하는데, 사회주의의 기록은 사실적으로 철저한 것인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것

모자란 내 지식으로, 거기에 팩트는 아무런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 

사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념을 위한 프로파간다에 복무한다면 그걸로 족하다.

오로지 사회주의적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계몽과 고취에 기여하면 된다는 것이 이를테면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다.

어제 어깨동무하고 찍었던 사진속 혁명동지가 어느날 홀연이 지워져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이 되어 버리는건 예사.

얼마전 상영된, 영국인이 찍은 북한영화 '태양 아래서'를 보라.

조작으로 점철된 북한사회의 적나라한 모습.

연출로 꾸며진 진미라는 소녀의 일상, 그것이 그들에게는 다큐멘터리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회주의 리얼리즘보다 시적 서정적 데포르마숑이 훨씬 팩트에 근접한 것이 아닌가.

 

돌이 된 사나이 노정필.

 

그러나 순정한 이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란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머릿속은 하나의 이상(理想)에 골몰할지라도 먹고 싸고 자고 섹스도 하는데 생각 한조각은 내어주어야 한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인간을 쫓아내고 농장의 지배자가 된 돼지의 계명을 떠올려보라.

 

역사가 어디 모순끼리의 대립에 의하여 변증법적으로만 진행되던가.

역사는 당대의 삶의 자리일 뿐이다.

공산주의 실험이 어디 소비에트적 인간성 하나 창출해 내었던가 말이다.

 

<“나는 요즘 어떤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 그 이상은 묻지 말게.” 그의 웃음은 쓸쓸하다기보다 수줍었다. 그 친구는 이 년 전 상처를 했다. 아직 재혼할 생각도 없어 보였는데 어쩌다 어떤 여자를 사귀게 된 모양이었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슬그머니 감격했다. 인간의 성실이라는 것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인간의 성실이란 원래 그런 정도의 것이 아닐까. 사랑을 하고 죄를 느끼고 그러고는 고해를 하고, 고해를 하고도 사랑을 하고 또 죄를 느끼고 고해할 신부를 다음다음으로 찾다가 보니 서울의 신부가 바닥이 났다. 안양까지 신부를 찾아가야만 했다......노정필씨와 이 친구를 비교해서 우열을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적인 사람을 좋아하게 마련이다.>

 

나도 인간적인 사람이 좋다.

 

***霓鄕***

2016.06.30 06:49

 

'아마 하늘은 비가 오기 위해서 있고, 거리는 교통사고를 있게 하기 위해서 있고,

집은 그 속에서 사람이 죽기 위해서 있고, 성공보다도 빛나는 실패를 위해서 인생은 있다.

기록하지 않기 위해서 기록이 있고, 시를 쓰지 못하기 때문에 장황한 기록이 있다.

용광로의 정열이 없으면 빙화하는 정열이라도 있어야 한다.

때론 허무를 보다 정치(精緻)하게 하기 위해서 천재(天才)를 필요로 할 때가 있다.'

 

새벽잠은 비 쏟는 소리에 깨어났더랍니다.

며칠새 더위는 깊어지고 공기는 매마름을 더하더니

이토록 쏟아지는 비라니...

비, 참 반갑습니다.

 

오늘은 '빗속에 서서 우는 아이'의 눈길 저 편으로 오는

무지개 곱게 그어진 꿈조각이라도 줍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인간적인 사람이 좋다.'

'나는 인간적인 사람이고 싶다.'

 

그냥... 생각해 보았답니다.ㅎ

 

사이버, 어려운 이사까지 하시며 선물해 주시는 글들, 동우님께 깊이 고마워합니다.^^

 

***┗동우***

2016.07.01 04:57

 

예향님

빗소리에 깨어나는 새벽잠.

새벽 창문 두드리는 빗소리는 참 정겨울텐데, 남녘에는 가는 빗방울 몇 뿌리고는 그만입니다.

 

한겨울 눈도 그리 인색하더니, 비 대신에 봄의 강설(降雪)도 괜찮을텐데.ㅎ

눈 타령이라니.

뜬 구름 없는 소리였습니다. 하하

 

뜬 구름...이라

예향님 알고 싶으시다면 나중 설명드립지요. 하하.

 

***野草***

2016.06.30 07:35

 

신문사 일했을 적 이병주 선생님은 나와도 인연이 없지 않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잘 모를테지만, 선생의 글 각광받을 시대가 다시 도래할겁니다.

고맙습니다. 동우님.

 

***┗동우***

2016.07.01 04:57

 

언로에서 일하셨으니 이병주 작가와 인연이 없을수 없으시겠지요.

말씀처럼, 한 시대 이병주의 도도하고 호방한 글들 다시 회자될 날 있을터..

읽어주셔 고맙습니다, 야초님.

 

***설레임***

2016.07.01 07:15

 

이병주

접해 보고싶은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 시절 그시간

환경이 만들어 낸 아니 그 시절을 지나면서 변화하는 모습 저에게는 애잔하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아려오는 가슴도 있습니다 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어제는 본 병원 종합검진이 있어 하루종일 이곳저곳에서 검진을 하다 날이 저물어 사촌동생집에 와서 하룻밤을 잤습니다

어디서나 잘 자는데 낯선곳에서 첫날밤을 못 자는 버릇이 있어서 자다깨다 반복하면서 이 시간에 이르렀습니다

검진결과는 물론 굿이구요

삼개월 후 보자는 말씀

후후, 안도하면서 오늘 양평병원에 들어갑니다

시간은 정말 거짓없이 잘 흘러 칠월의 하루를 맞이하고

덧없이 흐르는 시간이 애석하기만 합니다

정상적인 제주에서의 일상이라면 바쁘게 돌아가고 있을텐데 저에 바늘은 아주 느릿하게 차분히 가볍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완전히 내려놓는 연습중이랄까요 ㅎ

맘만 그렇지 늘 머릿속은 많은생각으로 내려놓지 못하고 겉만 떠돌고 있는 느낌입니다

나를 비우는 연습 ㅎ ㅎ

저가 저를 비웃게 됩니다

 

***┗몽이***

2016.07.01 07:44

 

설레임님께 이야기 드리고팠는데, 그 글이 그만 아래로 내려갔네요.ㅠㅠ

 

***몽이***

2016.07.01 07:41

 

감히 이곳에 말씀올려도 좋을런지요.

동우님의 이 방에서 자주 뵈올 수 있어 제게도 마음가는 셀레임님,

의학의 발달로 이제는 病같은 건 정말이지 깊이 걱정할 것이 아닌듯합니다.

견디고 기다리고 참아내면 그 끝은 완쾌로 오는 확신을 보여주는 의술을 믿습니다.

 

설레임님!

님의 그 건강하고 활달하신 사진 속 모습에서 100세 보장!!!이 읽혀졌지요.

잠시 지나가는 지금의 아픔, 곧 지나간 일이 될거예요.설레임님 말씀처럼 '이 또한 지나갈 일'

 

애써 자신을 비우려하기보다, 즐겁게 기쁘게 오늘의 이순간을 축복으로 느끼시며

설레임님답게 시간을 채우셨으면 하는, 애정어린 말씀 여쭈어도 될런지요.

 

몇번 이런 소식 접하고, 설레임님을 위한 마음의 기도 드렸었는데

오늘은 이렇게 용기내어 감히 입밖으로 내어 봅니다.

 

힘내세요.

설레임님!!!

 

(비밀글 설정이 되질 않네요.ㅠㅠ)

 

***┗설레임***

2016.07.01 11:18

 

누구신지 잘 모르지만 너무 감사합니다.

눈물이 흐릅니다.

 

***┗동우***

2016.07.02 03:25

 

설레임님.

검사결과 당연히 '굿'

말씀하시는 설레임님도 '굿'이고

그 말씀 듣는 내 귀도 '정말 '굿'입니다.

내 블로그로부터 설레인님의 근황을 알게 되신 몽이님도 기쁘게 '굿'이라고 하시고.

 

고맙습니다.

축하합니다.

 

***하늘의소리***

2016.07.04 08:50

 

왔노라.보았노라.가노라.

왜 삭제해서 궁금증 낳게 하는기요!

 

***┗동우***

2016.07.05 04:32

 

하늘의 소리님.

<리딩북> 메뉴에 全文을 친구공개로 올려놓았습니다.

하늘의소리님 daum 아이디 만들어 친구 신청하여 주시면 <리딩북>메뉴가 짠하고 나타날겁니다.

 

 

 

-독서 리뷰- 

  

<쥘부채>

-이병주 作-

 

***동우***

2016.08.22 04:08

 

'이병주(李炳注, 1921~1992)'의 '쥘부채'

파일 눈에 띄길래 얼른 업어와 올립니다.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섬진강변에 있는 이병주의 문학비에 새겨진 문구입니다.

 

이 소설, 역사도 신화도 되지 못한채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스러져간 슬픈 야사라고나 할지...

어느 남녀의.

 

쥘부채에 새겨진 한글 이니셜.

ㄱ,ㄷ,ㄱ과 ㅅ,ㅁ,ㅅ.

 

3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eunbee***

2016.08.22 19:03

 

<쥘부채>

아주아주 오래전에 TV문학관이라는 티비드라마로 보았던 기억이 나요.

나는 '쥘부채'라는 단어의 의미도 그때 처음 알았구요.

잔잔한 감동을 주는 훌륭한 드라마였고, 좋은 작품을 이렇게 티비로 보는구나,하면서

매일?(단일편으로 끝났었나? 암튼 티브이문학관 시간은 기다렸으니)

그 시간을 기다리던 기억도 있구요. 그러나 이제쯤 거의 잊어버리고 희미해진 내용.

올려주시는 원작 매매읽으면서 이병주님의 문학세계를 더듬어 볼테어요.

늘 고마워요. 동우님.

 

무더위.

처서라는 절기도 무색하네요.

쫌만 쫌만...참다 보니 한 달여가 넘을 듯.ㅠㅠ

 

아, 그런데 저 이니셜, 그건 주인공들의 이름이었다는 건 기억나요.ㅋ (혹시 아닌가??? ㅋ)

 

***┗동우***

2016.08.24 04:59

 

은비님.

이 소설, TV문학관의 드라마로도 만들어졌었군요.

 

ㄱ,ㄷ,ㄱ과 ㅅ,ㅁ,ㅅ.

맞아요, 강덕기와 신명순의 이니셜.

아마 드라마는 이 소설의 피상적 주인공인 그 두사람에 초점이 맞추어져 만들어졌겠지요?

 

정말 올 여름 참 끈질기기도..

처서가 지났는데.

 

***동우***

2016.08.24 03:34

 

이 소설은, 1969년 세대지에 발표한 늦깎이 소설가 이병주의 초기작입니다.

 

설악산에서 조난 당한 사람들에게서도 질투 비슷한 감정이 일어나는..

이념구조가 지극히 편협하였던 그 시절, 지식인의 스노비즘적 자의식이 느껴집니다.

 

4.19... 종교...문학... 당시 떠들썩하였던 위장귀순한 간첩 이수근의 이야기도 등장하는 등.

소설의 행간에서, 시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그리하여 시원스레 토해내지 못하는 작가 심중의 일단이 읽힙니다.

 

마지막 분 올리고 계속...

 

***동우***

2016.08.24 04:56

 

이병주의 쥘부채

마지막분 올리다 보니까, 글쎄 뒷부분이 빠져있지 뭡니까?

책 펴놓고 자판 두드려 10여 페이지를 채워 넣었습니다.

하하, 공치사(?ㅎㅎ) 겸하여 말씀드립니다.

 

강덕기와 신명숙.

청실 홍실, 부채를 펴면 나리꽃에 머리를 반쯤 묻고 있는 나비가 그려져 있고, 꽃에는 ㅅ,ㅁ,ㅅ이, 나비 날개에는 ㄱ,ㄷ,ㄱ이 깨알만 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남자는 사형당하기전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죽은 후라도 명숙씨를 사랑한다.'라고.

만기를 3년 앞두고 감옥에서 죽은 신명숙의 간절한 염원.

'나는 죽어 꽃이 될 테니 당신은 죽어 나비가 되어 오라'는.

 

시대사의 질곡 속에서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한쌍의 사랑과 원념.

 

나는 과거사 청산이라는 말이 참 우습게 들리는 사람입니다.

인간사 지난 일이 청산한다고 청산되어 지는겝니까?

시나브로 묽어지고 색이 바래어 갈 뿐이지요.

 

이 소설, 작가의 여러 소회가 느껴집니다만.

 

<어느덧 해가 기울었다. 박명의 시간이 주위를 에워쌌다. 전등이 꽃피기 시작했다. 유 선생의 의견에 의하면 이 시간이 가장 이름답다고 했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시간은 지혜의 시간이라고 했다. 어둠을 비 추는 전등이 이 시간에만은 꽃의 역할을 한다고 했다. 이 시간은 또 노인의 주름살을 밉지 않게 하는 시간이며 초로의 잔주름을 뵈지 않게 하는 시간이며 청년의 미숙함이 나타나지 않는 시간이며 승자의 뽐냄도 패자의 억울함도 노출되지 않는 시간이며 미녀의 미도 추녀의 추도 발언권을 잃는 시간이며 만상이 제대로의 품위와 가치로서 나타날 수 있는 시간이라고도 했다. 이런 시간 속을 450만이 붐비는 하계를 향해 내려오는 동식의 그 모습은 자라투스트라를 닮아 고고했고 그 가슴엔 자라투스트라의 외침이 은은하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진실로 인간은 더러운 강물과도 같다. 스스로를 더럽힘 없이 더러운 강물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모름지기 바다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대니보이***

2016.08.24 13:11

 

동우님.

꼭 읽고 싶었던 소설이었습니다.

역사의 질곡.

한반도 산산하하 곳곳에 묻혀있는 쥘부채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병주 작가님의 작품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염치없이.

정말 동우님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늦더위에 건필하시기를.

 

***┗동우***

2016.08.25 05:04

 

반갑습니다, 대니보이님.

 

옳으신 말씀.

무릇 기하(幾何)리까, 한반도 근세사의 격랑 속에 이름없이 소문없이 스러져간 쥘부채들이.

내게도 쥘부채의 사연 없지 않겠습니다그려만..

 

대니보이님.

따순 인간성들은 그나마 비극적 역사의 한조각 구원일듯 싶습니다.

빨갱이 조카의 주검을 거두어주는 이모, 형의 원혼을 달래보려 안간힘쓰는 동생. 쥘부채를 태우면서 섭리의 기운을 불러일으키려 하는 동식...

 

이병주 작가의 작품들, 재고는 없습니다만 파일 구해지면 또 올립지요.

고맙습니다, 대니보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