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분홍빛 커튼> <립 밴 윙클>
<진홍빛 커튼>
-바르베 도르빌리 作-
***동우***
2015.04.11 04:46
바르베 도르빌리 (1808~1889)의 '진홍빛 커튼'
어설픈 듯, 묘한 분위기의 소설입니다.
다음은 이문열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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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 안되는 과거의 길고 쓸쓸한 여운>
-이문열-
회상은 시간이 파괴해버린 과거를 기억으로 재생하는 일을 말한다. 모든 소설은 본질적으로 자전적이듯이 또한 회상적이다. 우리가 편의상 귀향소설이라 부르는 것도 크게는 회상소설의 범주안에 들어갈 것이다.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은 조만간에 어떻게든 해석된다. 그리고 그 해석에 따라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기억 속에 저장된다. 그런데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해석 안되는 과거가 있다. 분명히 일어났으나 그 의미는 종내 밝혀지지 않은 채 의식 속을 떠도는 사물의 기억이 그러하다.
브라싸르 자작은 진홍빛 커튼이 쳐 있는 방과 그 속에서 일어났던 일을 끝내 해석하지 못한다. 알베르트의 도발적인 행동에서 그 뒤에 이어지는 기이한 정사며 돌연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부인물인 일인칭 화자의 어렴풋한 암시 외에 해석의 단서는 거의 없다. 심지어는 연대장에게 맡기고 떠난 뒤처리며 후일담조차 온전히 미지로 남겨져 있다.
그러면서도 그 과거가 브라싸르 자작에게 미친 영향은 오래고도 깊어보인다. 거의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야 할 만큼 길고 생생한 서두의 약전은 분명 열일곱의 소위가 겪었던 해석 못할 과거와 연관이 있다.
무모할 정도의 용감성을 지녔으면서도 위계질서에는 끝내 승복하지 못하고 일탈한 군인, 멋쟁이며 난봉꾼, 허무주의적 호사가로서의 남은 생애가 진홍빛 커튼과 무관한 것이라면 거기 대한 화자의 긴 서술은 이 작품의 사족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홍빛 커튼 뒤에 있는 과거는 해석되지 못했기 때문에 브라싸르 자작의 기억 속에 더 선명하게 각인 되엇을지도 모른다. 열일곱의 나이 뒤에 숨어 해석을 포기하고 그 해결까지도 상관에게 미룬채 달아나고 말았던 그 사건은 그 때문에 더 속깊은 상처로 그의 의식에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브라싸르 자작의 분방하고 요란스런 나머지 삶은 그 과거를 해석하기 위한 무의식의 노력은 아니었던지. 그 동안에도 그의 보이지 않는 상처는 끊임없이 피흘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지.
작가 바르베 도르빌리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반낭만주의, 반자연주의 작가이다. `장발장`으로 널리 알려진 빅토르 위고와 동시대에 살았던 그는 ‘동전 몇 닢에 회개하고 몇 시간씩 양심과 싸우다가 개과천선하는 그런 인간은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며 위고식의 낙관적이고 도덕적인 세계관에 맹공을 가했던 작가로 유명하다.
사교계의 남성이나 귀족 여인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도르빌리 소설의 특징은 일상에서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의 위악적인 모습, 순간적으로 포착되는 인간의 악마적 속성을 살짝 열려진 창틈을 통해 들여다보듯 파헤치는데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진홍빛 커튼`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 ‘마녀들’에 수록된 소설이다. ‘마녀들’은 어차피 천상의 순결함과 악마의 모습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을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담고 싶어한 그의 작가적 욕망을 선명하게 보여준 작품집이다.
그러나 그의 소설이 악을 미화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면서 ‘마녀들’이 재판에 회부되고 초판본 4백 80권이 압수되는 필화사건을 겪기도 했다.
당시 사회적으로 유행하던 살롱을 들락거리며 탁월한 논객으로 이름을 떨쳤던 그는 보들레르, 발자크와 특히 친밀한 교분을 쌓으며 사회적으로 마찰을 빚던 그들의 작품을 적극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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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 밴 윙클>
-워싱톤 어빙 作-
***동우***
2015.05.15 04:54
워싱톤 어빙 (Washington Irving 1783~1859)의 '립 밴 윙클'
마누라에게 쥐어사는 공처가, 성격적으로는 좀 문제가 있지만 순박한 사람입니다.
산에 올랐다가 도끼자루가 썩어버렸네요.
하룻밤새 20년이 흘러버렸군요.
아내로부터의 자유를 얻었지만 아내는 죽고 옛 세상을 잃어버렸습니다. ㅎ
다음은 이문열의 해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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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상상력의 서구적 형상화>
-이문열-
우리는 옛부터 시간의 상대적 진행을 극대화한 설화에 익숙해 있다.
시간의 진행이 현저하게 빠른 어떤 특정한 공간에서 현실로 복귀했을 때에 받게 되는 충격을 노린 것으로 그 충격의 내용은 주로 시간의 파괴력과 연관된 것이 많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지 모른다.'는 속담을 남긴 옛 전설이나 무릉도원의 설화 같은 게 그러하다.
[립 밴 윙클]은 그런 동양적 상상력을 서구적으로 형상화한 특이한 작품이다.
립이 다른 시간궤를 경험하고 자신의 시간궤로 되돌아오게 되는 과정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설화에 매우 닮아있다.
그러나 그것을 형상화하는 방식이나 주인공에게 남겨진 충격의 흔적은 아주 다르다.
그 차이는 먼저 서술과 묘사에서 드러난다.
동양의 설화는 애매한 시대와 추상적인 인물들에 의해 진행되는데 비해 이 작품의 주인공과 시대배경은 구체성을 띠고 드러나며 묘사도 아주 사실적이다. 그것은 어쩌면 세련된 현대의 단편과 정제되지 못한 민담의 차이일 수도 있다.
두 번째 차이는 다른 시간궤에 속한 사람들의 초월성에 대한 해명에 있다.
동양의 설화에서는 그들이 신선이거나 자연의 특혜를 받은 이들, 혹은 시간의 파괴력도 어찌해볼 수 없는 한이나 비원을 품을 이들 등으로 그 해명이 시도되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왜 초기 네덜란드계 이민들이나 헨드릭 허드슨 선장과 그 배 반월호의 선원들이 시간을 초월해 나타나게 되었고, 또 왜 그들의 공간에서는 시간이 그렇게 빨리 진행되는지에 대해 설명이 없다.
서구의 근대문명이 초월성의 논리에 약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독자의 상상력에 부과하는 작가의 숙제일까.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아무래도 그 경험의 충격이 주인공에게 남긴 흔적일 것이다.
동양의 주인공들은 그 충격으로 자신들도 초월을 지향하게 되거나 최소한 그 초월적 공간을 다시 찾아가려고 애를 쓰고 그 과정에서 흔히 현실과의 갈등을 빚는다.
그러나 립에게는 그런 노력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거니와 오래잖아 되찾은 현실과 조화를 이루며 살게 된다.
그게 서구인의 현실지향적 특성이 반영된 것이라면 그 점만으로도 이 [립 밴 윙클]은 소설공부를 하는 이들에게 눈여겨 봐두기를 권할 만한 작품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미국 독립 초창기인 1783년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뉴욕에서 성장한 어빙은 19세 때부터 사회풍자 기사나 극평을 신문에 기고하기 시작, 1807년에는 직접 잡지를 창간해 자신의 글을 싣기도 하는 등 매우 진취적이며 개척정신이 강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상사 주재원과 공사관을 거치며 영국 스페인 등을 두루 여행한 그는 자신의 폭넓은 경험을 살린 작품 [스케치 북] [알함브라 전설] [대초원에의 여행]을 발표해 성공을 거두었다.
일찍부터 골드스미스 등 영국 작가에 심취해있던 그는 단아하고 로맨틱한 작품들로 명성을 얻었는데 반면 당시에 강력히 대두되던 미국 국민문학에의 요구를 외면해 문단에서 외톨이가 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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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nbee***
2015.05.15 19:43
내가 어릴 적, 아마도 중학교 즈음일까, 오빠가 빌려다준 책 '립 반 윙클'
그림도 곁들여 있는, 나는 동화책이라고 생각하고 재밌게 읽은 책.
이곳 동우님의 서재 리딩북에서 다시 꺼내 읽고 있으니
마치 어린날의 나로 잠시 돌아갔다 온듯 아련한 그리움과, 그기분에 얹힌 묘한 즐거움이 있어요.
잔소리쟁이 아내
만사태평 립 밴 윙클
산 속에서 술에 취해 한 잠 자고 났더니... 어언 20년이란 시간이 뚝 잘려나가고, 아니 휘리릭 지나가 버리고...
옛날 이야기로 읽혀지는 엊저녁의 소설읽기는, 내 옛시절의 한 페이지를 들여다 보는 향수어린 시간이기도 했어요.
립 할아버지가 품에 안은 손주의 내음새 같은 내 어릴적의 향수.ㅎ
고마워요. 동우님!!
***동우***
2015.05.16 05:10
립 밴 윙클,
나는 처음 읽는 소설인데 벌써 옛날에 나온 책이었군요.
책 귀하던 그 시절 대개는 대본점에서 빌려다 보았지요.
나도 아련한 기억이 있습니다.
재미있거나 슬프거나 인상깊게 읽었던 책의 기억 속에는 그 내용만이 남아있는건 아니지요.
그때의 분위기나 환경, 사람들 그리고 느낌의 기억들..
정능, 미아리 쪽 대본점에서 빌려다 장판 방바닥에 배를 붙이고 함께 읽었던.. 형과 동생의 모습도 아스라하게 떠오릅니다.
도끼자루 썩는줄 모르고 세월을 보내는, 도원경 무릉도원.
우리는 주로 바둑같은 도락적 도취를 빗대어 말하지요.
림 밴 윙클은 구주회(옛날의 볼링같은 게임이라고 합니다)놀이보다 술에 취하여 세월이 흘렀지만. ㅎㅎ
고마워해서 고마워요, 은비님!
-독서 리뮤-
<두 소몰이꾼>
-S.W 스코트 作-
***동우***
2015.08.29 04:52
황석영 선정 한국명단편 101은 일단 접겠습니다
그리고 월터 스코트(1771~1832)의 두 소몰이꾼을 두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월터 스코트경하면 대번에 '흑기사'(아이반호)가 떠오르지요.
소설 보다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로버트 테일러가 출연한 영화로.
영국이라는 나라.
좁은 땅덩이에 잉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의 네 독립된 지역이 모여 유나이티드 킹돔이라는 국가를 이룬 나라.
지방마다 기질도 완연히 다르다지요.
잉글랜드는 앵글로 색슨족이고 스코틀랜드는 켈트족, 영국이 성공회인 반면 스코틀랜드는 장로교, 옛날에는 스코틀랜드에서 영어가 아니라 게일어라는 다른 언어를 썼다고 합니다.
작년인가, 영국으로부터 스코틀랜드를 분리코자 주민투표를 하였는데 부결되었지요.
멜 깁슨 주연한 브레이브 하트라는 영화도 떠오릅니다.
이 소설, 두 지역 사람들의 기질적 차이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옛 로마인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는 칼레도니아.
산악과 협곡과 호수의 나라 스코틀랜드.
잉글랜드인은 보리로 맥주를 빚지만 스코틀랜드인은 위스키를 만들어 마신답니다.
가문에 대한 긍지와 집착이 대단한 주민들. (우리의 귀에 익은 Mac字가 붙은 숱한 이름들, 맥도널드 맥아더 맥킨토시 맥머피 맥클라인... '맥'은 '누구의 아들'이라는 단어라지요. 이를테면 '맥도날드'는 '도널드집안의 자손'이라는..)
스코틀랜드인 '로빈 오이그 맥콤비치'는 잉글랜드인 '해리 웨이크필드'의 우정회복을 위한 주먹질을 치명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가 간직해온 태생과 가문에 대한 자존심과 자부심은 수전노에게 비장의 재물과도 같이 어느 때보다도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남몰래 혼자만 즐긴다는 의미에 있어서 더욱더 소중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재물을 약탈당한 셈이었다. 남몰래 숭배하던 우상들이 더럽혀지고 짓밟힌 것이었다. 모욕당하고, 욕을 보고, 얻어맞고, 이제 그는 이미 그가 갖고 있는 가명과 그가 이어받은 가문 앞에 얼굴을 내밀 수 없는 마음이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복수밖에 남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이 숨차게 내딛는 발걸음에 더욱더 박차를 가했으며, 길을 가며 그는 모욕을 받을 때와 똑같이 복수는 일격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마음에 새겼다.>
죽임과 죽음으로 밖에는 회복될수 없는 손상된 명예에 대한 대응.
그러나 로빈 오이그에게는 시칠리아나 코르시카등 라틴사람의 복수심과는 달리 상대에 대한 불타는 증오는 섞여있지 않습니다.
<로빈 오이그는 살짝 수건을 제치고는 슬픔에 가득 찬 눈으로,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고정된 시선으로 지그시 생명을 잃은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로 조금 전까지 생명이 넘치던 얼굴이었다. 자신의 힘에 대해 기분 좋은 확신에 차서 짓던 미소, 그의 적에 대해 화해와 동시에 경멸을 담던 미소로 아직까지 죽은 친구의 입술은 약간 일그러져 있었다. 구경꾼들은 로빈 오이그의 행동에 놀랍고 두려워서 이를 앙다물고 입술을 반쯤 다문 채 일제히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살인자의 손길이 죽은 자의 상처에 닿는 순간 방금 방 안을 선혈로 물들게 하던 바로 그 상처에서 다시금 피가 뿜어나오지 않을까 내심 걱정을 했다. 그러는 동안 로빈 오이그는 다시 수건을 덮고 한 마디 짤막하게 절규를 했다. "아, 참으로 멋진 녀석이었는데!">
저 살인은 과실치사도 아니고 미필적고의도 아니고 자력구제에 의한 정당방위도 될수가 없습니다.
현대법은 아마 이렇게 재단(裁斷)할듯 싶습니다.
모욕 당한 현장에서 벗어나 한참의 시간이 흐른뒤 결행한, 죽이기로 마음먹고 실행한 확신범의 살인으로.
그러나 저 법정은 인간적 고민을 합니다.
기계적인 법적용보다 인간을 들여다보는 깊은 자상함이 있군요.
<복수심에서 나온 암살이라는 너무나 비잉글랜드적인 이 범행에 대해 법정의 청중이 처음에 가졌던 편견이 어떠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육체적 폭력을 당했을 때 그로서는 씻을 수 없는 불명예로 더럽혀졌다고 생각하는 스코틀랜드 사람 특유의 뿌리 깊은 민족적 선입관에 대한 해명이 이루어지고, 또한 그가 처음에 보였던 인내심, 절제력, 참을성이 정상 참작의 요인으로 대두되면서, 잉글랜드 법정의 관대함이 작용하여 점차 그의 범행은 결코 천성적으로 야만스럽다거나 상습적 비행에 의한 삐뚤어진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명예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원인이 되어 돌발적으로 일탈행위를 저지른 데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쪽으로....>
비록 사형을 선고하였지만 말입니다.
<로빈 오이그는 오이그 맥콤비치는 사형 선고를 받았고, 후에 절차에 따라 그에게 형이 집행되었다. 그는 매우 의연한 태도로 그의 운명을 받아들였고, 판결의 정당함도 인정했다고 했다. 그러나 무장하지 않은 사람을 공격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에는 몹시 분개하며 거세게 반발했다고 한다. "내가 빼앗은 생명에 대해 나도 생명으로 갚는다." 그의 항변은 이렇게 이어졌다고 한다. "그 이상 어떻게 하겠는가.">
모욕을 당하였으니 죽여야하고 죽였으니 나도 죽어야 한다.
그 이상 어떻게 하겠는가...
주체적 자아가 어찌 해볼 수 없는, 스코틀랜드 하일랜드 사람들 속에 잠재된 집단무의식일런지요.
지역적 기질이라는건 어떻게 형성되는 걸까요?
대지와 풍토등 자연적 환경과 역사와 습속등의 인문적 환경...
다음은 이문열의 해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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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차이가 빚어낸 비극>
-이문열-
우리가 흔히 보는 살인은 극단한 증오의 표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이루어지는 살인은 그 증오가 없다. 오히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적 성격이 강하다.
여기서 로빈 오이그와 해리 웨이크필드는 둘 다 이름 있는 소몰이꾼으로 세상의 악과는 거의 무관한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결국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죽이고 마침내 그도 죽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더구나 둘 다 서로를 인정하고 은근한 애정까지 느끼면서도 모욕하고 죽인다.
이 같은 비극을 이해하는 열쇠는 무엇보다 그들이 사내였으며 그것도 한 문화를 모범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이들이었다는 점에 있다. 모욕의 방식과 그 해소에 관한 한 로빈 오이그는 하일랜드 문화를 대표하고 해리 웨이크필드는 잉글랜드 문화를 대표한다. 그리고 여기서 비극적으로 형상화된 것은 바로 그 두 가지 다른 문화의 충돌이다.
모든 문화는 우열을 가르기가 쉽지 않다. 특히 언제나 수호를 떠맡아야 하는 남성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자신의 문화가 우월하거나 최소한 상대편과 등가를 이룬다. 따라서 그의 행동원리는 자신의 문화에 따를 수밖에 없다.
해리가 로빈을 모욕한 것도 로빈이 해리를 죽인 것도 그들 자신에게는 지켜야 할 의무와도 같은 행동원리였을 뿐이다.
이 작품은 19세기 초반에 쓰여진 것으로 어떤 이는 영국 근대 단편소설의 효시로 친다. 하지만 또한 이 작품이 거의 2세기 전에 쓰여졌다는 것 때문에 오늘날 단편소설을 공부하려는 것 이에게는 그리 세련된 전범이 되지 못한다.
특히 작품의 후반에 장황하게 실린 판사의 논고문은 성마른 현대의 비평가들을 약올리기 딱 알맞다.
행복 했으리. 그런 것은 자기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단단히 믿고 있는 비평가들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쓰고 싶은 대로 글을 쓸 수 있었던 시대는.
이 작품을 쓴 스코트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작가로 우리에게는 <아이반호 (혹은 호반의 기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그 자신도 변호사가 되고 몇 가지 공직을 거쳐 작위까지 얻었으나 결국은 소설가로 끝을 보았다. 그는 스코틀랜드 변경지대의 옛 전설과 민요, 독일의 시 등을 연구하며 문학적 취미를 기르고 재능을 닦아 특히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에서 걸작을 많이 남겼다. 작품으로는 장편 <아이반호>외에 <웨이버리>와 <가이어스타인의 앤>등이 유명하다.
스코트의 소설들은 인물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고 과거는 현실적 기반 위에 사실성과 미래에의 전망을 가지고 처리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한때는 그저 한 역사소설가로 잊혀져가는 듯했으나 사실주의의 맹위에 힘입어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다. 특히 루카치 같은 이는 주저없이 스코트의 작품들을 가장 탁월한 역사소설의 전범으로 친다.
여기 실린 <두 소몰이꾼>은 그의 흔치 않은 단편들 중 하나로 문학성보다 문학사적 의의를 더 크게 보는 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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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마을의 작가 '오영수'를 기억하시나요?
70년대말 문학잡지에 '특질고(特質考)'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전라도 사람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켜, 문단에서 제명 당하고 절필선언까지 하였습니다.
그 충격으로 멸 달 뒤 세상을 떠났지요.
오영수의 특질고, 인터넷에 있길래 퍼왔습니다.
그 옛날 세상에 큰 물의를 일으킨 유명한 글입니다.
한번 읽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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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질고(特質考)
-오영수-
특질(特質)-한 말로 특질이라지만 이 특(特) 자 한 자만 하더라도 그 내포한 개념은 다양 복잡하다.
더구나 질(質)까지 합하면 더욱 복잡하고 광범(廣範)하다.
원래가 특성(特性)과도 통하고 기질과도 상통하지만 여기서는, 딴 데서 흔히 볼 수 없는- 그렇다고 해서 어떤 모양이나 틀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요. 또 오관(五官)으로 느낄 수도 없는 감성적, 심정적, 습관 이런 것들이 버릇화되어 버린 생활화 현상의 앙금이라고나 할까?
어느 민족,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특질 또는 기질이라고 해도 좋고 국민성이라고 해도 무방할 뿐 아니라 한 민족 한 나라에도 지방 따라 그 지방의 특질 또는 특성이 있고 더 세분하면 한 동네, 한 집안에도 볼 수 있다.
세계 인류가 제각기 얼굴 모양이 다르듯이 그 언어 행동, 사고심상(思考心象)이 결코 같을 수가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으나 단지 딴 데서는 그리 흔하지 않다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서 유사, 즉 동류(同類)가 한 민족 한 사회의 오 분의 일을 공약수로 낼 수 있다면, 그것은 그 민족 그 사회의 특질 또는 특성, 기질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그러나 이러한 관념적 부연으로서 그 개념이나 이해 파악은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그 구체적 실례를 들어 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 같다.
이를테면, 영국 사람들은 모임이나 술자리에서 모욕을 당하거나 불쾌할 경우, 나비넥타이를 매만지거나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결투를 상의한다든지, 미국인들의, 권총부터 쏘아 놓고 그 가족의 부양비를 계산한다든지, 셋만 모이면 혁명을 도모하는 독일인, 조의나 축하금으로 천 원짜리 수표나 약속어음을 내놓고 거스름돈 오백 원을 현찰로 받아가는 불란서, 담배 한 갑 값만 있으면 일을 쉬는 인도 사람들, 일본 사람들의 여차직하면 발도(拔刀) 하라키리(割腹)-.
이런 것들은 딴 나라에서는 흔하게 볼 수 없기 때문에 특성 또는 특질 또는 기질, 크게는 그 국민의 민족성, 국민성-이 아닐까? 퍽 재미난 예가 있다.
이것은 어느 한가한 사람의 창작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러나 그것이 허구일지라도 공감의 객관성이 있다면 사실이 아니겠는가?
언젠가 미국에서, 코끼리에 대한 연구 논문을 공모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불란서에서는 코끼리의 사랑, 즉 로맨스에 대해서.
영국에서는, 코끼리의 사냥에 대해서-.
중국에서는, 코끼리 요리에 대해서-.
미국에서는, 세계에서 제일 큰 코끼리에 대해서-.
일본에서는, 진짜 코끼리를 세계에서 제일 작게, 또 진짜보다 더 진짜를 만드는 데 대해서-.
독일에서는, 코끼리에 대한 연구 논문 상중하(上中下) 세 권을 그것도 겨우 서설(序說)로 내놓았다-고 아무튼 그 진부(眞否)는 그만두고라도 그 나라대로의 국민성, 특성, 특질, 기질… 같은 것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야기를 우리나라로 돌려 보면 더 잘 짐작이 간다.
이를테면 평안도의 지방적 에고와 섹트와 매서운 성격-이것을 어느 친구는, 월북민의 실향(失鄕) 즉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하더라만….
그러나 그렇지도 않은 옛날부터 임출맹호(林出猛虎)라고 했고, 그것은 싸움을 통해 뚜렷하다.
첫째, 말이 필요 없다. 그러니까 욕지거리가 필요 없고, 그러니까 욕의 발전이 없다- 이 샹간나…와 함께 딱!즉 고대 박치기 한번이면 그만이다.
그런가 하면 함경도는 산세가 험해서 그런지 첫째 우락부락, 억세고 무작하고… 그래서 생활력이 강한 반면 운치나 멋대가리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왈가닥이다. 이런 것을 시속말로 와일드 또는 저지-라고 하던가?
아무튼 지저분하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도 이전투구(泥田鬪狗)라고 했나 보다.
강원도로 내려오면 이건 또 백날 여시(如是) 네 맛도 내 맛도 없는 무덤덤이다. 밤에는 자고 낮에는 밭이나 쪼고 멋대가리 없기는 함경도와 마찬가지다.
강원도에서 자고로 두드러진 인물이 나지 않고… 딱지가 붙은 암석노불(岩石老佛)은 그래도 돌옷을 입고 운치(韻致)나 있지만 그야말로 속절없는, 꾸어다 논 보릿자루다.
그다음이 서울인데 이건 또 너무나 대조적이다. 서울 하면 이조 오백 년의 도읍으로서 새삼스레 여기에 운운할 필요가 없겠다만… 그러나 서울은 서울이요, 만승천자(萬乘天子)가 계시는 궁거(宮居)인 만큼 감히 백성 된 주제로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제는 상황과 관념이 달라졌다.
대강대강 예거(例擧)해 보면 생산이 없으니 그렇기도 하겠지마는 우선 싹싹하기 청니(靑梨)같고 경위(經緯)가 빠르고 사리 판단 셈수, 그리고 체면치레 등…그러면서 외면치레, 물 찬 제비, 아침 부용(芙容花) 그러나 비단치마 속의 넝마, 부엌 부뚜막에 개가 ××할 만큼, 된장찌개 그릇에 불티가 뽀오얗게 앉아 있다.
하긴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수도의 공통된 생리겠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방에서 올라오는 유생(儒生)들과 돈푼깨나 모은 토반(土班) 토호(土豪) 들이 감투 중계 또는 장사, 이들을 상대로 생필품, 주로 귀금속, 피륙, 약재 등으로 살아가는 서울이고 보면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래서 서울에는 큰 인물이 없다. 나지 않는다. 알 수가 없다-고들 한다.
그럼 서울에 잇댄 충청도는 어떤가?
첫째 강원도와 마찬가지로 개성이 없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서둘 것도 없고 느릴 것도 없다. 서울과 강원도와 경상도에 시속말로 샌드위치가 돼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즉 중화(中和)가 돼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단 한 가지 파격적 예외라고 할까…가 있다.
그것은 말이 느린 거다. 말이 느린 거야 비단 충청도뿐이 아니겠지만 특히 말꼬리의 ‘유우’다.
여러 말 그만두고, 저어어유우, 뒤에유우 담이 지금 막 넘어지는데유우… 해서 담에 깔려 죽었다든가, 저어유우, 우리가 유우, 이집 머스기 하고유우, 저어기 옹당유우… 옹당이라니… 응 저 용당 늪 말이군. 예예 맞아유우. 게서 자맥질을유우… 이때 벌써 아이는 십 리쯤 떠내려가 버렸다든가, 시집을 다녀가는 며느리가, 아버님 안녕히 기시유우- 이 유우가 끝나자, 서울역! 서울역!
다소 과장(誇張)은 있다고 하더라도 충청도 말은 이 유우를 때고는 말씀이 안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 다음은 영남으로 내려와서 우선 전라도로 말하면 참 재미나고 섬세하고 다양하다.
고 간드러지는 전라도 방언- 나긋나긋 감태같이 감칠맛 있는… 그뿐이랴, 풍류를 알고 멋을 알고 음식 솜씨 좋고 옷을 입을 줄 알고… 뭐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그런 반면에 결점과 하자(瑕疵)도 많다.
첫째 표리부동(表裏不同) 신의(信義)가 없다. 입속것을 옮겨 줄 듯 사귀다가도 헤어질 때는 배신(背信)을 한다. 그런 만큼 간사(奸邪)하고 자기 위주요, 아리(我利)다- 전라도에서 돈벌이 가온 놈 구경했나?는 세상의 정평이지만 그보다도 정말 재미있는 것이 욕이 어느 도보다도 월등 풍부하고 다양하고 지능적이다.
욕도 화풀이로 전해 오는 욕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어느 도나 마찬가지지만, 이 전라도 욕은 그때그때의 경우에 따라 임의자제(任意自製)로 창조를 한다. 그러니까 내용이 알차고 적절하고 풍부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밤을 새워도 못다 할 예를 여기에 들기는 헛된 정력 소모와 종이의 낭비에 불과하기 때문에 각설하고, 왕창, 잣것, 몽땅, 살작, 사람 한번, 개땅쇠, 지랄… 이런 어휘들은 전라도 사람들이 즐겨 쓰는 방언이다.
이를 테면, 사람 한번 살짝 미친당께. 확 걸어서 몽땅 가삐려. 잘들 가드라우 잉. 말로서 혀, 말로서 허랑깨. 그려, 나는 갯땅쇠여. 개땅쇠가 너 애비 뫼에 굴총을 놓당까여. 이 생피 붙어 화냥년 담 밑에서 오살을 할 놈. 야, 빠수(버스)가 만 원이건 이만 원이건 빨랑빨랑 타랑깨, 머저리 항바지야.
“아니 정 이럴랑가. 좋다. 히여볼라면 혀 봐.”
“그려, 니가 죽든 내가 죽든 끝장을 내고 말티여.”
“여기….”
따지고 보면 삿갓[竹笠] 한 죽 중에서 두 장이 험이 있어 이걸 딴 거로 바꿔 줄 텐가 안 줄 텐가의 몇 푼 이해 때문의 싸움이다.
오늘 저녁에 세상없어도 결단을 내겠다면서 누가 먼저도 없이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그렁깐대루 만 냥에 한 닙(일 원?)만 빠져도 만 냥 구실을 못한께로….”
“그렁깐대루 한 달이 넘은 지금에 와서 그런 소리 헌다면 지난해 삿갓도 물어야 할께 아녀….”
밤새도록 이런 식으로 시비다.
이게 무니(문어)는 무닌데 워째 오바 단추 같당가?
안 되겠다. 이러다간 한이 없겠다. 그만두자.
다음은 경상돈데 이게 또 재미있다.
재미로 말하면 전라도 못지않다.
전라도와 인접하고 내왕이 빈번해서 욕지거리도 거의 같다. 어디서 오랜만에 또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다짜고짜 아이고 이 문딩이야-다.
이 때문에 한때 사회적 문제도 된 적이 있었다. 그리고 파 발음은 평안도 라 발음이 나로 변하듯이 모조리 포 자 발음이다. 파리를 포리, 팔이 폴….
이런 따위야… 별것도 아니지만, 그보다는 성격인데… 이것도 한둘 예증으로서 그만둬야겠다.
첫째, 미련하고 붙임성 없고 눈치 모르고 무작하다.
그런 점에서는 쉐프트보다도 훨씬 뒤진다.
가령, 겨울밤 같은 때 초랑방 머슴들이 내기를 잘 한다. 밤이 기니까. 내기 중에도 손쉬운 게 두부 많이 먹기다. 나락(세경 받은 벼) 한 말씩을 타고… 그러나 선뜻 나서는 것이 없다.
한 엄두리 머슴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간다. 이웃집 할머니에게 가서
“그 두부 좀 있겠는교?”
“있다 와?”
“묵구로요.”
“민 모나?”
“한 여나무 모 내와 보소.”
“혼자?”
“야아!”
“엄머나! 혼자서 열 모나….”
“마아 내놔 보소.”
시금털털한 젓김치를 걸쳐 먹어 보니 십상이다.
열 모를 먹어치우고 강판 같은 손바닥으로 입 언저리를 문지르면서
“돈은 나락으로 주게요.”
그러고는 그깟짓 두부 열 모… 자신이 있다.
“저어 내가 한번 묵어 보게요?”
여남은 사람의 좌중이
“그래 그래, 니는 묵을기다.”
이래서 한옆으로 짚북더기를 밀치고 두부 한 소쿠리와 김치 한 사발이 들어왔다.
한 모를 베어 문다. 맛을 모르겠다. 맛은 그만두고라도 우선 넘겨가 주질 않는다.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다. 김치를 더 얹어 억지로라도 넘겨 본다. 나락이 한 말이다.
그러나 넘어가긴커녕 먹은 것이 울컥울컥 치받는다.
이건 아무래도 무슨 조화다.
좀 전에는 두부 열 모를 단숨에 먹어치웠는데… 이거… 아무리 생각을 되풀이해 봐도 조화다. 분명 이건 조화다.
“안 되겠심더. 몬 묵겠심더.”
“아니 이 사람아, 한 모를 몬 묵다니… 나락이 한 말일세.”
“압니더.”
“그러먼 이건 우리가 노놔 먹네.”
“야아!”
“아니 이 사람아, 나중 이렁저렁 말 없지러?”
“문딩이 처자(處女) 장가를 디리시먼 디릿지 안 되겠심더.”
“하긴 문딩이 처자(處女) 장가도 어렵기는 하지.”
싸움질도 참 걸작이다.
누가 크게 욕지거리를 많이 하느냐에 승부가 난다.
당장 살인이 날 것같이 엉겨붙으나 기껏 검맥(멱살을 잡는 것)으로 끝난다-가 아니고 일 년이고 끄는 예가 예사다.
즐겨 쓰는 욕에는, 손발이 게발 망그러지도록(밥 얻으러 다닌다고) 또 옘병을 잡아다 은행에 저당을 해 놓고 자손대대로 이자만 뜯어먹어라. 이런 싸움이 끝이 날 리가 없다. 저녁 뒤에 침으로 다진 담배를 꽁꽁 재서 개울둑에 나가 건너편에다 대고-네 이놈 아무개야아…. 곧 반응이 온다.
“한 술 처묵었시먼 자빠져 잘끼지 ×××× 나왔나?”
“네 이놈, 배은망덕도 분수지. 아홉 해 전에 니 애비 산역(山役)을 내가 했지.”
“허, 그래도 귓구멍은 뚫리 가주고 어데서 듣긴 들은 모양인데, 배은망득이 뭔지 알기는 알고 처시버리나. 일곱 해 전에 니 눔 집 짚배까리에 불이 났을 때 그때 못에 찔린 상채기가 아직도 시퍼러타. 네에 이놈. 이 밥 빌어다 죽 숴 먹을 노옴-”
근자에 와서 교통이 발전으로 하루 생활권을 벗어난 지역이라곤 이미 없어지고 말았다. 그만큼 또 지방과 도심지의 인적 물적 교류도 신속 빈번해진 것도 당연한 사실이다.
그와 함께 또 그 지방의 특유한 풍습 또는 생활 전통 언어[方言] 특색도 뜨물에 막걸리 탄 것처럼 본적 불분명(本籍 不分明)이 되고 말았다.
언어학 또는 연구 또는 정책가들의 층에서 본다면 큰 성과라고 할는지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한 작가로서 동조는커녕 되레 적지 않은 저항을 마지않는다.
언필칭(言必稱) 내 것을 찾고[主體] 우리 고유문화… 운운하면서 몇천 년 몇백 년 묵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악습마저도 문화유산이랍시고 허수아비 깨춤 추듯 날뛰면서 불과 열 손가락에도 차지 않는- 명맥(命脈)이 생생한 방언을 획일, 즉 언어 통조림을 만들겠다는 사고나 정책은 내 상식으로서는 이해하기 곤란하다. 그보다는 과학ㆍ경제 일상생활품… 우선 이것을 진정한 우리말로 한자(漢字)를 빼고 설명을 해 보라. 언어 정화(淨化)니 정리니-는 한문 또는 한자음을(語順이 確實한) 우리글로 바꿔 놓는 것만이 결코 본의는 아닐 것이다.
…뒤로 입바이 빠꾸 오라잇! 이건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인가? 신입(申込), 보합(保合), 사시미, 카바야끼…. 이런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인간 대명사에 동성동명 이인(異人)은 너무나 큰 문제지만 우선 그 여자 하나를 놓고, 그메니 그미니 그네니… 해서 이거 하나도 정리 정착을 못 하고 흐지부지가 아닌가? 어느 것이 더 급하고 필요한가는 다 같이 한번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까 싶다.
거듭하거니와 나는 아직 한 번도 ‘오랑캐꽃’, 일본말로 ‘수미래’, 서구 사람들의 ‘바이올렛’을 그대로 오랑캐꽃 또는 말꽃으로 쓴 적이 없다.
그 어감이 못마땅할 뿐 아니라, 그 고귀한 색깔이며 소녀의 입김 같은 애련 때문에 ‘제비꽃’이라고 써 왔고 여인의 젖꼭지와 유방 위의 자색으로 원형이 있다.
물론 우리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방면으로 물어보았으나 애매해서 나는 ‘젖무리’라고 썼다.
말이…란 글쎄 너무 차원이 낮은 상식론이지만 첨부터 있는 것은 아닐 거다. 즉 인간의 창조가 아니겠는가? 나는 한 작가로서 경유에 따라서는 말을 만들고 찾고 그래서 어휘 하나에라도 기여하는 사명감을 잊지 않고 있다.
지금도 어는 지방 버스 안에서 들은 예지만, ‘내 가고’, 즉 내 들바구니란 말이고 ‘다와이’, 즉 위가 넓은 물통 또는 대야-가 그대로 통하고 있다. 어느 시골 과자점 유리에 ‘요강판다’는 쪽지가 붙었는데 알고 보니 ‘요오깡’이란 팥과 우무를 주원료로 한 떡인지 과잔지였다.
“-말로서 허랑깨, 말로서 혀. 사람 한번 살작 미친당깨. 이 잣것이… 그래. 잘들 가드라우이잉.”(전라도)
“-우야꼬, 이 문딩이야. 내가 암만캐도 미쳤제. 저런 추끼… 보름달인데 안 밝아. 사움은 말리고 중매는 부친데이.”(경상도).
“-그러니껴. 니 헤(네 것)먼 어떻고 내 헤먼 어떤가? 개도 한 구시(구유)에 같이 묵는데. 앵그러니껴?(안 그렇습니까?)”(경북 지방)
“-글쎄유우. 안녕히 기시유우.”(충청도)
“-이 샹간나. 이보라요. 애새끼는 배고파 울지요, 내래 어케 살갔시오.”(평안도)
“-차차 합시다레. 무우르, 무우르 한 그릇 주시오. 그래설나무네.”(함경도)
“-아주방 뭍에서 왔슈꽈무?”(제주도)
“-무우랑 배추랑 사려어. 어련할갑쇼. 둔(돈). 준말이야(존말이야) 어른 하시는 말씀에 천첩이 무슨 할 말이 있겠습까마는….”(서울)
이 말을 하고파서 이렇게 장광설(長廣舌)을 늘어논 거다. 다시 거듭하거니와 나는 앞으로도 방언을 사수할 작정이다.
<문학사상 197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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