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형리> <무명씨들 外>
<형리>
-페르 라게르크비스트 作-
***동우***
2015.08.31 00:45
페르 라게르크비스트(Par Lagerkvist, 1891~1974)의 '형리'
2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라게르크비스트는 처음 접하는 작가인데 스웨덴의 소설가 시인이라고 합니다.
'바라바'라는 소설로 세계적 명성을 얻어 195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하는군요.
'바라바'는 예수 대신 풀려난 도둑의 이름이지요. (예전 안소니 퀸이 주연한 영화 '바라바'의 원작이 이 소설이라는데 그 영화가 썩 좋은 작픔이었다고는 기억되지 않습니다만)
'형리(刑吏)'
추상적이고 상징적입니다.
무슨 표현주의 무대를 보는듯한 느낌이군요.
소설이 아니라 희곡이었다면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심오한 주제를 다루고 있을뿐더러 난해한 소설입니다.
나치, 전쟁, 인종주의, 인간의 폭력성과 잔인성, 신의 부재... 같은 암울한 분위기가 가득하기는 한데..
굳이 읽기를 권하지는 않으렵니다. ㅎ
아래는 위키백과에서 주어온 작가소개입니다.
++++
페르 라게르크비스트는 스웨덴의 소설가·시인이다.
웁살라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일찍부터 프랑스 회화(繪畵) 영향을 받아 표현파 문학을 제창했으며 1914년 시집 <모티프>로 시단에 데뷔했다.
대전(大戰)을 경험한 그는 시문집(詩文集) <고민>에서 절망에 가까운 고뇌를 노래했으나 그 후 시문집 <혼돈>, 시집 <마음의 노래> 등으로 빛과 자신을 되찾고, 수필 <극복된 삶>, 소설집 <싸우는 영혼>으로 긍정에 이른다. 이는 그가 인간이 갖는 파괴와 건설의 상반된 욕망은 모두 깊숙한 밑바닥에 있는 어둠 속에 뿌리박고 있으며 이 어둠의 세계야말로 생명의 근원(根源)이라고 보는 경지에 도달한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는 에세이 <불끈 쥔 주먹>으로 이를 확인했다. 그동안에도 그는 나치스 세력이 강해지자 소설 <사형집행인>으로 폭력 긍정의 확대에 항의하고 다시 대전 중에는 소설 <난쟁이>로 악의(惡意)와 소극주의에 대결했다.
1950년에는 명작 <바라바>를 썼고, 1951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후에도 소설 <무녀(巫女)>, <아하스베르스의 죽음>을 비롯하여 그 밖에 시집도 내고 있다.
그는 과작(寡作)으로 장편은 없고 작품에는 태작이 없으며 문체는 모자이크를 연상케 하는 거친 수법으로 특이한 힘을 지니고 있다. 희곡 작가로서도 그는 당대의 일인자라고 불리며 <인생을 다시 산 사나이>, <어둠 속의 승리>, <연금석(鍊金石)>, <인간을 살리고 싶다>, <형리>등의 명작이 있다.
++++
***동우***
2015.09.01 00:17
형리의 긴 사설.
생각을 깊게 하는바 있지만, 아래 이문열의 말마따나 나는 '단련된 독자가 아니므로' 내게는 난삽합니다.
그래서 내 잡설은 미루렵니다.ㅎ
아래는 이문열의 해설입니다.
++++
<신이 화석화한 뒤의 인류사와 그 주재자>
-이문열-
이 작품은 좀 특이한 독법을 필요로 한다. 사실적인 묘사의 목로주점과 구체적인 인물들의 잡담으로 시작되는 도입부에서 작품의 통시성이나 추상성을 짐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형리와 그의 칼을 둘러싼 미신적이면서도 신비한 속설들과 거기 연관된 상당히 밀도있는 개인체험의 진술에서도 마찬가지다. 세상 어딘가 있을 법한 목로주점에서 역시 있을 법한 사람들이 나누는 잡담처럼 들릴 뿐이다.
그러다가 형리의 기이한 사랑전설과 외팔이 라세 일행이 나타나면서 독자는 비로소 무언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게 된다. 여사형수의 생사를 형리에게 맡긴다든가. 전설적인 만다라게를 실제로 캔다든가 하는데서 짙어지는 중세적 분위기 때문이다. 분명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기는 해도 어딘가 환상적인 요소가 섞여들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하지만 공간과 인물들의 추상성과 통시성이 제대로 드러나는 것은 아무래도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창녀와 암살자들과 '하일'을 외치고 폭력을 예찬하는 신사들이 등장한 뒤가 된다. 목로주점은 현실의 장소라기보다는 통시적 공간이며 인물들로 구체적이라기보다는 인류사의 전개에서 폭력과 관련된 추상적인 인물이다.
그리하여 암살자들의 어이없는 살인에다 종족주의적 폭력을 암시하는 듯한 흑인들과의 소동에 이르면 비로소 이 작품의 공간과 인물이 종말론적인 혼란을 드러내기 위한 문학적 조작의 산물임을 알게 된다.
물론 이같은 이해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단련된 독자가 아니면 대부분이 대화로 연결되는 전반부의 지루한 전개방식이나 필연성이 얼른 짐작 안되는 인물들의 계속적인 등장에 지쳐버릴 수도 있다.
그런 독자를 위해 이 작품에 맞는 독법을 제안한다.
먼저 초반부를 지루해질 때까지만 읽다가 바로 후반부인 형리의 독백으로 가기를 바란다. 형리의 독백도 지루할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지루함을 참아야 할만한 가치가 있음을 감히 보장한다. 그리하여 거기서 얻은 심각한 감동으로 다시 읽다가 만 부분으로 돌아간다면 지루함이나 혼란스러움없이 이 작품을 완독할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땅과 자신의 몸을 적시는 처형의 피에 지친 나머지 먼 하늘나라로 찾아간 형리는 이미 화석이 되어버린 신을 보고 절망해 돌아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게는 그 형리야말로 인간의 변덕스런 욕망과 폭력성이 충실히 투영된 살아있는 신같이 보인다.
많은 현대인들에게 신은 자신들이 슬퍼하고 고통받고 피 흘리는 동안에는 무력하면서도 형의 집행에는 어김없는 비정한 형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지은이 라게르크비스트는 195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스웨덴의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고민의 문학'으로 스웨덴 문학을 이끌어 온 그의 이력은 자전적 소설 '진실의 나그네가 되어' 에 잘 드러나 있다.
철도역장의 아들로 태어나 종교적 분위기가 강하게 흐르는 유년기를 보낸 그는 성장하면서 점차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난 강인한 인간 정신을 믿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자리한 악마적 성향을 목도한 그는 마침내 이같은 불행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데 일생을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와이 격렬한 대결을 펼치면서 북유럽 최고의 양심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형리'는 시대의 고민과 문제를 상징적으로 그려낸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며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바라바'는 예수대신 십자가에서 풀려난 악당의 이후 생활을 그린 소설이다. 라게르크비스크는 이밖에도 소설 '무녀' 아하스베루스의 죽음'과 시집 '마음의 노래' 화톳불 밑에서' '어둠 속의 승리' '인간을 살게 하라'등 무수한 작품들을 남겼다.
++++
<무명씨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作-
***동우***
2015.09.02 04:12
이름만 들었을뿐, 처음 읽는 갈레아노입니다.
언론인이고 작가였던 우루과이 출신의 좌파 지식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Eduardo German Maria Hughes Galeano, 1940~2015, 올 4월에 ‘귄터 그라스’와 같은 날 사망하였군요)
오늘 새벽 몇편의 글을 읽었는데, 그의 문학에는 짙은 정치적 체취가 깃들었는데 조금도 역겹지 않았고, 짤막한 글 속에서도 확연히 느껴지는 그의 면모에 감동이 일었습니다.
열강의 식민수탈에 신음하였던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글로벌 자본의 압도적 지배, 그를 의식하지도 못한채 부당함 속에서 이름없이 살다가는 사람들..
그러나 그의 글에는 직정적인 거친 토로(吐露)나 좌파적 프로파간다의 생경함이 없습디다.
그가 구사하는 아포리즘에는 위트가 넘치고 해학이 녹아있더군요.
시(詩)적이기까지 합니다.
검색하여보니 갈레아노가 자기 책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더군요.
"내 모든 책을 통해 드러내 보이고 싶었던 것은 한마디로 작고 적은 이름없는 이들의 위대함과 거대한 것들의 하찮음이었다"
'무명씨'라고 번역된 스페인어 'Los Nadies'
사전을 찾아보니 'Los'는 복수 인칭대명사 '그들'이라는 뜻이고 'Nadie' 는 '하찮은'(시시한,무능한),'별볼일 없는'이라는 뜻이로군요.
무명씨(無名氏)..
뉜가(somebody)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nobody) 것으로 존재하는 사람들.
인간이 아닌 '인적 자원'에 불과한 사람들..
라틴 아메리카의 'Los Nadies'에 대한 갈레아노의 여러 은유 속에 대한민국의 무명씨는 몇개나 포함되어 있을까...
으흠, 이제야 짧은 글조각 몇편 읽었을뿐, 내가 갈레아노에 대하여 무얼 안다고 더 지껄이겠습니까?
이따 도서관에서 그의 책들을 빌려다 읽으려 합니다.
아, 나는 내 독서에 절망합니다.
황혼에 이르러 맞는 새로운 인식의 확장, 그걸 느낄 때마다 나는 정말 안타깝고 슬픕니다,
좀 더 젊었더라면. 좀 더 많은 책을 읽고 좀 더 체계적으로 사유하여 좀 더 다른 세계관으로 좀 더 낳은 인간이 되었을걸...
젊은벗들, 늙은이의 이 한숨소리 참조하시기를.. ㅎ
꼬비에뚜님댁에서 업어온 텍스트 파일 몇편있으니, 며칠간 갈레아노를 올리겠습니다.
매우 짧은 것들입니다, 함께 읽어요.
<미쳐버린 세계 外>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作-
***동우***
2015.09.03 10:41
어제 도서관에서 갈레아노의 책 4권을 들고왔습니다.
'수탈된 대지', '시간의 목소리', '축구 그 빛과 어두움',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
어제 오늘 '시간의 목소리'를 붙잡고 앉아(누워) 내쳐 읽고 있습니다.
꽁트(인지, 아포리즘인지, 에피소드인지, 시인지, 우화인지, 르포르타쥐인지, 기사인지..) 한 페이지도 안되는 짧막한 글들이 400 여편 담겨있는 책입니다.
'수탈된 대지'는 콜롬버스의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5백년 동안의 유럽과 북아메리카(미국)에 의한 라틴 아메리카의 수탈의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450여 페이지를 후루룩 훑어보고 해설을 먼저 읽었는데 갈레아노의 역사가와 저널리스트로서의 정신이 약여하게 드러나는 책일듯 싶습니다.
이 책은 라틴 아메리카 청년들의 필독서라고 합니다.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람보'의 환상에서 깨어나듯이, 그 쪽에서는 그런 종류의 책인 모양입니다.
라틴 아메리카.
현대에 들어서 식민주의 야만의 이빨은 감추어졌지만, 구미 민주주의라는 위선적 환상과 신자유주의라는 무한의 욕망의 숨겨진 발톱은 더욱 교활해졌습니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그 진실을 파해쳐서 여러 형식으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읽어갈수록 그가 버겁습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진실에 대하여 나같이 감상주의의 피상성으로서는.
여기다 깨작깨작 몇편의 짧은 글을 올리는게 무위롭게 느껴졌습니다.
책은 읽겠지만 갈레아노에 대한 내 잡설은 일단 접겠습니다.
그의 책을 '좀' 읽은후 '좀' 소화가 되면 다시 '좀' 어프로치하던지.. 하렵니다.
대신, 라틴아메리카의 고독, 마르케스의 입으로 대신하렵니다.
아래 글은 마르케스의 1982년 12월 8일 노벨 문학상 수상 기념 연설문입니다.
++++
라틴아메리카의 고독
-마르케스-
마젤란과 함께 첫 세계 일주를 했던 플로렌스 출신의 항해사 안토니오 피가페타(Antonio Pigaffeta)는 아메리카 대륙의 남부를 항해하면서, 상당히 사실적이면서도 마치 환상 속을 여행하는 듯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 기록 속에서 그는 배꼽이 궁둥이에 달린 돼지들과, 수컷 짝들의 등 위에다 알을 낳는 부리가 없는 새들, 마치 혀가 없는 펠리컨을 연상시키는 스푼 모양의 부리를 지닌 새들을 보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당나귀의 머리와 귀, 낙타의 몸, 사슴의 다리와 말의 울음소리를 내는 잡종 괴물도 보았다고 썼습니다. 그는 처음 파타고니아 고원에서 만난 원주민이 거울을 보자마자, 자기 자신의 형상을 보고 그 활달한 거인이 놀라 자빠지는 모습도 묘사하였습니다.
오늘날 소설 장르의 씨앗이 담긴 이 짧고 신기한 책은, 그 무렵 우리의 현실에 대한 가장 충격적인 묘사는 아닙니다. 인디아스의 연대기들은 그 외에도 수많은 이야기들을 남겼습니다. 그토록 사람들이 갈망하던 환상의 땅인 엘도라도(El Dorado)는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지도 위에 등장하면서 종종 지도제작자들의 환상에 맞춰 그 위치와 형상을 변모했습니다.
영원한 청춘의 샘을 찾기 위하여 신비로운 알바르 누녜스 카베사 데 바카(Alvar Nunez Cabeza de Vaca)는 멕시코 북부를 8년간이나 탐험했는데, 이 광기어린 탐험에서 원래 출발했던 인원이었던 600명이 서로를 잡아먹어 오로지 다섯 명만 귀환했습니다.
그 시대의 가장 불가사의한 수수께끼 중 하나는 각각 백 파운드의 금을 실은 일만 일천 마리의 노새들의 행방으로, 그들은 아타왈파 황제의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어느날 쿠스코를 떠났지만 결코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식민지 시대에 카르타헤나 데 인디아스에서는 충적토에서 길러서 모래주머니 안에 작은 금덩어리들이 들어 있는 닭들을 팔았습니다.
한 개척자의 금을 향한 욕망은 최근까지도 우리들을 괴롭혔습니다.
지난 세기 말, 파나마 해협 위로 대서양-태평양을 잇는 고속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위촉된 독일 조사단은 이 프로젝트가 단 한가지 조건 하에서 가능하다고 결론지었는데, 즉 도로 레일이 그 지역에서는 희귀한 쇠가 아닌, 금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스페인의 압제로부터의 우리의 독립은 우리를 광기로부터 해방시키지는 못했습니다.
무려 세 차례나 멕시코의 독재자였던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Antonio Lopez de Santa Anna) 장군은 일명 '패스트리 전쟁(Guerra de los pasteles)'에서 잘린 자신의 오른쪽 다리를 위해 성대한 장례식을 치뤄 주었습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Gabriel Garcia Moreno) 장군은 16년간 에콰도르를 절대군주로서 통치했었는데, 장례식 때 그의 시신은 예복을 완전히 빼 입고 수많은 훈장을 단 채로 대통령의 권좌 위에 앉혀졌습니다.
3만 명의 농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접신론자(接神論者)이자 엘살바도르의 폭군, 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Maximiliano Hernandez Martinez) 장군은 자신이 먹는 음식에 독이 있는지 감지하는 시계추를 하나 발명했고, 성홍열을 예방하기 위해 길가의 전등을 붉은 종이로 가리도록 했습니다.
테구시갈파의 중앙 광장에 세워진 프란시스코 모라산(Francisco Morazan) 장군의 동상은 실은 파리의 중고 조각상 창고에서 산 네(Ney) 제독의 동상이었습니다.
11년 전,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시인들 중 한명인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는, 그의 말들로 이 관중을 깨우쳤습니다.
그 때 이후로, 선의의 유럽인들은 -그리고 종종 악의의 유럽인들도- 저주받은 남자들과 역사적인 여성들의 경계가 없는 땅, 끝이 없는 고집이 전설 속에 흐려지는 땅 라틴아메리카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소식들에 의해 더욱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단 한 순간의 휴식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를 닮은 한 대통령은, 불타는 대통령궁 속에서 홀로 한 나라의 군대를 상대로 싸우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명확한 설명이 없는, 두 번의 의심스러운 비행기 사고들은, 또 다른 고결한 대통령과, 자신의 나라의 존엄을 회복한 한 민주적인 군인의 삶을 단명시켰습니다.
그 동안 다섯 차례의 전쟁과 17번의 군사 쿠데타가 발발했습니다.
우리 시대 최초로, 라틴아메리카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종 학살을 단행하고 있는 사악한 독재자가 들어섰습니다. 동시에, 2천만명의 라틴아메리카 어린이들이 한 살도 되기 전에 죽었는데, 이는 1970년 이후 유럽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수보다 더 많습니다. 독재에 의해 실종된 사람들의 수는 거의 12만명에 육박합니다. 웁살라 전체의 인구가 사라졌는데도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상황이라고나 할까요.
임신한 상태에서 체포된 수많은 여성들이 아르헨티나의 감옥 속에서 아기들을 낳았지만, 아무도 군부에 의해 남몰래 입양되거나 고아원으로 보내진 아이들의 행방이나 신원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현실을 변혁하려 했기 때문에, 전 대륙에서 거의 20만명의 남성과 여성들이 목숨을 잃었고, 중앙아메리카의 작고 불행한 세 나라,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그리고 과테말라에서는 1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만약 미국에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면, 통계적으로 4년간 160만명이 폭력적인 죽음을 당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손님을 환대하는 전통을 가진 나라, 칠레를 떠난 사람의 수는 백만명 혹은 전 인구의 10%입니다.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문명화된 국가라고 자부하는 인구 이백 오십만의 나라 우루과이는 인구 다섯 명 중 하나를 추방시켰습니다. 1979년 이래 엘살바도르에서 발발한 내전은 매 20분마다 난민 하나를 낳았습니다. 라틴아메리카 전역의 추방자들과 난민들로 나라를 하나 만든다면 그 인구는 노르웨이를 능가할 것입니다.
-아래 계속-
***동우***
2015.09.03 10:42
-위에서 받음-
나는 스웨덴 한림원이 주목할 만했던 것이 내 문학적 표현만이 아니라 이 엄청난 현실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종이 위의 현실이 아니라, 우리 속에 살면서 우리의 무수한 일상적 죽음들의 순간 순간을 결정하고, 슬픔과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탐욕스러운 창작의 원천을 지탱해주는, 이 콜롬비아의 방랑의 향수병자가 운명에 의해 속해 있는 현실 말입니다.
시인과 거지, 음악가와 예언자, 전사와 악당 등 저 난폭한 현실의 모든 창조물들은 그들의 상상력의 아주 조금만을 요구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을 믿을 수 있게끔 만드는 전통적인 수단들이 부족했다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고독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 본질을 공유하는 이들 고난들이 우리를 방해한다면, 자신들의 문화를 찬송하는 데 심취한, 유럽의 이성적인 지성인들이 우리를 해석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을 찾지 못한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들은 생의 고됨이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지는 않다는 것,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우리의 모험은 그들이 걸어갔던 길 만큼이나 고되고 잔인하다는 것을 잊은 채, 자신들을 재는 잣대로 우리를 재려고 합니다.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 기준으로 우리의 현실을 해석하려고 하는 시도는 오로지 우리들을 더욱 더 미지의 존재로, 부자유스럽고 더욱 더 고독한 존재로 만들 뿐입니다. 위대한 유럽이 만약 스스로의 과거를 통하여 우리를 관찰했다면 보다 사려깊은 통찰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런던이 첫 성벽을 쌓는 데 3백년이 걸렸고, 첫 주교가 생기는 데까지 또 다시 3백년이 걸린 사실을 기억한다면, 에트루리아의 왕이 로마를 역사 속으로 끌어들이기 전까지 무려 스무 세기 동안이나 불확실의 구름 속에서 진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부드러운 치즈와 무개성적인 손목시계들을 쏟아내는 평화로운 오늘날의 스위스가 불과 16세기까지만 해도 용병들로 유럽 전역을 피에 물들였다는 것을 유럽이 기억한다면 말입니다. 심지어 르네상스가 절정에 달했던 때에도, 제국의 군대들에게 고용되었던 1만 2천명의 용병들은 로마를 약탈한 뒤 철저히 파괴하고 로마 시민 8천명을 학살했습니다.
나는 53년 전, 이 자리에서 토마스 만(Thomas Mann)이 찬양한, 순수한 북부를 열정적인 남부와 연합시키려던 토니오 크뢰거(Tonio Kroger)의 환상을 찬양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보다 공정하고 인도적인 조국을 위하여 이곳에서 투쟁하는 현명한 유럽인들이 우리를 보는 그들의 방식을 재고한다면 우리를 보다 더 많이 도울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들의 이상과의 연대도, 그것이 이 세계에서 자신들의 자주적인 삶을 누리려는 꿈을 가진 민족들을 위한 구체적인 도움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고독을 감소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라틴아메리카는 스스로의 의지가 없는 졸(卒)이 되고 싶지도 않고, 또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또한 그녀의 독립과 창조를 향한 탐험이 서구적인 영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헛된 소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간의 거리를 좁힌 항해 기술의 발달은, 역으로 우리의 문화적 차이를 더욱 더 강조하였습니다. 문학에서는 우리에게 그토록 쉽게 허용되는 창조성이, 왜 사회 변혁을 향한 우리의 고된 시도들에게는 항상 거절당하는 것일까요?
왜 진보적 유럽인들이 그들의 나라에서 추구하는 사회 정의가, 라틴아메리카에서도 다른 조건 하에서 다른 방법으로 목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우리 역사의 엄청난 폭력과 고통은 긴 세월의 불평등과 무수한 슬픔의 결과이지, 우리 집에서 3천 레구아나 떨어진 곳에서 꾸며지는 음모의 결과는 아닙니다.
그러나 유럽의 많은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에 풍부한 결실을 얻게 해준 과잉의 열정을 잊어버린 노인들처럼, 어린아이 같은 그들은 세계의 두 힘센 주인의 손아귀에서 사는 것 외에 다른 운명은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고독의 크기입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모든 억압과 착취와 유기에 우리는 생명으로서 대항합니다.
홍수나 질병도, 기아나 자연재해도, 심지어 세기를 잇는 끝이 없는 전쟁도, 생(生)의 사(死)에 대한 지속적인 우위를 억누르지는 못합니다. 이러한 우위는 성장하고 더욱 더 속도가 빨라집니다.
매년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보다 7천 4백만명이나 더 많은, 해마다 뉴욕 시 인구의 7배에 달하는 새 생명들이 태어납니다. 이들 생명들 대부분은 라틴아메리카를 포함하여 최소한의 자원을 가진 나라들에서 태어납니다.
반면, 가장 부강한 나라들은 오늘날까지 이 지구 위에서 살아온 모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불운한 행성 위에서 한번이라도 숨을 들이쉰 모든 생명체들을 몇 백번이나 몰살시킬 수 있는 파괴의 힘을 모으는데 성공했습니다.
오늘 같은 날에, 내 문학적 스승인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인류의 종말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만약 내가 32년 전, 그가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거대한 비극이 오늘날에는 인류의 역사 이래 처음으로 한낱 과학적인 확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나는 그가 섰던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없었을 것입니다.
지난 인류의 역사 동안 한낱 유토피아에 불과했을 법했던 이 환상적인 현실과 마주친 우리, 무엇이든지 믿고 싶어하는 이야기꾼들은, 지금이라도 정 반대의 유토피아를 만들려는 노력이 늦지 않았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 누구도 타인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지 않는, 새롭고 완전한 생명의 유토피아를, 사랑이 진실되고 행복이 가능한, 그리고 백년 동안의 고독의 저주를 받은 인종들이 드디어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지구상에서 두번째 기회를 누릴 수 있는 그런 유토피아를 말입니다.
-1982년 12월 8일 노벨 문학상 수상 기념 연설, 스톡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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