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이순원 (1,4,3,3,1)

카지모도 2020. 3. 8.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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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이순원]]

<먼길> <말을 찾아서> <1978년 겨울, 슬픈 직녀>

 

 

<먼길>

-이순원 作-

 

***동우***  

2016.01.02 04:48

 

이순원 (1957~ )의 '먼길'.

 

일본 드라마를 보면 가독(家督)을 물려준다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적자(嫡子)나 아들이 없으면 데릴사위나 양자를 들여서라도.

그 대물림은 대체로 지위라거나 생업이나 기술등 육적(肉的)이라거나 물적(物的)인 현실적 의미가 강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대(代)를 잇는다는 어떤 근원적 에토스의 측면, 일종의 영적(靈的) 측면에서의 명제인 것입니다.

물질주의의 현실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자주 느끼는바, 공맹(孔孟)의 도(道)의 구현에 있어서 일본보다는 우리나라가 훨씬 고상한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닐까요 합니다만.

 

격동의 근세사를 겪은 우리나라. 

특히 6.25 동족상잔의 세월....

이 땅에서 그 격랑으로부터 자유로울수 있었던 집안 하나라도 있었을까요?

많거나 적거나 가볍거나 무겁거나 간에.

 

이순원의 ‘먼길’

경우 바르고 손끝 야물딱진 당숙모.

당숙은 사촌형인 아버지 대신 인민군에게 끌려가 행방불명되었고 오로지 외아들 하나 희망으로 살아가는 당숙모의 별호(別號)가 '읍에 아재'입니다.

읍에 아재의 아들, 기한이 형.

행방불명된 남편의 사망신고로 연좌제가 풀리자 정작 큰집자식은 승승장구하지만 오히려 안 가도 될 군대에 다녀오는둥 지지리 풀리지 않는 '읍에 아재'의 자식입니다.

 

<그러나 새벽쯤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아버지의 그 목병은 어쩌면 사십여 년 전 겨울, 그 목 잠김의 재발이 아니었을까 하고. 그리고 또 어쩌면 먼 길, 나간 정신에도 본능처럼 돌아와 누워야 할 자리를 알고 돌아와 숨을 거둔 아재의 마음속 화해로 내가 도착할 때쯤이면 아버지가 다시 지난 추석 때 선반 위에 올려 둔 담배를 꺼내 태우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그것은 기한이 형까지 그렇게 마음속의 용서로 돌아와야 비로소 나은 목 잠김인지도 몰랐다.>

 

아버지의 죄책감과 미안함과 부끄러움.

늙는다는 건 괜히 나이의 숫자만 늘어가는게 아닙니다.

생각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관계에 대한 미안함과 연민과, 그리고 한살이 도리에 대한 깨달음으로 깊어지는 생각입니다.

 

으흠 그런데 내 경우, 

그런 깨달음 여태까지 아득하므로 나는 아직 늙지 않았습니다그려.ㅎ

 

비니미니 지금 내 나이 될 즈음, 이 소설 속 사연 따위는 어느 고(古)소설 속의 얘기일테지요.

그 때 쯤이면 관계거나 윤리거나 혹은 양심이거나.. 인간의 한살이 도리라는 것에 대하여 전혀 다른 패러다임이 형성되어 있을겁니다.

어떤 식으로들 생각이 깊어질런지, 지금은 상상도 되지 않는 전혀 낯설 그것들.

먼 훗날 만들어지는 그 생각들.(작금도 시나브로 변모해가는.)

나 죽은 후 내 것 아니므로 지금 내게 아랑곳 없을테지만 말입니다.

 

 

<말을 찾아서>

-이순원 作-

 

***동우***

2017.12.18 09:12

 

이순원의 '말을 찾아서'

참 정결하게 아름다운 소설입니다.

 

노새, 

이름처럼 슬픈 동물입니다.

암말과 숫당나귀 사이에서 태어난 힘만 세고 생식능력은 없는 짐승.

 

한 소년의 성장소설로 읽어도 좋고, 노새와 같은 한 사내의 애틋한 에토스를 읽어도 좋습니다.

혹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정서로 읽어도 좋겠습니다.

 

두 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동우***

2017.12.19 04:41

 

대(代)를 잇는다는 것.

자식이 없으면 양자(養子)를 들여서라도.

 

노새를 끄는 당숙에게 있어서의 양자.

가산(家産)이나 가독(家督)을 물려준다는 물적인 측면보다 형이상학적(?)인, 심리적인, 정신적인 의미가 더 깊습니다.

행복하기 그지없는 안돈감, 그리고 마냥 쏟아주고 싶은 사랑...

관념이 승화되어 싹튼 내리사랑입니다.

어찌보면 유전자의 그것보다 더 진하고 아름다운 애정입니다.

 

<"도로 물려 오란 말이야. 노새집 양재(양자) 안 할 거니까">

수호에게 당숙의 노새는 견딜수없는 부끄러움이었습니다.

그토록 당숙에게 양자 가기 싫어하였던 그.

그러나 필경은, 아부제(아부지)라 부르면서 비로소 마음을 엽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을줄 아는, 그것이 바로 어른이 되는 것일테지요.

 

그러나 아부제의 노새와는 한사코 친해질수 없었습니다.

노새로 표상되는 당숙의 이미저리, 그 트라우마는 어른이 되어 말고기를 먹고서도 죄의식을 남깁니다.

 

<결국 그 원고에 나는 그의 이야기를 쓰지 못했다. 그러나 언젠가 나는 그의 슬픈 생애에 대해 제대로 글을 쓸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다린다. 그는 태어나기로도 암말과 수나귀 사이에서 온갖 핍박 속에 오직 무거운 집과 먼길을 걷기 위해 생식력도 없는 큰 자지만 달고 나온 노새였고, 이름은 은별이었다.>

 

갈수록 멀어지는 세대간 의식의 괴리...

대를 잇는다는 의식은, 시나브로 전혀 다른 의미의 패러다임이 되어있을테지요.

이제 내 세대가 저물면.

 

이순원의 '말을 찾아서'

잔잔하지만 짙은 감동, 참으로 잘 쓴 좋은 소설입니다.

 

 

<1978년 겨울, 슬픈 직녀>

-이순원 作-

 

***동우***

2018.02.05 04:09

 

이순원 (1958~ )의 '1978년 겨울, 슬픈 직녀'

 

내 것보다 10년쯤 늦은 1978년의 겨울의 군대.

그러나 군대의 상황과 졸병의 형편은 시대를 관통하여 엇비슷합니다.

슬픈 직녀의 그 정서도.

 

세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함께 읽어요.

 

***동우***

2018.02.07 04:39

 

집시법위반으로 강제징집된 군대는 내 지원병의 군대와 좀 다를까마는, 1.21 사태 즈음의 내 군대인지라 유신군대가 어떠한지 모르겠지만 도낀개낀 아니랴.

아버지같은 인사계, 독사같은 하사관, 구렁이같은 장교들이나 헌병대 영창같은 것들도 내게 낯선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군대집단의 부당함에 대하여 고개를 빳빳이 든 적이 없었다.

'유신의 군대' 군가 대신에 다른 노래를 부르는 병사.

야전훈련 텐트에 여자를 불러들이는 상관의 부정함에 대하여 허공에다 총을 갈기고... 

그런건 언감생심.

나는 반합 뚜껑을 두드리면서 영자의 빤스를 신나서 불렀고, 국민교육헌장을 소리높혀 복창하였고, 쌀이 가득 든 더블백을 신새벽에 중대장 집으로 날랐고, 보급계의 보직으로 화랑담배와 전투복을 철조망 넘겨 술값 만들기도 마다 하지 않았다.

군대는 不正 不當하였고 나는 부정직하고 비겁하였다.

이문희(1933~1990)의 단편 '努海記' (군대의 부정에 무력하게 저항하는 졸병 이야기)를 읽으면서 한줌 부끄러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밤, 자리에 누워 나는 내 옆에 누운 직녀의 손끝을 하나하나 더듬어 어루만졌다.>

여자는 미지의 환락, 그리고 내 곁에는 시대의 슬픈 직녀는 누워있지 아니하였다.

 

나의 스물 두엇무렵.

음습한 골방에서 관념의 마스터베이션이나 일삼는 슬프고 부끄러운 청춘.

그로부터 몇십해런가.

오늘 이르러.

극복하였는가. 그리하여 기쁜가.

아니, 여전히 부끄럽다. 슬프다.

화가 난다.

꼬라지에 무엇이 그리 노여운가.

늙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