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르 클레지오]]
<세상 밖으로..> <오로라의 집> <틱스카칼> <물질적 황홀>
<세상 밖으로 또는 오를라몽드>
-르 클레지오 作-
***동우***
2016.03.30 04:33
2008년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소설가,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 (Jean Marie Gustave Le Clezio, 1940 ~ )
꼬비에뚜님 댁에서 '르 클레지오'를 처음 읽었습니다. <實없는 나의 책읽기입니다>
'세상 밖으로 또는 오를라몽드'
참 좋게 읽히는 소설, 늙은 재 속에 그나마 투명한 서정 한 줌 남아있는지 애잔한 감성을 자아냅니다.
버려진 극장 오를라몽드.
소녀 아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평안한 곳, 태아가 되어 스스로 갇힌 womb(자궁) 공간입니다.
고요와 평화와 아름다움이 깃든 고색창연한 古城입니다.
유년의 행복한 기억이 고스란히 보관된 다락방입니다.
회색빛 도회의 소음이 없는 푸른 바다와 하늘만 보이는 원시림입니다.
그리하여 이윽고 돌아가 죽을 무덤입니다.
그 오를라몽드가 부수어져 폐허가 됩니다.
바다에 쏟아지는 태양의 그림자는 소녀의 얼굴 위로 어두운 눈동자 속에서 반짝입니다.
분노로 꺼지지 않는 빛과 함께.
그림장사 할 적, 복제된 아트포스터의 그림 한점에 (아트포스터도 라이센스가 있더군요)에 눈을 떼지 못하였습니다.
참 이상도 하지요. 생전 처음 본 것인데도 내게는 너무도 낯익은 그림이어서.
괜히 외롭고 왠지 서럽고 막막하고 무언가 따뜻하고 어딘가 편안한.. 그런 느낌 가득 담겨있는.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는데 '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 1882~1967)의 그림이었어요. (인터넷은 참 좋기도 하지요, 말미에 올린 그림입니다.)
그때 내 오를라몽드의 풍경이 저러했었던가 보아요.
***다나***
2016.03.31 16:29
제가 참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이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표현하신대로 괜히 외롭고 서럽고 막막하고 따뜻하고 편안한.. 그 느낌을 저도 받았거든요.
그의 <일요일 이른 아침> 이란 작품도 딱 그 느낌이랍니다.
어제, 오늘 올려두신 몇 편의 글들을 편히 읽었습니다.
존경하는 동우님.
감사합니다.
***동우***
2016.04.01 04:30
반갑습니다, 다나님.
에드워드 호퍼에 가득 흐르는 도회적 쓸쓸함의 정서..어딘가 따뜻함의 페이소스가 배어있는.
다나님의 감성이 만저집니다그려. ㅎ
어쭙잖은 글들, 편히 읽으셨다니 고맙습니다.
자주 들러 주십시오.
***eunbee***
2016.04.03 09:12
호퍼의 그림.
두분의 '외롭고' '먹먹한'...
내게도 만져지는 우연의 일치.ㅋㅋ
다나님이 내 블로그를 29일 하루에 19회 조회하신 뒷날
동우님 방에 올려진 호퍼의 같은 그림.
어쩜 그리도 우연인지요.
저 그림을 이곳에서 본 순간 댓글 쓰려다 망설이고 포기했는데
그날 작은것들을 사랑스럽게 펼쳐놓으시는 내눈에 매우 사랑스런 여인이
댓글을 쓰셨네요. 어쩜 그리도 우연한 일이... 마치...ㅋㅋ
그냥 해보는 소리인데도 자꾸 웃게 되네요.
인터넷은 정말 좋아요.ㅎㅎㅎ
우연이 벌어진 일이 하도 신기해서.
며칠 신기해 하다가 만우절 이야기로 드릴까 하기도...
이렇게 실없이 삽니다. 하핫
***동우***
2016.04.04 05:13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감성의 동질성일테지요.
정서적 동족으로서. ㅎ
프랑스에도 만우절을 쇠나요? (쇤다? ㅎㅎ)
<오로라의 집>
-르 클레지오 作-
***동우***
2016.04.05 04:41
르 클레지오의 '오로라의 집'
투명하게 아름다운 서정, 관능적인 문체..
그리고 자연의 편에 선 작가의 순정한 분노가 느껴집니다.
이런 분위기의 소설을 읽을적마다 원어(原語)로 읽었으면 하고 내 빈약했던 어학의 공력(功力)에 한숨을 쉽니다.
학교에서 배웠던 영어마저 턱도 없는 주제에 언감생심의 불어(佛語)이지만 말입니다. ㅎ
철거되는 낡은 극장 '오를라몽드'.
티티새가 우짖었던 퇴락한 비밀정원, 진주빛 궁전 '오로라의 집'
초록빛 바다, 짓푸른 하늘, 숲과 나무...
우리 존재의 시원이 자리한, 사랑과 자유와 추억이 깃든 곳.
프랑스의 친구는 기다립니다.
매년 봄이면 창가에서 노래를 들었던, 이상하게도 올 봄에는 오지 않는 티티새의 우짖는 소리를.
한반도, 그 옛날 전선줄 가득 음표처럼 줄지어 앉아 짹짹이던 참새들과 낮은 하늘을 날렵하게 날던 제비들 한국땅에서 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지는 벌써 오래전.
우리 도회화의 성마름에 비할바 없이 유장한 프랑스인데...
으흠, 우리에게 남겨진 마음 속에 원초적인 초록 빛갈로 잠겨 있었던 것들.
편리라거나 효율이라거나 개발이라거나 발전이라거나 기술이라거나의 탈을 쓴 부르도저의 캐터필러 아래 쓰러져 사라졌습니다.
끊임없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요즘들어 부쩍 느낍니다만 나는 하루가 다르게 전혀 낯선 문명의 얼굴을 대하는듯 합니다. <이세돌을 압도 하는 알파고를 보십시오>
이런 속도로 나아가단 내 손주 비니가 스물 처녀가 되었을 때 지금과는 아주 다른 세상이 되어있을 것 같아요.
고작 10년 쯤 후인데 우리 옛시절의 100년과 맞먹을만한..
그 때가 되면 비니는 어떤 생각 어떤 가치관으로 어떤 환경 속에서 생활하고 있을까, 가끔 생각합니다.
늙은이들, 온고지신(溫故知新) 운운하는 덕목 만으로는 감당할수 없는 세상이지 않겠어요?
그러하니, 후대에게 자리를 비켜 사라져야 하는 목숨의 당위가 게 있을법도 합니다. ㅎ
호모 사피엔스는 실로, 자연으로부터 가속(加速)으로 괴리되고 있습니다.
어디까지 나아갈런지 짐작도 할수 없지만, 그 나아감의 방향이 모쪼록 섭리를 거스르지 않는 밝은 쪽이기를 빌 뿐이지요.
<틱스카칼>
-르 클레지오 作-
***동우***
2016.08.30 04:29
내 빈약한 독서력(讀書歷)
'르 클레지오' (Le Clezio,1940~ )는 딱 네편을 읽었을 뿐입니다.
그것도 종이책이 아니라 P/C 모니터로. (전에 '오를라몽드'와 '오로라의 집'을 올렸었지요)
틱스카칼(Tixcacal)
유려한 시적문체인데 언어들은 비의적(秘意的)이라 매우 난해합니다.
낯선 지명과 인명들의 발음이 생경하여 더욱 그러한 인상입니다. (유카탄 반도의 마야 인디언의 어휘일테지요.)
검색하여 보니까 '르 클레지오'는 문명에 대한 혐오와 불안으로 1969~1973년 파나마에서 인디언과 함께 생활하면서 평온을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틱스카칼'은 '성스러운 세 도시'(Trois villes saintes)라는 소설집에 실린 세편의 소설중 한편이라고 하는군요.
세 도시의 이름은 이 소설 '틱스카칼'과 '샨카'와 '슌 폼', 소설집에는 세개 도시 이름으로 세편의 소설이 실려있다지요.
영원한 잠에 빠진 도시, 한발로 물을 찾아 허덕이는 숲과 대지...
성도(聖都) '틱스카칼'은 침략자인 백인문명과 대척점에 있는 도시입니다.
백인도시처럼 풍족한 물(물질)은 없고 한발의 틱스카칼은 사뭇 비탄이 흐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지하동굴을 흐르는 차가운 물의 말씀과 망각할 수 없는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크리스찬, 십자가, 세라핀(세라핌이겠지요), 하늘의 왕국, 성처녀수태...
그러니까 소설에 등장하는 현인(賢人) '후앙드라 크뤼즈'는 예수의 이미지로군요.
백인이 가져온 예수, 그러나 예수는 정작 틱스카칼에 있다는... 패러독스일까요.
문명으로 오염된 예수가 아니라 생명의 시원(始源)에 존재하는 예수.
이 소설을 서사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니 머리에서 쥐가 납니다그려.ㅎ
이런 소설은 파악이 아니라 일종의 시적(詩的) 감흥으로 읽어야할 듯 합니다.
어떤 직관적 이미지를 그냥 느낌으로 사유하면 족하리이다.
원시적 환상의 정글 이미저리, 앙리 루소의 그림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또는 예수의 이미지를 강렬한 마티에르로 표현한 조르주 루오의 그림도 떠오릅니다.
앞에서 나는 '르 클레지오'를 딱 네편 읽었다고 하였는데, 나머지 하나는 '물질적 황홀'입니다.
그닥 길지 않은 에세이인데 나는 감동하였습니다.
조만간 올립지요.
<물질적 황홀>
-르 클레지오 作-
***동우***
2017.06.15 06:22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 (Jean Marie Gustave Le Clezio, 1940 ~ )의 '물질적 황홀'
물질적 황혼.
메타포와 알레고리, 매우 매우 비의적(秘意的)입니다.
그러나 서정적인 유려한 문체로 알듯 모를듯한 감동을 주는 에세이.
이 작품을 작년 가을, 딸이 모는 봉화가는 승용차 안에서, 봉화의 민박집에서 읽었습니다.
아내와 딸과 아들과 두 손주 비니와 미니.
3대의 인연, 그 정은 어디로부터 비롯하여 이토록 연연한 것일까....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완전한 세계 속에서 나의 허무가 차지할 자리는 없었다...세계는 아직 이쪽에, 현실적이고 에워싸는 것으로 그 무엇으로도 귀착되지 않고 사라지기 쉬운 단단함으로, 느낄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질료로써, 겉으로도 안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그저 그 자체일 뿐인 충만하고 긴 질료로서 존재했다....체계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제외된 채 동떨어져 있을 수가 없었고 떠날 수가 없었다...날 수가 없었다. 그 무한은 유한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 영원은 오직 시간의 토대 위에 건설된 것이었다....보이는 것은 오직 옛날에 존재했었던 것뿐. 옛날에 존재했었던 것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그 결과가 어떤 것이건간에 창조의 심연으로부터 나온 그 결과는 원인이 없는 것이었다. 원인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우연의 극소의 운동에 따라 출현했던 것은 어떤 길을 좇아가지 않았다. 운명은 소급능력을 갖춘 환상이었다... 돌연 모습을 나타낸 그것은 어떤 현전의 확인이었으니 거기에다가 기원이나 종말을 부여할 수는 없었다. 오직 이런 점은 말할 수 있었다. 즉 침묵에서 나와서 침묵으로 되돌아간다는 사실 말이다. 또 이 점도 말할 수 있다. 즉 침묵이라는 사실 말이다....내가 태어나지 않았을 때 세계는 버려져 있었다...그 공허가 나를 창조했다...언제나 그 에너지가 있었다...그 무한은 몸을 가진 것이었지 어떤 생각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에서 벗어날 길 없는 질료의 정확한 공간이었다...
어떻게 나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었던가? 어떻게 나는 여기에는 있고 저기에는 없을 수 있는가! 그러나 우주는 절대확실. 내가 있든 없든 우주는 치밀하여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다....즉 존재하는 것의 완벽함과 소외불가능성 말이다...변함으로써, 혹은 그 자체인 채로 남아 있음으로써 저마다의 사물은 <충실한> 것이었다....그것은 창조되기를 그친 적이 없으며 그 속에다가 제 비밀의 형태를 간직하고 목적 없이 떠다니면서 눈에 보일까 말까 하게 그 형태를 드러내 보이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 신비는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다. 그 신비는 자명하다. 완전히 자명하다. 그것은 물질을 지닌 것이다...창조의 행위는 결코 그치는 법이 없다. 그것은 이처럼 끈질기게 계속되는 단단한 물질 속에서 이루어진다...그러나 분리되어 떨어져나온 저마다의 몸 속에는 사람들이 그 속에 깃들기를 바랐던, 물질이 분리되어 나오기를 바랐던 싸늘하고 태연한 불의 존재가 담겨 있다. 나의 내면에는, 내가 잊어버리지 않도록, 영원히 내가 기억하도록, 항상 그 한 조각 태양이 들어 있다...아무런 필연성도 없이, 내 운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라곤 하나도 담지 않은 채 펼쳐져 있다...이 진실된 무한이 나를 품었다. 그것이 나의 물질을 저의 물질 속에 품었다....나를 세상에 낳은 여자가 또한 나를 죽였다.>
리처드 도킨스.
원시수프만이 넘실거리는 태초의 혼돈. 그 혼돈 속에서 아미노산이 생성되고 유기물이 탄생하였다고 합니다.
단백질의 분자에 의하여 생겨난 개체의 특성인 DNA.
체세포 분열과 섹스라는 교차에 의한 감수분열, 자연선택에 의한 끊임없는 진화, 역귀와 돌연변이.
내 존재는 무구한 시간의 끄트머리인 현금(現今)의 그 결과물입니다.
그러하므로 내 자아는 물질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까?
정신은 물질의 일부, 하나의 물질적 속성인 것입니까?
물과 불과 공기와 흙이라는 원소이거나, 火水木金土라는 오행설.
자연회귀론, 유물론, 범신론, 윤회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알무스타파는 사람들과 작별하면서 마지막 말을 남깁니다.
“나는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잠시만 있으면 바람결에 한숨을 돌리다가 또 다른 여인이 나를 낳을 것입니다”
막연하게 느껴지는듯도 한 '물질적 엑스터시'
허지만 내 부박한 사유와 천학(淺學)의 머리로 어찌 이 글을 이해할수 있으리.
그냥, 시적 감흥의 몽롱한 감동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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