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아르투르 슈니츨러]]
<장님 제로니모와 그의 형>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장님 제로니모와 그의 형>
-아르투어 슈니츨러 作-
***동우***
2015.06.01 05:33
아르투르 슈니츨러 (Arthur Schnitzler, 1862~1931)의 '장님 제로니모와 그의 형' (Blind Geronimo and His Brother- Der blinde Geronimo und sein Bruder 1902년 발표)
이 소설을 처음 읽었던게 교과서에서였던가.
<까를로는 눈먼 동생의 팔을 꼭 부여잡고 앞으로 이끌며 다시 걸어갔다. 그는 전보다 훤씬 더 빨리 걸었다. 제로니모가 어린 시절 이래 두 번 다시 보여주지 않았던, 부드럽고 복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까를로도 역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제 자기에게 더 이상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법정에서나 또 이 세상 다른 어느 곳일지라도. 그는 다시 동생을 얻은 것이다... 아니, 그는 처음으로 동생을 얻은 것이다.>
도둑이 되었을지라도 우애를 회복한 형제의 저 기쁨에 울컥 감동하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자네 이름이 뭐지?"
"예, 제로니모입니다."
"그럼 제로니모, 제발 속지는 말게!" 그 순간 마부가 계단 맨 위 층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리, 속다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네 친구에게 20프랑짜리 지폐를 주었단 말이야."
"아이구 나리,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래, 그럼 조심하라구!"
"그 사람은 제 형이에요, 나리. 그 사람은 저를 속이지 않습니다."
젊은이는 잠시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었다. 그가 아직 곰곰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마부가 운전대에 올라 말을 몰기 시작했다. 젊은이는 마치 "운명이야! 될대로 되려므나" 이렇게 말하려는 듯 머리를 흔들며 몸을 의자 뒤에 기댔다. 그리고 마차는 떠나버렸다.>
무심코 던진 돌에 맞아죽는 개구리.
젊은이의 저 심리는 인간성의 음습한 곳에 자리잡은 가장 추악한 것이고 저 무책임한 냉소적 장난은 악의 여부와 상관없이 씻을수 없는 죄악입니다.
까를로와 제로니모.
죄책감과 의무감에서 우러난 것일지라도 동생을 향한 형의 연민과 사랑은 얼마나 눈물겨운지요.
도둑이 된 형에게 감사와 사랑의 입을 맞추는 동생도 나는 눈물겹게 이름답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아르투어 슈니츨러 作-
***동우***
2016.06.19 09:19
아르투어 슈니츨러' (Arthur Schnitzler, 1862~1931)의 '죽은 자는 말이 없다'를 올립니다.
'슈니츨러'는 '눈 먼 제로니모와 그의 형' (기 포스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이지요.
그 소설은 아마 예전 중학교 교과서인가에 실려 있었을겁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프란츠와 불륜관계인 유부녀 엠마.
남자를 사랑하지만 여자는 가정을 버릴 생각은 없으므로, 행여 다른 사람의 눈에 띌까 그녀의 밀회는 언제나 조심스럽습니다.
폭풍우 부는 날 밀회중 마차가 전복하고 여자가 정신을 차리고보니 자신은 멀쩡한데 남자는 죽은 듯 옆에 쓰러져있습니다.
사랑하는 남자를 어떻거든 살려보고자 남자가 죽은것 같다는 마부에게 그래도 의사를 불러오도록 보냅니다.
어둠 속에서 가냘픈 등잔불과 함께 죽었을 것 같은 남자 곁에 남겨진 여자, 비로소 공포가 엄습합니다.
남자의 창백한 얼굴이 무섭고, 만일 남자가 죽었다면 사람들에게 불륜이 드러날까봐 정신이 번쩍 듭니다.
인기척이 나자 등불을 꺼 어둠 속에 자신을 숨기고 여자는 현장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옵니다.
여자의 의식의 흐름.. 심리의 기복.. 죄책감과 사회적의식..
정치(精緻)한 심리묘사입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슈니츨러'를 자신의 도플갱어라고까지 하면서 극찬하였답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의 내면은 자아(ego)와 이드(id)와 초자아(super ego)로 나뉘어진다지요.
자아의 갈등구조.
이드가 논리와 윤리의식과는 상관없는 본능적 욕동이라면, 초자아는 무의식에 자리잡은 어떤 도덕률로서 이드를 제어하는 기능을 담당한다지요. (융의 집단무의식과는 좀 다른 개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엠마의 수퍼에고, 이를테면 남자를 버려두고 도망친다는 죄의식과 불륜의 발각을 두려워하는 심리의 이중노출로 작용하는듯 느껴집니다.
인터넷에서 주어온 슈니츨러의 면모
++++
1862년 오스트리아 빈의 상류사회에서 태어나 몇 번의 여행을 제외하고는 평생 빈을 떠나지 않았다. 의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의학을 공부하고 병원까지 개업했으나 결국 의사의 길을 버리고 극작가와 소설가로서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는 작가로서 성공하여 경제적인 부와 명성을 얻기도 했지만 도박과 낭비로 어려움을 자초하기를 수차례나 반복했고, 젊은 시절 그의 여성 편력은 카사노바의 환락과 모험을 옮겨놓은 것 같았다. 한 사람의 실존인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낯선 또는 병적인 그의 삶은 그가 14세 때부터 죽는 날까지 55년 동안, 처음 6년을 제외하면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한 일기에 담겨 있다.
슈니츨러는 1900년을 전후로 호프만스탈과 함께 오스트리아 ‘빈 모더니즘’을 대표하던 작가다. 활동 당시 그는 그의 작품이 “문학 작품이라기보다는 병원 검사 기록에 가깝다”는 비판을 자주 들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슈니츨러가 인간 심리를 마치 의사가 환자의 증상을 진찰하듯 지극히 분석적인 시선으로 관찰하고 그 결과를 작품으로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슈니츨러의 작품이 병원 검사 기록에 가깝다는 비판을 들은 것은 실제로 그가 의사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1862년 당시 빈의 저명한 후두과 의사인 요한 슈니츨러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대 문제로 아버지를 자주 찾아오던 연극배우들을 통해 슈니츨러는 일찍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완고한 반대로 뜻을 펼치지 못했고, 결국 빈 의대에 들어가 의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언제나 문학에 가 있었고, 의사로 일하던 시기에도 헤르만 바르, 후고 폰 호프만스탈, 페터 알텐베르크 등 빈 모더니즘 작가들과 교류했으며, 여러 편의 희곡과 단편 소설도 발표했다.
그러나 대학에서의 의학 공부는 슈니츨러의 정신세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빈 의대는 모든 병의 원인을 물리적, 화학적 원인에서 찾는 유물론적 의학이 주도했다. 슈니츨러는 의학 공부를 통해 인간을 자유의지나 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 법칙의 영향권 안에 있는 생물학적, 물질적 존재로 바라보는 데 익숙해졌다. 물론 이러한 인간관은 근본적으로는 19세기 중반 이후 눈부시게 발전한 자연 과학의 영향과 관계가 깊다.
슈니츨러는 오늘날 독일어권 어문교육의 필독서인 『꿈의 노벨레』, 『엘제 아씨』, 『구스틀 소위』 외에도 『어둠에로의 도피』, 『카사노바의 귀향』, 『회색빛 아침 속의 게임』 등 소설 60여 편과 희곡 30여 편, 작품 노트 잠언록 자서전 일기 등을 남겼다. 바우어른펠트 문학상, 그릴파르처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1931년 10월 빈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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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죽음을 느꼈을때 여자의 심리.
주검을 인식하는 것처럼 확연하게 한 대상에 대한 인상(印象)이 유리(遊離)된 감정이 있을까요.
사랑하는 프란츠는 홀연 종적을 감추어버리고 창백하고 무서운 한 남자가 곁에 누워 있을 뿐입니다.
<그녀는 생각했다. 가망이 없습니다…… 그 말이 계속하여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가망이 없습니다. 갑자기 그녀는 옆에서 숨소리가 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창백한 입술 쪽으로 몸을 숙였다. 아니었다. 거기에서는 아무런 입김도 나오지 않았다. 관자놀이와 뺨의 피는 마른 것 같았다. 그녀는 일그러진 그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온몸을 떨었다. 그래, 나는 어째서 믿지 않는단 말인가! 틀림없는데…… 이건 죽음이야! 그리고 그녀는 온통 전율했다. 그녀는 점점 더 이렇게 느꼈다. 죽은 자. 나와 죽은 자, 내 무릎 위에 있는 죽은 자. 그리고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머리를 밀쳐냈고, 그리하여 그는 다시 땅바닥에 누워있게 되었다. 그제야 홀로 떨어져 있다는 몹시 섬뜩한 감정이 그녀를 엄습했다. 어째서 마부를 보냈나?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나! 국도 위에서 죽은 남자를 데리고 혼자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사람들이 오면…… 그래, 사람들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여기서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하지? 그녀는 다시 죽은 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기 혼자만 그의 곁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는 불빛이 있지. 그리고 그녀에게는 이 불빛이 지금 자신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랑스럽고 정겨운 어떤 것으로 여겨졌다. 이 작은 불꽃 속에는 그녀를 에워싼 드넓은 까만 밤 속에서보다 더 많은 활력이 있었다. 그렇다. 그녀에게는 이 불빛이 자기 옆 땅바닥 위에 누워 있는 창백하고 무서운 남자에 맞서 자신을 보호해주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녀는 눈이 아른거리고 불빛이 흔들거리기 시작할 때까지 불빛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그녀는 꿈에서 깨어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뛰어 일어났다! 그건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사람들이 여기서 그와 함께 있는 나를 발견해서는 안 돼. 그녀는 자신이 도로 위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과 발밑에 있는 죽은 자와 불빛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또한 그녀는 자신이 어마어마하게 커져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지? 그녀는 생각했고, 머릿속에서는 자꾸만 이 생각이 솟구쳤다.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지? 사람들을? 그 사람들에게 내가 무슨 필요가 있지? 사람들은 와서 물을 텐데……그럼 나는……나는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지? 모두가 내가 누구냐고 물을 거야. 나는 그들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아무 대답도 못 해. 그들이 오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고, 침묵할 거야. 아무 말도……그들은 내게 강요하지는 못할 거야.>
좀전까지의 그 달콤하고 열렬하였던 사랑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걸까요.
싸늘하게 식어버린 사랑 그 어둡고 파멸적인, 죽은 자의 위력으로부터 우야든둥 벗어나야 합니다.
죄책감 따위는 묻어버리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요.
<그녀는 자신이 벌써 오랫동안 마치 뿌리가 박힌 듯 거기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녀는 달아날 수 있으며, 거기에 서 있는 것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고, 스스로를 불행에 빠뜨리는 것이다. 그녀는 한 발짝을 떼어놓는다……조심스럽게……그녀는 도로변 웅덩이를 건너야 하는데……한 발짝을 들어올린다.-오, 웅덩이는 아주 얕다!-그러고는 또 두 발짝을 떼어놓고, 마침내 도로 가운데에 이르고……그런 다음 잠시 조용히 서서 앞을 바라보고는 어둠 속으로 뻗친 음침한 길을 따라 계속 걷는다. 저쪽에, 저쪽에 도시가 있다. 그녀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지만 방향만은 확실하다고 느낀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뒤로 돌아선다. 그다지 깜깜하지는 않다. 그녀는 마차를 뚜렷이 볼 수 있고, 말들도…… 또한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면 땅바닥에 누워있는 사람의 윤곽도 알아볼 수 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뜬다. 무언가가 그녀를 가지 못하도록 제지하고 있는 듯 여겨지는데, 그녀를 여기에 붙들어두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죽은 자이고, 그의 위력에 그녀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에서 세차게 벗어나고, 이제 땅이 너무 젖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녀는 미끄러운 도로 위에 서있으며, 축축한 먼지안개는 그녀가 걸어가는 것을 방해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걸어가며……더 빨리……달려가며……거기에서 달아나……다시 돌아간다……빛 속으로, 혼잡 속으로, 사람들에게로! 그녀는 도로를 따라 달리며, 넘어지지 않기 위해 옷을 높이 들어올린다.>
결국 그녀는 남편에게 고백하였겠지요?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용서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녀는 자신이 갑자기 모든 것을 큰소리로 얘기해 준 듯한……이날 저녁에 있었던 일을 식탁에서 모두 털어놓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그리하여 그녀는 남편의 놀란 시선 앞에 좌절하면서 다시 한 번 묻는다.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요?”
“죽은 자는 말이 없어.”남편은 매우 천천히 그녀가 한 말을 다시 말한다.
“그래요……그래요……”그녀는 말한다.
그리고 남편의 눈 속에서 그녀는 그에게 더 이상 아무 것도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읽으며,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본다. 그런 다음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아이를 침대로 데려가 눕혀요. 당신 내게 뭔가 얘기할 게 있는 것 같은데……”
“예.”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몇 년에 걸쳐 속여 온 이 남자에게 곧장 모든 사실을 털어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남편의 시선이 줄곧 자신에게 향하고 있음을 느끼면서 아이를 데리고 천천히 문을 나가 걸어가는 동안 그녀에게는 커다란 평온이 찾아든다. 마치 많은 것들이 다시 좋아질 것 같은…….>
나였더라도 필경 엠마와 똑 같았을겁니다.
남자 명색이라도 말입니다.
-독서 리뷰-
[[아르투르 슈니츨러]]
<어떤 이별> <라이젠보그 남작의 운명>
<어떤 이별>
-아르투어 슈니츨러 作-
***동우***
2015.09.05.
오늘도 '슈니츨러'의 소설입니다.
'어떤 이별'
어제 올린 '죽은 자는 말이 없다'와 같은 맥락의 소설인데 이번에는 죽는 여자를 대하는 남자의 의식의 흐름으로 씌여졌군요.
유부녀 안나와 사랑에 빠져버린 알베르토.
사랑과 관능에 매몰된지 석달 즈음, 스물네시간 여자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알베르토의 저 미칠것 같은 파토스.
연애경험 시덥잖은 나같은 사람이라도 짐작 못할바 없을듯합니다만. ㅎ
<그 끔찍한 기다림의 시간 동안 겪은 흥분으로 완전히 녹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은 그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날마다 오후 세시가 되면 그는 블라인드를 내린 채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는 어떤 일도 시작할 수 없었다. 초조한 나머지 책을 잡을 수도 없었고 신문을 읽을 수 조차 없었다. 편지를 쓴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고작 담배 피우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그는 자유와 여행과 먼 곳과 고독이 몹시 그리웠다. .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녀를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상태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 저기… 저기 길모퉁이에… 지나가는 모든 여자가 그녀로 보였다.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부터는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 당신을 기다릴 거야.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말야.」그러나 그 말을 하는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웃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중얼거렸다. 「이러다간 미치고 말 거야. 미치고 말 거라고!」>
그런데 그토록 사랑하는 안나가 죽어갑니다.
도무지 믿을수 없습니다.
닷새전까지만해도 그렇게 젊고 그렇게 아름답고 그렇게 사랑스러웠던 여자가 죽는다니.
그러나 자신은 그녀를 만날수도 위로할수도 사랑과 고통을 고백할수도, 그녀를 위하여 무엇하나 해줄수 없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입장입니다.
고통이 업습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뭘 하지…? 야외로 나가기에는 너무 늦었어. 너무 늦었어, 너무 늦었어… 그래, 난 슬퍼! 내가 슬프다고? 죽도록 슬프다고? 아니야, 산보를 가야겠어. 나는 아무 느낌도 없어. 전혀 아무 느낌도 없다고. 지금이라도 극장에 갈 수 있어, 그래 맞아, 혹은 야외로 나갈 수도 있어… 오,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든 것 뿐이야… 모두 환상일 뿐이야. 내가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래. 그래… 나는 정말로 충격을 받았어!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야. 이 순간을 꼭 붙잡아야 해! 무언가 정확히 이해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말아야 해… 아무것도..고통이 문을 두드려도 나는 결코 문을 열어주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고통이 문 밖에 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 엿보기창으로 보면 고통의 모습이 보여.. 아 난 바보야, 난 바보라고… 내 애인은 죽게 될 거야… 그래, 그녀는 죽어, 죽을 거라고! 아니면 나는 아직도 희망을 품고 있는 걸까, 그래서 이렇게 태연한 걸까? 아니야, 그녀가 죽는다는 것은 분명해.. 내가 고통에게 문을 열어주었어! 고통이 들어왔어! … 안나, 안나, 나의 사랑스럽고, 나의 하나뿐인 사랑스런 안나! … 나는 당신 곁에 있을 수가 없어! 바로 내가 당신 곁에 있을 수가 없다고. 당신의 유일한 사랑인 내가 말야… 어쩌면 그녀는 의식을 잃고 있지 않을지도 몰라!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어! 그녀는 나를 찾고 있을 거야. 그렇지만 나는 갈 수가 없어. 나는 가서는 안 된다고. 혹은 어쩌면 그녀는 이승의 모든 걸리적거리는 것을 떨쳐버릴 수 있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면 이렇게 작은 소리로 속삭일지도 몰라. 그 사람을 내게 불러줘요. 그 사람을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 싶어요… 그 사람은 어떻게 할까…? ..그러나 인생은 그렇지 못해, 그렇게 되지 않아… 그것은 가장 이상적인 것일 뿐이야. 그녀를 다시 한 번 보고 그녀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은 말야!..>
엿보기 창으로 내다보면서 그토록 안타깝게 오기를 기다리며 내다보던 그 숨막히던 순간들을 회상합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애인을 멀리 두고 그 언저리만 맴도는 자신을 느끼면서 고통과 더불어 죄책감이 엄습합니다.
<도대체 내가 지금 구실 같은 것을 내세울 필요가 있을까… 사람이 죽어가는 마당에… 그렇지만 그녀가 죽어가고 있다고 해서 내가 무슨 권리로 그녀의 비밀을 누설하고, 그녀에 대한 그녀의 남편과 가족들의 추억을 더럽힐 수 있단 말인가? … 그렇지만 …어쩌면 내가 미친 척하면 될 것 같아. 그래, 나는 얼마든지 변장을 할 수 있어… 아, 이 얼마나 멋진 생각인가! …그렇지만 그 역할을 잘 해내고 나서 곧장 평생 동안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다면… 혹은 그녀가 건강을 다시 회복하고서 나를 정말로 미친 사람으로 간주한다면, 나를 한 번도 만난 적도 본 적도 없다고 한다면! …아, 내 머리야, 내 머리야! 그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드디어 저택에 잠입한 알프레도는 안나의 주검을 대하게 됩니다.
그토록 사랑하였던 사람.
살아 있을적 불륜관계라는 사회적 윤리적 제약을 극복하지 못한 용기없는 사랑, 사랑하는 이의 주검 앞에서의 파토스는 물불을 가리겠습니까만..
<그리고 그 끔찍한 날들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그는 두 눈에 눈물이 고여오는 것을 느꼈다. 뜨겁고 아린 고통이 가슴속에 느껴졌다. 그는 울부짖으며 그녀 앞에 털썩 주저앉아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안나의 곁에는 말못할 슬픔에 잠긴 그녀의 남편이 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는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그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그때 그는 그 사람이 그의 오른손을 붙잡아 꼭 쥐면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더니 그 남자는 계속해서 울면서 몸을 다시 돌려 고개를 떨구고 이불에 대고 가볍게 흐느꼈다. 알베르트는 잠시 동안 그대로 서서 냉정한 눈길로 죽은 여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나오려던 그의 눈물은 다시 들어가 버렸다. 그의 고통은 갑자기 알맹이가 없는 껍질로 변했다. 그는 이러한 만남이 세월이 흐른 언젠가 끔찍하면서도 우스꽝스럽게 여겨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 남자와 함께 거기서 흐느꼈다면 아마 자신의 모습이 몹시 우스꽝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알베르토는 가족도 친척도 아닌 자신은 익명의 낯선 손님이라는 자의식에 사로잡힙니다.
그토록 끔찍하게 사랑한 사람을 향한 순수한 고통과 순수한 슬픔, 그건 필경 그의 것이 아니었던걸까요.
그것이 또한 자의식이 되어 그는 말할수 없이 부끄럽습니다.
부끄러움만이 자기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미소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지금 그곳에 마치 낯선 사람처럼 서서 나를 부인하고 있어요. 어서 그 사람한테 내가 당신의 여자였으며, 이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서 나의 손에 입맞추는 것은 당신의 권리라고 말하세요. 어서 그에게 말해요! 왜 말하지 않는 거죠? 그러나 그는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미소를 더 이상 보지 않으려고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는 마음 깊이 수치심을 느끼면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할 자격도 없었고, 또 죽은 애인이 그를 그곳에서 쫓아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녀를 부인했다고.>
산자에게 죽음이란 얼마나 상투적인 것인지요.
관계는 섞일지언정 생명은 섞이지 않습니다.
그러하니 죽음을 맹세한 사랑 또한 하나의 클리세입니다.
초상집의 오열은 구체적인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추상성을 슬퍼하는 형식, 그래서 그 오열과 통곡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겁니다.
진짜배기 슬픔은 매우 우스꽝스럽고 낯선 모습일듯 싶습니다.
누군가 그럽디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은 자일 뿐이라고.
알베르토의 심리과정.
사랑과 주검을 좀 겪어 본 바, 바로 나의 데자뷔입니다.
<라이젠보그 남작의 운명>
-아르투어 슈니츨러 作-
***동우***
2015.03.05 04:22
라이젠보그 남작, 그는 수많은 남자를 섭렵하는 여자를 용인하면서 언제나 그녀의 주변을 떠나지 않습니다.
물심양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여자에게 투척합니다.
한결같이 한 여자를 향한 일편단심 민들레.
언젠가는 그녀의 사랑을 쟁취하겠거니 하는 그의 기원과 헌신은 눈물겹습니다.
그러나 그 댓가가 결국은 죽음이로군요.
클래레의 생각이나 의도라던가 이야기의 흐름이 매우 모호합니다만, 나는 이렇게 이해하면서 읽었습니다.
클래레는 라이젠보그 남작을 철저하게 이용한 것으로.
남작의 재물과 정신과 생명까지도.
그녀는 그동안 한사코 마다하였던 그에게 하룻밤 사랑을 베풀어줍니다.
그것은 대공의 저주를 남작에게로 돌리기 위함이었지요.
월세의 주술의 충격으로 라이젠보그 남작은 죽어버리고 클래레와 월세는 대공의 저주로 부터 벗어나 천년만년 알콩달콩 사랑을 만끽하게 되는 것으로.
혹여, 죽는 순간 남작은 저들 연인의 간교함을 깨달았을런지...
가엾은 사람.
교미후 암사마귀에게 잡아먹히는 숫사마귀.
클래레를 향한 라이젠보그 남작의 집착, 저것은 사랑이 아니라 일종의 정신질환이 아닐까요.
혹여, 남작의 심리기저에 있는 극도의 자기애(自己愛)가 변형된, 자살충동으로부터 도망가고자하는 일종의 방어기제가 아니었을런지.ㅎ
아래는 이문열의 해설입니다.
++++
<치정, 혹은 흉기 같은 사랑>
-이문열-
이 작품이 처음 내게 충격을 준 까닭은 굳이 이름을 붙이면 기괴미 또는 추악미 같은 것이었다. 기괴미는 결국 대공의 저주가 현실로 이루어지는 데서 받은 느낌이며 추악미는 모골이 송연할 만큼 철저한 배신을 미적으로 표현한 조어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랑의 한 양태로서 '라이젠보그 남작의 운명'을 말해보고 싶다. 모든 순교에는 많건 적건 타의가 섞여들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조차도 십자가 위에서 빌지 않는가. "거둘 수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옵소서"라고. 하지만 그래도 순교의 특질은 아무래도 자발적인 죽음의 선택에 있다. 신앙이 빌미가 되었다고 해서 모든 죽음이 순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순애도 그렇다. 사랑을 위해 죽는다고 하지만 대개는 그 선택이 아니고서는 사랑을 지킬 수 없게 하는 상황의 강요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는 기꺼이 죽음을 껴안는 절차가 있어야 한다.
라이잰보그 남작의 불행한 사랑과 죽음은 얼른 보아 칙칙한 대로 한 편의 순애보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는 사랑에서도 죽음에서도 순애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특히 죽음은 거의 타의로 부여된 것이고, 따라서 순애라기보다는 치정사란 말이 더 온당할 것이다. 사랑은 여러 빛깔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여러 형태로 우리 삶에 기능한다. 높게는 우리 영혼을 천상과 초월로 인도하고 낮게는 타락과 파멸로 이끈다. 삶에 눈뜨게 하고, 열정과 야망을 불지피며, 분노와 질투로 미치게 하고 때로는 자기부정에까지 이르게 한다. 다른 가치에 패배하기도 하지만 또한 다른 가치를 짓밟기도 하고, 더러는 자기희생으로 결합하여 보다 높은 단계로 숭화하기도 한다.
클래레 헬에 대한 라이젠보그 남작의 사랑은 환상과 희망으로 그의 삶에 유익하게 기능 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환상은 거짓이었고 기대는 무망했음이 드러나는 순간 그 사랑은 그의 삶에 치명적인 흉기가 되고 말았다. 실은 대공의 저주가 그를 죽인 게 아니라 처참하게 드러난 사랑의 실상이 그를 죽였다. 하지만 우리가 소설을 읽는 목적이 교훈을 얻거나 도덕성을 함양하기 위해서 만은 아니다. 이 단편을 사랑을 주제로 한 열 개의 전범중에 하나로 넣는 것은 그냥 들었으면 시시했을 치정담을 섬뜩하면서도 인상깊은 예술작품으로 빚어낸 아르투르 슈니츨러에 대한 경의의 표시다.
아르투르 슈니츨러는 1862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의학자였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의대를 졸업한 슈니츨러는 청년시절 우연한 기회에 플로베르와 모파상을 읽은 후 창작에 눈을 들리게 된다. 부친의 조수 노루을 하며 집필한 희곡 '아나톨'이 평단의 반응을 일으키고 뒤이어 발표한 작품 "연애유희"가 사람들의 관심을 얻자 그는 아예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서 버린다.
사랑과 죽음을 주요 테마로 하는 슈니츨러의 작품에는 밤과 낮, 환상과 현실이 엇갈리며 그려진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전공인 의학적 지식을 소설 창작에 도입, 주인공의 섬세한 내면이나 복잡한 연애심리를 적나라하게 해부한 데 힘입은 바 크다.
문필가로서 어느 정도의 명성을 얻자 슈니츨러는 당시 베를린을 중심으로 전성하던 자연주의 문학운동에 대항, 우미하고 섬세한 유미적 경향의 신낭만파 문학을 선도하기도 했다. 물론 여기에는 프랑스 상징주의 문학의 영향이 컸던 게 사실이다. 슈니츨러를 가리켜 빈 상징주의 문학의 전형적인 작가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워낙 활동력이 강했던 그는 한때 '베른할디 교수' 같은 사회극을 쓰기도 했으나 이 분야에서 주목받는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사랑과 죽음'의 문학에 관한 한 슈니츨러는 독특한 세계를 일구어 놓았으며 희곡과 소설 양분야에서 두루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흔치 않은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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