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김주영]] -1- (1,4,3,3,1)

카지모도 2020. 5. 14.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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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 -1-

 

 

<<<홍어>>>

-김주영-

 

 

***동우***

2014.09.07.

'김주영'(金周榮, 1939 ~)의 소설은 처음 올리는군요.

 

대하소설 '객주' '화척'등이 유명하지만 이 소설 '홍어'도 1998년쯤의 베스트셀러였지요.

 

가장(家長)은 바람을 피다가 쫓기듯 집을 떠나 일점 소식없는지 6년째입니다.

고적한 집에는 아직 젊은 어머니와 13살짜리 아들만이 남겨졌습니다.

늘 집안에는 고요가 가라앉아 있습니다.

바느질 솜씨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가난하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꼿꼿하여 겸손한듯 오만합니다.

어머니의 천성일터이지만.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아내로서의 모멸감.

모자만의 생활, 그 적조(積阻)한 단절감에서 비롯된 두려움.

그런 예민한 감성의 반작용도 컸을겁니다.

 

남편이거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언제나 부엌 문설주 걸어 놓은 말린 홍어 한마리.

여인의 어떤 자존적 고집이었을까요.

하늘을 훨훨 비상하는 가오리연과 물속을 쾌적하게 유영하는 홍어.

자유를 꿈꾸는 소년의 어떤 성장통을 은유하는 걸까요.

 

그렇지만 홍어는 부엌문설주에 매달려 있고 연(鳶)은 얼레에 물려 있습니다.

연(緣)이란 자유가 아니지요.

 

폭설에 갇힌 아침, 고요 속으로 틈입한 걸부새이(거렁뱅이) 여자아이.

어머니와 아들의, 그 단절된 적요 속에 파문이 일기 시작합니다.

 

김주영의 '홍어' 여섯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함께 읽어요.

 

***동우***

2014.09.08.

[내 상상력의 가녘 바깥에 존재하였다가, 불쑥 몸체를 드러낸 설국의 세계 역시 몸떨림이 가시지 않은 열병과 같은 강도로 나를 흥분시켰다. 눈부신 설원 위에 한 사람의 무희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무희는 아득하게 펼쳐진 눈밭 위를 거침없이 헤엄치거나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걸부새이(거렁뱅이) 소녀 삼례의 발랑 되바라지고 음습하게 비밀스러운 그 불량끼.

13살짜리 소년에게 그것은 지독하게 매운 고추를 먹었을 때처럼 고통스러움을 통한 파괴적 쾌감이 있었다.

 

그러면 어머니에게 있어 삼례는 무엇이었을까.

 

[그깐 매질 따위는 하루종일 맞아도 난 아무렇지 않아. 너네 엄마가 나를 매질한다고 생각하니? 그게 아냐. 너네 엄마는 한풀이를 한 거야. 너 그거 알고 있니?... 무당이 하는 한풀이는 돈 받고 하는 거구, 너네 엄마 한풀이는 약 발라줘가며 하는 거다. 너 그거 알고 있니?”]

 

어머니는 언제나 부엌 문설주에 걸려 있던 홍어를 다시 사다 걸지 않았다.

삼례는 어머니의 메마른 가슴속에 응고되어 있던 회한의 심지에 불을 댕긴 것이었다.

 

어머니는 6년 동안의 식물적 기다림, 그 수동적 자세에서 비로소 몸을 털고 일어난 것일까.

어쨋거나.

[폭설이 마을을 덮어 오랫동안 머물렀던 그해 겨울, 우리 마을에서 살아 있었던 사람은 삼례 한 사람뿐이었다.]

 

***동우***

2014.09.08.

벗이여.

仲秋佳節.

우리 명절입니다.

 

지구촌 어디에있더라도 쓸쓸해하지 마셔요.

우리 情맛에 따순 것들(가족들서껀, 먹거리서껀..), 바투바투 둘러앉으세요.

 

가을저녁(秋夕)

오늘 밤 곳곳의 달빛은 좋을런지요.

 

모쪼록 아름답게 풍성하고 기쁘게 행복한 한가위 명절 맞으시기를.

나도 오늘 집밖의 따순 것들 찾아 가을 양광 속으로 나가렵니다. ㅎ

 

++++

<가 을 에>

-김남조-

 

잎들이 진다

생명의 귀의(歸依) 그 유순으로

뛰어내리는 가을잎들,

하늘은 버릴 것을 만들지 않으시니

떨구이는 잎들조차

제뿌리에 순밀의 꿀을 따르고

어머니신 대지(大地)에

귀한 소금맛을 바치리

 

여름의 화로는

물의 신성(神聖)을 다 담아내고

재와 그스름도 씻어

오늘은

어린이같은 살결

 

가을이여

돌아온 딸들과 그네의 자식들의

축제일(祝祭日) 같음이니

신(神)은 지난 봄철부터

이들을 위해

짙은 단맛의 과물(果物)을

영글려 오셨니라

 

진실로

무엇을 더 바라리

마지막 시절에

꿈같은 처음으로

사람 하나의 그 항구(港口)에

나도 왔음을

++++

 

***동우***

2014.09.09.

남편이 부재(不在)한 여인.

아버지 없는 소년.

 

모자(母子)의 봄, 삼례가 떠난후의 봄은 여늬 봄과는 달랐을까.

기다린다는 일직선의 시간적 관성에서 벗어나, 졸음과 기다림의 정한을 품고있는 나선형의 시간..

 

[나는 서쪽 하늘을 온전하게 덮고 있는 풍만한 노을을 온몸으로 마주받으며, 음습하고 침침한 껍질에서 금방 벗어난 매미의 애벌레처럼 투명한 살갗으로 변신한 나를 바라보곤 하였다. 나는, 내 가슴속으로 스며들어 내 뼈대와 살점을 싸잡아 용해시킬 수 있을 만큼 충만했던 해거름녘의 고요와 황홀한 노을 속으로 해면처럼 투명한 몸이 되어 빨려들곤 하였다. 그렇지만 마을의 어느 누구도 발가벗은 채로 노출된 나를 알아차리진 못했다. 나는 혼자만이 갖는 전율적인 발성의 욕구를 이빨을 사리물고 삼키며 은밀하게 그것들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실제로는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같이 보이는 투명성이 갖는 가없는 방만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어느 누구도 감히 흉내내거나 범접할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이 거기엔 있었다. 그때 방천둑 위에서는, 헤어져 있는 거리와는 상관없이 자유자재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수꿩의 울부짖는 듯한 울음소리...먹이를 노리고 하늘을 선회하는 콘도르.

 

까고 앉아 시원스럽게 방뇨하는 삼례의 허연 엉덩이.

 

열네살 아비없는 소년의 성장통.

정능개천가 방죽에 앉아 붉은 놀을 바라보던 오십여년전 어떤 아이..

 

***동우***

2014.09.10.

삼례의 허이연 엉덩이, 열네살 사춘기의 숨결은 가쁘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성의식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D.E.로렌스'의 '아들과 연인'이 오버랩 된다.(책부족 이번달 과제로 읽고 있는데)

 

성장통을 앓고 있는건 세영이 뿐이 아니다.

어머니도 역시 성장통을 앓고 있다.

관계와 세상에 대하여.

 

[어머니는 비로소 세상 속으로 운명이 시키는 대로 방랑벽에 자신을 맡겨버린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황량하고 을씨년스런 세상 속으로 한발 두발 들여놓기 시작했다.]

 

***동우***

2014.09.11.

어느날 홀연 굴러들어온 낯선 이복동생.

자신이 생산하지도 않은 이 간난쟁이에게 <세밀하게 배분된 탐미적 관찰과 절제와 혼돈을 뛰어넘는 애정으로> 정성스레 빈젖을 물려주는 어머니.

자신을 두고 낯선 남자와 간통한듯한 느낌, 어머니를 향한 배신감과 절망감.

그것은 다름아닌 비련의 아픔입니다.

 

사춘기 소년의 이중적인 심리구조는 모순이 아닙니다.

부재하는 아버지를 향한 절실한 그리움. (이때의 아버지는 자신을 거세하려는 공포의 대상이 아닙니다.)

반면 아버지나 동생따위는 없는게 좋다는, 자신만의 전유물로서 어머니를 독점하고 싶다는 근친상간적인 욕구.

그 둘은 공존하면서 서로 충돌합니다.

 

또한 어머니(과부아닌 과부)에게 내재하는 관념, 그리고 아직 젊은 여인으로서 점점 깨닫게 되는 삶의 실체성.

전통의 유교적 가치관, 여성으로서 恨을 보듬고 운명으로 수렴하는 희생과 기다림의 관념적인 덕목과 그리고 삼례로 비롯하여 눈뜨기 시작한 육체적 현세적 삶의 가치.

그 둘의 갈등.

어머니는 차츰, 자신을 사모하는 이웃남자의 뜨거운 눈길을 속으로는 기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게 되는겐지..

 

거듭 느끼건대, 이 소설은 일인칭 화자인 소년의 입을 통하여 들려주는 소년자신과 어머니 두 사람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성장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적어도 이 집에선 어머니와 나만의 전유물이라고 믿어왔던 은밀함과 땅에 깔려있는 듯한 비밀스러움들이 매미의 애벌레가 허물을 벗어가듯, 야금야금 바깥 세상으로 노출되고 있었다.]

 

뿌옇게 흐려보였던 삶을 언제나 투명한 거울처럼 비춰주었던 어머니는 소년에게는 이제 보이지 않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복수심은 수탉을 물어죽인 누룽지를 통하여 대리만족하게 되는 지경이지요.

 

그 혼돈으로부터의 탈출.

소년은 삼례를 찾아 떠나고 싶습니다. 아버지가 떠난 것 처럼.

어머니 역시 벗어나고 싶습니다. 평생 보듬어왔던 종속적 그 유교적 가치의 몽롱함으로부터.

 

***동우***

2014.09.12.

남자는 하늘을 나는 가오리연 콘도르거나 심해를 헤엄치는 홍어인가요.

여자는 한 곳에 붙박혀 함초롬히 이슬을 머금은 한송이 꽃인가요.

 

바람피다 도망간 남편을 다소곳이 기다리는 여인.

지아비의 귀환으로 기다림의 6년 세월 오랜 고초는 죄 보상받은 걸까요.

여인은 초례청으로 들어선 신부가 신랑에게 맞절을 올리듯 이마를 조아려 지아비에게 재회의 인사를 올립니다.

 

으흠, 정결하여 어여쁩니까, 슬퍼서 아름답습니까.

 

이 땅에서 '여자로 살기'의 덕목이 대체로 그러하여 아름다웠던 시절도 있었을겁니다.

아마, 남자들 살판 나는 세상이었을테지요. ㅎㅎ

 

세영이 어머니에게 삼례等等은 이방(異邦)의 신선한 바람이었습니다.

그 바람을 통하여 진정한 자아를 탐색합니다.

자신의 욕망과 격정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자신은 식물이 아님을, 여자로서의 굴종을, 기다림의 굴욕을, 남편의 귀환이 결코 보상이 될수없음을.

그리하여 억압된 현실로 부터의 일탈을 차곡차고 준비하였을겁니다.

 

남편이 돌아온 다음날 아침, 그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가출을 결행합니다.

필경 그녀의 목적지는 삼례의 자유함(緣으로 부터의)이 있는 그곳일겝니다.

 

소년의 아버지에 대한 원초적 그리움과 어머니에 대한 원초적 집착.

그러한 소년의 자아도 성장하여 영글었습니다.

소년도 삼례의 자유함이거나 성(性)이거나를 역시 꿈꾸고 있었을겁니다.

떠나간 어머니 때문에 절망적인 동요를 느끼지는 않습니다.

언젠가는 소년도 역시 삼례를 향하여 집을 나서겠지요.

 

이 소설, 사실주의적 서사와 소년의 환상이 교직되어 있습니다.

사팔뜨기의 착시. 어떤 성장통의 혼란스러움을 은유하는 것일까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unbee***

2014.09.14.

홍어.

다음 페이지가 올라오기를 무척 기다리며 읽은 소설이랍니다.

읽은 후에 할말도 많고 쓰고 싶은 감상도 많았는데, 제법 길게 써서 올리기 등록하다가

날리고는... 힘이 빠졌어요.

 

요즘은 내 입에 맴도는 '눈이 내리네~'이 노래가 나도 모르는새에 흘러나오면

아, 홍어. 그런답니다.ㅎ

 

사팔뜨기라는 걸 궂이 돌아온 아버지 입을 통해 말을 해버려서

좀 '너무도 소설스러워졌네?'했어요.ㅎㅎ

홍어에서의 김주영 님의 서사는 작정하고 만들어 붙인 듯하면서도 어찌나 재미있게 읽히도록 하던지,

매우 맛나고 재미있게 읽었어요.

 

***동우***

2014.09.15.

맞아요.

'서사는 작정하고 만들어 붙인 듯하면서'

짐짓 조심스럽게 언급하셨지만, 역시 은비님은 예리하십니다.

생각의 뿌리는 만져지지만, 문체가 좀 작위적인 느낌 없지 않습니다.

김주영의 문장은 좀 꺼끄러운데가 있어요.

서사의 리얼리즘 쪽보다는 로맨티시즘에 있어서 더욱. (특히 소년의 환상적 서술부분)

 

아무래도 김주영의 본령은 '객주'와 같은 토속적 서사에 있는듯.

그렇지만 지엽적 모자람을 훨씬 능가하는 '홍어'의 문학성.

은비님 맛나고 재미있게 잃히듯, 수작입니다.

 

특히 내게는 세영이가 내 소년에 오버랩되어 더욱.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