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그레이엄 그린]] (1,4,3,3,1)

카지모도 2020. 5. 31.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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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그레이엄 그린]]

<귀향> <피고측의증언> <에지웨어...> <작은여행가방> <레버씨의기회>

 

 

<귀향>

-그레이엄 그린 作-

 

***동우***

2013.06.04 06:23

그레이엄 그린 (Graham Greene,1904~1991)의 ‘귀향’

아래, 이문열은 이 소설의 해설에서 <시간에 따라 변모하는 천진성의 의미>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러나 천진성(美)과 섹슈얼(醜)은 그러나, 야누스의 두 얼굴은 아닐까.

男性性에 있어서 섹슈얼 판타지라는 것은 어쩌면 천진한 아름다움....ㅎ

군대의 호방한 사수에 이끌려 우연히 들어간 술집에서 술집여자로 만난 국민학교적 천진하였던 여자아이의 현란하게 화장한 얼굴과 거침없이 표출하는 음란한 말짓과 몸짓....

처음에 좀 당황하여 서글펐을까마는, 좀 시간이 지나자 나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져서 스스럼이 없었다.

 

<무척 어렸을 때에 나는 마음 속 깊이 서로 모순되는 두 감정을 느꼈었다. 생의 혐오와 생의 황홀. -보들레르->

보들레르여, ‘모순되는’이라는 말씀은 당신의 오류가 아닐까.. ㅎ

 

이문열의 작품해설 (이 소설 역시 '이문열의 세계명작산책'에서 업어 온 것입니다)

 

++++

<의미에 간섭하는 시간 혹은 천진성의 의미>

-이문열-

 

기억은 시간의 파괴력에 저항하는 우리의 유일한 수단처럼 보인다. 어떤 기억들은 그것이 가진 아름다움이나 가치 때문에 특히 추억이란 이름으로 소중히 갈무리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세월이 많은 것을 변화시키고 사라지게 한 뒤에도 옛 그대로인 그것들을 그리움과 화한으로 되돌아보거나 축복처럼 즐긴다.

하지만 결국은 기억도 시간의 파괴력에서 벗어나는 수단은 못되며 추억은 더욱 그러하다. 시간은 우리의 의식에 작용함으로써 그것이 받아들이는 사물의 의미에도 간섭을 한다. 특히 추억처럼 주관에 많이 좌우되는 기억은 더 많은 간섭을 받는다.

이 작품은 적당히 속인이 된 중년의 주인공이 30년만에 어릴 적 살던 곳을 찾아가서 겪는 이야기로, 전편을 흐르는 감회는 돌아보는 쓸쓸함이다. 그가 떠난 뒤에 흐른 시간은 고향의 많은 것을 사라지게 하고 바꾸어 놓았다. 돌아보는 그의 쓸쓸함 속에는 사라지고 변한 그 모든 것들에게서 느끼는 상실감과 허전함도 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시간의 위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파괴되어가고 있는 자신을 확인하는 서글픔이 더 커보인다. 시들어가는 육체에 야망과 이상을 상실한 정신, 성숙이란 말 속에 감추어진 타락, 현명이란 이름으로 단련된 영악 같은 것들이 그에게서 진행되고 파괴의 내용일터이다.

그런데 고행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아이들이 댄스교습을 받는 관행으로 그는 그것에 관한 기억을 따라 자신의 옛 천진성을 추적해본다. 그때 좋아했던 소녀에게 보낸, 아이 적의 순수한 사랑을 표현했다고 믿는 자신의 쪽지를 찾아보는 일이다.

뜻밖에도 그 쪽지에는 조잡한 춘화가 그려져 있었고 당혹한 그는 묘한 배신감마저 느낀다. 하지만 그는 이내 깨닫게 된다. 그 춘화는 틀림없이 천진성으로 그려진 것이며 변한 것은 다만 그 의미뿐이라는 걸. 시간의 파괴력은 사물의 의미에 마저 간섭한다는 걸.

원래 이 작품의 제목은 '천진한 아이‘ 였고 작가도 감상적인 귀향 소설로서 보다는 천진성의 의미를 파고드는 쪽에 작의을 모으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번역과정에서 한 번 제목이 '귀향'으로 바뀐 뒤로 국내에서는 신기하리만치 그 제목으로만 알려지고 귀향소설의 한 전범으로 취급되었다.

나는 한때 이 작품에게 원래의 제목을 찾아주고 '비틀기와 뒤집기'편에 집어 넣을까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검토하면서 나는 꼭 그래야 할 필요성을 찾기 어려웠다. 앞서 말한 것처럼 천진성의 문제도 시간의 파괴력이 사물의 의미에 간섭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 작품이 여기 실려 안 될 까닭은 없다. 거기다가 전편을 흐르는 담담하면서도 절실한 감회는 틀림없이 잘된 귀향소설의 한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 그레이엄 그린은 무엇보다도 소설을 '노블'과 '엔터테인먼트'로 나누어 문학적 진지함과 대중적 오락성을 각기 그 특성으로 삼고 자신의 작품에도 엄격히 적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 두 특성의 치명적인 불화 때문에 문학적으로는 일생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죽기 전까지 거의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끝내 '위대한 비수상자'의 대열에 남고 말았다.

그린은 옥스포드 대학에서 공부했고 한때는 공산주의에 경도되었으나 곧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상적 이력을 갖고 있다. 작품으로는 장편 '내부의 나' '스템블 특급' '권력과 영광' '사건의 핵심' '정사의 종말' '말없는 미국인' 등 깊이와 무게를 아울러 지닌 대작들과 '밀사'를 비롯해 '공포성'등 대중의 인기를 끈 일련의 스릴러물에 '스물한 개의 단편들'이란 단편집도 남겼다.

자신의 구분과는 달리 그의 작품들은 노블 속에서도 스릴러적인 요소가 있고 엔터테인먼트에도 내면적인 깊이가 있어 어떤 이는 그를 '형이상학적 스릴러 작가'로 규정짓기도 한다. 많은 작품들이 영화화되었는데 우리에게는 '제3의 사나이'가 잘 알려져 있다.

++++

 

 

<피고측의 증언>

-그레이엄 그린 作-

 

***동우***

2016.09.04 06:20

그레이엄 그린 (Graham Greene,1904~1991)

스릴러를 비롯하여 실존과 신앙의 문제를 다룬 것등 많은 소설로 한때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영국작가.

'제3의 사나이'등 많은 그의 작품들이 영화로 만들어졌지요.

 

‘피고측의 증언’의 피의자는 바로 일란성 쌍둥이었습니다.

똑같이 생긴 두 사나이, 목격자의 증언만으로는 범인을 확정할수 없습니다.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이태원살인 사건이 생각납니다.

화장실에서 무고한 대학생을 칼로 난자하여 살해한 사건.

현장에 있었던 둘 중 하나가 범인임에는 틀림없지만, 둘중 하나로 확정지을수 있는 증거가 없습니다.

증거불충분으로 둘 다 풀어줄수 밖에.

공소시효를 아슬아슬하게 남겨 놓은 시점에 새로운 증거로 미국에서 범인을 붙잡아. 지금 이태원 살인사건의 유력한 범인으로 패터슨은 재판을 받고 있지요.

 

재판정을 나서자 쌍둥이중 하나가 버스에 치어 죽습니다.

하늘의 징벌인가요.

네 증언 때문에 내 형제가 죽었어!

남겨진 또 하나의 아담스는 시체 곁에서 일어나 사몬 부인쪽을 똑바로 쳐다봅니다.

당신이 사몬 부인의 입장이었다면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가 있겠습니까?

등줄기에 소름이 돋습니다.

 

좋은 휴일을.

 

***字夢美廷***

2016.09.04 06:37

안녕하세요, 동우님^^

새벽에 함께 일어나 마주하기가 오랜만이지요?

새벽을 좋아하시는 동우님과 달리 우리가 늘 늦잠 꾸러기라서

만나는 일은 견우와 직녀처럼 일 년에 한 번, 겨우 ㅎㅎㅎ

 

잠시 읽어보는 새벽의 소설.

그렇군요. 이 작가의 이름은 익숙합니다.

쌍둥이라서.. 아아, 그렇게 되네요.

증거 불충분이라면, 법의 심판대에 세우기 어려운.

그렇지만 아이러니는 늘 우리 세상사에 일어나기도 해서 하느님이 계신가 하게 되지요.

대부분 일어나는 억울한 일과 그 처리 방식은 하느님 없는 세상 같지만요.

 

동우님의 휴일도 행복하시기를^^

 

***┗동우***

2016.09.05 00:37

그렇지요?

증거주의와 무죄추정의 원칙...

 

그레이엄 그린.

나는 대중작가로만 기억하고 있는데 검색하여보니 순수문학의 거장, 노벨문학상의 유력후보이기도 하였더군요.

시드니 셀던과는 급이 다른가 보아요. ㅎ

 

댓글은 뜨아하지만 늘 가차이에서 뵙고 있다오..

블로그와 페이스 북으로.

유럽 여행에서 돌아오신 호호야님의 근황도.

부쩍 자란 도연이 모습도.

요즘 자몽님의 컨디션과 독서와 번역과 공부 모습도 좋아 내 마음도 좋습니다.

 

얼마전 번역하여 올리신 나스메 소세키의 짧은 소설.

감동하였습니다.

포스팅하려고 긁어다 놓았지요.

 

***송현***

2016.09.05 20:02

동우님 안녕하세요

무덥던 여름도 가고 시원한 바람이 간간이 부네요

저는 예전에 그레암 그린을 많이 좋아하였어요

권력과 영광, 사랑의 종말, 귀향,... 단편들도

재미있는 구성과 종교적인 사랑의 경지 순수한 배경 ...

한번 읽으면 단숨에 읽게되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

이 단편도 단숨에 .... ㅎㅎ

 

***┗동우***

2016.09.06 04:30

오랜만입니다, 송현님.

그레이엄 그린, 그랬었지요.

한때 많이 읽혔다고 생각됩니다.

나는 그의 소설은 많이 읽지 못하였고 영화화 된 것은 상당히 보았을겁니다.

나중에 그의 원작이라는 걸 알게 된 경우도 있었고.

 

왜, 송현님.

위에서도 말했지만 시드니 셀던도 인기 있었지요?

나는 그레이엄 그린을 그처럼 대중소설로 풍미한 작가로 알고있었는데 그 뿐이 아닌 대단한 작가더군요. ㅎ

 

 

<에지웨어로(路) 인근의 작은 극장>

-그레이엄 그린 作-

 

***동우***

2018.10.03 00:56

'그레이엄 그린 (Graham Greene,1904~1991)'의 ' 에지웨어路 인근의 작은 극장 (A Little Place off the Edgeware Road)

 

우리 또래 즈음의 기억.

한시절을 풍미하였던 작가, 그레이엄 그린.

순수문학인지 대중문학인지, 장르를 넘나들면서 많은 작품들을 남겼지요.

영화화 된 작품도 적지 않고.

이 소설 또한 추리소설로 읽어야 할지 상징성 짙은 심리소설로 읽어야 할지.

 

한 분열성 인격장애자의 강박적 패러노이드.

살인을 저지른듯 한데, 사라진건 시신이라니... 사뭇 어렵습니다만. ㅎ

 

 

<작은 여행 가방>

-그레이엄 그린 作-

 

***동우***

2018.11.20 05:38

'그레이엄 그린 (Graham Greene,1904~1991)'의 '작은 여행가방 (The Overnight Bag)'

 

그로테스크한 소설이로군요.

(본문에도 나오는) 15세기 네델란드의 종교화가 '히로니뮈스 보스(Hieronymus Bosch)의 기괴하게 상징적인 그림처럼.

 

<"가방 안에 죽은 아기가 들어 있어요." "죽은 아기요?" "예." "아, 그럼‥‥" 운전사가 말했다. "그는 더위를 못 느끼겠네요? 사내 아기 맞아요?" "예. 사내 아기예요. 전 아기가‥‥ 부패할까 봐 불안해요." "아기들은 오래가요." 운전사가 말했다. "놀랄 정도랍니다. 노인들보다 더 오래가지요. 점심은 뭐 드셨어요?" 헨리 쿠퍼는 약간 놀랐다. 그는 마음속을 더듬어야 했다. 그가 말했다. "카레 다뇨 아 라 프로방살요." "카레?" "아니요. 카레가 아니에요. 마늘과 허브를 넣은 양고기 요리예요. 거기에다 사과 타르트 한 조각도요." "뭘 좀 마시기도 했겠지요?" "로제 와인 반 병요. 그리고 브랜디 한 잔도요." "그거 보세요." "뭐가 말이에요?" "배 속에 그렇게 많은 게 들어 있으니, 당신이 아기보다 몸을 잘 유지할 수 없는 거예요." 뭔가 예리한 독설이 담긴 말이었다. 운전사는 잊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거부하는 것인지, 히터를 끄지 않은 채 한동안 조용히 운전만 했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이 소설이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골똘이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마멀레이드 속에서 나온 사람의 발가락.

<"당연히 따졌겠지?" "말로 따지진 않았어요. 하지만 그 발가락을 접시 가장자리에 잘 띄게 놓아두었어요.">

 

작은 여행 가방 속에 고이 모셔온 갓난아기의 사체.

아무래도, 잘게 저민 고기가 되어 저들 모자의 만찬을 위한 오븐 속에 들어갔을것 같습니다.

 

'그레이엄 그린'이 표현하고 싶었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일단 등골이 오싹합니다.

헨리 쿠퍼도 그의 어머니도.

 

 

<레버 씨의 기회>

-그레이엄 그린 作-

 

***동우***

2019.02.06 04:32

내 젊은 시절, '그레이엄 그린 (Graham Greene,1904~1991)'은 장르를 넘나드는 무소불위의 작가였지요.(영화로도...)

그의 작품 무수히 많을터인데 인터넷 뒤져봐도 텍스트파일 눈에 띄는건 그닥 많지 않습디다. (리딩북에 몇편 올렸습니다만)

 

'레버 씨의 기회'

두 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좋은 연휴를.

 

***동우***

2019.02.07 04:15

프리메이슨 회원이며 로타리 회원인 레버 씨.

일상의 번잡함 속 사소한 결함, 그는 매우 고결하지는 않았으나 근본적으로 도덕적인 인간이었다.

 

레버 씨의 기회 (A Chance for Mr Lever)

그 기회는 도덕성의 파괴로 발현되는 어떤 것이었던가.

 

<그는 이제 자신이 로터리클럽 회원이었다는 것도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삶의 의미를 상실했고, 그래서 모든 구속에서 벗어난 느낌이었다. 도덕은 한 인간이 동료들과 함께 행복하게,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레버 씨는 행복하지 않았고 성공하지도 못했으며, 이 답답한 작은 천막 안에 있는 그의 유일한 동료는 '광고의 허위성'이나 레버 씨가 이웃집 소를 탐하는 것에 신경을 쓸 처지가 못 되었다.

관념이란 것이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지리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면 자신의 관념을 온전히 지킬 수 없게 된다.

'죽음의 엄숙함?'

죽음은 엄숙하지 않다.

죽음이란 것은 레몬같이 노란 피부와 검은 토사물일 뿐이었다.

'정직은 최선의 방책?'

그는 갑자기 이 말이 얼마나 허위적인지 깨달았다.

이제 그는 타자기 앞에 행복하게 앉아 있는 무정부주의자였다.

에밀리에 대한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개인적인 관계만을 생각하는 무정부주의자였다.>

 

실존의 역설. 관념의 변이.

그레이엄 그린의 냉소적 에필로그는, 그리하여 도덕적인가.

 

<그러나 이 글을 일고 있는 독자 여러분은 레버 씨보다 훨씬 더 많은걸 알고 모기의 이동 경로를 추적할 수도 있으므로, 모기가 몸이 부풀어 오른 흑인에서 데이비드슨의 천막으로 그리고 레버 씨의 발목으로 옮겨 다녔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여러분은 하느님이, 인간의 나약함을 긍휼히 여기시는 자비로운 하느님이, 레버 씨가 서툰 위조문서를 몸에 지니고 감염된 황열병 병균을 핏속에 지닌 채 숲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갈 때 그에게 사흘간의 행복을, 고통의 사슬로부터 사흘간의 해방을 기꺼이 허락하신 것을 믿을 수 있으리라.

내가 만약 레버 씨가 지금 즐거운 기분으로 돌아가는 그 칙칙하고 황량한 숲 -어떤 영적인 삶도 믿을 수 없고, 사방의 풀들이 시들어 죽어 가는 자연 바깥의 것은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는 숲 -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으로 인해 믿음이 흔들리지만 않았다면, 이 이야기는 그와 같은 사랑의 하느님을 향한 나의 믿음을 북돋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모든 일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는 법이다.

이 말은 레버 씨가 루르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로렌에서 페르노를 마시면서 중장비를 판매할 때 즐겨 쓰던 표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