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1.2.3.4- (1,4,3,3,1)

카지모도 2020. 7. 14.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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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생문> <귤> <밀차>

 

 

<나생문(羅生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作-

 

***동우***

2013.02.04 05:38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芥川龍之介, 1892~1927)’의 ‘나생문(羅生門)’

비오는 한밤중, 호젓한 도시외곽 문루(門樓), 다락에 버려진 시체들, 시체 곁에 웅크리고 앉아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는 노파, 그리고 해고된 하급무사...

예전 나생문을 처음 읽을 적에 나는 일단 이 음산한 분위기에 빠져 들었다.

 

아래는 작가 ‘이문열’의 해설이다.

++++

<인간성의 어두운 심연을 보는 차가운 눈길.

-이문열-

'나생문'은 작가의 처녀작이고 분량도 짧지만 요절한 천재의 번득이는 재기를 잘 느낄수 있는 가작이다. 이 작품이 다루는 상황은 단순하고 그 전개는 단조로울 만큼 간명하다. 어느 좀도둑이 시체에서 머리칼을 뽑는 노파를 덮쳐 그녀의 옷을 강탈해 간다는 게 줄거리의 전부다.

그런데도 이 작품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작가가 택한 이야기의 방식 때문일 터이다. 겉으로는 흔히 말하기라고 하는 방식을 쓰고 있지만 실제 작품의 주제를 드러내는 데 쓰이고 있는 것은 보여주기란 방식이라는 편이 옳다. 어지러운 시대와 음산한 배경, 그리고 힘없는 인물들과 그들이 빚어내는 비참의 한 단면을 차분하고 냉정하게 그림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삶의 어두운 진상에 접근케 한다.

작가가 이 작품에서 우리에게 상기시키려는 것은 많건 적건 서로를 해쳐가면서 살기 마련인 우리 삶의 비정한 연쇄로 이해되고 있다. 살았을 때 뱀고기를 생선이라 속여 판 여인의 시체에서 머리칼을 뽑아내 가발로 팔려고 한 노파와 남의 시체를 훼손해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는 그 노파의 옷을 강탈해 가는 좀도둑이 만드는 연쇄가 그러하다. 죽은 여인에게서 뱀고기를 속아 산 사람들이라 해서 남을 해친적이 없다는 보장은 없고 좀도둑도 나생문 밖에서 다시 더 힘있는 강도에게 그가 가진 것을 빼앗기게 될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내게는 왠지 사람의 정의 혹은 선의지(善意志)에 보내는 작가의 차가운 눈길이 더 인상깊게 남아있다. 그 좀도둑이 처음 시체의 머리칼을 뽑는 노파를 보고 느낀 분노는 틀림없이 정의감 혹은 선의지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자신의 범죄를 합리화하는 구실로 바뀌고 만다. 작가가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데는 그 밝으나 차가운 눈길도 한몫 했으리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문열->

++++

 

이 소설은 ‘구로자와 아키라 (黑澤明)’의 영화 ‘라쇼몽’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영화에서도 나생문이 단편적인 배경으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영화는 소설과는 이야기의 줄거리가 전혀 다르다.

소설과 영화는 주관과 객관이라는, 어떤 인식론적 주제를 다루고 있어 그래서 동일한 '나생문'일까.

 

산적과 무사와 무사의 아내와 나뭇꾼이 등장하여 하나의 동일 사건에 대하여, 사건당사자들 각자 자신의 이익과 입장에 따라 주관적인 진실을 증언하는 것이 영화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일종의 인간 심리를 묘파하는데 중점을 두는 내용이었다.

 

소설에서 노파의 처지와 하급무사의 입장 또는 뱀고기를 생선이라고 속여 판 죽은 여인, 그들 행위의 객관적 정당성(善意志와 관련없는)을 보편적 선의식(善意識)의 잣대로 평가할수 있는가.

 

주관적 진실과 이른바 '팩트'의 문제. (책부족 함께 읽었던 '카트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가 떠오른다)

개별적 실존이 살아가는 '살이의 구체성'이 작용하면 객관적 팩트는 사뭇 왜곡될수가 있는 것.

그래도 객관적 잣대는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살이에 들이대야만 한다.

 

아래 < >는 내 내면의 추악한 모습.

 

 

<귤>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作-

 

***eunbee***

2015.05.20 23:48

 

겨울저녁, 기차, 한산한 플렛폼...따분한 '나' 별스럽지 않은 소설에

소녀의 슬프고 애잔한 귤 몇개가 노오란 불을 켜네요.

 

어디선가, 언젠가 만난듯한 장면, 본듯한 이야기....

우리의 지난 시절, 어렵지않게 많은 사람들이 겪었었을 소재예요.ㅎ

 

작가는 '개천문학상'과 깊은 연관이 있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군요.ㅋ

언젠가도 한번 꺼낸 이야기, 백일장에서 부상으로 받은 개천문학상 수상집. 기억에 아른거려요.

더구나 이작가의 라쇼몽을 영화로 보고는 어찌나 인상 깊게 간직되어있는지..

비가 쏟아지는 나생문(?) 아래서 시작되는 이야기.. 흑백 화면을 더욱 음습한 분위기로 만드는

그들의 아리송한 대화들...사건들... 이 영화 두번이나 봤어요.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소설을 더 읽고 싶습니다. 동우님.

잡아다 주실 건가요? ㅎㅎㅎ

 

***동우***

2015.05.21 05:04

은비님의 표현 그대로, 슬프고 애잔한 소녀의 귤 몇개가 작가의 마음에도 노오란 불을 켰겠지요.

피로와 권태를, 그리고 또한 불가해하고 수준 낮고 따분한 인생을 다소나마 잊을 수가 있었다고 하지 않아요?

 

밀감은 예전 얼마나 귀한 과일이었는지. 바나나처럼.

미깡이라 하였었지요.

 

서울로 식모살이 하러 가는 소녀.

언제나 동생들이 눈에 밟히는 촌구석의 가난한 집 큰 딸...

 

공지영의 봉순이 언니.

주인집 패물이나 귀한 것들은 손도 대지 않고 빠랫줄 널린 교복만을 훔처서 고향집으로 달아난 소녀가 떠오릅니다.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소설들.

뉘 명령이라고.

눈 밝혀 찾아, 보이는 족족 잡아 올립지요. ㅎ

 

나중 안내해 드리겠지만, <꼬비에뚜>님댁 숨겨진 황금밭을 발견했습니다.

일본문학에 조예깊으신 분인데 일본꺼뿐 아니라 국내외를 망라한 수많은 작품들...

차츰. ㅎ

 

 

<밀차>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作- (2015.05.22.)

 

***동우***

2015.05.22 10:25

 

몇편이나 업어올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소설을 올립니다.

명을 받잡고. ㅎ

 

밀차(トロッコ, 예전 화물차 트럭을 도라쿠라고 하였는데 그 어원인듯 합니다) 오르막에서는 땀흘려 밀고 내리막에서는 타고 달리기.

호기심과 재미에 빠져서 소년은 멀리 낯선 곳까지 와 버리고 말았습니다.

즐거움과 무서움.. 소년의 심리를 참 정치하게 묘사하였습니다.

나도 기억합니다.

동네 밖을 벗어나 짜릿짜릿한 재미에서 빠져나왔을 적 갑자기 의식하게된 어두운 밤하늘의 낯선 무서움, 나도 왕 하고 울음을 터뜨렸었지요.

오줌통이 저린듯한 그 요상한 느낌이 생각납니다.

 

어제의 '귤'도 그렇고, 이 소설도 동화(소년소설)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어제 밤 부산시립합창단 공연을 관람하였습니다.

그그저께는 후배가 일원(一員)으로 연주하는 색소폰 오케스트라(아마빌레 색소폰 오케스트라 14회 정기연주회)에 다녀 왔구요.

5월의 행복한 앙상블이었습니다.

 

합창공연 마지막 레퍼토리가 동요메들리였는데, 너무 좋았습니다.

노래하기전 지휘자(조우현)가 말하더군요.

동요가 어린이 노랜줄 알았는데, 합창을 준비하면서 어린이 노래가 아니라는걸 절절하게 느꼈더랍니다.

동요는 어른을 위한 노래라구요.

할비가 손주들에게 들려주는 노래들, 이 담에 어른이 된 비니미니의 노래일 터.. ㅎ

 

이 소설.

<료헤이는 스물여섯 살 때 처자와 함께 도쿄로 나왔다. 지금은 어느 잡지사의 이층에서 교정을 보고 있다. 그런데 그는 문득 전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때의 자기가 생각날 때가 있다- 세상살이에 고달픈 그의 앞에는 지금도 역시 그때같이 어슴푸레한 덤불이나 고개가 있는 길이 희미하게 한 줄로 뻗어나고 있다. >

 

세상살이 낯설고 고달플때, 어린 날의 어슴프레한 덤불이나 고개가 있는 희미한 길이 떠올라 낯설지 않으리다...

 

***eunbee***

2015.05.23 01:59

 

어제밤엔 자정이 지나서 귀가했어요. 서울에서 온 조카들과 센 강 밤풍경보느라...

돌아와 컴 여니,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소설이 올려져 있어, 고맙고 기뻤지요.

제 청을 들어주셔서.ㅎㅎㅎ

 

너무 멀리 와버려 뒤돌아 보니 아득하고 황망해졌을 때

머리에 김이 오르도록 달려가 마침내 안도감이 가져오는 편안하고

시원한(올곳까지 다달았다는) 울음을 앙~ 울 수 있는 곳,

그곳이 없습니다. 언제부턴가 그곳이 없답니다.

 

부산시립합창단 공연 관람,

섹소폰 오케스트라의 연주회,

가족동반 행복하고 따스한 모습의 동우님을 그려봅니다.

5월의 행복한 시간들.

 

동우님,

왼쪽 눈에 핏줄이 터져 흰눈동자가 붉어졌어요.

그래도 잼나게 리딩북 읽고 있다우. 즐겁게.ㅎㅎㅎ

 

***동우***

2015.05.23 05:50

 

은비님께 으앙~ 울음 터뜨릴 곳 왜 없을라구요?

은비님을 사랑하고 은비님이 사랑하는, 남다른 사랑 넘치는 젊은 가슴들 은비님 주위에 포진하고 있는데.ㅎ

울긋불긋 아롱다롱 휘황한 오월 파리와 쏘의 파노라마.

눈 혹사시키셨으니.

 

거긴 아직 금요일일테지만, 여긴 토요일입니다.

좋은 주말을.

 

***해나***

2015.05.22 12:53

 

도라쿠...다비...어릴 적 어른들로 부터 이런 말들을 많이 들으며 자랐는데

이게 일본말이었군요. 저는 단지 경상도 사투리인 줄 알았어요 ㅎㅎ

제가 경상도의 아주 작은 시골에서 어린시절을 보냈거든요.

 

저는 어릴 적...학교 다녀오는 길에 경운기가 지나가면

동무들이랑 서로 그 뒤에 매달려보려고 좇아갔던 기억이 납니다.

 

저도 살면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어릴 적 기억들이 몇 있습니다.

어제 일처럼...나의 성격형성에 영향을 미친 사건들도 있지요.

 

동우님은...역시 문화를 즐기면서 눈부신 5월을 보내고 계신 것 같습니다^..........^

 

***동우***

2015.05.23 05:52

해나님.

도라쿠는 영어 트럭의 일본식 발음.

 

오월의 주말입니다.

해나님도 눈부신 주말 보내시기를.

 

 

 

-독서 리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코> <거미줄> <소년>

 

 

<코>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作-

 

***동우***

2015.05.23 05:05 

 

1916년 발표한 '코'(鼻,はな)

'아쿠다가와 류노스케'라는 천재적인 신인작가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출세작.

나쓰메 소세키는 이 작품을 격찬하였습니다.

일본 고대 설화집에 있는 이야기로부터 모티프를 얻어 창작한 소설이라는데 매우 유머러스한 과장으로 씌어진 단순한 에피소드입니다.

얼굴 가운데 기다란 소시지를 달아놓은것처럼 기형적 코를 가진 승려가 각고의 노고 끝에 정상적인 코를 가진 얼굴로 변모합니다. 룰루랄라...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껏 기형코를 동정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정상코를 조소합니다.

어느날 아침 원래의 기형코로 돌아온 모습에 승려는 상쾌한 기분을 느낍니다.

 

이 심플한 골계(滑稽)의 '코'라는 소설이 뭣 때문에 그리 격찬을 받은 작품일런지..

다시 읽어 봅니다.

기형코의 승려를 대하는 사람들은 자신은 그런 코를 갖지 않음을 안도하면서 이상스런 코를 가진 승려를 동정합니다.

괜히 자의식(自意識)에 겨워 쩔쩔매는 쪽은 기형코를 가진 승려 자신입니다.

겉으로는 '코' 따위 아무렇지도 않은듯 태연한척 하여도 속으로는 오만가지 애를 다 씁니다.

상좌가 알아낸 정상코를 만드는 비법, 속으로는 얼마나 하고 싶었겠습니까마는 저 거드름이라니...

어쩄거나 그 비법은 효험이 있어 정상코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정상코를 대하는 사람들의 웃음이 옛날과 같지 않습니다.

기형코를 가지고 있었을때도 웃기는 하였지만 그 웃음은 자신과는 다른 기묘한 얼굴을 대하는 동정심과 자신의 얼굴에 대한 안도감에서 우러나는 웃음이었다면, 정상코를 보고서는 노골적으로 시기하고 조롱하는듯 노골적으로 낄낄대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던 기형코의 코가 정상코가 되니 그제서야 코가 보이기 시작한가 봅니다.

 

어느날 아침 일어나 보니 코는 다시 기형코로 바뀌어 있습니다.

아이구, 다행입니다.

 

<법사는 코가 하룻밤 사이에 다시 원래대로 길어진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코가 짧아졌을 때와 같은 상쾌한 기분이 어디에서부터인지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되면 이젠 틀림없이 아무도 웃는 사람은 없겠지.’ 법사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속삭였다. 긴 코를 새벽의 가을 바람에 흔들거리면서.>

 

인간성의 나약함을 조롱하는 걸까요.

남의 불행을 즐거워하다가 불행의 극복을 배아파하는, 이기주의의 추함을 풍자하는 걸까요.

어쨌거나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거미줄>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作-

 

***동우***

2015.05.24 04:37

 

불교적 교훈으로 지은 동화일까요,

부처님이 나오고 극락이 나오고 지옥이 나옵니다.

 

우리나라 동화에서도 낯익은 듯한 이야긴데 아쿠다가와가 처음 지었던가봅니다.

천국의 아브라함 품에 안긴 거지 나사로와 음부에서 고통받는 부자, 누가복음도 생각납니다.

 

오직 가느다란 한줄 거미줄에 운명이 달렸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매달려있으니..

그들을 밀쳐낸것도 아니고 소리를 질렀을 뿐인데,

저 경우 나는 당연히 '칸다다'가 되겠지요.

 

나같이 지극히 이기적이고 지극히 사적(私的)인 인간, 대승불교는 지난합니다그려.

내일, 초파일입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동우***

2015.05.24 04:58

프랑스에는 수국이 피지 않는가 봅니다.

파리 은비님의 벗, 시인 염명순님의 시입니다.

 

++++

<수국이 피는 곳>

-염명순-

 

수국을 기억하세요?

사람들의 발길이 자주 닿지 않는 퇴락한 산사의 마당 한켠에 흰색에 가까운 보라색 수국이 피는 날의 고요를.

비구니의 낭랑한 독송이 햇살에 실려 수국 위에 가만히 내려앉을 즈음엔 어김없이 해가 지고 나는 왜 늘 어스름에만 수국을 보았는지요

허전한 마음자리마다 수국이 피는 날엔 내 외로움이 인적 없는 산사의 고즈넉한 연화무늬 창살을 만들고 꾸밈없이 조촐한 목어가 되어 맑은 물을 거슬러 깊은 산을 오르곤 했지요.

그런 날엔 꽃잎들이 불경처럼 내 마음에 가라앉고 한국에 돌아가면 꼭 수국을 보러 가리라 마음먹었었지요

그러나 서울에 도착한 나는 수국을 잊고 수국 또한 나를 잊었던지 그 사이 몇 번이나 수국이 피고 졌을 시간을 분탕질하던 내가 다시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올라 내가 살던 서울이 지리부도처럼 펼쳐질 때에서야 그제서야 수국이 내 눈앞에서 하얗게 흔들렸어요

수국이 피지 않는 나라에서 수국을 그리던 마음이 수국이 피는 나라에서 수국을 잊어버린, 마음이 담담한 사람이 자기 한구석을 비워 그저 수수하게 기르는 꽃, 수국을 나는 언제 고요한 그 길을 따라가 볼 수 있을까요

외로운 마음으로만 볼 수 있는 그 꽃을 수국이 피지 않는 땅에서 다시 기억합니다.

++++

 

***eunbee***

2015.05.24 21:42

 

밀차, 료헤이의 덤불숲 우거진 언덕, 내가 잃어버린지 몇 해가 된답니다. 고향마을 오두막에서의 작은 소망이 산산히 날아가 버리던 그 때.

나는 객지에서의 내 발걸음이 고향의 어느 작은 언덕에서 멈추어질줄 알았거든요.

 

코,

이케노오 절의 법사는 소시지 닮은 코가 그의 운명입니다.ㅎ

소설 읽으면서, 이상스레 겹쳐지는 생각 하나, 한국 어느 절에선가 부처님 어깨부근에 풀벌레의 알이 매달린 신기한 것을 보고, 만다라꽃(?)이라고 법석을 부리던 사람들...

이 법사님의 코가 한국의 어느 절에 있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엉뚱한 생각.ㅋㅋ

 

거미줄,

내 어릴 적, 이모님댁에 가서 펼쳐본 두어 장짜리 그림에 곁들인 이야기.

무간지옥에서 허덕이게 될 무서운 내용을 보고 읽으며 겁에 질렸던 기억이 있어요.

죄짓지 말고, 나쁜짓 하지 말며 살아야겠다.ㅎㅎ 어린맘에 겁먹어서 다짐하던...ㅎ

 

염명순 시인은 유학 초기 시절 남불 툴루즈에서 보내던 그때, 아마도 수국을 보지 못했나 봐요.

프랑스에도 수국 많아요. 색깔도 다양하고 소담스럽고 풍성한.

브르따뉴 지방 Port-Blanc에 갔을 때 수국이 얼마나 예쁘고 지천이던지.

수국때문에 그 마을이 더욱 인상 깊게 새겨졌어요.

쏘 우리 옆집에도 수국 몇그루가 있으나, 아직 피지 않았네요.ㅎ

 

 

<소년>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作-

 

***동우***

2015.05.25 13:28

 

저 '소년'은 필경 작가 자신일테지요?

 

어른이 되어 회억하는 유소년시절이 자아내는 아련하게 슬픈 느낌,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차츰 사물에 대한 인지와 삶을 향한 인식을 획득해 감에 따라 상상속 세계는 소멸하고 신비하게도 몽롱하였던 느낌들을 상실해가는 과정의 그 이상한 슬픔...

 

'소년',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문학의 향기를 맡습니다.

 

"요시하라는 어떨까? -아사쿠사에는 요즘 양가집 규수들이 매춘을 하러 나와 있다더군."

크리스마스날, 야스키치는 옆 테이블 장사꾼의 얘기를 들으면서 몇시간 전 버스깐의 프랑스 선교사를 떠올립니다.

어린 마리아를 바라보는 철테안경 너머에서 기쁨의 눈물로 빛나고 있었던 선교사의 눈을.

야스키치는 그 행복에 가득찬 회색 눈 속에 모든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음을 스쳐간 추억 두세개를 회억하는 것입니다.

 

갈 위의 비밀.

4살 짜리에게 15,6세 짜리 소녀는 전지(全知)한 델포이(Delphi)의 무녀입니다.

진흙길에 자욱을 남긴 두줄기 평행선.

환등기에서 본 몽고의 대사막에 끝없이 이어진 자욱은 사라지고 지금은 그저 흙투성이의 화물차가 한대, 쓸쓸한 마음 속에 스스로 바퀴자국을 그리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살아보아도 뭐하나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행복인지도 모릅니다.

 

죽음.

당신은 언제 죽음의 불가해(不可解)를 인식하였나요?

소년은 나름 죽음을 압니다, 개미를 눌러 죽인 후에는 늘 개미의 주검이 남으니까요.

스스로 죽는 주검을 본 적이 없으니 모든 생명은 죽어야한다는 법칙을 소년은 알리가 없습니다.

나 또한 산이나 숲을 걸을적마다 신기한게 그겁니다.

산과 숲에 무수히 깃들었던 생명들의 주검은 어디에 숨겨져 있을까..

주검은 어찌 그리 빨리 감추어지는걸까..

지렁이가 박테리아가 그리도 빨리 분해하는건가..

가끔 살해당한 짐승의 잔해는 본적 있지만 자연사한 짐승의 주검을 본 적은 없습니다.

 

내 어릴적 상상, 어느 동화에서 읽었을 겁니다. 코끼리는 죽을때가 되면 죽을 장소를 찾아 밀림 속 비밀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지요. 달이 밝은 밤에..

그래서 코끼리가 죽는 장소를 찾아내면 부자가 되겠구나, 상아가 지천으로 널려있을테니 그런 생각도 했지만, 한편으로 달빛을 받으면서 죽음을 향하여 뚜벅뚜벅 걷는, 가뭇 사라져가는 코끼리의 뒷모습을 머리속에서 그려보면서 말할수없는 슬픔이 밀려왔답니다. 장엄한(?) 슬픔...

그게 죽음에 대한 최초의 인식이었지 싶습니다.

야스키치처럼.

 

<그러나 두번째 유리문 소리는 조용히 아버지의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다음에는 그저 뜨거운 물냄새가 가득히 희뿌옇게 퍼져갈 뿐이었다. 야스키치는 고요해진 목욕실 속에서 큰 눈을 떴다. 동시에 종래까지 불가해였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발견했다. 죽음이란 결국 아버지의 모습이 영원히 지워져버리는 것이다.>

 

바다.

나는 바다를 좀 압니다만 바다의 표정은 참으로 변화무쌍합니다.

아니, 이중적이라고 하는게 옳겠습니다. 요강과 사막의 은유처럼.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아이가 두 손을 담그는 눈 앞의 디테일한 바닷물은 초록빛이 아니랍니다.

해수욕 수영을 하다가 덮치는 파도에 들이키는 바닷물은 푸른 것이 아니지요.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온세상 백색으로 통일된 아름다움의 설경(雪景), 그러나 내가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그림이 바로 눈이 녹기 시작할 즈음의 풍경화...

 

 

 

-독서 리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김장군> <그림자> <덤불 속> <마술> <지옥변>

 

 

<김장군 (金將軍)>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作-

 

***동우***

2015.05.26 04:31

 

꼬비에뚜님 댁에서 업어온,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김장군'

꼬비에뚜님 블로그는 국내외의 방대한 작품들을 작가별로 잘 정리한, 실로 보물창고같은 곳입니다.

 

아쿠다가와가 이런 소설도 썼군요.

'김장군'

조선의 김응서 장군을 모델로 한 소설.

아쿠다가와 류노스케라는 이름이 한결 친근해지는 느낌입니다.ㅎ

 

함께 업어온 원문(본문란에)과 해설(아래, 댓글란에)도 같이 올립니다.

 

꼬비에뚜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얼마나 신세를 질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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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羅生門(라쇼몽)과 신들의 미소로 유명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한국, 당시 식민지 朝鮮을 배경으로 1924년(大正13年, 다이쇼 13년)「신소설(新小?)」2월호에 발표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소설이라기 보단 단순한 평론집 비슷한데, 한국에 전해내려오는 임진록의 여러 이본(異本) 중에 하나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죽음을 차용해서 서사를 이어나간다. 제목의 김장군이란 김응서 장군을 가리키는 제목으로서 류노스케가 차용한 임진록에서는 김응서 장군과 기생 계월향이 평양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를 죽이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 <사실 모두가 알다시피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일전쟁(이 전쟁의 명칭에 대해선 생각해봐야 겠지만)중에 죽은 것이 아니라 에도바쿠후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죽었다>

그 전설을 전하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일본역사교과서에서 더 오래 전에 일본서기에서 전해내려오는 백촌강전투(이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 의해 일본과 백제부흥군이 패배했다. 그리고 이 전투는 동아시아 역사 최초로 韓中日이 싸운 국제전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를 다루지 않은 것을 문제삼고 이렇게 이 소설을 마무리 짓고 있다. ; 어떤 나라의 역사도 그 국민에게는 반드시 영광된 역사이다. 김장군의 전설만을 웃어넘기는 것은 옳지 않다.(원문 : いかなる?の?史もその?民には必ず?光ある?史である. 何も金?軍の??ばかり一粲()に?する次第ではない.)

김응서장군의 전설을 전하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이 소설은 상대주의적인 역사관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간토대지진(1923) 직후의 재일조선인에 대한 일본내의 적대에 대한 경계라고 하는 것이 가장 무난한 것 같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중국에 여행한 적 있다가 일본으로 귀국할 때 조선을 잠깐 들린것이 그의 조선경험의 전부였다고 전한다. 그 시기를 전후해서 아마 임진록을 접한 것 같아 보인다.

다만 이 소설을 인용하면서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어떤 나라의 역사도 그 국민에게는 반드시 영광된 역사다"라는 류노스케의 말이다. 역사가 E.H.Carr의 말처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원문:a continuo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his fact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라고 하더라도 그 과거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은 현재를 사는 역사가의 몫이 될 것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이 말을 검토하고 극복하지 않은 한 한일간의 역사문제, 더 나아가서 국민/국가 그리고 상대주의라는 문제에 대해 역사를 보는 사람들은 어떤 일정한 한계에 부딪히고 말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그것을 극복하는 노력이 다방면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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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作-

 

***동우***

2015.05.27 04:41

 

그림자.

이 이야기의 맥락을 어떻게 더듬어야 할까요

 

1년전 결혼한 회사 사장인 중국인 남편 '진채'와 카페 종업원이었던 아내 '후사코'

'진채'는 아내를 무척 사랑하는듯 하고 '후사코'는 남성편력의 전과가 있는듯합니다.

그리고 '진채' 회사의 서기 '이마니시'는 '후사코' 의 사진을 꺼내보면서 행복한 미소를 짓습니다.

후사코의 간부(奸夫)인지, 짝사랑하는 것인지.

'이마니시'는 사장 '진채'를 증오하는듯 합니다.

그 증오가 후사코의 남편이기 때문인지 어쩌면 그가 중국인이기 때문에 더욱 증오하는겐지.

진채와 후사코의 이혼을 노리는 것인지,

'후사코'의 不情을 사장에게 익명으로 투서합니다.

 

정말 '후사코'는 情夫와 놀아나고 있는건지요.

혹은 투서와 기억으로 인한 근거없는 '진채'의 의처증인지요.

투서때문인지, 과거 후사코의 남성편력의 전과 때문인지 아내를 의심하여 사랍탐정을 시켜 미행케 하는 남편.

 

진채는 아내의 간통 현장을 목격하여 목을 졸라 죽였는지요.

또 하나의 '진채' - 저 도플갱어는 무엇인지요.

사랑하는 아내의 부정을 견딜수 없어서 일종의 방어기제로써 간부(奸夫)를 자기자신으로 투사한 것인지요.

방금 본 영화가 이 이야기 '그림자'였나요.

근데 영화는 '그림자'가 아니라네요.

꿈을 꾼 것도 아닌데.

그림자는 무엇인가요.

“서로에게 '그림자' 같은 거라면, 마음 쓰지 않아도 되겠죠.”

방점을 여기 찍어야 하는지요.

 

'관계'라는 것.

'관계', 그 사이의 긴장미와 그리고 허허미(?ㅎ 虛虛美)같은 것?

 

 

<덤불 속>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作-

 

***동우***

2015.05.28 04:42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만든 ’아쿠다카와‘ 원작의 '나생문 (라쇼몽)'은 매우 유명한 영화입니다.

하나의 사건을 다르게 기억하는 현상, 그 영화 때문에 '라쇼몽 효과'라는 전문용어까지 생겨났지요.

 

예전 그 영화를 볼 적에 나는 구로자와 감독이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원작을 너무나 비틀어 원작과는 딴판의 영화를 만들었구나 하고 생각하였더랍니다.

이 소설을 읽고나서야 '라쇼몽' 영화의 진짜 텍스트는 '덤불 속'이라는걸 알았었지요. (내가 이래요, 글쎄)

 

무사의 아내가 도둑에게 강간을 당하였고 무사는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팩트는 이것 뿐입니다.

일곱사람의 제각각 다른 진술만이 있을 뿐, 사건의 진상은 오리무중 미궁에 빠졌습니다.

과연 덤불 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제 각각 자신의 시점과 입장에서 얘기하는 '덤불 속'사건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요 ?

 

도둑과 아내와 남편(무당의 입을 빌린 진술)

주관화된 기억의 오류라는 전문용어 ‘라쇼몽 효과’?

그러나 저들의 진술은 기억의 왜곡이 아니라 적어도 두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자기합리화, 어쩌면 윤리적 방어기제로서의 심리적 거짓.

 

누군가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치더라도 그것조차 거짓이 됩니다.

진실과 함께 하는 이기주의의 거짓, 아무도 믿을수 없습니다.

옳은 것은 무엇인가요.

 

단절되고 폐쇠된 공간, '덤불 속'의 진실은 아무도 알수 없습니다.

진상이 드러났다.. 진실은 이것이다.. 매스컴의 헤드라인.

그러나 '덤불' 밖의 그 누구도 '덤불' 속의 본질에는 접근할수 없습니다.

이기주의에 기반한 저마다의 입장으로 저마다의 깜냥으로... 다면적 시각의 하나로서 주절댈 뿐입니다.

 

'덤불 속' 에는 인간과 관계에 대하여 어떤 허무하고 추한 알레고리가 숨어있ㄴ느듯 합니다

 

***동우***

2015.05.28 05:01

 

은비님이 먼 프랑스로부터 주문하여 책을 한권 보내주셨습니다.

내 손주 비니 읽히라고.

19세기의 화가, 귀스타브 브리옹이 그린 당시의 삽화가 곁들여진 어린이용 '레미제라블' (내가 읽은 여섯권 짜리 완역판에도 이 그림이 실려있었지요)

'새롭게 읽는 세계 어린이 문학의 고전'으로 비룡소에서 출판한 책이지요.

책을 번역하여 펴낸 이는 파리에 사시는 은비님의 친구이신 염명순 님입니다.

이미 많은 시집과 책을 출판한 염명순님은 시인이며 번역가며 미술사학자이기도 하지요.

 

비니는 지금 초등학교 2학년.

그 아이에게 이 책은 수준이 높을듯 한데, 오히려 나는 비니에게 적극 읽힐 참입니다.

책이란 모름지기 자신보다 수준 높은걸 읽어야 한다는 내 지론이기도 합니다.

이 책을 다 읽고나면 얼마나 생각이 깊어지고 넓어질 것이며 어휘력은 얼마나 풍부해 지겠어요.

할비의 당근도 준비했답니다. ㅎ

 

내가 학원사 문고의 '장발장'을 읽었던게 아마 국민학교 4, 5학년 쯤이었을겁니다.

감동에 겨워 눈물지으면서 몇날 며칠을 두근댔던 그 때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지금 벨기에를 여행중이신 은비님께 여기에다 감사의 인사를 눕힙니다.

메르시, 마담 은비.

 

***eunbee***

2015.06.01 17:57

 

염명순 시인께서 은비네에게 저 책을 선물해 주셨지요.

우린 읽고서, 이미 읽었던 어느 레미제라블이나 장발장보다 좋게 읽히는 아름다운 번역이라며 기뻐했어요.

 

비니와 미니 아기들이 읽어도 좋겠다는 마음에..

민욱군에게도 보내야 하는데, 주소가 바뀌었네요. ㅎㅎ 차츰.. 후일로.

 

독서는 자신보다 수준 높은 것으로. 동감! 동의!

 

 

<마술>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作-

 

***동우***

2015.05.29 04:28

 

'휴 잭맨'과 '크리스찬 베일'이 나오는 마술사 영화 '프리스티지'가 생각납니다만, 아쿠다가와의 소설의 묘사와 문장에는 득특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기예(技藝) 뿐이리까, 집중하여 몰두하여야 하는 무릇 대상에 잡것이 끼면 필패(必敗)지요.

하다못해 노름에 있어서도. 노름하는 마음가짐에도 잡것이 끼면 잃게 마련이라고 하더군요.

돈 딸 욕심이 없으면 뭣하러 노름할까마는, 내 보기에 진정한 노름꾼의 자세는 무념무상인듯..

노름꾼의 그 포커페이스는 욕심이나 호승심을 초월하여 가히 고결한 어떤 경지에 이른 얼굴이라고 느낄 때도 없지 않습니다.

나는 노름을 못합니다.

드러나는 욕심... 잡것이 승(勝)한 천박한 성정인지라...

 

내일부터 아쿠다가와의 대표작 '지옥변'을 몇번으로 나누어 올리겠습니다.

 

 

<지옥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作-

 

***동우***

2015.05.30 05:02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지옥변'(地獄?)

내용은 대강 알고 있었으나 나로서 소설은 처음 읽는데, 꼬비에뚜님 댁에서 업어온 것입니다.

꼬비에뚜님께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나누어 올리려다가 이 소설은 아무래도 한 호흡으로 읽는게 좋을듯 하여 한꺼번에 올립니다.

 

아쿠다가와의 형안(炯眼)은 인간성의 음습한 곳 도사리고 있는 광기를 꿰뚫어 봅니다.

화가 요시히데(良秀)의 광기가 미적 오르가즘에 휩쌓인 예술적 광기라면, 화자(話者)의 시니컬한 칭송 대상인 호리가와(堀川) 대영주의 광기는 오로지 추악함입니다.

예술지상주의.

 

<그는 사다리 위에 멈춰선 채, 책 사이에 움직이고 있는 점원과 손님들을 내려다 보았다. 그들은 이상스레 조그마했다. 뿐더러 사뭇 초라해 보였다. "인생은 한 줄의 보들레르만도 못하다." 그는 얼마동안 사다리 위에서 이러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른 다섯의 나이로 자살한 아쿠다가와가 남긴 글 중의 일절입니다.

 

인생은 한줄 보들레르만도 못하다....

나 역시 한때 입으로는 저렇게 씨부린듯도 싶습니다만, 그러나 나란 인간은 서른다섯에 죽기에는 어림없는 스노비즘의 화신...

이제 일모도원의 세월 앞에서 나는 '보들레르 따위 한줌 삶의 조각보다도 가볍다..'이렇게 주절거릴런지요. ㅎ

 

'지옥변'

느닷없이 어떤 강렬한 색감의 우키요에와 더불어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영화 '감각의 제국'이 떠오릅니다.

김동인의 '광염소나타(광화사를 고칩니다)'가 연상되기도 하구요.

허지만 솔직히 느끼건대 '광염소나타'는 아취랄까, 그런 기품에 있어서 '지옥변'에는 미치지 못하는듯 합니다.

 

으흠, '아베일족'에서의 일본인의 그 가공할 의식구조를 폄할 작정이었는데...

 

***꼬비에뚜***

2015.06.01 17:26

요사이 서너명이 카페 가입 신청을 해와서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동우님이 여기 주소를 알리셨군요.

카페 가입은 초청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카페 주소는 내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동우***

2015.06.03 04:43

꼬비에뚜님.

그런줄도 모르고, 죄송합니다.

 

 

 

-독서 리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두자춘> <어느 바보의 일생>

 

 

<두자춘(杜子春)>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作-

 

***동우***

2015.05.31 01:45 

 

아쿠다가와를 전부 다 읽어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책장에 그의 책이 없지 제법 많건만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았어요.

은비님 요청으로 아쿠다가와를 찾아 올리면서, 차제(此際)에 그를 좀 더 깊이 느낄수 있었습니다.

 

두자춘, 작가는 무얼 말하고 싶었던걸까요.

중국 원전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갖은 악형에도 신음 한번 내지 않던 그가 자식이 죽는 마당에서 '억'하고 소리를 냅니다.

이제 신선(神仙)되기는 물 건너 갔습니다.

 

미쳐 죽은 어머니, 아쿠다가와는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과 사랑과 좌절의 복합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답니다.

그걸 하나의 우화(寓話)에 실어 표현하고 싶었을까요.

 

<나의 어머니는 광인이었다. 나는 한 번도 나의 어머니에게 어머니다운 친밀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머리를 틀어 빗으로 꽂은 채 항상 시바(芝)의 외갓집에서 혼자 앉은 채 긴 곰방대로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얼굴도 작고 몸집도 작다. 얼굴은 핏기가 없는 회색빛이었다. 이런 형편으로 나는 나의 어머니에게 보살핌을 받은 적이 없다. 한번은 양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2층으로 인사를 하러 갔는데 그 때 어머니에게 느닷없이 곰방대로 얻어맞은 기억이 난다. 하지만 대체로 어머니는 항상 조용한 광인이었다.>

 

그러나 아쿠다가와는 자신의 내면을 그대로 까발려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일종의 아포리즘으로 혹은 우화로 치환하여 보여주는 것이 그의 문학일 터입니다.

 

<한없이 쓸쓸하다. 나는 언제나 늘 쓸쓸하다.>

<나의 소설은 많든 적든 나의 체험의 고백이지만 내 자신을 주인공으로 해서 신변에서 일어난 사건을 뻔뻔하게 쓰는 일은 질색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호기심 많은 제군에게 내 생활의 밑바닥을 보여드리는 것은 불쾌하다.>

<누가 수고스럽게도 수치스러운 사실을 고백소설 따위로 쓰겠는가?>

 

아쿠다가와는 1927년 7월 24일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이라는 한 구절을 남기고 자살하였습니다.

죽기 한달 전 친구에게 <어느 바보의 일생>이라는 제목의 원고를 친구에게 부쳤다고 합니다.

이 글은 그의 사후 출판되었지요.

 

++++

<어느 바보의 일생>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나는 이 원고를 발표하는 가부는 물론이요, 발표하는 시기며 기관도 자네에게 일임하려고 하네.

자네는 이 원고 속에 나오는 대개의 인물들을 알고 있을 테지. 그러나 나는 발표한다 하더라도 인덱스를 붙이지 않아주기를 바라네.

 

나는 지금 가장 불행한 행복 속에 살고 있네. 그러나 이상스럽게도 뉘우치지는 않고 있네. 다만 나 같은 惡夫, 惡子, 惡親을 가진 사람들을 사뭇 가엾게 여기고 있네. 그럼 잘 있게.

 

나는 이 원고 속에선 적어도 의식적으로는 자기 변호를 하지 않았다고 자처하네.

끝으로 내가 이 원고를 특히 자네한테 위탁하는 것은 자네가 필경은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알고 있는 걸로 생각하기 때문일세. (도시인이라는 나의 껍질을 벗기기만 한다면.)

 

아무쪼록 이 원고 속에서 내가 얼마나 바보스러운가를 비웃어 주게나.

 

1927년 6월 20일

아쿠타가와 류우노스께

 

쿠메 마사오君 앞.

 

1) 시대 

그것은 어느 책방의 2층이었다. 스무 살인 그는 서가에 걸린 서양식 사다리에 올라, 새로운 책을 찾고 있었다. 모파상, 보들레르, 스트린드베리, 입센, 쇼, 톨스토이.....

그러는 동안에 해질녘은 다가왔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책 장의 글씨를 읽어 갔다. 거기에 나열된 건 책이라느니 차라리 세기말 바로 그 자체였다. 니체, 베를렌느,

그는 어스름과 싸우면서 그들의 이름을 세어 나갔다. 허나 책들은 점점 수심쩍은 그림자 속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는 급기야 기진맥진해서, 서양식 사다리를 내려오려 했다. 그러자 갓 없는 전등이 하나, 바로 그의 이마 위에서 갑자기 반짝 불을 켰다.

그는 사다리 위에 멈춰선 채, 책 사이에 움직이고 있는 점원과 손님들을 내려다 보았다. 그들은 이상스레 조그마했다. 뿐더러 사뭇 초라해 보였다.

<인생은 한 줄의 보들레르 시 만도 못하다.>

그는 얼마동안 사다리 위에서 이러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2) 어머니

광인들은 모두 한결같이 쥐색 옷을 입고 있었다. 넓은 방은 그래서 한층 우울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들의 하나는 오르간을 향해 열심히 찬송가를 쳐대고 있었다. 동시에 또 그들의 하나는 바로 방 한복판에 서서 춤춘다기보다는 뛰놀고 있었다.

그는 혈색이 좋은 의사와 함께 이러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도 10년 전엔 그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 그는 사실이지 그들의 냄새에 그의 어머니의 냄새를 느꼈다.

<그럼 가볼까?>

의사는 그의 앞에 서면서, 복도를 따라 어느 방으로 갔다. 그 방 한 구석에는 알콜로 가득찬 커다란 유리 항아리 속에 뇌수가 여러개 담겨 있었다. 그는 뇌수 위에 희미하게 흰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흡사 계란의 흰자위를 조금 떨어뜨린 것과 비슷해 보였다.

그는 의사와 선 채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한 번 그의 어머니를 상기했다.

<이 뇌수의 소유자는 XX전등회사의 기사였는데 말이지. 노상 자신을 검게 빛나는 큰 다이어몬드인 줄 알고 있었지.>

그는 의사의 눈을 피하기 위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엔 빈병 파편을 심은 벽돌담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엷은 이끼풀이 얼룩지고 흐릿하게 희끄무레해 보일 뿐이었다.

 

3) 집

그는 어느 시외의 2층 방에서 숙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토대가 헐거롭기 때문에 묘하게 기울어진 2층이었다.

그의 백모는 이 2층에서 번번이 그와 싸움을 했다. 그야 그의 양부모로부터 중재를 받기는 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백모한테 누구보다도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평생 독신이었던 그의 백모는, 이미 그가 스무 살 때에도 예순에 가까운 노인네였다.

그의 어느 시외의 2층에서, 서로 사랑하는 자들은 서로를 괴롭게 해야하는가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어쩐지 으스스한 2층의 기울어짐을 느끼면서.

 

4) 東京

스미다가와 강은 흐리터분하게 흐리어 있었다. 그는 달리는 작은 증기선 창으로부터 무코지마의 벗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꽃을 소복히 담은 벚나무는 그의 눈엔 일렬로 늘어선 넝마처럼 우울했다. 하나 그는 그 벚꽃에 - 에도 이래의 무코지마 벚꽃에, 어느 틈에 그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5) 我

그는 그의 선배와 함께 어느 까페의 탁자로 향해, 쉴 새 없이 권련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별로 입을 열지 않았다. 허나 그의 선배의 말에는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오늘은 반나절이나 자동차를 타고 있었지.>

<무슨 용건이라도 있었는가요?>

그의 선배는 턱을 괸 채 지극히 무심하게 대답했다.

<뭐 그저 타고 싶어서지.>

그 말은 그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신의 세계에 가까운 我의 세계로 그 자신을 해방했다. 그는 어째 아픔을 느꼈다. 하나 동시에 기쁨도 느꼈다.

그 까페는 극히 작았다. 그러나 Pan神 액자 밑에는 붉은 화분에 심은 고목나무가 한 그루, 그 두툼한 이파리를 추욱 늘어뜨리고 있었다.

 

6) 病

그는 끊임없는 바닷바람 속에서 커다란 영어사전을 펼치고, 손가락 끝으로 낱말을 찾고 있었다.

Talaria 날개 돋친 구두 또는 샌들.

Tale 이야기.

Talipot 동인도에 나는 야자수. 줄기는 50-100피트 높이에 달하며, 잎은 우산, 부채, 모자 등에 사용된다. 70년에 한번 꽃을 피운다......

그의 상상은 또렷이 이 야자나무 꽃을 그려냈다. 그러자 그는 목구멍에 여태껏 알지 못한 가려움을 느끼곤, 부지중 사전 위에 가래를 떨구었다.

가래를? - 그러나 그것은 가래는 아니었다.

그는 짧은 생명을 생각하고, 다시 한번 이 야자나무 꽃을 상상했다.

이 먼 바다 저 편에 높다라니 솟구쳐 있는 야자나무 꽃을.

 

7) 그림

그는 갑자기 - 그것은 참으로 갑작스러웠다. 그는 어느 책방 앞에 서서, 고호의 화집을 보고 있는 중에 갑자기 그림이라는걸 완전히 이해했다. 물론 - 고호의 화집은 사진판이었음이 분명했다.

하나 그는 사진판 속에서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대자연을 느꼈다. 이 그림에 대한 정열은 그의 시야를 새롭게 했다.

그는 어느새 나뭇가지의 술렁거림이며 여자의 볼의 볼록함에 대해 끊임없는 주의를 보내기 시작했다.

비 내리는 어느 가을날의 해질녘, 그는 어느 시외의 육교 아래를 지나가려 했다. 육교 저쪽의 둑 밑에는 짐마차가 한 대 서 있었다.

그는 그곳을 지나면서 누군가 전에 이 길을 지나간 사람이 있는 것을 느꼈다. 누구냐? - 그것은 그 자신에게 새삼스레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스물 세살인 그는 마슴 속으로는 귀를 자른 네덜란드 사람이 하나, 긴 파이프를 입에 문 채 이 우울한 풍경화 위에 물끄러미 날카로운 눈길을 퍼붓고 있었다.

 

8) 불꽃

그는 비에 젖은 채 아스팔트 위를 밟고 갔다. 비는 꽤나 심했다.

그는 물보라가 충만한 속에 고무를 바른 외투 냄새를 느꼈다. 그러자 눈 앞의 가공선이 한 줄 보랏빛 불꽃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야릇한 감동을 느꼈다.

그의 상의 호주머니는 그들의 동인잡지에 발표할 그의 원고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빗속을 걸으면서 다시 한번 등 뒤의 가공선을 쳐다보았다.

가공선은 여전히 날카로운 불꽃을 던지고 있었다.

그는 인생을 내다보아도, 아무것도 특별히 탐나는 것은 없었다.

하나 이 보라빛 불꽃만은 - 처절한 공중의 불꽃만은 목숨과 바꾸더라도 붙잡고 싶었다.

 

9) 시체

시체는 모두 다 엄지손가락에 철사 달린 표를 달고 있었다. 그 표에는 이름이며 연령같은 것이 기입돼 있었다.

그의 친구는 허리를 굽혀 솜씨있게 메스를 움직이면서, 어떤 시체의 얼굴 가죽을 XX기 시작했다. 가죽 밑에 펼쳐져 있는 건 아름다운 노란 지방질이었다.

그는 그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어떤 단편소설을 - 왕조시대에 배경을 잡은 어떤 단편소설을 써내기 위해 필요했음이 분명했다.

하나 부패한 살구 냄새 비슷한 시체의 냄새는 불쾌했다.

그의 친구는 미간을 찌푸리고 조용히 메스를 움직여 나갔다.

<요즘은 송장도 모자란단 말이야.>

그의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어느 틈엔가 그의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 <나는 송장이 모자란다면, 아무런 악의도 없이 XX을 할테다.>

그러나 물론 그의 대답은 마음 속에 있었을 따름이었다.

 

10) 先生

그는 큰 떡깔나무 밑에서 스승의 책을 읽고 있었다. 떡깔나무는 가을 햇볕 속에 이파리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어딘지 먼 공중에 유리 접시를 드리운 저울이 하나, 꼬옥 평형을 지니고 있다.

- 그는 스승의 책을 읽으면서, 이러한 광경을 느끼고 있었다.........

++++

 

-아쿠다가와 류노스케는 일단 마치겠습니다.-

 

***eunbee***

2015.05.31 05:22

 

동우님,

많이많이 마아아아아아니~ 감사합니당.ㅎ

이렇게 많은 작품을 소개해 주실 줄은 몰랐지롱요.

동우님의 또다른 한 사람의 팬, 작은딸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를 읽느라 요즘 독서삼매랍니다.

벨기에 여행 다녀오느라 몇 작품은 아직인 나보다 더 살뜰하게 감상하고 있는 작은딸이 오늘은 '동우 할아버지께 고맙단 인사 드려야 겠어'라고 했어요.

 

이집 인터넷과 이 노트북이 말썽이라서, 여행 사진을 올리지 못하고 있어 이러고 있답니다. 조금 후엔 인터넷도 먹통되는 시간이니 여기서 바삐 맺고 다시 쓸게요. 동우님!!!

 

오월 마지막날이네요.ㅎ

멋지게 마감하세욤~^^

 

이제 폰으로 이 소설 읽을거예요.

고마워요. 동우님~

 

***동우***

2015.06.01 05:41

 

은비님.

다른건 몰라도 한국은 인터넷 선진국.

인터넷 후진국(ㅎ)에서는 블로깅보다 모바일이 편리한듯.

벨기에의 파노라마, 쏘의 성당 종소리....카카오스토리로 보고듣는 작은 그림들.

 

유월입니다.

여름에 진입하여, 이제 바야흐로 오르가즘으로 치닫는 계절...

 

무엇보다 은비님.

은비 모친님의 리딩북 애독, 말할수없는 기쁨이랍니다. ㅎ

 

***해나**

2015.05.31 18:50

 

동우님 덕분에 아쿠다가와 류노스케를 알게 되었어요, 저는^^;;

저는 제가 글 줄이나 제법 읽는 줄 알았는데

동우님 블로그 드나들면서...자격지심이 느껴집니다. ㅎㅎ

책도 인생도...어렵네요. 잘 모르겠습니다.

 

***동우***

2015.06.01 05:43

 

해나님.

나 또한 글줄이나 제법 읽는줄 알건만, 아직 접하지 못한 그 숱한 작가들..

인생 저물도록 자격지심으로 사는게지요. 무어.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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