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몽매(蒙昧)의 팡세> 1.2.3 (1,4,3,3,1)

카지모도 2020. 7. 10.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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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잡설-

 

[[몽매(蒙昧)의 팡세]]

2013.05.04

  

아, 내 영혼에 여적 고여있는 한 줌 신앙 있다면, 그 꼬라지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혹한 모습일겁니다.

남루(襤褸)하고 수척(瘦瘠)한 심령(心靈).

 

그런 심사가 요즘, 예전 펴들었던 종교관련 책들을 다시 뒤적거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일모도원(日暮途遠)의 나그네 길, 객창한등(客窓寒燈)에 비추인 영혼의 그림자가 몹씨 스산하여 스스로 불쌍한가 보아요. ㅎ>

어줍잖은 사유(思惟)일 망정 좀 무겁게 가라앉고 싶습니다.

 

감히 <몽매(蒙昧)의 팡세>라고 제목 달아 종교적 단상(信仰斷想)을 지껄이고자 합니다.

그렇지만 천학(淺學)의 독서와 비재(非才)한 생각들 오죽하리까.

맥락도 논지도 허술하기 그지없는 단편(斷片) 쪼가리 될 겝니다만, 내 그릇이 그 모냥이니 어떡하겠어요?

책을 읽다 마음에 담겨지는 글 조각들이나 떠오르는 느낌과 생각을 그냥 늘어 놓으려 합니다.

 

혼잣소리 하려다가 공개글로 하기로 하였어요. <그래도 남에게 들려주려 하면 스스로 성실(誠實)의 부담같은거 생기지 않겠어요? ㅎ>

 

<'파스칼’이 ‘팡세’에서 허영을 말하였습니다. "허영은 이토록 인간의 마음에 뿌리박고 있으므로, 그 누구도 각기 자만하고 자신에게 감탄해 줄 사람을 얻으려고 한다. 철학자들까지도 그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것을 반대하는 나 역시 이 글이 잘 썼다고 칭찬을 받고 싶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도 역시 이것을 읽었다는 칭찬을 받고 싶어 할 것이다.">

 

파스칼의 발가락 때 만큼도 미치지 못하는 속물, 못나빠진 폼잡기 없지 않을 것이지만 좋은 마음으로 보아 주시고 좋은 말씀 있거들랑 들려 주십시오.

 

 

<몽매(蒙昧)의 팡세> (1)

2013년 5월 4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1.

내가 신(神)께 이르는가, 신(神)께서 내게 오시는가.

 

2.

차안(此岸)의 모색(摸索)인가, 피안(彼岸)의 선택(選擇)인가.

점오돈수(漸悟頓修), 돈오돈수(頓悟頓修)인가.

궁구(窮究)인가, 계시(啓示)인가.

쟁취(爭取)인가, 은총(恩寵)인가.

간구(懇求)인가, 예정(豫定)인가,

포상(襃賞)인가, 선물인가.

마이크로인가, 코스모스인가.

심리(心理)인가, 초월(超越)인가.

철학인가, 종교인가.

 

3.

예수의 제자를 잡아 죽이려고 살기등등한 사울이 다메섹에 이르자 하늘의 빛이 비추었다. 예수의 말씀이 들렸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하시거늘 대답하되"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그리하여 사울은 뒤집어져 버렸다. 바울이 되었다.

 

4.

합리주의자 데카르트의 철학으로 부터 출발했던 위대한 천재 '블레즈 파스칼'

1854년 11월 23일 밤에 그에게 엄습한 신비주의.

그는 환희에 차서 부르짖었다.

"철학자의 神이 아니요, 수학자의 신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이셨도다. 이 확신, 이 감격, 이 기쁨 그리고 이 평화."

 

5.

살아있는 신, 체험된 신, 계시(啓示)의 신은 타오르는 불이다

<"타오르는 것은 아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다 -베르나루두-">

계시의 신은 언제나 불과 같이 사람들에게 엄습하여 순식간에 직감적 인식에 이르게 한다.

전율적인 체험, 딱 한번 엄습하는 그것.

영혼의 불꽃.

 

6.

밀란의 정원, 아우구스티누스는 죄의 문제로 고뇌하고 있었다.

그 때 그의 귀에는 어린아이의 음성이 들렸다 

'집에서 들고 읽어라, 집에서 들고 읽어라.'

집 의자에 펼쳐져 있었던 구절을 읽었다.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아우구스티누스 죄의 문제는 단번에 사라졌다.

 

 

<몽매(蒙昧)의 팡세> (2)

2013년 5월 5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1.

변증법적 유물론.

무릇 통속철학의 조건은 無(무신론)다.

계몽주의는 종교(宗敎)라는 전제(前提)를 허락하지 않는다.

 

2.

철학의 神.

인식에 대한 욕구.

자연신학이 궁구하는 추상과 관념의 신.

선(善) 그 자체.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

이데아.

순수한 사고, 순수한 행위.

본질, 필연,

최초의 실체...

 

3.

선험적(先驗的)인 것.

집단무의식(集團無意識).

본성(本性)은 갈구한다.

하소연, 숭배, 기도, 사랑, 찬미, 위무(慰撫), 노래가 통하는 신.

 

4.

인격적인 체험.

느끼는 신.

살아있는 신.

 

5.

가르칠 수 없는 것

자극받아 각성(覺醒)되는 존재의 감정.

 

6.

<이해되는 것은 신이 아니다. -테르스테겐->

 

7.

<인간은 하나님을 이해하지는 못하나 그래도 그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성(理性)은 매춘부다. -루터->

 

8.

‘누미노제’ (Numinose). <’루돌프 오토’의 책 '성'(聖)- 우리말 제목 ‘종교입문’(을유문화사)>

피조물감정(被造物感情)이라는 바로 그것.

 

9.

<타락하지 않은 오성(悟性)과 심성(心性)의 철학으로써 인간은 누구나 언제라도 신을 발견할 수 있다. -칸트->

 

 

<몽매(蒙昧)의 팡세> (3)

2013년 5월 8일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

 

1.

신앙은 신비하지만 맹목이며 이성은 명백하지만 수척하다.

 

2.

구원에 대한 욕구와 인식에 대한 욕구.

신앙과 철학은 대립한다.

 

3.

철학과 종교, 좌뇌와 우뇌, 로고스와 파토스, 논리와 비약, 추리와 직관, 이성과 감성...

나 따위, 난망하다.

정신의 조화로움...

영혼의 앙상블...

 

4.

<두 종류의 마음이 있다. 하나는 기하학적 마음이고 또 하나는 섬세한 마음이다. 기하학적 마음은 완만하고 굳으며 꺾기 어려운 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섬세한 마음은 유연한 사상을 갖고 여러가지 사랑스러운 부분에 대해 동시에 적용한다.>

-파스칼 '사랑과 정념에 관한 설'-

 

5.

<그러나 비뚤어진 정신의 소유자는 결코 섬세하지도 기하학적이지도 않다. 직관으로서 판단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은 추리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은 무엇이건 한눈으로 꿰뚫어보려고 하고 원리를 찾는 습관이 전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원리로써 추리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들은 직관에 관한 한 아무것도 모른다.>

-파스칼 '팡세'-

 

6.

<진정한 웅변은 웅변을 멸시하고 진정한 도덕은 도덕을 멸시한다. 다시 말하면 규칙같은 것이 없는 판단의 도덕은 정신의 도덕을 멸시한다. 왜냐하면 학문이 정신에 속해 있듯이, 판단에는 직관이 속해 있기 때문이다. 섬세는 판단의 분야이며 기하학은 정신의 분야이다. 철학을 멸시하는거야말로 참다운 철학을 하는 것이다.>

-파스칼 '팡세'-

 

7.

<자연은 모든 진리를 각각 그 자체 속에 두었다. 우리의 기교는 그 하나를 다른 것 속에 담는다. 그러나 그것은 부자연스럽다. 진리마다 자기 장소를 차지하고 있다.>

-파스칼 '팡세'-

 

8.

<고집불통으로서의 회의론자 (회의파 철학자인 피론의 무리)>

-파스칼 '팡세'-

 

9.

<경험할 수 있는 것 배후에 우리들의 마음이 파악할 수 없지만 그것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은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종교성이다.>

-아인슈타인-

 

10.

신앙에다가 '행위' '자력(自力)' '전승(傳承)'등 인문(人文)을 덧붙임으로 타락하였던 구교(가톨릭).

그리하여 종교개혁자들은 외쳤다.

<믿음만(sola fide), 은총만(sola gratia), 성서만(sola scrptura).>

 

11.

미지(未知)의 '모험'과 '암흑' 속으로 무조건적으루다 뛰어 드는 게 진정한 신앙이라고 원리주의자는 강변한다.

그게 선택된 자가 획득한 은총의 특권이라고.

 

12.

인간적인 자아로써 듣고 이해하는 신.

신앙하는 행위에 있어서 변명은 없어도 좋은가.

개념과 명제에 대한 진술이 없더라도 스스로 납득하는가.

철학적 고찰은 종교행위가 아닌가.

 

13.

<내가 기독교에 접촉한 이래 나의 영혼을 덮친 무서운 변화를 15분 이내로 말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나의 회심은 수많은 다른 회심자의 그것보다 훨씬 완고한 것이었다. 자신을 잃은 황홀경(ecstacy), 별안간 다가온 영적 광명(illumination)의 순간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나의 회심은 천천히,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하루만에 회심 한 것이 아니다. 이른바 회심의 철학은 나의 제목이 아니다.>

-우찌무라 간조 '나는 어떻게 크리스찬이 되었는가'-

 

 

<몽매(蒙昧)의 팡세> (4)

2013년 5월 9일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

  

1.

자연의 질서와 아름다움.

<자연을 관찰 할 때 우리는 신이 존재한다고 요청할 수 밖에는 없다 –칸트->

 

2.

양심과 도덕률은 이성과 합리에 선행하는 원초적 관념이다.

도덕적 의무감은 독립적인 하나의 권위로서 우리에게 명령한다.

 

3.

<이성의 지배에 의해서 이웃사람을 사랑한다는 진리에 도달한 것인가. 아니다. 내 영혼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성은 아니다. 이성이 발견한 것은 생존경쟁으로ㅡ 나의 욕망을 채우는데 방해를 하는 사람은 누구나 목을 졸라 죽여 버리라고 요구하는 법칙이 아닌가. 남을 사랑하라는 법칙을 이성이 발견할 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건 불합리한 것이니까.>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4.

우리의 존재가 관념하는 神이 곧 신의 실재와 직결된다는 존재론적 증명.

 

5.

인과율, 우주 법칙의 필연성.

 

6.

<사람의 마음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제2원인을 관찰할 때 그 이상 더 파고 들어가기를 멈춘다. 그러나 그 원인이 서로 부착되고 연결되어 있는 사슬을 볼 때 그 마음은 섭리나 神的 존재에 까지 날아 올라갈 수 밖에 없다.>

–프란시스 베이컨-

 

7.

<예술가의 작품은 스스로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 세계는 가장 완전하게 만들어진 예술품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가장 완전한 작가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이와 같이 우리는 신의 존재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된다.>

-필론-

 

8.

모든 인류는 공통적으로 종교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역사적 사실.

 

9.

<우리가 널리 세계를 두루 돌아다녀 보면, 헌법이 없고 글자가 없고 정치가 없는 백성은 찾아볼수 잇지만 종교가 없는 백성은 아직 찾아 본 적이 없다.>

–헤로도투스-

 

10.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근거와 원인을 그 자체 안에 가지고 있지 않다.

모든 존재는 유한하고 불완전하다.

 

11.

자아(自我)의 존재인(存在因)을 자아 안에 가지고 있는 자.

스스로 있는 자.

'I am who I am.'

'에예르 에쉐르 애예르'

자존(自存), 자생(自生), 완전, 자족(自足).

 

12.

변하기 쉬운 것은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도달할 수 없는 것은 그곳에서 실현된다.

말로 할수 없는 것이 그곳에서 이루어 진다.

 

13.

<한없이 여자다운 것이 우리를 그곳으로 끌고 간다.>

-괴테 '파우스트'-

 

 

 

-신앙 잡설-

 

<몽매(蒙昧)의 팡세> (5)

2013년 5월 20일

 

'신의 척도로서의 인간'(쿠르트 플라쉬 著)을 읽다.

  

1.

신을 의인화(擬人化)하는 것은 옳을까.

 

2.

<인간은 만물의 척도.>

-프로타고라스-

 

3.

<금발에 푸른 눈을 한 트라키아인들은 자기네 신들도 금발에 푸른 눈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디오피아인들은 자기네 신들은 검다고 생각한다. 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신의 원래 모습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신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유한성을 신에게 전가하고 있어서 만약 말과 소와 사자가 인간처럼 손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이들 동물은 자기네 신들을 말이나 소 혹은 사자의 형상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크세노파네스-

 

4.

<신들의 모습이 갖는 다양성은 우리를 현혹시켜 단 하나뿐인 신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내용없는 인간의 산물이다.>

-크자누스-

 

5.

한복입은 예수 그리스도, 치마 저고리 입은 마리아 (운보 김기창의 그림)

 

6.

<만물의 척도는 神.(이데아)이다.>

-플라톤-

 

7.

<신은 사고(思考)의 사고(思考).>

-아리스토텔레스-

 

8.

이데아의 관념으로서 '인간이 신의 척도'라는 명제는 약화되는가.

 

9.

이성적인 존재이면서 지극히 비이성적인 유한(有限)한 존재 인간.

신적인 존재에 인간적인 성격을 부여하지 않고 과연 우리는 무엇을 인식할수 있을까.

어떤 대상에 관해서 순수한 이성과 과학과 사상과 상상으로써 그 사물 자체를 파악 할수 없을 때, 신이란 완전히 의인적(擬人的)일수 밖에 무슨 도리가 있을런가.

 

10.

신의 개념을 나와 연결시킴으로써 신의 초월성은 파괴되는겐가.

나를 까마득하게 초월하여 선계(仙界)에서 노니는 신선은 나의 신이 아니다.

'신'은 '나'없이는 존재할수 없다.

 

11.

인간에 대한 고찰은 오직 인간으로부터만 가능하다.

인간적인 경험을 통하여 신의식(神意識)에 이르게 되는 것이 부당하지 않다

이것이 어쩌면 이것이 신의 초월성에 대한 근거이다.

 

12.

아버지 하나님, 어머니 하나님, 양파 하나님('깊은 강' -앤도 슈사쿠-)

우상의 전쟁, '라두사니 마을'의 수호성인 '성 판타레오네'와 '마스칼리코 마을'의 수호성인 '성 콘셀보' (우상숭배자들-가브리엘 다눈찌오-)의 저 피투성이 싸움.

 

13.

신은 모사(模寫)의 대상이 아니라 의미의 대상이다.

의미로서, 신의 표상이 갖는 것은 부동성(不動性)이 아니다.

 

14.

문화와 정서와 감성에 따라 다르게 파악되는 신.

어쩌면 그 모순이 사람들에게 척도가 되도록 맞추어진 신의 통일성이 아닌가.

 

15.

인간은 훌륭한 의미로서 신의 척도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다면 신은 나와는 전혀 무관한 존재, 신을 파악한다는 것은 공허하거나 혹은 불손(不遜)하다.

신이라고 하는 사상의 내용은 나의 사고에 의존하는 것이다.

 

  

<몽매(蒙昧)의 팡세> (6)

2013년 6월 24일

 

알수없는 신

  

1.

성서.

일점일획무오(一點一劃無誤), 축어영감(縮語靈感), 알파와 오메가.

도그마에 갇힌채 꼼짝 못하는 神.

 

2.

종교적인 것으로 부터 급전직하 자연과학적인 것으로 변모하는 세계상(世界像).

우주는 지구중심도 아니고 인간중심도 아니다.

그런데도 神중심적이란 사유는 타당한가.

 

3.

정신분석(개인심리학, 심층심리학등.)에 의한 스스로에 대한 인식.

어린애의 원형이 확대된 <하나님 아버지>

 

4.

<신앙의 표상인 아버지는, 응징하는 아버지를 두려워 하지만 동시에 어린 날 자신을 보호하여 주는 상대를 그리워 하는 어른의 소아적 동경이 부르는 명칭이다.>

-프로이트-

 

5.

신이란 원망(願望)하는 꿈이 투영된 이미저리.

아버지가 투영된 신의 면모.

 

6.

<종교는 환상(illusion)이다.>

-프로이트-

 

7.

<종교는 아편이다.>

-맑스-

 

8.

유태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

구약성서에서 비롯된 역사적인 세 종교. (모두 구제사적 사실로 서술된 역사적 사건에서 출발하고 있다.)

고고학과 역사적인 연구에 의한 언어학적 비판과 명백하게 드러나는 비종교사적 사실들.

성서의 전승에 대한 회의.

 

9.

관념이 아니라 인격적인 신.

관념으로 보듬어 안고 종교적 추상 뒤로 숨는 신이 아닌, 현실에 존재하는 인격적인 신은 어디 있는가?

현대사를 점철한 비극적인 역사적 현장과 자연재해의 현장들.

살아계시고 전능하신 신은 그 현장에 아니 계셨다.

과연 신의(神義)는 어디 있는 것인가.

 

10.

성서에서 익숙한, 현실속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은 숨어 버렸다.

마르틴 부버는 일식(日蝕)에 빗대어 <신식(神蝕)>이라고 했다고 한다.

생각건대, 이른바 신앙인의 신앙적 의식은 카오스의 어떤 모습이 아닐까.

의지(意志)이거나 이중잣대의.

어쩌면 그 감정모체의 진실은 다분히 니힐리즘이 아닐까..

 

11.

유대학자가 쓴 '알수없는 신'(샬롬 벤코린)을 읽다.

유대교는 기독교보다 훨씬 자유롭고 유도리(餘裕)가 많구나.

그러나 예정론의 품에 안겨 낙낙(樂樂)하는 기독교보다, 인간의 조건에 있어서는 훨씬 더 서슬이 퍼렇구나.

 

12.

오늘날 드러난 자연과학은 완벽한가, 궁극인가.

<오늘 날> 무의미한 것에 대한 의미부여를 시도하는게 종교는 아니다.

오늘날 자연과학적 인식은 신앙의 관점으로 볼때는 하나의 변증법적 현상으로 보일수 있는 것.

인식의 문 뒤에 무한으로 통하는 새로운 문이 열리는 것을 깊은 외경심을 가지고 파악하게 하는 것이 신앙이다.

 

13.

정신분석에 의하여 근세기 들어 매우 관념화 된 영혼 그 자체.

사람은 어려서부터 악한 마음을 품게 마련 -창세기-

히브리어는 이 경우 충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좋은 충동과 나쁜 충동.

캘빈이 말하는바 바울의 섭리, 선택받은 자와 노여움의 대상이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유태교는 인간은 자유롭다는 것에 근거한다.

선행도 죄악도 오직 자유로부터 생긴다

 

14.

인간은 언제나 도덕적 결단 앞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15.

<신의 율법도 인간의 자유없이는 기만 또는 만담에 불과하다>

-마이모니데스-

<모든 것은 예견되어 있지만 거기에는 자유가 주어져 있다.>

-랍비 아키바-

 

16.

인간이 신앙의 전거(典據)로 삼고 있는 축어영감설(逐語靈感設)이란 교리는 작금 비판적 정신 앞에 이미 받아 들여질수는 없다.

신앙은 역사적 제약성을 지닌 성서를 신이 말씀하신 본래의 음성으로 생각할 용기를 갖지 않으면 안된다.

구약성서는 신화적 언어를 자주 사용한다. (신약성서에서도 신화적 사건이 지대한 중요성을 차지하지만)

신화를 신화로서 이해하고 그것을 우리 마음 속에 내면화시킬수 잇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문자 그대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교회 설교의 타당성 여부가 문제 될 것인데, 유태교는 이 문제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태교에서는 비신화화가 중요한 중심적 문제가 아니다.

 

17.

<신학은 절대적으로 구체적인 것과 절대적으로 보편적인 것 사이의 긴장의 영역이다.>

-폴 틸리히-

 

18.

계약의 역사는 성서로 끝나지 않는다.

시나이 계약과 골고다 계약은 역사이자 동시에 현재이다.

 

19.

신의론(神義論) <히브리어로는 '티두크 하딘'>

심판은 올바르다는 교의는 이 세상에 나타난 악에 대하여 신의 지혜와 정의로움을 옹호하려는 인간적인 노력이다.

욥을 보라.

뇌운(雷雲) 속에서 신이 말씀하신다는 장대한 신 현현(顯顯)의 장. (38장 4절)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인간 욥은 이렇게 답할수 밖에는 없다.

"보십시오, 저는 참으로 비천한 자이니 무엇으로 당신께 대답하오리까?"

그럼에도 인간의 정신은 이해할수 없는 것을 모색하여 알수 없는 신의 뇌운(雷雲) 속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특히 격심한 고난을 받으면 '나의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한탄할수 밖에는 없다

이 시험이 가장 엄한 것이다

 

20.

죄는 자유의 댓가이다.

너희는 살생하지 말라는 신의 말씀에 순종하거나 거역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있다

오직 인간에게만 허여된 자유이다.

그 자유의 어두운 면을 인식해야 한다

 

21.

아브라함은 묻는다.

"도대체 죄있는 자와 죄없는 자가 싸잡아 멸망해도 좋습니까?" 하고.

여호와는 말씀한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

 

22.

신앙은 편안한 잠을 자기 위한 부드러운 베개가 아니라 하나의 모험, 영혼의 위대한 모험이라는 사실이다.

히브리어로 '엠나'라는 의미로서의 신앙은 우리에게 알려진 신에 대한 신뢰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알수 없는 신, 우리가 도저히 볼수 없는 신에 대한 신뢰이다.

너는 어디 있느냐? 하고 신은 우리에게 묻는다

설령 그것이 최후의 순간일지라도 어김없이 우리에게 묻는 것이다.

알수 없는 신 앞에 우리는 서 있고, 우리는 또한 알수 없는 신으로부터 달아난다

어디로 달아날 것인가.

그와 똑같은 신에게로 달아나는 것이다.

신의 노여움에서 자비 속으로.

이것이 유태교 신앙의 최후이자 최고의 인식이다.

 

23.

자유로부터의 도피.

어디로 갈 것인가.

아아, 신앙이란 삼엄하게 번득이는 칼날이로다.

  

 

<몽매(蒙昧)의 팡세> (7)

2013년 7월 31일

 

 

예정(Predestination)의 교의(敎義)

 

1.

1987년 2월 어느날 마태복음을 읽던중, 강하게 엄습한 신비주의에 벅차 흐느꼈다.

그때 내게 교회도 신앙적 환경도 없었다.

두루 척박한 직장과 환경에 영혼이 피흘려, 그 즈음 나는 성서만을 읽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내 의지(意志)에 의하여 하나님을 믿기로 결신(決信)하였던 것일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한다.

한 사람이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예정하신바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쩌랴, 갈수록 부박(浮薄)하고 경박해지는 나의 믿음.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것은 나의 착각이었나.

그러니까 나의 믿음이란 애시당초 무망(無望)한 헛된 꿈이었나.

 

2.

하느님에게서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미리 정해져 있다.

그 누구도 미리 하느님에 의해 정해지지 않으면 하느님의 구원을 받을수 없다.

예정과 선택은 하나님 일방의 뜻이고 하나님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다.

선택 받는 자의 선의지(善意志), 윤리관(倫理觀). 선행(善行), 환경(環境), 조건(條件) 따위는 하등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야말로 보끌복(福不福)이다.

 

3.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5장>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1서 4장>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에베소서 1장>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데살로니가후서 2장>

 

4.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사무엘, 에레미야, 이사야, 호세아, 다니엘, 에스더, 에스겔, 말라기, 세례요한, 예수의 제자들, 특히 바울....하나님께 헌신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하여 특별하게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다.

 

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예레미야 1장>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나니 그는 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요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시니 이스라엘이 그에게로 모이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 -이사야서 49장>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 양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아모스 7장>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갈라디아서 1장>

 

6.

가장 확신있게 예정론을 설파한 사람은 바울이다.

하나님의 예정사역에 의한 구원은 신명기적 율법(律法)이나 도덕 그 이상이다.

특히 로마서는 예정의 교의는 구속(救贖)이나 의인(義認)과 함께 그리스도 복음의 토대임을 여러 면에서 논구(論究)한 책이다.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그 사람의 율법적 행위에 있지 아니하고 순전히 하느님의 뜻에서 비롯된 은혜에 의한다는 것이다.

 

7.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함을 입었으니 -로마서 1장>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장>

 

8.

로마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도, 중세 최대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도, 종교개혁자 칼뱅도, 무교회주의자(無敎會主義者) 우찌무라 간죠도 분명하게 말한다.

<예정(豫定)은 속죄(贖罪) 부활(復活)과 함께 피할수 없는 필연적인 기독교 정신의 결론이다. 실존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이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이 바로 예정신앙(豫定信仰)이다.>

 

9.

예정신앙을 신학의 하나의 중요한 제목으로 삼은 신학자는 어거스틴이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유의지는 신이 주신 은사(恩賜)이다"

인간의 구원은 신의 은사다라는 대전제(大前提)아래, 이러한 견지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 것이다.

그는 고린도 전서에서 예정에 관한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중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함같이 자랑하느뇨. -고린도전서 4장>

그는 말한다.

"인간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 죄에 대한 대책으로 은총을 결정한게 아니다. 신은 시간 이전과 시간 밖에서 자유롭게 이 일을 결정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자비이다. 이 자비는 막연하게 인류 전체에 주어진게 아니라, 개개인에게 주어진다. 신의 영원한 목적은 각 개인에 대한 구원이었다."

"사람은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믿는다. 이 복음을 듣는 사람은 두 종류가 있다, 즉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그 이유는 어떤 사람은 주가 준비해 주셨고, 다른 어떤 사람은 주가 준비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의 자비와 심판에 의해서 구분하셨다."

"인류는 영원 전부터 두 가지 종류로 나누어진 것이다, 택함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로."

 

10.

중세의 대표적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도 예정신앙을 중요시 하였다.

그는 예정의 원인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였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와 받지 못하는 자, 두 종류로 나뉜다.

 

11.

아, 편애하시는 하나님.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성서는 기도를 권장하면서도 예정은 불변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기도가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그가 답하였다.

"예정은 기도에 의해서 촉진되지 않는다. 예정은 기도의 결과가 아니다. .그러나 예정은 제2의 원인과 자연적 원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즉 무엇이든지 그 사람을 구원으로 이끌어 가는 일이라면 그것은 예정의 질서에 속한다. 기도는 다른 선행과 함께 이 부류에 속한다. 기도는 그 사람에게 예정을 가장 분명하게 인식케 하여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도는 일종의 신앙촉진제로서, 심리적인 확신에 기여할 뿐인지.

 

12.

칼빈이야 말로 예정론의 신봉자였다.

그는 말한다.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선포된 게 아니다. 그것은 설교의 대상에 있어서 벌써 구별된다."

"또 하나는 선포된 설교가 받아 들여지는 면에 있어서도 다르다. 설교가 통하는 자와 통하지 않는 자가 있다. 그 이유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게 아니라 신의 뜻에 있기 때문이다."

칼뱅은 성서적 입장에서 예정에 관한 교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신의 영원한 칙령을 예정이라고 부른다. 신은 그것으로써 각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원하시는데 따라서 스스로 결정하셨다.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상태로 창조된 것은 아니다. 영생을 받은 자와 영벌을 받을자로 창조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생명으로 어떤 사람은 죽음으로.

사람들이 칼뱅에게 반박하였다.

그렇다면 설교의 필요가 무엇이며 전도의 의미가 어디 있는가.

칼뱅의 답.

"신의 예정의지는 너무나도 오묘해서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인간으로서는 무의미한 질문이며 인간적인 언어로서는 대답이 불가한 질문이다."

 

13.

예정론은 현대 신학자들에게도 큰 짐이라고 한다

대다수 자유주의신학자는 부정하는 쪽이지만 , 대다수 보수주의 신학자는 그것이 변경할수 없는 성서적 교훈이므로 무조건 믿어라한다

예정론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사람이 바르트였다.

그는 예정론을 4부분으로 나누어 다루었다.

그 요지(要旨)는 그리스도의 의미를 숙고하자는 것이다.

"과거 예정론의 결정적 흠결은 막연하게 신의 권능에 의해서라고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으로써 이루어진 점을 간과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에 대하여 바르트가 말한다.

"예수는 성육신 사건을 통하여 神인 동시에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되었다. 신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는 야훼신과 동일한 분이요 인간의 측면에서 보면 그는 사람과 동일하신 분이다. 즉 신의 선택에 있어서 그는 선택하시는 신인 동시에 선택된 사람이다."

바르트에 의해서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와 칼빈이 강조한 하나님의 절대적 칙령(勅令)이라던가 알수없는 비의(秘意)의 예정이라는 사상에서 벗어났다.

"영원 전에 피조 세계와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예정되었다면 그것은 다만 운명론이라는 비난을 어떻게 피할수 있을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이란 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지 않은 신은 허황된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

"신과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은 것이기 때문에 예정 역사는 매우 구체적인 사건이다."

공동체의 선택이란 제목으로 바르트는 신의백성을 계약의 대상으로 삼은 사건에 언급한다

"이 공동체 선택이 어떤 필요성에 의하거나 강요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신의 자유로운 뜻에서 하신 일이다.

이 선택은 장차 그의 창조사역 안에 인간이 있을 것을 예측하시고 그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일이다."

개인의 선택이란 제목으로 그는 세가지 특이한 선택론을 말한다.

"첫째, 그리스도가 자기의 어떤 공로로 성부로부터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순전히 은총으로써 택함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각자가 공로로써가 아니라 은총으로써 택함을 받았다. 둘째, 그리스도는 고난과 죽음을 위하여 택함을 받았다. 예수는 고난과 죽음의 이유가 없었으나 그것을 감당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신의 영원한 뜻을 성취함으로써 그에게 씌어졌던 고난과 죽음을 벗어 버렸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즉 생명으로 택함을 받은 것이다. 세째, 성부와 성자는 서로 신뢰하고 있었다. 예수는 성부를 끝까지 믿음으로써 죽음을 수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부활로 성부로부터 버림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증명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끝까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선택은 확실해 진다.

바르트는 그렇게 말함으로서 예정의교의가 복음의 총화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선포되고 들을수 있는 모든 말은 신이 사람을 택하신다는 것과 그 분이 또한 자유롭게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바르트가 강조한 바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이라는 점, 그것이다.

"그리스도와 다른 차원에서나 시간 안에서나 관계 안에서 예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존재에 동참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선택 안에서 우리가 택함을 받은 것이다."

 

 

 

-신앙 잡설-

 

<몽매(蒙昧)의 팡세> (8)

2013년 7월 31일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기독교 문답'의 '예정론'

  

1.

내가 조금이라도 그리스도를 볼 수 있고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성결(聖潔)을 마음에 느낄수 있게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기독교는 과학과 마찬가지로 첫째로 사실이 있으며 그 후에 이론이 있는 것이다.

나 자신의 실험에 의하여 <하나님의 예정(豫定)>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이 증명되었음을 말하고자 한다.

 

2.

진심으로 말하건대 나(우치무라 간조)는 착한 사람이 아니다.

세상에는 나보다 훨씬 선한 사람이 많다.

내게 무언가 선(善)한 구석이 있어서 하느님을 믿게 되었다면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마음 속에 악이 가득찼음을 나처럼 철저히 느끼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무엇을 내가 지녔기 때문에 내가 크리스찬이 된 것이 절대로 아니다.

나는 억지로 크리스찬이 된 것이다.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의 전통적인 사무라이 집안 출신)

만일 내 생애가 나의 의지와 계획대로 되었더라면 나는 결코 크리스찬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세상에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을 전파한다는 짓거리는 내가 진심으로 거부하고 회피한 일이었다. (우치무라 간조는 '성서의 연구' 발행인으로도 유명하다)

크리스찬이 된 후에도 '제발 제발 전도사만은 되지 말게 해줍시사' 하고 얼마나 기도를 하였던지.

이 사실은 내 친구들이 증인이 되어 줄 것이다.

전혀 내 선택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셨을 때, 그나마 나의 애국심이나 공의심(公義心)이 가장 왕성할 때가 아니었다.

내가 실망하고 낙담했을 때였고, 내 마음 속에서 백귀(百鬼)가 날뛸 때였다.

 

3.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전도를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이상한 사실일 것이다.

진심으로 크리스찬이 되기를 바라고 열성껏 전도한 사람은 아니되고, 유전이나 교육이나 환경이나 심지어 기독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엉뚱한 사람이 크리스찬이 된다는.

기독교의 감화력(感化力)을 주장하는 사람이 많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이 감화는 영혼의 중심에 까지 이르지 못하더라.

감화를 받는 영혼은 따로 있었다.

아, 서로 배리(背理)되는 이 의외성(意外性)을 어떻게 설명하랴.

그리하여 나는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선(善)을 행할 자유는 주셨지만 영혼을 살리는 일 만은 당신의 손에 보유(保有)해 두신걸로 확신한다.

이 확신은 나 자신의 '사실의 실험'에 의하여 얻은 것이다.

성서를 보라.

<나자렛에서 무슨 선한 자가 날 수 있느냐,>

그리스도 자신도 환경(環境)의 아들이 아니었다.

열두제자를 보라. 모두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었다.

바울을 보라.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하신 바가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그의 회심(回心)을 어떻게 이해할수 있는가.

 

4.

로마 천주교에는 수많은 유식한 신학박사(神學博士)들이 있었지만, 복음(福音)을 초대(初代)의 순결(純潔)로 돌아가게 한 사람은 광부의 아들 '루터'였다.

단상(壇上) 하나 갖지 못한 '존 웨슬레'가 근세 종교적 신기원을 열지 않았나.

느끼건대 오히려 교회를 천시(賤視)하고 신학교를 경시(輕視)하는 하나님이시다.

확언(確言)하는바 하나님은 교회나 신학교를 중요한 예정사역(豫定使役)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셨다.

요즘도 신학교에서는 가장 순수한 기독교가 나오지 않는다

‘무디’나 ‘헨리 드라민드’처럼 신학자도 아니고 목사도 아닌 자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자였다.

(아시다시피 우치무라 간조는 무교회주의의 창시자)

'올리버 크롬웰'을 들어 보라.

“나는 안다. 나는 어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아, 나는 어둠 속에서 어둠을 사랑하고 빛을 미워했다.나는 큰 죄인이다. 그렇다. 죄인의 괴수이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나는 성스러운 것을 미워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나를 돌보셨다. 아, 하나님의 은혜는 얼마나 큰지. 바라건대 나를 위해 하나님을 찬미하여라. 나를 위해 기도해 다오. 내 안에서 사업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날에 이것을 완성하시기를! -'크롬웰'이 그의 사촌 여동생 '센트 존' 부인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 카아라일 저 '크롭웰전' 중에서-”

 

5.

당연히 예정설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때부터 제기된 의문이 있다.

"예정이 진리라면 인간은 자기의 구원에 대하여는 속수무책이 아닌가."

이미 구원받을 자와 멸망되어질 자로 구분되어 있는데 무어하러 괴로워 할 것이며 무어하러 몸부림 칠 것인가.

복불복(福不福)의 운명(運命)이 아닌가.

"편애(偏愛)로 피조물을 구분하여 결정하신 분을 어찌 공평(公平)과 공의(公義)의 하나님으로 부를수 있으랴."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의 반박이다.

창조(創造)와 피조(被造)의 속성(屬性)을 곰곰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그 뜻을 누가 대적하느뇨.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이 없겠느냐 -로마서 9장>

공평(公平)과 공의(公義)를 들어 하나님을 힐문(詰問)하는겐가.

생각해 보라.

하나님을 탓하려면 자연(自然)도 탓해야 하지 않는가.

자연이란 얼마나 불공평한 것인가.

사자(師子)는 동물의 왕으로 포식자이고 양이나 사슴은 그들의 배를 불려주는 먹이감이다.

누구는 모두 돌아보는 미인(美人)으로 누구는 얼굴을 돌려버리는 추녀(醜女)로, 누구는 띵까띵까 부자집 자식으로 누구는 지지리궁상 가난뱅이로 태어난다.

뱀은 어째서 미움받고 비둘기는 왜 사랑받는 존재인가.

자연에 충만(充滿)한 그 이치를, 그 이유를 당신은 아는가?

아, 피조물(被造物)로서는 '모른다'고 말할 수 밖에는 없다.

"그와 같은 이치는 우리가 알 바 아니다. 자연이 그렇게 되어 있다는걸 알 뿐이지 그 밖의 원인과 이유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6.

그렇다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선택받은 자들은 무조건적으로 행복을 쟁취한 자들로 여기려는가.

그들의 풍모(風貌)는 고아(高雅)하며 삐까번쩍 황금 옷을 걸치는 줄 아는가.

아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서 53장>

그들의 신고(辛苦)는 보통사람이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검(劒), 교회에서의 추방, 부모형제로 부터의 소외와 모욕, 친구로부터 위선자로 매도.., 그 밖에 말 못할 고통이 그들을 엄습한다.

그 비통과 굴욕을 참고 견뎌야 하는 자들이 바로 선택된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는 고통이 주어진 자들인 것이다.

고통은 현세(現世)에서 먼저 맞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광(榮光)은 미지(未知)의 영역에서 나중에 맞는다.

예수께서 부르짖으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하실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우리같은 작은 자들임에랴.

우리는 예정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기독교 신자의 특권을 포기하려 기도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豫定)이 먼저 알려진다면 하나님의 예정에 속한 자들은 그 예정에 동참(同參)하지 않게 되기를 간절하게 기도할 것이다.

 

7.

또 반박 할 것이다.

예정이 진리(眞理)라면 기독교란 얼마나 허무한 종교인가.

하나님이 점지한 자가 따로 있는데 복음을 전파한다는 건 또 얼마나 허망한 노릇인가.

전도(傳道)를 하나 안하나, 심지어는 예수를 믿으나 믿지 않으나 하나님이 점지한 자는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는데 전도할 필요가 어디에 있단 말가.

그러나 전도(傳道)라는 건 세상에서 알고있는 그런게 아니다

나는 지자(智者)요 너는 우자(愚者)이기 때문에 전도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몽매(蒙昧)함을 깨우쳐 준다는 교만(驕慢)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전도가 아니다.

또한 나는 구원받고 너는 타락했기 때문에 나는 너를 거두어준다는 교만한 자비심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요컨대 기독교의 전도는 인간을 목적으로 하는 전도가 아니다.

세상의 교사(敎師)의 입장으로 전도에 임하는게 아니다,

 

8.

다음을 아는게 전도 성공의 첫째 요건이다

첫째, 전도는 하나의 고백(告白)이라는 점이다

전도는 '네 죄가 이러저러하니 네 죄를 회개하라'는 게 아니다.

'나도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이러저러하게 될수 있었다, 나는 당신에게 이것을 알리려고 한다,'는 자세.

바로 그것이다.

즉 훈계적(訓戒的)이 아니라 발표적(發表的)인 것이다

바울의 서신(書信)을 읽어보라.

바울은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을 표본(標本)으로 하여 세상에 자신의 고백(告白)을 들려 줄 뿐이다.

기독교는 이론이 아니라 실험이다,

신학연구(神學硏究)는 아무리 그 오의(奧義)에 도달하였다 하더라도 기독교의 전도사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세상에 보여줄 심령적실험(心靈的實驗)을 갖지 못한 사람은 전도사가 되어서는 안된다.

둘째, 전도는 감사(感謝)의 제사(祭祀)이다.

세상의 죄악에 분노하여 전도에 나서는게 아니다.

분노해야 할 것은 오로지 자기자신의 죄에 대해서다.

또한 다른 사람의 타락을 가엾게 여겨 구원사업(救援事業)을 하는 것도 아니다

가엾게 여겨야 할 것은 죄인의 괴수인 자기자신인데 누구를 가엾게 여긴다는 말인가.

전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격려(激勵)되고 고무(鼓舞)된 자기자신의 표출(表出)이다.

아무리 침묵을 지키려해도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그 기쁨으로 안절부절 못하기 때문이다.

젖먹이가 옹알이 하듯, 하나님이 내 입을 열기 때문이다.

의무에 강요(强要)되어 종사(從事)하는 전도는 전도가 아니다.

마음 속에서 역사(役事)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자극되어 자발적으로 착수(着手)하는 사업이 전도이다.

기독교 전도는 의무가 아니라 특전(特典)인 것이다.

쾌락이고 도락이다.

이와 같은 환희(歡喜)가 없는 전도는 반드시 실패하고 만다

예정신앙(豫定信仰), 그것은 전도에 방해가 되기는 커녕 전도의 정신을 더욱 북돋아 준다.

예정은 인간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관념(義務觀念)을 크게 늘여주는 것이다.

예정신앙은 그 어떤 박해(迫害)도 모진 굶주림도 견딜수 있는 힘이다

전도란 혹여 이기적 애국심의 변형된 모습이 아닌가하고 묻는다면.

아니다.

'리빙스턴'은 그의 애국심에 격려되어 영국에게 새 영토를 얻으려고 아프리카 전도한 게 아니다.

모라비아의 선교사는 애국심에 격려되어 그린랜드의 빙산 속 에스키모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다.

애국심은 분명 강대한 힘임에는 틀림없다,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을 사랑하고 걱정한 진정한 애국자였다)

그러나 애국심을 전도의 정신으로 삼기에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사회개량의 수단으로서의 전도는 어떠할까. (기독교는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침탈의 첨병이기도 하였지만 근대 건전한 산업사회의 자본주의 정착에도 지대한 기여가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회개량과 진보에 있어서 기독교적 전도가 가장 큰 힘이 된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크리스찬은 사회개량을 목적으로 전도에 종사할수는 없다

사회개량 되건말건 그게 크리스찬의 힘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

오직 그것만이 전도자를 지배하는 유일한 힘이다.

 

9.

거듭 묻는 택함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가 애시당초 확정되어져 있는데, 전도할 보람은 어디 있단 말가.

복음 전파의 목적은 크리스찬을 만들기 위한게 아니라, 크리스찬을 찾기 위한 것이다. (예정된 자를)

경험많은 크리스찬은 이 사실을 뻐저리게 느낄 것이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2장>

예정된 자가 드러나는 것, 이것이 전도에 성공하는 표징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일렀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려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요한복음 4장>

씨는 이미 하나님이 에정에 의하여 뿌리신 것.

복음을 전하는 자는 하나님이 씨를 뿌린 밭에서 여문 곡식을 추수하러 갈 뿐이다.

 

10.

숙고(熟考)하라, 너 삐딱한 자여.

하나님의 예정(豫定)과 선택(選擇).

숙명적(宿命的) 결정론(決定論)으로 인식하여 회의하거나 도피하지 말 것.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고 있다는 실존적 자아의식, 인식의 리얼리즘이 되도록 할 것.

벌을 주거나 멸망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의 자비와 사랑에 의해서 구원하려는 은총의 역사(役事).

은총을 느낄 것.

나의 신앙고백(信仰告白)이 되도록.

그래, 기도 할 것.

 

11.

아아, 나의 팡세는 천비(賤婢)한 지식과 척박한 사유(思惟)로 힘들어하며 헐떡인다.

 

12.

언필칭 팡세라니, 몽매가 백치(白痴)에 이르렀다.

주여, 도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