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김영하 1.2.3 (1,4,3,3,1)

카지모도 2020. 7. 17. 21:02
728x90

-독서 리뷰-

 

<바람이 분다>

-김영하 作-

 

***동우***

2013.01.16 06:32

 

밀폐된 공간.

그에게 컴퓨터의 ‘윈도우’는 그야말로 들창이다.

그는 ‘그 윈도우로 세상을 엿보고 세상도 그 창으로 그의 삶을 훔쳐본다.’

오로지 그곳으로 부터만 빛이 들어오고 소리가 들린다.

 

<밤도 없고 낮도 없다. 신도시 아파트 단지들 사이 식객처럼 자리 잡은 단독주택지구의 한 상가의 지하에서 사는 나에게는 밤도 없고 낮도 없다. 직장이면서 집인 이 습한 공간까지 기어들어 오는 빛은 없다. 아니 처음에는 있었으나 막아버렸다. 영화 포스타보다 조금 큰 들창 그 빛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 빛과 소리는 아무 것과도 인과(因果)없이 단절된, 소통(疏通)이 거부된 빛이고 소리다.

과거와도 미래와도. 그리고 외부(外部)와도.

 

의 추억 따위를 읊조리는 인간들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LP의 음은 따뜻했다고, 바늘이 먼지를 긁을 때마다 내는 잡음이 정겨웠다고 말하는 인간들 말이다. 그런 이들은 잡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잡음에 묻어 있을 자신의 추억을 사랑하는 것이고, 추억을 사랑하는 자들은 추억이 없는 자들에 대해 폭력적이다.>

 

무언가 거대담론에 의하여 굴러가는 듯한 세상.

멀리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파악하여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굴러가는 것일게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위험하고 무섭다.

그 사람은 이 세상에는 익명으로 살고자 한다.

자신이 세상을 익명으로서 의식하듯이.

 

그리하여 스스로 은둔폐쇄적(隱遁閉鎖的)인 삶을 선택한다.

이를테면 그들이 바로 ‘히키코모리’일 터.

히키코모리들은 이 세상으로부터 자신은 슬쩍 비켜있을 뿐이라고 스스로 위무한다.

 

그리고 그런 삶을 영위함으로서 그의 세상은 그저 평화롭기만 한 것이다.

 

<꿈꾸는 일을 위해 석 달을 하루같이 뭔가를 할 수 있는 그가 경이로웠다. 나였다면 단 일 주일도 힘들었을 것이다. 세상은 그런 사람들 때문에 굴러간다. 지금까지 나는 그런 세상에서 슬쩍 비켜서 있었다. 달려오는 사람을 피하듯이 몸을 살짝 비틀었을 뿐이다. 그런 자세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평화롭기만 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밀폐된 공간에 낯선 이질의 것이 틈입(闖入)하였다.

사이버에 침잠하여 헐떡이는 마스터베이션의 삶에, 펄떡이는 리얼리즘의 신선한 바람 한줄기가.

 

<그 평화로운 세상으로 그녀가 달려와 슬쩍 비켜설 틈도 없이 내게 충돌해버렸다. 뒤로 나동그라지면서 아주 많은 생각을 했다. 다 쓰잘데 없는.>

 

그는 그 바람을 이제 쫓아낼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폐쇄된 공간에는 늘 바깥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익명의 기호가 아니었다.

익명이 아니라는 것은 한 인간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녀와 소시민적 일상을 즐기고 그녀와의 여행을 꿈꾼다.

 

<그녀가 퇴근하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우리는 함께 장을 보기도 했고 비디오를 빌려 오기도 했다. 소시민적인 일상이 예고 없이 내게 찾아왔다.>

 

<그 날 밤도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내 몸 위에 올라앉은 그녀가 다시 나를 채근했다. 그녀의 허벅지가 내 허리를 조였고, 더없이 안온했다. 함께 떠나고 싶어요. 한번 떠나면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수 없는 그런 여행을 하고 싶어요. 남미와 로키와 케냐, 그리고 이집트를 가는 거예요. 네팔에선 트래킹도 하고 치앙마이에선 코끼리를 타고 밀림을 누비는 거예요. CD복제 따위는 잊어버리구 말이에요. 비행기 값을 빼고 오백만 원이면 육 개월쯤은 넉넉히 돌 수 있대요. 천만 원만 있으면 일 년은 문제 없구요. 나도 돈이 있어요. 월세 보증금을 빼면 되거든요. 나는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통신망을 돌아다니며 부지런히 광고를 올리고 아침이 되면 지웠다.>

 

그러나 무섭다.

폐쇄공간에 부는 그 바람이 무섭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그 ‘바람’ 때문에 킬리만자로의 정상까지 올라가 그곳에서 얼어 죽고 말았는데.

 

<그러다 문득 나는 이 어둡고 침침한 공간을 돌아보게 되었다. 빛도 낮도 밤도 없는 이 공간. 떠난다는 일이 처음으로 두려워졌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왜 눈 덮인 정상에서 얼어 죽었는가, 나는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킬리만자로를 오르기 위해 석 달 동안 새벽 신문을 돌린 남자와 나는 무엇이 다른가. 다리 불구의 비둘기들이 청계 고가 아래에 살고 있다던데. 왜들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걸까. 그러나 그런 돌아봄은 잠깐이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일에 열중했다. 이미 미세한 균열이 내 삶을 흔들어 놓았고 나는 떠난다는 것말고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모종의 사건으로 여자는 오지 않는다. (여자는 거짓투성이였다)

아아, 이 공간의 바람을 이제 어쩌란 말인가.

 

<우리, 다음 주에 떠나요.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요. 테이프에 음악을 녹음하고 있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곡들로만 가려서 말이에요. 러시아에 가면 카자흐 노래를 가르쳐 드릴게요. 남자가 부르면 훨씬 멋지거든요. 그곳에 계속 계신다면 찾아갈게요. 이젠 정말로 떠나는 거예요.>

 

<나도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사무실은 빠졌고 보증금도 돌려받을 예정이다. 남은 집기를 모두 팔아치웠고 비행기도 예약해 두었다. 하지만 그녀가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나는 무연히 게임을, 또 게임을 하고 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빛도, 낮도, 밤도 없는 이 지하실에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게임을 한다. 게임을 한다. 게임이 한다. 게임을 한다. 그녀가 오지 않는다.>

 

<사방이 꽉 막힌 이 지하실로 어디에서 이렇게도 바람이 불어오는 걸까.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한 여자를 기다리고 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분다.>

 

이 소설을 읽고 내 생각은 엉뚱한 방향으로 난만하여 진다.

 

은둔폐쇄의 삶으로 숨어 든 히키코모리.

무엇이 그들의 의식을 압도하여 무엇이 두려워 그러는겐가.

자본주의인가, 민주주의인가. 전체주의인가. 사회구조적 시스템인가. 미래인가, 디지털 트렌드인가. 어쩌면 젊음의 중압감인가.

 

소통을 거부하는 그 요인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왕따였을까 소외감이었을까 어떤 트라우마때문이었을까.

 

아, 이에 관하여 ‘사회심리학적 천착’은 여러모로 모색되고 있을 터이다.

 

생각은 또 비약하여 곁가지를 친다.

 

히키코모리는 오로지 부정적으로만 어프로치 해야 하는 대상일까.

‘인생에 무슨 욕심이 꼭 있어야 하는가’ ‘젊음에 야망이 없으면 아니되는가’하는 ‘안경’처럼 ‘무위로운 삶’이라는 덕목으로서의 어프로치는 웃기는 짬뽕일까.

 

‘이상의 날개’를 타고 생각은 또 비약한다.

‘날개’의 주인공.

그는 굉장한 속도로 우주를 질주하는 지구를 생각하면 현기증이 나서 지구로부터 내리고 싶다고 소리쳤다.

그도 역시 인간사회가 스스러웠고 생활이라는게 서먹서먹하였다.

볕이 안드는 골방에 파묻혀 돋보기로 지리가미를 끄실리는 유희나 거울놀이 같은 것에 키득거리면서 즐거워 하였다.

그는 ‘비범한 발육을 회고하여 세상을 보는 안목을 규정’하고 스스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가 된 것일꺼나

피로와 권태.

그리고 절망.

몸을 파는 아내의 방 뒷 칸 그의 골방.

‘히키코모리’가 아닌 그의 골방에도 바람이 불었다.

그는 그 바람에 실려 날개를 펴고 싶었다.

“날개야 돋아라.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다시 엉뚱한 비약으로 노인의 의식을 한번 들여다 보려한다.

노인은 늙어 갈수록 ‘히키코모리’가 된다.

오로지 자기자신에 침잠하려 한다.

소외나 억압이나 절망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멀지 않은 죽음에 압도 당하여 그러는 것이다.

 

아아, 죽음이야말로 바로 '바람'이고 '날개'가 아닐런가.

 

단편 하나 읽고서리 엉뚱한... 객쩍은 소리 주절거렸다. ㅎ

 

***eunbee***

2013.01.16 10:38

 

내게는 참으로 매력적인 소설을 읽었습니다.

눈 내리는 아침에.....

 

그리고 그아래 동우님 글.

 

요며칠새 나는 '히키코모리'가 되어가고 있는 자신을 의식하고서는

무서움에 걱정 만발이었다는 것을 고백함.ㅠㅠ

 

좋은 하루 되세요. 동우님!

 

***동우***

2013.01.17 04:52

 

하하, '히키코모리'는 아무나 되는게 아니랍니다.

도무지 은비님께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

 

한번 스스로 상상을 해 보시우.

세상과 연을 끊은채 낮밤없이 골방에 틀어박혀 자기만의 무언가에 파묻힌채 동일한 의식을 반추하는 일상...

 

여기는 그토록 인색한 눈.

북녘에는 참 푸지게도 내렸어라.

 

분당에 내리는 눈.

은비님의 눈(眼)은 몽환적 동화적인 눈(雪)으로 금새 치환할수 있을껄.

샤갈의마을에 내리는 눈으로.

 

좋은 하루. 은비님.

난 영화관 예약한 '레미제라블' 본다우. 오늘.

걸 기대!

 

***teapot***

2013.01.17 07:19

 

"히키코모리" 라는 말의 뜻을 구글에서 찿아보고 왔읍니다.

히키코모리 라는 단어를 요새 한국사는 사람들은 다 아는 단어입니까?

영어도 한국말도 다 못하게 돼서 걱정입니다.

 

***동우***

2013.01.19 06:03

 

티팟님.

'히키코모리'는 근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어휘랍니다.

전에는 '오타쿠'라고 하였지요.

 

둘 다 홀로 집안에 틀어박혀 좁은 자신의 세계에 골몰하는 사람들을 가르키는 일본 말인데.

'오타쿠'는 그래도 '히키코모리'에 비하여 긍정적인 면이 있는 호칭이지요.

자신이 몰두하는 취향을 같은 취향의 사람들끼리 공유한다는.

그래서 일본의 '오타쿠'는 아주 사소한 것에 전문적인 기여를 하기도 한다지요.

이를테면 이쑤시개에 기막힌 조각을 한다던가...

일본문화에 어떤 저력으로서 작용하는 바도 있을겁니다.

 

그런데 '히키코모리'는 그야말로 외톨이.

작금에 인터넷의 발달로 이런 성향의 사람들이 늘어간다지요.

그리하여 이들에게는 반사회적 성향의 사람들도 있는 모양입니다.

사이코패스 같은...

얼마전 미국 총기 난사의 범인도 이런 성향의 사람이었다지요.

 

그래서 고독한 칩거자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연구도 활발한 모양이에요.

 

하하, 티팟님.

'히키코모리'와 같은 어휘를 한국사람이라고 다 알고 있겠어요 어디?

좀 관심있는 사람들이나 알아 듣겠지요.

 

글로 접하는 티팟님의 한국어 추호도 이상없습니닷!!

 

 

 

 

-독서 리뷰- 

 

<베를 가르다>

-김영하 作-

 

***동우***

2013.08.26 05:15 

김영하(1968~ )의 '베를 가르다'

 

[차에 시동을 걸면서 뒤를 돌아다본다. 수락산의 그림자가 깊다. 어디선가 오르골 소리가 들려온다. 홍학들이 떼지어 사막을 횡단하고 있다. 뒤늦게 태어난 홍학 새끼들이 저마다 발에 소금 족쇄를 차고 그들의 뒤를 따라 염전 속을 걸어간다. 한없이 가벼워져 작두날 위에서 춤추는 수연과 역시 무한히 가볍게 생애 마지막 춤을 추어버린 옆방 여자와 한없이 무거운 다리를 지닌 홍학떼 들이 사막 속에서 어울려 논다. 여전히 나는 그들의 발을 씻어주고 싶을 따름이다. 그뿐이다.]

 

'무녀리 홍학'과 '무당이 된 대학동창'과 '발레리나를 환상하다 자살하는 여인'

이 3개를 아우르는 연결고리는 무엇인가.

 

엇갈린 꿈과 욕망일까.

버림받거나 간직하고 있는 소망, 자신의 이야기로 소통될수 없는 관계나 시간에 관한 허무함을 말함일까.

시대이거나 현실이거나, 이미 절여져 족쇄가 되어버린(새끼 홍학처럼) 우리 삶의 참을수 없는 가벼움이거나 무거움을 은유함일까.

이를테면 그건 실존의 업(業)인가.

발을 씻어준다..족쇄에 입맞춘다..

주인공은 무엇에 연민하는겐가.

 

문학적 모호함.

내가 알수없는 무언가 있겠지만, 논리거나 철학으로서의 이해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인생이 그러하듯.

 

'베를 가르다'

아름답게 쓸쓸하게 불쌍하게 혹은 슬프게 내 감성의 베를 가르는구나.

 

신문에 실린 사진으로 발레리나(강수진)의 발을 본 적이 있다.

생강처럼 울퉁불퉁 혹투성이 못생긴 발. 발레리나의 業이다.

아름다워 그 발에 입맞추고 싶었다.

오래 전, 잡지('샘이 깊은 물'이었던가)에서 소설가 박경리선생의 손을 본 적이 있다.

밭에서 노동하는 손, 글을 쓰는 손.

그 손 역시 입 맞추고 싶도록 아름답게 슬펐다.

 

오래 전 티브이에서, 춤꾼 이애주 교수가 대학생들의 어떤 이념적 모임의 야외현장에서 하이얀 소복을 입고 추는 춤사위를 보았다.

이념은 커녕 내게는 다만, 그 에로티시즘에 숨이 막혔다.

 

***유리알 유희***

2013.08.26 11:51 

오래 전 읽은 소설을 이곳에서 만나는군요.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어 님의 독후감을 봅니다.

공감합니다.

진솔하고도 오의깊은 평에 저는 숨이 막힙니다.

 

이상헌님을 기억합니다.

 

***동우***

2013.08.27 05:11

정말 반가워요, 유리알 유희님.

못 난 글.

작가님께서 공감하여 주신다니 한편으로 부끄럽지만, 영광입니다.

 

아까 유리알유희님댁 들러 잠시 산책하였더랩니다.

<숨이 막히는> 글들, 작품들.

 

이제 그 곳.

내 노닐며 흡향(吸香)하는 숲이 될터입니다. ㅎ

 

***eunbee***

2013.08.26 21:58

날아오르려는 의지들.

땅에 발을 둔 것들의 슬픔인지.

'나'는 어찌하여 그리도 발에다 입맞추고 싶은 건지..ㅋ

 

그보다도, 김영하님이 카페 퓨어, 베르니니의 조각, 칼라하리 사막의 홍학들...을 가져다 두었거나

발레리나, 지젤, 누레예프, 작두타는 무희...를 등장시킨 이야기전개에 슬몃 웃었어요. 왜 웃음이 나는지...ㅎ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서 동우님의 뒷글이 더 가슴에 새겨지네요. 제게는....

 

'버림받거나 간직하고 있는 소망, 자신의 이야기로 소통될수 없는 관계나 시간에 관한 허무함을 말함일까'

작금의 제 맘을 옮겨 놓으신거 같아요.ㅎ

 

발레슈즈에는 발을 옭아매고 피나게하고 뭉그러뜨리는(많이 착용해야 그리되지만)토슈즈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건 무용하는 사람에겐 얼마나 다행인지요. 낭만발레나 고전발레에서 고집하는 토슈즈. 정말 힘들지요.

 

***동우***

2013.08.27 05:22 

(베르니니의 조각은 모르겠으되) 발레리나..지젤..누레예프는 은비님 색감의 어휘들입니다. ㅎ

 

발레슈즈가 죄 토슈즈를 말하는게 아니로군요.

어느 장르에서나 고전주의는 엄격하고 까탈스런 영감님인가 보아요.

 

홍신자입니까?

맨발로 춤추는 자유로움, 그러나 그 몸사위는 난해합디다만.ㅎ.

 

춤추는 자의 발.

외다리 발레리노(중국인)를 본적 있지만, 춤의 기본언어는 곧 발의 언어가 아니겠는지요.

무대, 혹은 클루즈의 홀에서 춤추는 은비님은 멋져요. 하하 상상속 그림.

 

***eunbee***

2013.08.29 09:30

홍신자. 자유를 위한 변명인가하는 의 엣세이집을 80년대 읽었던 기억.

늦깎이 무용인. 안성의 웃는돌 행사에 단짝 친구랑 한번 가봤던 기억.

90년대 어느날 과천 현대미술관에서 있었던 홍신자의 짧은 공연(전시회장 한켠 공간에서)에 관객으로 갔다가 조선일보 문화부기자에게 인터뷰이로 찜당해서, 공연에 대한 내 소감이 조선일보 한귀퉁이에 실렸던 기억.

스쳐지나간 이야기들이네요.

 

***teapot***

2013.08.29 02:41

'이념은 커녕 내게는 다만, 그 에로티시즘에 숨이 막혔다' ~ 전적으로 동감합니당!!

 

***동우***

2013.08.29 06:07

하하, 티팟님.

나는 온몸을 여민 여성 한복에서 섹시함을 그닥 발견하지 못합니다만, 하이얀 소복(喪服이거나)에서는 진한 에로티시즘을 느낀답니다.

소복을 입고 처연한 춤사위의 춤에서는 더욱.

내가 좀 이상한가?ㅎ

 

***teapot***

2013.08.29 06:22 

이상한게 아니고 무언가 아시는 것 같은데요? 호호호호

 

 

 

 

 

-독서 리뷰- 

 

[[김영하]] -3-

<오ᄈᆞ가 돌아왔다> <손> <고압선>  

 

 

<오빠가 돌아왔다>

-김영하 作-

 

***동우***

2016.04.06 04:32

'김영하'(1968 ~ )의 '오빠가 돌아왔다'

참 재미있는 소설입니다만, 혹여 좀 불편할런지도..

가히 엽기라 할만한 가족이므로.

 

딸과 여동생의 교복과 팬티를 훔쳐 성적 패티시즘에 헐떡거리는 아비와 오래비라는 작자.

미성년 여자아이를 집으로 끌고 와 동거하고, 제 아버지를 주먹으로 때려눕히고 집안을 장악하는 자식놈의 패륜 짓거리.

 

<오빠는 열여섯까지 아빠한테 죽도록 맞고 자랐다. 아빠가 오빠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함께 사는 것만도 다행이다. 아빠는 실컷 두들겨패고도 분이 풀리지 않으면 오빠를 홀딱 벗겨 집 밖에 세워놓기를 좋아했다. 그러고는 깡소주에 취해 세워놓은 것도 잊어버리고 고꾸라져 잠들기가 일쑤였다. 옷가지를 챙겨 밖으로 나가보면 팬티만 입은 오빠가 오들오들 떨며 아빠를 욕하고 있었다. 개새끼, 씨발새끼, 좆같은 새끼. 내가 가만두나봐라. 그 예언은 열여섯이 되자 현실이 되었다. 오빠는 술에 취해 달려드는 아빠를 주먹으로 때려눕히고는 줄넘기 줄로 꽁꽁 묶어놓고 집을 나갔다.>

 

어머니란 여편네의 말뽄새.

<도대체 아빠는 왜 오빠와 나를 낳았을까. 아니 이 질문은 엄마에게 던져야 되지 않을까? 아니 어쩌자고 나와 오빠를 낳아 이렇게 무책임하게 내팽개쳐두는 거예요? 며칠 전 나는 생각난 김에 엄마가 경영하는 함바집으로 찾아가 질문을 던졌다. 대답 대신 국자가 날아왔다. “시끄러, 이년아. 개시부터 재수 없이. 낳아준 것만도 고마운 줄 알고 잘 살어. 네년 낳느라고 밑이 다 빠질 뻔했는데 이년이 이제 와서 뭐, 왜 낳았냐고? 니 그 잘난 애비한테 가서 물어봐라. 그 인간 말종, 개 같은 자식한테.”>

 

열네살 짜리 딸년은 또 어떻구요?

<저 아빠라는 인간은 똥개보다도 지능지수가 낮은 게 아닐까 가끔 의심스럽다..... 아빠는 그대로 집까지 실려와 문짝이 부서진 자기 방에 부려졌다.... “너 어디 안 놀러 가니?” “이 밤중에 어딜 놀러 간단 말이에요?” “그럼 엄마더러 내 방으로 좀 건너오라고 할래?” “말해봤자야.” “말이나 좀 해봐.” 엄마에게 말을 전하자 엄마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텔레비전 볼륨을 높였다. “안 가볼 거야? 아빠도 나름대로 오래 굶었어.” 당장 꿀밤이 날아왔다. “어린 년이 어떻게 못 하는 말이 없어.” “사실인데 뭘.”>

 

그런데 말입니다.

형편없는 막장의 콩가루 집안임은 분명한데, 그 기저(基底)가 마냥 허무하거나 냉소적인 것은 아닙니다.

작가의 위악적(僞惡的) 테크닉일까요?

상식적 비윤리성을 걷어내고 보면 어딘가 긍정적이고 따뜻한 것들이 만져집니다.

쳔명관의 장편 '고령화 가족'도 오버랩되는군요.

 

가족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근데 그걸 획일적으로 규정할수 없는, 매우 개별적인 것일듯 합니다.

사랑의 근거이면서 트라우마의 근원이기도 한.

 

모듬살이의 최소단위인 혈거족(穴居族), 꼭 핏줄로만 이루어지라는 법도 없을겝니다.

영화 '가족의 탄생'이 떠오릅니다.

 

***다나***

2016.04.08 16:30

재미있게 읽었어요..^^*

 

요즘 출퇴근 지하철에서 김원일의 소설집 <비단길>을 읽고 있습니다.

네 해를 같이 살다 북으로 간 남편이 남긴 비녀를 꽂고 60년 수절하는 팔순의 노모와 남북이산가족 상봉으로 만나게된 아버지..

그 앞에서 음식도 깨작거리며 말도 제대로 못하던 어머니가 만남을 뒤로하고 돌아가는 버스에 올라서는

"조석으로 따뜻한 밥 대접하며 같이 보내고 싶다 제발 나를 데려가 주라"며 두 팔 휘저으며 미친 듯 울부짖으며 헤어진 뒤로 시름시름 앓다가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아들인 자신을 붙잡고 아버지인듯

"이 길로 임자 따라나서서 쌀밥에 고기반찬으로 모시고 살고싶다"며 애원하더라는 마지막 글에서 눈이 조금 뜨거워졌더랬어요. 오늘 아침에..

 

어머니의 모습이 참 달라요..

아침의 어머니의 모습이 지고지순한 지어미라면 지금 대면한 어머니는 참 씩씩한 여장부 입니다..ㅋㅋ

 

***동우***

2016.04.11 04:46

다나님 어디 다녀오느라 답글이 늦습니다.

김원일의 비단길.

처음 듣는 소설입니다만, 반백년 넘어 상봉한 가시버시.

조석으로 따뜻한 밥 대접하며 같이 보내고 싶다 제발 나를 데려가 주라"며 두 팔 휘저으며 미친 듯 울부짖는 늙은 아내짜리.

으흠, 부부의 연이 무엇이관대..

생각건대 그건 情이 아니라 恨이겠지요. ㅎ

 

 

 <손>

-김영하 作-

 

***동우***

2017.11.20 07:13

김영하의 '손'

 

<당신의 그 연극이 막을 내리던 날, 비로소 당신의 남편이 될 사람을 만나고야 말았습니다.>

反轉, 뜻밖인가요?

 

fetishism

후미코의 발처럼, 이 소설을 관능소설로 읽어도 좋으리다.

레즈비언.

거미여인의 키스처럼, 퀴어(qeer)소설로 읽어도 좋으리다.

 

손.

어떤 때, 그윽한 눈의 표정보다 두 손 맛잡아 애절한 손의 표정이 더 절실합니다.

어떤 때, 美人의 홍순옥치(紅脣玉齒)보다 뱅어같은 손이 더 농염하여 섹시합니다.

어떤 때, 구리빛 피부에 번들거리는 땀보다 불끈 움켜진 손의 굴곡이 더 건강합니다.

어떤 때, 노동으로 늙은 주름살보다 앙상하게 드러난 손의 뼈마디가 더 애잔합니다.

 

푸치니의 손 (그대의 찬 손), 로댕의 손 (성당, 비밀).

아스케나지의 손, 정경화의 손, 고흐의 손, 박경리의 손...눈먼 자의 손, 쟁기 잡은 손. 빼앗는 손, 뻬앗기는 손. 때리는 손. 긁어 모으는 손, 움켜쥔 손, 끌어 안는 손,

 

얼굴은 물론 몸뚱이 여기저기 성기까지 성형한다는 시속(時俗)이지만, 손을 성형한다는 얘기는 들어본적 없습니다.

손의 표정은 진실합니다.

손은 삶의 메타포이고 예술의 메타포입니다.

어쩌면 존재의 메타포입니다.

 

정신과 교호하는 코이터스.

육체에 담긴 형이상학적 개념들.

 

손에 관한 사유, 말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으리이다.

 

 

<고압선>

-김영하 作-

 

***동우***

2017.06.19 04:25

내 블로그는 김영하에게 원한이 좀 있습니다.하

1년전인가. 그의 소설 '오빠가 돌아왔다'를 올렸다가 10년 훨씬 넘게 운용해 오던 블로그를 폐쇄 당하는 치명적인 징벌을 받았었지요.

그에 앞서 Reading Book의 저작권 침해로 daum으로부터 몇번의 경고와 벌칙은 있었지만 말입니다.

10여년의 연조(年條)에 비할바 아닌지라, 새 블로그의 독자는 그 덕에 반의 반의 반토막으로 줄어버렸습니다그려. ㅎ

겁이 나, 이 소설도 모레쯤 삭제하겠습니다. (물론 '리딩북'으로 옮겨놓고)

 

김영하(1968~ )의 고압선,

여자를 사랑하였다가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사나이.

'마르셀 에메' 류의 환상소설(분신술의 '사빈느'나 벽을 관통하는 '뒤티유욀')의 분위기는 아닌데.

고압선이라는 제목, 찌릇찌릇 강한 전류가 흐르는 사랑의 거시기함을 말하는 겐지.

 

사랑하면 사라진다... 무슨 의미일까요.

사랑의 감정을 가졌다가는 현대사회로부터 소외되고 만다... 뭐 그런 의미쯤 되는걸까요.

 

도회의 직장 언저리에 빌붙어 아등바등 살아가는 소시민의 삶.

어머니 사이에 끼어 마누라와의 섹스마저 지리멸렬합니다.

안팎으로 볶이는, 불안하고 진부한 직장과 가정생활.

직장인의 임포텐스는 한때 사회적 담론이 된적도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동경하였던 여동창생과의 조우, 그는 한껏 발기합니다.

여자를 열망하고 질펀한 섹스를 향유하여, 추락한 남성의 존재가치는 이제 회복하였나요?

 

그러나 그 반대급부는 점점 투명인간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세상의 눈으로 볼수 없는.

 

<하루를 보냈다. 아무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고 말 걸지 않았다. 그런 날들이 계속, 계속되었다. 바로 오늘까지.>

 

현대인의 소외과정,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리 잠자'...

겹처 떠올라 좀 우울합니다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