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모리 교수의 마지막 수업>
-모리 슈워츠 作-
***동우***
2015.10.24 04:35
'모리 교수의 마지막 수업'
노쇠와 죽음에 대하여.
죽음에 이른 노학자가 자분자분 들려주는 통찰적인 죽음의 실용서(?)입니다.
다섯번 정도로 나누어 올리겠습니다.
일모도원(日暮途遠)의 늙은이들, 병상에 누운 사람들, 병상을 지키는 사람들, 늙은 부모를 둔 젊은이들..
'모리 교수의 마지막 수업'
좋은 책입니다.
함께 읽어요.
++++
<모리 슈워츠 교수의 프로필>
모리 슈워츠(Morrie Schwartz)교수는 미국 매사추세츠 월트햄에 있는 브랜다이스 대학에서 35년 동안 사회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1994년 77세 나이에 루 게릭병에 걸려 1995년 11월 4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병을 받아 들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가능한 한 풍요로운 삶을 살기에 노력했다.
목숨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배움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으며, 스승으로서의 직분 또한 버리지 않았다.
자신의 죽음을 드러내어 그 과정에서 겪는 온갖 슬픔과 고통을 모든 사람들을 위한 대화의 소재로 기꺼이 내 놓았으며, 말을 더듬고 손발은 움직이지 못하는 처지이면서도 자신의 마지막 모습까지 모든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개인주의와 경쟁만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되는 이 시대에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사랑과 연대 의식, 용기와 희망을 전하고자 했던 위대한 스승이었다.
그는 삶을 사랑하였고, 죽음 또한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그의 삶과 죽음은 사람됨의 위엄과 기품을 우리들 마음속에 깊이 새겨 놓았다.
++++
***동우***
2015.10.26 04:21
죽음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그대 깊이 사유 한 적 있는가.
그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가.
죽는 법, 살아가는 법.
그렇구나 사랑하는 벗이여,
모리 교수의 수업을 경청하자.
++++
1. 살아가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죽는 법을 알게 됩니다. 죽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됩니다.
훌륭하게 살아가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언제라도 죽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2. 자신의 몸이나 병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마십시오. 몸은 우리의 일부일 뿐, 결코 전체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렇게 위대한 이유는 몸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감정과 통찰력, 직관을 지닌 존재들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감정과 통찰력과 직관이 남아있다면 우리는 아직 우리의 자아를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3. 화가 나면 화풀이를 하십시오. 항상 좋은 사람인 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좋은 사람인 때가 더 많은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극도로 화가 났을 때는 그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십시오. 좌절하거나 화가 났을 때, 감정을 표출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4.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자신을 동정할 줄 아는 사람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십시오. 자신을 가장 가까운 친구로 삼으십시오.
자신을 진실로 아는 자는 진실로 자신을 귀하게 여기며 자신에 대한 귀한 존경심을 통하여 타인들을 자기처럼 귀하게 여기는 방법을 배웁니다.
5. 타인의 도움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꺼이 우리를 도와주도록 해야 합니다.
다만, 그들이 들어 줄 수 없는 요구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6. 너무나 짧은 우리의 삶에서 행복은 소중한 것입니다. 가능한 한 즐거움을 많이 느낄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놓으십시오.
전혀 예상치 못한 때에, 뜻밖의 곳에서 행복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7. 슬퍼하고, 슬퍼하고, 또 슬퍼하십시오.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드러내는 것은 삶의 소중한 휴식이 되며,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줍니다.
슬픔을 드러내는 것은 카타르시스와 위안을 안겨 주며 침착함을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슬픔의 끝이 슬픔일 수는 없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슬퍼하며 울고 난 후에는 아직 남아 있는 것에 감사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8. 우리가 정말로 해서는 안 될 일은 자기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생각의 끝에는 우울증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쓸모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자기 나름의 방법을 찾으십시오.
9.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힘을 기르십시오. 용서는 우리의 삶을 이전의 삶과는 아주 다른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용서는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억울한 생각을 없애주며, 죄책감을 녹여 줍니다.
10. 파도는 해안에 부딪쳐 사라지지만, 바다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바다의 일부였던 그 물결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인류의 삶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파도가 아니라 바다의 일부입니다.
++++
***동우***
2015.10.27 04:16
아래 글.
시인 김정란(1953년~ )이 쓴, '모리 슈워츠 (Morris Schwartz, 1916 ~1995)의 '모리 교수의 마지막 수업' 책에 대한 발문(跋文)입니다.
김정란의 이 글에 나는 전적으로 동감하는바, 나 또한 여러번 그와 같은 이야기를 지껄였을겁니다.
김정란은 완벽하게 나와 생각이 같습니다.
모더니즘은 우리 삶 속에서 죽음을 죽여버렸습니다.
주검은 감추어지기 급급하고 늙음은 소외되었습니다.
죽음은 추문이 되어버리고 늙음은 스스로 창피함이 되어 버렸습니다.
<베르사이유의 그 발작적 인공(人工)은 자연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맹렬한 증오이다.>
아, 얼마나 서늘하고 신랄한 지적입니까.
후기자본주의, well-being... 오로지 삶에 대한 맹렬한 욕망만이 찬송 받는 세상.
리얼리즘의 극점인 죽음, 작금 우리 삶의 양태에 어디 죽음이 자리하고 있습니까?
죽음에 대한 통찰..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과 퀀블로 로스 박사의 '죽음에 이르는 5단계'가 생각납니다.
참, 김정란의 말처럼 죽음을 없애버렸듯이 정말 뒷간도 없애버렸군요.
똥냄새의 향기로움 사라진 뒷간은 뒷간이 아니라 이제 화장실이 되어버렸습니다.
귄터 그라스가 <넙치>에서 말합니다.
똥냄새는 사랑이라고..
<“일제빌 내가 나의 냄새를 맡는걸 좋아 하듯이 당신도 당신의 냄새를 맡는걸 좋아하고 있어. 그리고 내가 즐거이 당신의 냄새를 맡고 싶어하고 당신이 기꺼이 나의 냄새를 맡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야.”>
-독서 리뷰-
<모리 교수의 마지막 수업>
***동우***
2015.10.28 05:17
아아, 나도 이제 일모도원(日暮途遠)의 세월을 사는 늙은이.
뉘엿뉘엿 지는 해가 보인다.
모리 교수의 통찰력있는 말씀대로, 저리 살다 죽어야 할텐데.
추문(醜聞) 속에서 죽지 말라. 나여.
죽기까지 자신이 쓸모있다는 존재의식을 잃지 말라.
물질적인 것들 한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나 간 후, 좋은 남편 좋은 아비 좋은 형제 좋은 친구로 남겨지게 하라.
특히 사랑하는 내 두 손녀들에게.
아래 김정란의 글.
모리교수의 책과 함께 마음으로 곰곰 씹어가면서 읽어 보십시오.
++++
<죽음을 가르치는 겸손한 교사>
-김정란-
너는 이 정원으로 늘 되돌아왔다. 네가 홀로 고통스러워했던 길들이 지워진다. 풀들은 죽은 너의 얼굴을 의미한다. -이브 본느프와, '위협당하는 증인'
(근대와 죽음)
죽음은 이제 추문이다
인간이 인간적 사실들을 중심으로 세계 원리를 직조하기 시작한 근대화 과정은, 모순되게도,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구성 요소인 육체를 서서히 소외시킨 과정과 일치한다.
자아의 위대함에 눈뜨기 시작한 인간은 신을 쫓아내면서 스스로 신이 되는 것을 꿈꾸었다. 인간은 자기가 언젠가 죽는 필멸의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원칙을 따르는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애써 부정해 왔다.
인간의 자연은 제도적으로, 그리고 구조적으로 통제되고 소독되기 시작한다. 원수인 자연. 그 때문에 인간이 죽어 가야 하는 자연.
베르사이유의 그 발작적 인공(人工)은 자연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맹렬한 증오이다.
자아의 대표자인 왕을 위해 예쁘게 단장한 시녀로 전락한 자연. 그런 자연관은 여성의 육체에도 고스란히 투사된다. 인간의 대표자인 남성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코르셋 속에 부푸는 육체를 우겨 넣은 베르사이유의 궁녀들과, 마지막 나뭇잎까지 다듬어진 베르사이유 정원은 완전한 데칼코마니이다.
그렇게 근대의 빛나는 이성주의는 자연인 인간의 필멸성으로부터 단호하게 고개를 돌린다.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19세기를 지나 20세기말에 이르기까지 지칠 줄 모르고 달려온 근대의 천사는 자연의 악마를 무저갱에 가둔다.
그렇게해서 인간의 자연인 육체와, 그 육체의 가장 중요한 생물학적 특성의 발현인 성(性), 그리고 육체의 궁극적 귀결인 죽음은 서서히 인간의 지평으로부터 쫓겨가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은 병원을 발명해서 병든 자들을 격리시키고, 양로원에 노인들을 처박고, 변소를 화장실로 바꾸어서, 냄새를 풍기는 육체를 소독한다.
육체의 귀결인 죽음, 아니 오히려 주검은 인간의 지평으로부터 철저하게 감추어진다.
죽음은 이제 추문이다. 인간은, 홀로, 외롭게, 죄지은 자처럼 죽어간다.
근대 이전에 인간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사뭇 달랐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인간적 사실들 중의 하나였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죽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죽음은 개별자의 고독한 사건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겪는 공적인 사건이었다. 죽은 자의 주변에는 산 자들이, 그러니까 언젠가 죽어 갈 자들이 모여든다. 어린아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죽음의 장면을 지켜보면서 근대 이전의 인간들은 미리 죽음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죽음은 형이상학적으로 규명되는 사건이었다. 죽은 자는 형이상학의 울타리 안에서 죽어 간다. 죽은 자의 육체는 와해되지만, 그의 존재는 형이상학이라는 다른 형태 안에 간직되는 것이다.
죽음은 두렵기는 하지만, 설명되는 그 무엇이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은 죽음을 배울 어떤 기회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신도 종교도 더이상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은 닥치는 죽음 앞에 홀로, 형이상학적 설명도 없이 홀로 서 있다.
발달된 의술 덕택에 평균 수명은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인간이 질병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의학의 발달과 더불어 병도 진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온갖 종류의 현대병들이 세로 등장하고 있는 형편이다.
게다가, 교통 사고, 테러, 갈수록 잔혹해지는 범죄 등, 발달한 의술이 병을 정복한 비율 이상으로 인간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을 확률은 어느 때보다도 크다.
게다가, 현대 사회의 문명은 죽음뿐만 아니라, 육체의 노쇠 자체를 구조적으로 외면한다.
모든 문화가 젊은이들을 위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노르베트 엘리아스는 현대 문명이 죽음뿐만 아니라 늙음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만듦으로써 사회의 구성원들에게서 죽음을 배울 기회 자체를 빼앗아 버린다고 말한다.
현대 사회에서 노인들은 스스로를 '창피스럽게' 느낀다.
젊은이들은 언제까지나 젊은 채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에 빠져 있다.
이제 아무도 한 개인에게 죽음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컴퓨터가 발달하고, 사이버 문화가 발달하면서, 이러한 현상은 점점 더 가속화되어 가고 있다.
육체는 점점 더 육체의 이미지에 의해 지워져 가고 있다.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이미지의 의미는 점점 더 타락해 간다. 이미지는 생의 직접성을, 그것의 필멸성을 조롱하면서 실재 위에 군림한다.
죽다니? 추접스럽기도 해라.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난 이렇게 한결같은데!
(죽음을 가르치기)
다시 공동체 안으로
그러나 문제는 인간은 엄연히 필멸의 준재이며, 자연이 생자필멸의 법칙을 따르듯, 인간도 그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육체는 여전히 두께이며 불명이며, 들쭉날쭉한 물질이며, 언젠가 쓰러져 썩는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
탈근대 사회에서 들어서서 육체에 대한 담론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에 따오른 것은 따라서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다.
인간은 너무나 오랫동안 주제넘게 신노릇을 해왔던 것이다.
이제 죽음이 되돌아온다. 죽음은 다시 인간적 사실 안에 편입될 것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죽음을 배울 기회가 없는 현대 사회에서 '죽음을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을 자청하고 나선 모리 슈워츠의 결정은 시대적으로 대단히 시의적절하다.
이 '죽음 강의'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요소들이 숨어 있다.
첫째, 모리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진행되는 루게릭 병에 걸려 있다. 그 병은 육체의 능력을 하나씩 빼앗아, 결국 나중에는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몰고 간다.
둘째, 그는 사회학 교수였던 사람이다.
셋째, 모리의 강의는 철학적이라기보다는 구체적이며 실용적이다.
이 세 가지 요소는 모리의 마지막 강의의 성격을 분명히 규명할 수 있게 해준다.
모리의 강의는 텔레비젼을 통해 일반인들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늙고 병들어서 죽어 가는 육체를 대중 앞에 텍스트로 제시한다는 것은 여간한 용기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결정은 현대의 매끈한 이상적 육체의 이미지에 대한 항의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모리는 육체가 텔레비젼 스타들의 육체처럼 이상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정작 자신의 육체처럼 서서히 마모되어 가는 물질이라는 것을 효과적으로 가르친다.
그야말로 몸으로, 몸을 읽을거리로 사용해서 가르치는 셈이다.
아직은 살아 있는, 그러나 곧 죽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자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살아 있는 장례식'.
모리의 육체가 서서히 능력을 잃어서 어쩔 수 없이 타인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또 그가 전직 사회학 교수였다는 사실도 이 강의의 중요한 특성이다.
모리는 인간은 결국 함께 살아가야 하며, 인간이 겪는 일은 그 무엇이나 타인들과 '함께' 있음으로써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병은 육체적 사실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분명한 현실이다.
그 사실을 출발점으로 해서 그는 병든 자가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를 세심하고 찬찬하게 보여 준다.
죽음은 다시 공동체의 사건으로 탈바꿈한다.
모리의 강의는 철학적이라기보다는 실용적이다. 이 강의가 대중들을 향해서 발언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필수적인 선택이다.
모리 자신의 학문적 소양은 대중과의 만남을 위해 겸손하게 유보된다. 이 선택 역시 죽음을 공동체적 사건으로 만드는 데 하나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죽어 가는 자가 죽음에 대해 하는 강의는 죽어 가는 자들을 위해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모리는 죽음이 죽어 가는 자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자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따라서, 이 책은 '죽음' 그 자체에 관한 책이 아니라, '죽음' 또는 죽음의 원인이 되고 있는 '병'을 매개로 죽어 가는 자와 건강하게 살아 있는 자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죽음은 인간적 사실의 전부를 상대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인간은 죽음을 매개로 열린 관계 안에 다시 자리잡는다.
내가 나인 바는 절대적인 것이 아닌 것이다.
나는 네가 죽어 가듯이 언젠가 죽는다. 그리고 죽음의 통로를 통하여 나보다 먼저 이 세상에 있었고, 그리고 앞으로 이 세상에 있게 될 모든 사람들과 연계된다. 따라서 죽음은 벽이 아니라 통로이다.
(영적 유대에 관하여)
그러나 모리의 가르침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적인 관계 안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지만, 그러나 모리는 그것만이 인간됨의 본질을 결정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즉, 인간은 관계에 의해서 규정되지만, 그러나 '핵심 자아' 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그런 가르침은 희미한 밑그림만으로 그려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화된 이 노학자가 죽음 앞에서 어떤 영적 실존에 대해 말하고 싶어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사학적 자아가 아닌 다른 자아가 인간의 내면에 숨겨져 있다는 가정에 동의한다.
결국 모든 종교의 궁극적 목표이기도 할 이 숨겨진 자아와 조우하는 것, 그것이 모리의 가르침의 최종적 메시지이다.
“사회학자 어빈 고프만은 양파 껍질을 한 꺼풀씩 벗겨가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고 말했다. 해체주의자들도 인간의 본질에 대해 같은 말을 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말을 믿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속의 보이지 않는 어느 곳에 핵심 자아라고 일컬을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에서 활동하는 이 숨겨진 자아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내적 공간'을 확보하는 일은, 타인들과의 관계에 관심이 없는 나르시스트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모리의 입장은 단호하다.
“각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자아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아도 공동체와 타인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존재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주변의 세상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리가 영적 실존에 대해 이야기하는 까닭은, 한 인간이 깊은 내적 자아와 조우함으로써 진정으로 겸손한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형제 자매들'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는 소외된 떠돌이들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성숙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서로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진실로 아는 자는 진실로 자신을 귀하게 여기며, 자신에 대한 귀한 존경심을 통하여 타인들을 자기 자신처럼 귀하게 여기는 방법을 배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타인도 사랑할 줄 모른다. 왜냐하면, 자신을 믿지 못하므로, 인간성에 대한 확실한 비젼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깊은 자아에 도달한 자는 오만하지 않다. 한 인간의 깊은 자아는 사적인 자아가 아니라 공적인 자아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모리는 조심스럽게 '신'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뭐라고 불러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우리보다 더 높은 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 논의는 깊이 진전되지 않는다. 세속화가 깊이 진행된 세대답게 그 역시 너무나 오랫동안 불가지론자로 살아왔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영적 유대'에 대해 조심스럽게 운을 뗀다.
그가 말하는 '영적 유대'의 본질이 어떤 것이든, 나는 모리의 생각을 여기서 길게 논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귀와 눈을 열어 두라고 여러분께 부탁하고 싶을 뿐이다.
세계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영적 유대'에 대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영혼'은 이제 더 이상 전근대의 잠꼬대가 아니다. 영혼은 오히려 모든 첨단의 담론들이 즐겨 다루는 화두가 되어가고 있다. 어떤 의미심장한, 그러나 고요한 항의가 지구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영성주의는 전근대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돌아오고 있다.
성인(聖人)들이 무덤을 열어짖히고 우리들 사이로 돌아오고 있다.
어쩌면, 당신 자신이, 부활한 성인의 환생인지도 모른다. 후기산업사회의 온갖 욕망의 지꺼기 아래서 심음하고 있는 당신 자신이 바로 성인의 숨겨진 씨앗인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다만, 눈과 귀와 마음을 열고 영혼을 다해 생을, 그리고 당신 자신을 바라보기 바란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만, 있는 힘을 다해 당신 자신이 되기 바란다.
그러면 당신은 생을 읽는 방식을 배우게 될 것이고, 그러면 저절로 죽음을 읽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죽음은 생의 엄연한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당신을 죽이지 않는다. 죽음은 당신을 살린다.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게 한다.
죽음을 받아들인 당신은 외롭지 않다. 당신은 공동체의 운명 안에서 다른 방식으로 자리잡게 되기 때문이다.
++++
***eunbee***
2015.12.01 21:17
동우님
그간 답답하셨지요?
리딩북 독자, 우리 모두도 그랬을 거예요.
동우님의 해금(ㅎㅎ)과 함께 12월이 묻어왔어요.
한 해의 끝자락을 사뿐히 즈려밟고 블방에 납시어요.
하늘하늘 눈꽃송이가 아니되면 보슬보슬 비구슬이라도 뿌려두오리다.
동우님 이 방에 컴백하시는 날
파리에서는 큰애가 날아듭니다.
동우님 마중은 이렇게 해두고
날 밝으면 딸마중 가야지요. 룰루~랄라~
동우님의 컴백홈~
두 팔 크게 벌려 환호합니당~^*^
올려주신 ‘모리 교수의 마지막 수업’
다시 한번 천천히 곱씹어 읽어 보렵니다.
***동우***
2015.12.04 04:42
북녘에는 푸지게 눈 내리고, 7년만에 큰따님 고국 어머니 곁에 오시고.
내 블로그는 드디어 해금되고. ㅎㅎ
나도 은비님.
두 팔 크게 벌려 두루 환영합니다.
모리 교수의 책,
일모도원의 우리 세월.
귀하게 읽을 가치가 있고도 남을 책입니다.
차츰 그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어요, 은비님.
남녘에도 눈 내렸으면 금상첨화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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