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앨리스 먼로 1.2 (3.3.1)

카지모도 2021. 2. 25.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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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앨리스 먼로]]

<밤> <사내아이들과 계집아이들>

 

 

<밤>

-앨리스 먼로 作-

 

***동우***

2016.07.09 21:04

 

2009년 맨 부커상, 201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캐나다 여류작가 '앨리스 앤 먼로'(Alice Ann Munro, 1931~ ).

앨리스 먼로는 단편소설만 쓰는 작가입니다.

노벨상위원회가 마침내 단편소설을 온전한 장르로 인정했다고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기도 했답니다.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

 

“앨리스 먼로는 섬세한 스토리텔링으로 찬사를 받는 작가로, 명징성과 심리적 사실주의가 그 특징이다. 일부 비평가들은 먼로를 캐나다의 체호프라고 부른다. 먼로의 단편들은 흔히 작은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데, 그 사회에서 용인되는 존재로 살고자 하는 몸부림은 종종 긴장된 관계와 도덕적 갈등-세대 차이와 충돌하는 야심들에서 비롯한 문제들-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먼로의 글은 일상적이나 결정적인 사건들, 그런 에피파니(epiphany)를 다루면서, 이를 둘러싼 이야기를 조명하고 실존적인 문제를 섬광 같은 번뜩임 속에 드러낸다.”

 

불면의 밤. 동생을 목졸라 죽일까봐 걱정되어 잠을 설치고 밖을 배회하는 소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잠시 데자뷔에 빠졌습니다.

밤은 공상과 망상과 강박이 의식을 들쑤시는, 낮과는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근친살해. 근친상간...뿐이리까.

내게도.

 

프로이트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아무리 겉으로는 범상할지라도 속으로는 엉뚱하고 파괴적인 욕동을 감추고 있는 것이 인간 퍼스낼리티의 현장입니다.

가끔 가정이라는 동굴도 개별적 인간의 퍼스낼리티와 비슷한 면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어느 가정이나 온화한 겉모습과는 다른 어브노멀한 속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아버지의 먹고사니즘의 불면과 대면한 소녀의 불면.

이윽고 순치된 소녀도 잠을 이룰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현실은 꿈보다 강한 것입니다.

 

 

<사내아이들과 계집아이들>

-앨리스 먼로 作-

 

***동우***

2016.11.09 04:22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은 내게는 한참 낯선, 어떤 불편함이었습니다.

나 역시 밥 딜런의 노래들을 좋아하고 그의 문학적 소양을 인정치 못할 바 없을뿐더러, 대중가수라고 하여 그 예술적 가치를 폄훼할 생각은 전혀 없는데 말입니다.

 

<밥 딜런은 위대한 미국의 노래 전통 속에서 새로운 시적(詩的) 표현을 창조해왔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문학개념.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소독스한 언어로 구축된 예술형태인 것입니다...

노랫말에다 최고권위의 문학상을 주었다는 그것이 그 어떤 순결함이 모욕 당한듯한.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크로스 오버...

내가 가진 의식(意識)으로는 해석할수 없는...

그레서 내 또래 시절은 저물었구나하는 한줄기 페이소스를 어쩌지 못하겠습니다그려.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확연하게 느낍니다.

나는야 구닥다리 늙은이라는걸... ㅎ

 

2013년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캐나다의 여류작가 '앨리스 앤 먼로'(Alice Ann Munro, 1931~ ),

'사내아이들과 계집아이들' (Boys and Girls)

한 소녀가 차츰 체득해가는 성적자각.

그건 얼마나 유니크하고 정교하게 구축한 언어들인지. (번역인데도)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내게는 이런 것이 문학입니다.

 

두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잡설은 내일.

 

***동우***

2016.11.10 00:17

 

느끼건대, 심플하지만 정치하고 감동적인 소설입니다.

 

여자와 남자.

안과 밖 살이의 모습들.

 

<나는 살기를 원하는 생명의 한복판에 있는 살고자 하는 생명이다. -쉬바이처->

 

그러나 우리의 슬픈 먹고사니즘.

도살(屠殺)

 

<그리고는 레어드가 사무적으로 “누나가 울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신경쓰지 마라.”

아버지는 단념한다는 듯이, 심지어는 기분이 좋은 듯이 나를 용서하는 동시에 영원히 배제시켜버리는 말씀을 하셨다.

“저 애는 계집아이일 뿐이잖아.”

나는 그 말에 항거하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서조차도.

아마 그것은 사실일 테니까.>

 

그렇게... 누나는 여자가 되고 남동생은 남자가 되어가는가 봅니다.

 

시몬느 드 보바르가 말했다지요.

여성은 태어나는게 아니라 만들어 지는 거라고.

 

여성해방의 전사들.(넙치 -귄터 그라스)

기구를 사용하여 남자처럼 다리를 쫙 벌리고 서서 오줌을 갈기면서 외칩니다.

“이제 페니스 선망같은건 없다. 쪼그리고 오줌을 누는 굴욕적인 일은 안한다"고.

 

그러나 아스세요.

남성을 극복하는, 그런 따위를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앙돼요!

 

아, 여성은 태어나는겁니다.

저, 천부적 여성성(Natural born femininity, 이런 말이 있는지..)을 해치지 말아요,

어줍잖은 페미니즘 따위로.

 

p.s

트럼프 미국 제45대 대통령 당선.

언론의 예측이고 여론조사고 모두 틀렸습니다.

나도 어쩌면 한구석 기대하는바 있었을런지.

기득권적 세계관이 아닌 전혀 다른 어프로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 어지러운 판국에 걱정되는바 크지만.

 

 

 

 

-독서 리뷰-

 

[[앨리스 먼로]]

<작업실> <행복한 그림자의 춤>

 

 

<작업실>

-앨리스 먼로 作-

 

***동우***

2017.02.07 04:21

 

'앨리스 먼로 (Alice Munro,1931~ )'의 '작업실'

 

맨부커상과 노벨상을 받은, 캐나다의 체홉이라고 일컬어지는 단편작가 앨리스 먼로.

여성의 삶에 대한 예리한 관찰, 평범한 일상 속에 숨겨진 비범한 모습들을 찾아낼줄 아는...

참으로 빼어난 소설이고 참으로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번역도 훌륭하고.

 

<내 삶을 해결할 방법이 불현듯 떠오른 것은 어느 날 저녁 셔츠를 다림질하고 있을 때였다. 그것은 단순하지만 뻔뻔해져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거실로 들어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남편에게 말했다.“아무래도 작업실을 얻어야겠어요.”>

 

<집은 남자가 일하기에는 아주 좋다. 남자가 일감을 가져오는 집은, 말끔히 청소가 되어 있고 일하기에 딱 좋도록 남자 중심으로 새로 배치할 수도 있다. 남자에게는 일이 있다는 걸 누구나 알아준다. 따라서 으레 전화를 받는 일도, 어디 두었는지 모를 물건을 찾는 일도, 아이들이 왜 우는지 알아보는 일도, 고양이 먹이를 주는 일도 기대하지 않는다. 방문을 닫아걸어도 무방하다. 방문이 닫혀 있고 그 방안에 엄마가 있다는 걸 아이들이 안다고 생각해 보라. (생각해 보라고 남편에게 말했다.) 왜냐. 아이들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도 용납하기 어려울 테니까. 여자가 허공을 응시한 채, 남편도 자식도 없는 엉뚱한 곳을 바라보는 건 자연의 섭리를 저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여길 테니까. 그러니 여자에게 집이란 남자와 같은 곳이 아니다. 여자는 누구들처럼 집에 들어와서 이용하고 다시 나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여자는 곧 집이다. 떼려야 뗄 수 없다.>

 

여성 제위께서는 꼭 한번 읽어 보시기를.

문장을 음미하면서.

 

내일 지껄이기로 하고.

'앨리스 먼로'의 '작업실' 두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벌침이야기 저자***

2017.02.11 15:21

 

토요일 오후에 다녀갑니다.

소중하고 값진 자료 고맙습니다.

편안한 주말 되시기 바랍니다.

 

***동우***

2017.02.09 04:13

 

쾌적하고 바다가 훤히 보이는 전망 좋은 집을 놔두고 굳이 '작업실'이 있어야겠다는 '나'

그것만이 자신의 현재의 삶을 해결할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인 '나'로서는 가정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자신만을 위해 숨쉬고 사유할 사적 공간이 필요하였던 겁니다.

 

<만약 세익스피어 시대에 어떤 여성이 세익스피어의 재능을 가진다면? -버지니아 울프->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쓴 것이 백년 전 쯤 일까.

그로부터 한세기 지나, 패미니즘 부르짖는 작금에 이르러 여성들은 자기만의 방을 올곧게 확보하게 되었을런지.

 

그런데 그 사적공간을 침범하여 온통 개판을 만들어 놓는 건물주 남자 맬리씨.

 

<나는 아직 다른 작업실을 구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다시 찾아볼 생각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마음속에 또렷이 떠오르는 그 그림 -맬리 씨가 걸레와 솔과 비눗물이 든 물통을 들고 어설프게, 일부러 어설픈 동작으로 화장실 벽 앞에 구부정하게 서서 낑낑거리며 문질러 닦고 서러운 한숨을 토해 내며, 이미 기이하기 짝이 없는데도 웬일인지 절대 성에 차지 않는, 믿음을 배신하는 또 다른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짜내고 있는- 이 가물가물해질 때까지는 적어도 기다릴 참이다. 원고를 다듬으면서 나는 생각한다. 그 남자를 지워 없애는 것은 나의 권리라고.>

 

'나'는 최소한 그 남자를 지워 없애는 것은 내 권리라고 자위할 뿐입니다.

 

아내에게 자식에게 자신을 강요하는 이른바 가장짜리의 독선적 폭력, 내 주위에 없지 아니하였고 지금 읽고있는 '숨은 우체통'에서도 보게 됩니다.

 

나는 작금 좌우로 갈린 촛불과 태극기에서도 이념을 떠난 그 원형질을 봅니다.

진보나 보수나.

 

페르소나의 팽창.

자아와의 동일화에 성공한 페르소나는 더욱 확대되어 타인에게까지 투사되는 것입니다.

파시즘의 작동원리가 바로 그러하지요.

팽창에 실패한 페르소나는 스스로 절망하여 도피하거나 상대를 저주하여 압살하려 듭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투사하여, 자신을 강요하는 저런 폭력.

나 또한 끔찍하게 싫습니다.

 

 

<행복한 그림자의 춤>

-엘리스 먼로 作-

 

***동우***

2017.08.30 04:34

 

'앨리스 앤 먼로 (Alice Ann Munro,1931~ )' 의 '행복한 그림자의 춤(Dance of the Happy Shades)'

 

기교도 장식도 없지만 정일(靜逸)하고 충만(充滿)합니다.

한 소녀의 섬세한 자의식을 통하여 들려주는 짧은 이야기의 여운은 강렬합니다.

과연, 앨리스 먼로는 노벨문학상에 호리(毫釐)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동네에서 피아노 교습소를 운영하며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늙은 마살레스 선생.

매년 그녀가 개최하는 파티, 아이들의 피아노 연주발표를 곁들여.

비좁고 더러운 집안, 변변치 않은 음식, 서툰 아이들의 연주...

사람들은 초대거절에 급급하지만, 대를 이어 마살레스선생에게 피아노를 배워 온 모녀는 마지못하여 참석합니다.

피아노 연주도 시작되고 음식도 식어가는데 그때까지도 마살레스선생은 누군가 기다리는 포즈입니다.

이윽고 나타난 한무리의 아이들, 인근 장애아학교의 지적장애아들입니다.

 

그 아이들의 피아노 연주.

사람들은 당황스럽고(일종의 모욕감까지) 지겨워 죽을 지경이지만 요란하게 박수를 칩니다.

 

<“그럼요, 저런 아이들에게 혐오감을 느끼는 건 옳지도 않고 나는 혐오감도 없지만, 지적장애아들의 연주를 들으러 오라는 말은 아무한테도 듣지 못했다고요, 도대체 이 파티가 무슨 파티래요?” 그러면서도 그들은 갈수록 우렁차게 박수를 친다. 이것은 끝이겠지 하는 바람으로. 하지만 연주 일정이 끝났다는 조짐은 없다.>

 

음악을 사랑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살레스 선생.

 

<“모든 어린이에게는 음악이 필요하지. 가슴속으로 음악을 사랑하지 않는 아이들은 없으니까.”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선생님인 걸." 마살레스 선생님은 당신이 어린이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고 거기에서 착한 마음씨와 선한 것이면 무엇이든 다 좋아하는 천성을 간직한 보물고를 찾아낼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이다.>

 

마살레스 선생에게는 그 어떠ㄴ편견도 없습니다.

장애아라고 하여 특별할 것도 유별날 것도 없는 음악이 필요한 아이들일 뿐입니다.

 

<생의 끄트머리에 이른 지금에야 비로소 자신이 피아노 연주를 가르칠 수 있는 -반드시 가르쳐야 하는- 누군가를 찾아낸, 그 대단한 발견을 한 사람답게 얼굴 가득 기쁨이 넘쳐흐를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할 법도 하다. 그러나 마살레스 선생님은 그 여자애가 오늘처럼 연주를 하게 될 날을 늘 기대했고, 그것은 당연해하고 흐뭇해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기적을 믿는 사람은 정말로 기적이 일어날 때 법석을 떨지 않는다. 더욱이 마살레스 선생님은 그 여자애를 자신이 아끼는 그린힐 학교의 다른 아이들이나, 사랑하지 않는 나머지 우리들보다 경이로운 아이로 여기는 것 같지도 않다.>

 

돌아오면서 소녀는 어머니가 다시는 그 따위 파티에 참석하지 않으리라는 걸 충분히 알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 편 느낍니다.

그런 마살레스 선생을 딱한 사람이라고는 여기지 못하리라는 걸.

어머니도 사람들도.

 

그건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 그런 생각들을 방해하기 때문이고, 그 음악은 마살레스 선생님이 사는 저쪽 나라에서 보낸 코뮈니케이기 때문입니다.

 

마살레스 선생님이 사는 저쪽 나라....

 

파일을 찾아 슈베르트의 리트를 듣습니다.

겸손하기 그지없는, 제럴드 무어의 피아노 반주.

 

푸르른 음악이여.

시인이여.

 

먼 땅의 아버지 먼 땅의 명공이여, 나에게 영원토록 힘을 빌리소서. -제임스 조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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