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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26) -채만식-

카지모도 2021. 5. 2.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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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금부터라도 제가 슬그머니 뒤로 나서서 태수의 뒤밑을 들추어 내어 이 혼인이 파의가 되게시리 훼방을 놀아 볼까 하는 생각을 두루두루 해보기까지 했다.

마침 음식 분별이 다 되었던지, 그새 안방과 부엌으로 팔락거리고 드나들던 김씨가 행주치마에 가뜬한 맵시로 앞 쌍창을 크게 열더니, 방 안을 한번 휘휘 둘러본다. 음식상을 어떻게 들여놓을까 하는 참이다.

태수는 약혼반지 곽을 꺼내서 주먹에 숨겨 쥐고 김씨한테 흔들어 보인다.

약혼을 한다고 모여 앉기는 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약혼인지 알 사람도 없거니와, 분별을 할 사람도 없어, 음식상이 들어오도록 약혼반지는 태수의 포켓 속에 가서 들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령 결혼식이라면 명망가라는 사람을 청해 오든지 목사님을 모셔 오든지 했겠지만, 그럼 약혼식이니 명망가의 다음가는 사람이나 부목사를 불러올 것이냐 하면, 그건 그럴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일은 좀 싱거웠고, 일이 싱거운지라 자리가 또한 싱거워 놔서, 전원이 모여 앉은 지는 한시간이로되, 초봉이는 너무 오랫동안 고개를 숙이고 앉았기 때문에 충혈이 되어서 얼굴이 아프고, 형주는 장난을 못 해서 좀이 쑤시고, 태수는 장인영감이 될 정주사의 앞이라서 담배를 못 피워 입 안이 텁텁하고, 정주사는 인제 혀가 갈라진 줄도 모르고 귀한 해태표를 연신 갈아 피우면서 탑삭부리 한참봉더러, 옛날 우리 조선 사신이 상국(上國 : 송·명)에 갔다가 글재주와 꾀로써 거기 사람을 혼내 주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되, 자리가 자리인만큼 탑삭부리 한참봉이 거 묵은 셈조간을…… 이런 소리를 하지 못하는 그 속이 고소했고, 탑삭부리 한참봉은 이렇게 심심하게 앉아 있으니 아이놈한테 맡겨 놓고 들어온 가게나 나가 보든지, 정주사와 장기를 한판 두든지 하고 싶었고, 김씨는 아랫목에 태수와 나란히 앉아 있는 초봉이를 보니 일찍이 내가 태수와 누렸던 자리에 인제는 네가 앉아 있구나 하는 시새움과 감개가 없지 못했으나, 일변 안팍으로 드나들기에 정신이 없었고, 그리고 형보는…….

형보는 처음에는 와락 이 혼인을 훼방을 놀아 볼까 하는 궁리도 해보았지만, 훼방을 놀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게 자는 호랑이를 불침 놓는 일이겠어서 생각을 돌려먹었다.

만일 태수와 파혼이 되고 보면, ‘이 계집애’는 도로 처녀로 제 부모한테 매여 있을 테요, 장차 어느 딴 놈의 것이 될지언정 형보 제가 손을 대기는 제 처지로든지 연줄로든지 어느 모로든지 지난한 일이나, 그러나 태수와 그대로 결혼을 하고 보면 얼마든지 기회도 있고 조화도 부릴 수가 있으리라 했던 것이다.

‘“오냐, 우선 너이끼리 시집가고, 장가들고 해라. 해놓고 나서 서서히 보자꾸나.’

형보는 아주 이렇게 늘어진 배포를 부리기로 했다. 그는 꼭 이 처녀래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었었다.

하고 나서, 그는 시치미를 뚜욱 떼고 앉아, 들은 풍월로 강 건너 장항(長項)이 축항까지 되면 크게 발전이 될 테고, 그러는 날이면 이쪽 군산이 망하게 된다고 태수한테 그런 이야기를 씨부렁거리고 있고…….

모두 이렇게 갑갑하기 아니면 심심한 참이었었다.

그런 중 김씨 하나가, 아무려나 처음부터 나서서 좌석도 분별하고, 이야기도 붙이고, 말하자면 서두리꾼 노릇을 하느라고 했는데, 반지 조건은 총망중에 깜박 잊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놈 반지가,

‘여보, 나도 한몫 봅시다!’

하는 듯이 출반주를 하던 것이다.

김씨는 섬뻑 어찌할 바를 몰라 어릿어릿한다. 그러나 그건 잠깐이요, 그는 혼자말을 여럿이 알아듣게,

“아따, 아무려믄 어떨라구!”

하면서 척척 걸어들어와 태수의 손에서 반짓곽을 툭 채어 가지고 (참말 아무래도 괜찮은 듯이) 처억 반지를 꺼내더니, 마치 요술 부리는 사람처럼 좌중에게 한번 높이 쳐들어 보이면서,

“자아, 이게 약혼반지예요…….”

이렇게 통고를 한 후에 다시,

“……자아, 내가 끼워 주어요!”

선언을 하고는 초봉이의 왼손을 잡아당겨 무명지 손가락에다가 쏘옥 반지를 끼워 준다. 빨간 루비를 박은, 몸 가느다란 십팔금 반지가 초봉이의 희고 조그마한 손에 예쁘게 어울린다.

초봉이의 손은, 일제히 그리로 쏠려 가지고 제각기 감회가 다르게 바라보는 열두 개의 눈앞에서 바르르 가늘게 떨린다.

김씨는 반지를 끼워 주고 나니, 그래도 원 약혼이라는 게 이렇게 싱거울 법이 있으랴 싶었던지 잡았던 초봉이의 손목을 그대로 한번 더 번쩍 치들고,

“자아 인전 약혼이 다 됐어요!”

하면서 좌중을 둘러본다. 권투장에서 심판이 이긴 선수한테 하는 맵시꼴이다.

이렇게 해서 약혼이 되고, 이튿날인 오늘 아침에 정주사네 집에서는 태수의 기별이라면서, 탑삭부리 한참봉네가 보내는 돈 이백 원에다가 간단한 옷감이 들어 있는 혼시함(婚時函)을 받았다.

오늘부터 이 집은 그래서 단박 더운 김이 치닫게 우꾼우꾼한다. 식구들은 초봉이만 빼놓고, 누구 하나 싱글벙글 웃기 아니면 빙긋이라도 안 웃는 사람은 없다.

바느질이 바쁘게 되었다. 혼인날은 단 엿새가 남았는데, 옷은 신부 것을 말고라도 집안식구가 말끔 한 벌씩 새로 해입어야겠으니 여간이 아니다.

그래서 저녁부터는, 그새까지는 남의 삯바느질을 하던 이 집에서, 되레 삯바느질꾼을 불러온다, 재봉틀을 새를 얻어 온다, 광목을 찢어라, 솜을 두어라, 모시를 다뤄라, 마구게 야단법석으로 바느질을 몰아친다.

그리고 계봉이는 아랫방 문 앞에 서서 승재더러 닭 쫓던 개는 지붕이나 치어다보라고 지천을 하고 있고…….

 

8 외나무다리에서

 

계봉이는 형 초봉이가 승재를 떼쳐 놓고 달리 결혼을 하는 것이 그리 달갑지가 않았다.

더구나 형과 결혼을 하게 된 그 사람 고태수한테는 웬일인지 좋게 생각이 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승재가 저 혼자 외따로 떨어진 것이 무엇인지 모르게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기는 하면서도 일변 그것과는 따로 승재가 불쌍하기도 했다. 제 애인이 시집을 가게 되어 약혼까지 다 해놓고, 그래서 안에서는 시방 혼인 바느질을 하느라고 생 법석인데, 이건 그런 줄도 모르고 여전히 아랫방 구석에 그대로 끄먹끄먹 앉아 있다니……!

계봉이는 승재가 불쌍하기도 하거니와, 제일 딱해 볼 수 없었다. 그런 깐으로는 어디론지 없어지고 혼인준비의 꼴을 보이지 않았으면 싶었다.

저녁 후에 계봉이는 책을 빌리러 나온 체하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면서 우선 정말 모르고 있나, 혹시 알고도 위인이 의뭉꾸러기라 짐짓 모른 체하고 있나, 그 눈치를 떠보았다. 했으나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깜깜속이었었다.

그래 계봉이는 슬끔 이렇게 말을 비쳐 보았다.

아 참, 우리 언니가 이번 스무사흗날 ××은행에 다니는 고태수라는 사람과 공회당에서 결혼식을 하게 되었는데, 그날은 병원을 하루 빠지고라도 꼬옥 참례를 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승재는 대번 알아보게 흠칫 놀라더니, 그러나 그것은 일순간이요, 이어 곧 시침해 가지고 대답이, 아 그러냐고, 그날 형편 보아서 그렇게 해도 좋지야고 하는 것이 아주 조금도 무엇한 내색이 없이 심상했다.

계봉이는 승재가 좀더 놀라기도 하고, 당황해하기도 하고, 실망 낙담도 하고 이랬으면 동정하는 마음도 더할 뿐더러, 저도 같이서 긴장도 되고 해서 좋았을 텐데, 저편이 뎁다 그렇게 밍밍하고 보니 이건 도무지 싱겁기란 다시 없었다.

계봉이는 그래서, 마치 솜뭉치로 사람을 때려 주는 것처럼 해먹고, 인제는 불쌍하다는 생각은 열두째요 밉살스러운 생각이 더럭 나서, 그래 마구 닭 쫒던 개는 지붕이나 치어다보라고, 지천에 잡도리를 하고 있는 참이다.

“아이유! 어쩌믄 조렇게두!”

계봉이는 손가락질을 해가면서 혀를 끌끌 차면,

“……그래, 애인이 딴 데루 시집을 가는 줄두 모르구서 저렇게 소처럼 끄먹끄먹 앉었기만 허구 …… 그리구 일껀 아르켜 줘두…… 아이유! 흘개 빠진…… 정말이지 번죽이 아깝지!”

들이 몰아세워도 승재는 종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히죽이 웃기만 한다.

“누가 웃쟀어…… 꼴에 연애? 옜수, 연애…… 애인이 시집가는 줄두 모르는 연애…… 조 모양이니 애인이 딴 데루 시집을 안 가”

“쯧!…… 할 수 없지!”

승재는 시치미를 떼던 것을 잊고서 계봉이 설레에 무심코 변명을 하는 것이다.

“……몰라두 할 수 없구, 알아두 할 수 없구, 다아…… 거저.”

사실 승재는 모르고 알고 간에, 그 일을 가지고 무얼 어떻게 할 내력도 없으며 주변도 없었다.

초봉이와 둘이서 터놓고 연애를 했던 것도 아니요, 결혼을 하자는 약속 같은 것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니, 가사 그랬다손 치더라도 저편이 변심이 되었다거나, 혹은 달리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리하는 것일 터인즉, 승재로 앉아서야 별수가 없을 것이거늘, 하물며 조금 얼쩍지근했다

면 했다고 할 수 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면 역시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할 수 있는 둘이의 사이리요.

하기야 승재도 우렁잇속 같은 속은 있어서 비록 겉으로는 내색을 안 할망정 지금 여러 가지로 감정이 착잡하게 엉클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방을 세 얻어서 오니까, 나이 찬 안집 딸이, 즉 초봉이가 첩경 눈에 띄었고, 그 뒤로 차차 두고 보노라니, 눈 한번 거듭 뜨는 것이며, 얼굴 한번 돌이키는 거랄지, 또 어찌어찌하다 지나가는 것처럼 한두 마디씩 하는 말이라든지 그 밖에 무엇이고 유상무상간에 범연한 게 없이 특별한 관심과 호의를 보이는 것 같았고, 그것이 초봉이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승재 자신도 초봉이한테 그래지는 것을 그는 이윽고 알게 되었었다.

그러다가, 금년 이월부터는 초봉이가 제중당에 가서 있게 되고, 마침 제중당은 금호의원에 약품을 대는 집이라, 약을 주문하는 간단한 전활망정 하루에 한두 번쯤은 초봉이와 이야기를 하곤 하는 것이 승재 저도 모르게 즐거운 일과였었다.

그랬는데 며칠 전에는 웬 사람이 찾아와서 제중당을 제가 맡아 하게 되었으니 앞으로도 전대로 많이 거래를 시켜 달라고 인사를 하고, 그래 전화를 걸어 보았더니 초봉이는 통히 나오지를 않고해서 그러면 주인이 갈리는 바람에 가게를 그만두었나 보다고 짐작은 했으나, 섭섭하기란 이를데가 없었다.

그래 일변, 그렇다면 다시 어떻게 취직을 해야 하지 않나…… 혹 우리 병원에 간호부 자리라도 한 자리 나면…… 제 딴에는 이런 걱정까지 하던 참인데, 천만뜻밖에 계봉이가 나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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