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우릴 만만히 보구서 그러는 게 아니냐? 대체 어째서 가자구 했다가 이제는 오지 말란다더냐…… 답답하다. 속이나 좀 알자꾸나”
“나도 몰르겠어요…… 그냥 오지 말라구 그리니깐…….”
초봉이는 곧은 대답을 않고 있다가 종시 모른다고 하고 만다.
그는 아까 저녁때 당하던 그 일을 모친한테고, 남한테고, 제 낯이 오히려 따가워서 말하기조차 창피했다.
저녁때 다섯시가 얼마 지나서다.
바쁜 일이 없어도 바쁘게 돌아다니는 제호지만, 요새 며칠은 정말 바빠서, 오늘도 아침부터 몇번째 그 긴 얼굴을 쳐들고 분주히 드나들던 끝에 잠깐 앉아 쉬려니까 그나마 안에서 윤희가 채어 들여 갔다.
제호가 안으로 들어가고 조금 있더니 큰소리가 들려 나오기 시작했다.
이틀에 한 번쯤은 내외간에 싸움을 하는 터라, 초봉이는 그저 또 싸움을 하나 보다 했지, 별반 귀여겨 듣지도 않고 있었다.
“그래, 기어코 그 계집애를 데리구 갈 테란 말이야”
윤희의 쟁그럽게 악을 쓰는 목소리가, 마치 초봉이더러도 들으라는 듯이 역력히 들려 왔다. 초봉이는 귀가 번쩍 띄었다.
“글쎄, 데리구 가면 어째서 그리는 거야”
이것은 약간 거칠게 나오는 제호의 음성이다.
“어째서라니? 내가 그 속 모를까 봐서”
“속은 무슨 속이란 말이야”
“말은 못 하나…… 계집애가 밴조고름하게 생겼으니깐 음충맞게 딴 배짱이 있어 가지구설랑…….”
이렇게 들려 나오는 윤희의 발악 소리에, 초봉이는 얼굴이 화틋 달아올랐다. 그는 마침 배달하는 아이도 없이 혼자 가게에 앉아 있으면서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는 깨끗한 처녀의 마음자리에 진흙을 끼얹은 것 같아 일변 분하기도 했다.
“나잇값이나 좀 해요!”
제호가 나무라듯 비웃듯 씹어 뱉는다.
“……인전 그만하면 철두 들 때두 됐는데, 왜 점점 갈수록 고 모양이야…… 원 내가 아무리 계집에 걸신이 들렸기루서니, 그래, 나이 자식 연갑이구, 더구나 믿거라 허구서 갖다 맽기는 친구의 자식한테 손을 댈까 봐서…… 원 히스테리두 분수가 있구, 강짜두 택이 있어야지!”
“아이구! 저 꽝우리구멍 같은 아가리루다가 말은 이기죽이기죽 잘두 하네!…… 아무튼지 말루만 이러네 저러네 해야 소용 없구, 자아, 데리구 갈 테야? 안 데리구 갈 테야? 응”
“데리구 갈 테야!”
“정말”
“그래.”
“그럼 나두 나 하구 싶은 대루 할 테야…….”
윤희의 한결 더 독살스러운 소리가 잠깐 그치더니, 조금 있다가 다시,
“……자아 이거 알지? 이건 빙초산이구, 이건 ××가리(加里)…… 빙초산은 위선 그 계집애 낯바닥에다가 끼얹어 주구, 그리구 나서 ××가릴랑은 내가 먹구…… 어때? 그랬으면 시언상쾌하겠지”
빙초산을 그 계집애 얼굴에다가 끼얹는다는 소리가 들릴 때, 초봉이는 오싹 소름이 끼치고 수족이 떨렸다.
안에서는 연달아 쾅당거리는 소리,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가 가게께로 가까워질 때에는 초봉이는 벌써 길로 뛰어나왔었다.
그러자, 길로 뛰어나오기는 했어도, 어마지두 어떻게 할지 분간이 선뜻 나지 않아서 주춤주춤하는데, 제호가 양편 손에 약병 하나씩을 갈라 들고 씨근버근 가게로 나오는 것이다.
안에서는 윤희가 아이고 대고 목을 놓고 울음을 울고, 제호는 두리번거리다가 길 가운데 가 서서 있는 초봉이더러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면서 기다란 얼굴을 끄덕거린다.
초봉이는 서먹서먹하기는 해도 가게로 들어갔다.
“이런 제기할 것!”
제호는 들고 나왔다가 테이블 위에 놓았던 빙초산과 ××가리 병을 도로 집어 들고 들여다보면서 두덜거린다.
“……글쎄, 그놈의 원수가 이건 어느결에 도독질을 해다 두었드람? 거 참…… 하마트면 큰일날뻔했지! 제기할 것…… 이거 아무래두 내가 ××가리래두 들이 마시구 죽어 버려야 할까 봐!……건데 초봉이”
불러 놓고도 그는 난처해 차마 머뭇거리다가 겨우 말을 잇는다.
“……이거 참 미안하게 됐는데 말이야, 응…… 저어 이번에 말이야, 서울 같이 못 가게 될까 봐……그러니 집에 있으라구, 집에 있으면, 내 인제 올라오라구 기별하께시니, 응? 초봉인 다아 내 사정 알아 줄 테니깐 하는 말이니…… 제기할 것, 이놈의 세상!”
제호는 초봉이의 대답을 차마 듣기가 미안한 듯이, 제 할 말만 다 해놓고는 이내 약병을 집어 들고서 ‘극약독약’이라고 쓴 약장 앞으로 가고 만다.
사맥이 이렇게 된 사맥이고, 했고 보매 초봉이는 그렇듯 창피스런 곡절을 비록 모친한텔 값에 이야기를 하기가 낯이 뜨꺼웠던 것이다.
“그리구저리구 간에…….”
유씨는 굳이 더 캐어물으려고 하지 않고 그쯤서 짐짓 모르쇠를 해버리면서 비로소 혼인말의 허두를 꺼내 놓되,
“……잘되었다, 그까짓 서울은 간들 실상 말이지 무슨 그리 우난수가 있다더냐? 밤낮 그 턱이 제 턱이지…… 아주 잊어버려라, 그리구 시집이나 가거라.”
초봉이는 그러나 이 끝엣말은 심상하게 귀넘겨 들었다.
전에도 양친이 늘 마주앉기만 하면, 초봉이가 듣는 데고 안 듣는 데고 어서 시집을 보내야겠다거니 너무 늦어 가서 걱정이라거니, 이런 이야기를 하곤 했기 때문에, 오늘 저녁에도 그저 지날 말인 줄만 알았던 것이다.
한편 유씨는 오늘 저녁에 그 말을 죄다 할까, 또 운만 따고서 그만둘까 망설이던 참이다.
가자던 서울은 못 가고, 저렇게 풀이 죽어 만사에 경황이 없어하는데 혼인 이야기란 어찌 생각하면 새수빠진 듯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변 생각하면, 그 애가 그럴수록 혼인이 어울린 이야기를 해주어서 거기에다가나 마음을 돌리고 다른 것은 잊어버리도록 하는 것도 계제에 좋을 성싶었다.
그래 우선 그렇게 허두만 내놓고는, 어떻게 할까 하고 다시 한번 궁리를 하는데 건넌방에 있던 계봉이가 마침 건너와서 살며시 들어앉는다.
그는 오늘 초저녁부터 눈치들이 이상하고 하니까, 필경 형의 혼인 이야기려니 기수를 채고서 궁금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두 바느질 좀 배워예지, 헤.”
계봉이는 도로 쫓겨갈까 봐 아주 이런 소리를 하면서 말긋말긋 눈치를 살핀다.
“여우 같은 년 같으니라구!”
유씨가, 누가 네 속 모를 줄 아느냐는 듯이 돋보기 너머로 눈을 흘기면서,
“……네년이 무척 바느질이 배우구 싶겠다…… 그리다가 짜장 사람 되게”
“어이구 어머니두…… 바느질 못 한다구 시집갔다가 쫓겨오믄 어머닌 속이 시원하겠수”
“말이나 못 하나…… 저년이 주둥아리만 알루 까놨어!”
“해해해…… 그래두 어머니 딸은 어머니 딸이지이”
“내 속에서 네년 같은 왜장녀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나두 모르겠다!”
“그렇지만 어머니, 나는 나 같은 훌륭한 딸이 어떻게 우리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는고? 그게 이상한걸”
“저년이 얄래져서 한참 까불구 있구만!…… 그렇게 까불구 분주하게 굴려거든 저 방으루 건너가아!”
“네에, 그저 다소굿하구 앉아서 어머니 바느질하시는 것만 보겠습니다!”
유씨는 계봉이를 지천은 해도, 그 애가 건너와서 분배를 놓고 나니까 초봉이와 단둘이서 앉아 있을 때보다는 어쩐지 빡빡하던 것이 적이 풀리고, 그래서 이야기를 하기도 훨씬 수나로워지는 듯 싶다.
“이 애야 초봉아”
유씨는 음성에 정이 간곡하게 부르면서 잠깐 고개를 쳐들고 본다.
초봉이는 모친이 무슨 긴한 이야기가 있길래 음성까지 가다듬어 가지고 그러는고 해서 마주 고개를 쳐든다.
“……너두 벌써 나이가 스물한 살이니…….”
유씨는 이윽고 이렇게 허두를 내놓고는, 그러고는 또 한참이나 잠잠하다가 비로소,
“……흰말이 아니라, 우리가 고향에서 그래두 조석 걱정은 않구서 살던 그때 같은 처지라면야 너를 나이 스물한 살이나 먹두룩 두어 두었을 것이며, 또오 너를 내놔서 그 푸달진 돈벌이를 시키느라고 오늘처럼 박제호 따위가 우리를 호락호락허게 보구서 그런 경우 빠진 짓을 하게 하긴들 했겠느냐…… 그것이 다아 집안이 치패해서 궁하게 살자니까 범사가 모두 그 지경이로구나!”
유씨는 이렇게 시초를 잡아 가지고, 넉넉 아마 삼십 분 동안은 별별 잔사설을 늘어놓더니, 급기야, 그러하니 네 나이 한 나이라도 더 들기 전에 마땅한 혼처가 있으면 하루바삐 혼인을 해야겠다, 너의 부친과 앉으면 그 걱정을 하는 참이다고, 겨우 장황스런 서론을 끝마친다.
마치고 나서는 또 한번 음성을, 이번에는 썩 의논성 있게 가다듬어,
“너 혹시 저 너머, 한참봉네 싸전집 말이다. 그 집에 기식하구 있는 고태수라는 사람, 저 아따, 저 ××은행소 다닌다는 사람 말이다. 그 사람 더러 본 일 있느냐”
유씨는 고개를 쳐들면서 말을 멈춘다.
초봉이는 고태수라는 이름을 듣자, 앗! 기어코 여기까지 바싹 들이대고 육박을 했구나! 하고 몸을 떨었다.
그 동안 초봉이는 고태수라는 사람의 독하고 세찬 정기가 미묘하게도 심장 속으로 뚫고 들어오는 것을 막으며 밀리며 실로 악전고투를 해왔었다.
고태수라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내고, 동시에 그가 이러저러한 속이 있다는 것을 알던 그날부터 초봉이의 가슴에는 저도 모르게 동요가 시작되었었다.
초봉이가 맨처음 그날, 태수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보다가 승재와 비교해서 승재가 그만 못하니까, 그것을 시기하여 태수한테 반감이 생긴 것 그것이 벌써 일 심상치 않을 시초였던 것이다.
그 뒤로 늘 태수는 초봉이의 머릿속에 가서 승재의 옆에 가 차악 붙어서는 초봉이가 아무리 눈치를 해도 찰거머리같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초봉이는 승재를 자꾸만 추켜 앉히고 싸고 돌고 해도 그럴수록 태수는 자꾸만 더 드세게 파고들었다.
태수는 마치 색채 강렬한 꽃이나 진한 향수처럼 초봉이의 신경을 자극시켰다. 초봉이는 눈이 아프고 콧속이 아려서 그 꽃을 안 보려고, 그 향내를 안 맡으려고 눈을 감고 고개를 두르고 했어도 끝끝내, 큰 운명인 것처럼 그것이 피해지질 않았다.
피하려도 피해지지도 않고, 그게 안타깝다 못해 필경 제 마음이 울고 싶게 짜증만 났었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인제 오래잖아 서울로 가는 날이면, 그것도 활활 털어지고 마음 가뜬하겠지, 이렇게 믿고 일변 안심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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