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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25) -채만식-

카지모도 2021. 5. 1. 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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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초봉이로서는 이 판이 말하자면 아슬아슬한 땅재주를 넘는 살판인데, 별안간 서울 가자던 것이 와해가 돼 단지 서울을 가지 못하는 것 그것만 해도 큰 실망인데, 우황 고태수라니!

마침내 승재를 갖다가 한편 구석으로 밀어 젖히고서, 제가 어엿하게 모친 유씨의 옹위까지 받아가면서 이마 앞으로 바로 다가선 그 고태수!

초봉이는 모친이 말을 묻는 것도 잊어버리고, 저 혼자서, 시방 태수라는 사람이 던지는 그물에 옭혀 매어 옴나위하지도 못하면서, 그러면서도 어느덧 방그레니 웃으면서 그한테 손을 내미는 제 자신을 바라보다가, 깜박 정신이 들어 다시금 몸을 바르르 떤다.

유씨는 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잠깐 만에 다시,

“그 사람 말이, 너를 안다구 그리구, 너두 자기를 알 것이라구 그리더란다.”

하면서 이야기를 또 내놓는데, 계봉이가 말허리를 꺾고 나서서 한마디 참견을 하느라고,

“으응, 그 사람…… 나두 더러 보았지……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너무 말쑥한 것 같더라!”

“네깐년이 무얼 안다구, 잠자쿠 있던 않구서, 오루루 나서? 주제넘게!”

유씨는 계봉이를 무섭게 잡도리를 해놓고서 다시 초봉이더러,

“……그래, 느이 아버지두 그리시구, 또 내가 보기두 사람이 퍽 깨끗허구 똑똑해 뵈더라…… 나이는 올해 스물여섯이구, 서울서 아따 뭣이냐, 전문대학교를 졸업했다구……”

“어이구 어머니두!”

욕을 먹을 값에, 계봉이는 제 낯이 따가워서 그대로 듣고 있을 수가 없던 것이다.

“……전문대학교가 어디 있다우? 전문학교믄 전문학교구 대학이믄 대학이지.”

“이년아 그럼, 더 높은 학굔 게로구나!”

“어이구 참, 볼 수 없네! 혼인허기두 전에 지레들 반해 가지굴랑…… 난 고런 사내 얄밉더라! 뻔질뻔질한 거…….”

“아, 저년이!”

유씨는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당장 무슨 거조를 낼 듯이, 돋보기 너머로 계봉이를 흘겨본다. 행여 건드릴세라 사리고 조심하는 아픈 자리를, 마치 들여다보는 듯 공짱나게 칼끝으로 쑤셔 낸다고야, 이 당장 같아서는 자식이 아니라 원수요, 쳐죽이고 싶게 밉던 것이다.

초봉이는 종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고, 유씨는 계봉이한테 흘기던 눈을 고쳐서 초봉이게로 돌려 한번 힐끗 기색을 살핀 뒤에, 죽 설명을 늘어놓는다.

“태수는 고향이 서울이요, 양반의 집 과부의 외아들이요, 재산은 천 석 추수나 하고, 지금 은행에 다니는 것은 장차 무슨 큰 경륜이 있어 일을 배울 겸 그리하는 것이요, 결혼식은 인제 예배당에나 공회당에 가서 신식으로 할 테고 잔치는 돈을 많이 들여 요릿집에 가서 할 테고 우리집이 가난해서 마음은 있어두 혼인할 엄두를 못 낸다니까, 그러잖아도 혼인 비용을 전부 제네가 대줄 요량을 하고 있단다고 하고, 그러니 털어놓고 말이지, 시방 이 지경이 된 우리한테 당자가 그만큼 잘나고 집안이 좋고, 그 밖에 여러 가지로 구격이 맞은 그런 혼처가 좀처럼 생기기가 어려운 노릇인데 그게 다아 연분이라는 것이니라. 그래서 느이 아버지와 내가 잘 상의를 해보고 나서 이 혼인을 하기로 아주 작정을 했다. 그러니 너도 그렇게 알고 있거라. 느이 아버지는 너의 의향을 물어 보라고 하시지만 너도 노상이 그 사람을 모르는 배 아니니 물어 보나마나 네 맘에도 들 것이다…….”

이렇게 유씨는 이야기를 마치고 잠긴 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들어 딸의 기색을 엿본다.

모친의 여러 가지 설명으로 해서 초봉이의 머릿속에 들어 있던 태수의 영상은, 인제는 더할 나위도 없이 찬란해 가지고, 승재의 그러잖아도 뒤로 밀려간 희미한 영상을 더욱 압박했다. 초봉이는 그것이 안타까워 몸부림을 치면서,

‘나두 몰라요!’

고함쳐 포악이라도 하고 싶었다.

세 모녀가 잠시 말이 없이 잠잠하고 있다가 유씨가 다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데 계봉이가 얼른 내달아, 초봉이한테 의미 있는 눈을 찌긋째긋,

“언니 참 잘됐구려? 그만하믄 오케이지, 무얼 생각하구 있어? 하하하…… 우리 언니가 인전 다네노코시를 타게 됐단 말이지! 하하하.”

웃어 대면서 언중유언의 말로 짓궂게 놀려 주고 있다.

초봉이는 눈을 흘기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다.

“언니, 내일 아침버텀은 밥 내가 하께, 응? 해해…… 척 이렇게 서비슬 해야 한단 말이야…… 그 대신 인제 언니 결혼하구 나서 혹시 서울루 가게 되거들랑 나 공부 좀 시켜 주어야 해? 응”

“……”

“아이, 왜 대답을 안 해…… 난 많이두 바라지 않구, 자그만치 의학전문이나 약학전문 하나만 마쳐 주믄 그만이야.”

계봉이는 이 자리에서는 형을 놀리느라고 장난삼아 하는 말이지만, 그가 의학전문이나 약학전문을 다녀, 한 개 버젓한 기술을 캐치하고 싶어하는 것은 노상 두고 하던 말이요 진정이었다.

“온…… 같잖은 년이!”

유씨가 계봉이를 타박을 하는 것이다.

“……이년아, 네 따위가 공분 더 해서 무얼 하니…… 사람 으젓잖은 것 공부시키기 공력만 아깝지!”

“어이구 어머니두…… 그래두 나두 언니 덕 좀 볼걸…… 어머니 아버지두 인제 부자 사위한테 단단히 덕 볼려믄서…….”

“저년을, 주둥아리를…….”

유씨는 그만 펄쩍 뛰면서 계봉이를 때릴 듯이 벼른다.

“안 그러께요 어머니! 다신 안 그러께요…… 그렇지만 어머니…… 저 거시키 조사나 잘 좀 해보았수”

“아 이년아, 조사가 무슨 조사야”

“그 사람이 부자요, 다아 양반이요, 그리구 어머니 말대루 전문대학교를 졸업하고, 그리구 또 …….”

“그년이 곤달걀 지구 성 밑엔 못 가겠네.”

“하하하하…… 그럼 언니가 곤달걀 푼수밖에 안 되나”

“저년을 거저!…… 아 이 계집애년아, 느이 아버지하면 내면 다아 오죽 알아서 할라구, 네년이 나서서 건방지게 쏘옥쏙 참견을 하려 들어”

“네에, 다아 그러시다면야…… 나두 다아 언닐 생각해서 그런 거랍니다.”

“이년아, 고양이 쥐 생각이라구나 해라!”

“네에, 언니가 아까는 곤달걀이라더니, 인전 또 쥐라!…… 오늘 저녁에 울 언니가 둔갑을 많이 하는군!”

“저년을! 네 요년…….”

유씨는 을러메면서 옆에 놓았던 침척을 집어 들고, 계봉이는 얼른 날쌔게 마루로 해서 건넌방으로 달아난다.

“……이년 인제 보아라. 등줄기에서 노린내가 나게시리 늑신 두들겨 줄 테니…… 사람 못된 년 같으니라구!”

유씨는 부아는 났어도 일변, 계봉이가 건넌방으로 가고 없는 것이 다행했다. 그는 인제 마지막으로 초봉이한테 하려는 그 말은 ‘여우 같은 그년’ 계봉이가 있는 데서는 내놓기가 겁이 났었다. 보나 안 보나, 그 주둥아리에 또 무어라고 말참견을 해서 속을 상해 줄 테니까(……가 아니라 실상은 계봉이가 무서워서).

유씨는 부아를 삭이느라고 한동안 잠자코 바느질만 하다가 이윽고 목소리를 훨씬 보드랍게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그리구 이런 말이야 아직 네한테까지 할 건 없지만, 기왕 말이 난 길이니…… 그 사람이 이렇게 하기로 한다더라…… 혼수 비용을 자기가 말끔 대서 하기두 하려니와, 또 우리가 이렇게 간구하게 지낸다니까, 원 그래서야 어디 쓰겠냐구, 그럼 인제 혼사나 치르구 나서 자기가 돈을 몇천 원이구(유씨는 몇천 원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대디리께시니, 느이 아버지더러 무어 점잖은 장사나 해보시란다구 그런다드구나!…… 그렇다구 너라두 혹시 에미 애비가 사우 덕에 호강을 할려구 딸자식을 부둥부둥 우겨서 부잣집으로 떠실어 보낼려구 하지나 않는고 싶어, 어찌 생각이 들는지는 모르겠다마는, 어디 설마한들 백만금을 준다기루서니, 당자 되는 사람이 흠이 있다든지, 또 깨렴직한 구석이 있다면야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내릴 일이지, 어쩌면 너를 그런 데루다가 이 에미 애비가 보낼 생각인들 하겠느냐? 그저 첫째루는 너를 위해서 하는 혼인이요, 그래 네가 가서 고생이나 않구 호강으루 살기두 하려니와, 또 그 사람이 밑천이라두 대주어서 장사라두 하면, 그게 그대지 나쁠 일이야 없지 않느냐”

유씨는 바늘귀를 꿰는 체하고 잠깐 말을 멈추고 딸의 기색을 살핀다.

“글쎄 이 애야!”

유씨는 다시 바늘을 놀리면서 음성은 별안간 처량하다.

“……너두 노상 그런 걱정을 하지만, 느이 아버지 말이다…… 그게 허구 다니는 꼬락서니가 그게 사람 꼴이더냐? 요전날 저녁에두 글쎄 두루매기 고름이 뜯어진 걸 다시 달아 달라구 내놓더구나! 아마 누구한테 멱살잽일 당한 눈치더라, 말은 안 해두…… 아이구 그 빈차리같이 배싹 야웨 가지군 소 갈 데 말 갈 데 안 가는 데 없이 다니면서 할 짓 못 할 짓 다아 하구, 그런 봉역이나 당하구, 그리면서두 한푼이라두 물어다가 어린 자식들 먹여 살리겠다구…… 휘유! 생각하면 애차럽구 눈물이 절루 난다!”

눈물이 난다는 유씨는 그냥 맹숭맹숭하고, 초봉이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이 좌르르 쏟아진다. 그것은 부친을 가엾어하는 눈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노상 그것만도 아니다.

그는 모친에게서 결혼을 하고 나면 태수가 장사 밑천으로 돈을 몇천 원 대주어서 부친이 장사 같은 것을 하게 한다는 그 말을 듣고는 다시는 더 여부없이 태수한테로 뜻이 기울어져 버렸다.

그거야 태수가 미리서 마음을 동요시킨 것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만한 조건이고 보면 필연코 응낙을 않던 못 할 초봉이다.

그러나 시방 초봉이는 제 마음의 한편 눈을 감고서라도 태수한테 뜻이 있어서가 아니요, 그 유리한 조건 그것 한 가지 때문이라고 해서나마, 안타까운 제 심정의 분열을 짐짓 위로하고 싶으리만큼 일변으로는 승재한테 대하여 커다란 미련과 민망스러움이 간절했다.

그러나 가령 그렇듯 박절하게 옹색스런 회포를 짜내지 않더라도 아무려나 아직까지는 그게 첫사랑의 싹이었던 걸로 해서 태수한테보다는 승재한테로 정은 기울어 있었던 게 사실이매, 그만한 미련의 상심(傷心)은 아무튼지 없지 못했을 것인데, 마침 겹쳐서 모친 유씨의 그 눈물만 못 흘리지 비극배우 여대치게 능청스런 ‘세리프’가 있어 놓으니, 또한 비감(悲感)의 거리가 족했던 것이요, 게다가 또다시 한 가지는, 그러한 부친과 이러한 집안을 돕기 위하여 나는 나를 희생을 한다는 처녀다운 감격…… 이렇게나 모두 무엇인지 분간을 못 하여 뒤엉켜 가지고 눈물이라는 게 흘러내린 것이다.

닷새가 지나, 오늘은 양편이 탑삭부리 한참봉네 안방에 모여서 초봉이와 태수가 경사로운 약혼을 하는 날이다.

태수 편에서는 다 그럴 내력이 있어서 혼인을 급히 몰아친 것이요, 정주사 편에서도 역시 하루바삐 ‘장사’를 할 밑천이 시각이 급해, 그저 하자는 대로 응 응 하고 따라갔던 것이다.

신부 편에서는 규수 초봉이와 정주사와 형주가 오고, 신랑 편에서는 태수가 가장 친하다는 친구 형보를 청했고, 탑삭부리 한참봉네 내외는 주인 겸 신랑 편이다.

다섯시에 모이자고 했는데 여섯시에야 수효가 정한대로 겨우 들어섰다.

형보는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보는 초봉이를 보고는 깜짝 놀란다.

그는 절절히 탄복하면서

‘아, 요놈이!’

하고 샘을 더럭 내어 태수를 쳐다보았다.

형보의 눈에 보인 대로 말하면, 초봉이는 청초하기 초생의 반달 같고 연연하기 동풍에 세류 같았다. 시방 형보가 초봉이를 탐내는 품은 태수가 초봉이한테 반한 것보다 훨씬 더했다.

‘고걸, 고걸 거저, 손아구에다가 꼭 훑으려 쥐고서 아드득 비어 물었으면, 사뭇 비린내두 안 나겠다!’

형보는 정말로 침이 꿀꺽 삼켜졌다.

‘고것 오래잖아 콩밥 먹을 놈 주긴 아깝다! 아까워, 참으로 아까워!’

형보는 꽹하니 뚫려 가지고는 요기(妖氣)조차 뻗치는 눈망울을 굴려 초봉이와 태수를 번갈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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