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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23) -채만식-

카지모도 2021. 4. 29. 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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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사는 아랫동네의 약국으로 마을을 내려가려고 벗었던 양말을 도로 집어 신으면서 유씨더러, 초봉이가 오거든 우선 서울은 절대로 보내지 않을 테니 그리 알고, 겸하여 이러저러한 곳에 혼처가 났으니 네 의향이 어떠냐고 물어 보라는 말을 이른다.

“성현두 다아 세속을 쫓는다는데, 그렇게 제 의향을 물어 보는 게 신식이라면서”

정주사는 마지막 이런 소리를 하면서 대님을 다 매고 일어선다.

“그럼 절더러 물어 보아서 제가 싫다면 이 혼인을 작파하실려우”

유씨는 그저 지날 말같이 웃음엣말같이 한 말이지만, 은연중에 남편을 꼬집는 속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변 유씨가 자기 자신한테도 일반으로 마음 결리는 데가 없지 못해서 말이다.

“제가 무얼 알아서 싫구 말구 할 게 있나…… 에미 애비가 조옴 알아서 다아 제 배필을 골랐으리라구.”

“그린 걸, 제 뜻을 물어 보랄 건 무엇 있소”

“대체 여편네하구는, 잔소리라니!…… 글쎄 물어 보아서 저두 좋아하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고, 만약에 언짢아하거들랑 알아듣두룩 깨우쳐 일르지”

“그걸 글쎄 낸들 어련히 할까 봐사 그리시우…… 잔소린 먼점 해놓구설랑…… 어여 갈 데나 가시우.”

정주사는 핀잔을 먹구서야 그만 해두고 마루로 나간다.

마침 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유씨는 초봉이가 들어오나 하고 귀를 기울였으나 마당에서 정주사와 인사를 하는 승재의 음성이다.

‘오오, 승재가!’

유씨는 새삼스럽게 승재한테 주의가 가던 것이다. 그럴 내력이 있었다.

유씨는 실상인즉 진작부터 초봉이가 승재한테 범연치 않은 기색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꼭이 그래서뿐만 아니지만 그첨저첨해서 그는 승재를 맏사윗감으로 꼽고서 두루 유념을 해왔던 것이다.

말이 많지 않고, 보매는 무뚝뚝한 것 같아도 맘이 끔찍이 유순하고 인정이 있는 것이 무엇보다도 유씨의 마음에 들었다.

한번 그렇게 마음에 들고 나니 그 담엣것은 다 제풀로 좋게만 보여졌다.

그의 듬직한 성미는 사람이 무게가 있는 것같이 미더운 구석이 있어 보였다.

그가 지금은 다 그렇게 궁하게 지내지만, 듣잔즉 늘잡아서 내년 가을이면 옹근 의사가 된다고 하니, 의사가 되기만 되는 날이면 돈도 벌고 해서 거드럭거리고 지낼 거야 묻지 않아도 빤히 알 일이요, 그러니 그때 가서는 마음 턱 놓고 딸을 줄 수가 있을 것이었었다.

하기야 한 가지 마음 걸리는 데가 없지도 않았다.

승재는 부모도 없고 친척도 없이 무대가리같이 굴러다니는 사람인 걸, 도대체 근지가 어떠한지 알 수가 없었다.

옥에 티라고나 할까, 이것 한 가지가 유씨의 승재에게 대한 불안이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는 묘리대로, 그것 또한 변법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지금 세상에 근지가 무슨 아랑곳 있나’

‘양반은 어디 있으며, 상놈이 어디 있어’

‘저 하나 잘나고 돈만 있으면, 그게 양반이지.’

이렇게 유씨는 이녁의 편리를 위하여 승재의 근지 분명치 못한 것을 관대하게 처분을 내렸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명년 가을에 승재가 의사가 되기를 기다려 그를 사위를 삼겠다고 정녕코 작정을 한 것은 아니었었다. 역시 사윗감으로 좋게 보고서 눈여겨두었을 따름이지.

유씨는 그러했지만 정주사는 결단코 그렇지 않았었다. 그는 승재 따위는 애당초 마음도 먹어 본 일이 없었다.

물론, 승재가 생김새와는 달라 인정이 있고, 행동거지가 조신한 것은 정주사 자신도 두고 겪어 보는 터라 모르는 바는 아니었었다.

그러나 당장 눈앞에 보이는 초라한 승재, 그가 의사가 되어 가지고 돈도 많이 벌고 의표도 훤치르르하고, 이렇게 환골탈태해서 척 정주사의 눈앞에 현신을 한다면 그때 가서야 정주사의 생각도 달라지겠지만 시방의 승재로는 간에도 차지를 않았다. 그는 유씨처럼 승재가 일후 잘되게 되는 날을 미리 생각해 보려고를 않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초봉이가 승재한테 무슨 다른 기색이 있는 눈치를 안다거나, 또 유씨라도 승재를 가지고, 자, 약시 이만저만하고 이만저만해서 나는 이 사람을 초봉이의 배필로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렇게 상의를 한다면 정주사는 마구 훌훌 뛸 것이었었다.

대체 어디서 굴러먹던 뉘 집 뼈다귄지도 모르는 천민(賤民)을 가지고 어엿한 내 집 자식과 혼인을 하다니 그런 해괴망측한 소리가 있더란 말이냐고, 그 노랑수염을 연신 꼬아 추키면서 냅다 냉갈령을 놓았을 것이었었다. 그 끝에 유씨한테 듭신 지천을 먹기도 하겠지만.

아무튼 그래서 유씨는, 남편의 그러한 솔성을 잘 아는 터라 아예 말눈치도 보이지 않고 그저 그쯤 혼자 속치부만 해두고 오늘날까지 지내 왔었다.

그러자 오늘 별안간, 고태수라는 신랑감이 우선 외양도 눈에 차악 고일 뿐만 아니라 천하에도 끔찍한 이바지를 가지고서 선뜻 눈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유씨는 태수가 나타나자 그의 외양과 들이미는 소담스런 이바지에 그만 흠탁해서 여태까지 유념해 두고 지내던 승재는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태수 하나만 가지고 여부없이 작정을 해버렸던 것이다. 태수는 혼자 가서 첫째를 한 셈이다.

유씨는 그렇게 작정을 하고 나서 그러고도 종시 승재라는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는데, 마침 승재의 음성이 들리니까 비로소 주의가 갔던 것이다.

유씨는 그제야 승재를 태수와 대놓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쌍으로 선 무지개처럼, 빛이 곱고 선명하니 가깝게 있는 며느리 무지개는 태수요, 뒤로 넌지시 있어 희미한 시어머니 무지개는 승재인 양, 도시 이러니저러니 할 것도 없을 성싶었다.

태수가 그처럼 솟아 보이는 것이 흡족해서 유씨는 무심코 빙그레 웃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 끝에 문득, 그만큼이나 무던하다고 본 승재를 그대로 놓치게 되는가 하면 일변 아까운 생각도 들었다.

이 아깝다는 생각에는, 그보다 앞서서 욕심 하나가 돋쳐 나왔었다. 그는 승재를 그냥 놓아 버릴게 아니라 작은딸 계봉이의 배필로 붙잡아 두고 싶던 것이다.

지금 스물다섯 살이라니까 계봉이와는 나이 좀 층이 지기는 해도, 여덟 해쯤 대사가 아니었었다.

그러니 아무려나 승재는 그 요량으로 유념해 두고서 후기를 보기로 작정했다. 하고 본즉 유씨는 하룻밤에 한 자리에 앉아서 큰사위 작은사위를 다 골라 세운 셈이 되고 말았다.

아홉시나 되었음직해서 초봉이가 돌아왔다.

유씨는 들어오는 초봉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깜짝 놀란다.

“너 어디 아프냐”

눈이 폭 갈리고 해쓱한 얼굴이며 더구나 핏기 없는 입술이, 결코 심상치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초봉이는 대답은 해도 말소리에 신명이 하나도 없고, 방으로 들어서자 접질리듯 주저앉는 몸짓에도 완구히 맥이 없어 보인다.

유씨는 바느질하던 것도 내려놓고 성화스럽게 딸을 바라본다.

“아니라께? 응…… 저녁은 아까 형주가 날라 갔지? 먹었니”

“네에.”

“그럼 늦게 일을 해서, 시장해서 그리나 보구나”

“아니.”

“그럼 왜 신색이 저러냐…… 어디가 아픈 게루구먼? 분명히 아픈게야!”

“아이, 어머니두!”

초봉이는 강잉해서 웃으려고 하는 모양이나, 웃는다는 게 웃는 것 같지도 않다.

“……내가 어쨌다구 그리시우? 난 아무렇지두 않은데.”

“아무렇지도 않은 게 다아 무어냐? 사람이 꼬옥 중병 치르구 난 것처럼 신색이 틀렸는걸…… 어디가 아파서 그러거던 아프다고 말을 해라! 약이라두…….”

“아프긴 어디가 아프우? 아무렇지두 않다니깐.”

초봉이는 성가신 듯이 이마를 가늘게 찌푸린다.

초봉이는 아까 아침에 나갈 때만 해도 넘치게 명랑했었다.

오늘은 저녁때부터 새 주인한테 가게를 아주 넘겨 주고 내일 하루는 집에서 쉬고 모레는 밤차로 서울로 가고 한다고, 사람이 본시 진중하니까 사뭇 쌔왈거리거나 하지는 않았어도, 혼자 속으로 좋아서 못 견디어하는 눈치는 완연했었다.

그는 그새도 늘 어머니만 믿으며 어쨌든지 아버지가 못 가게 막지 못하도록 가로맡아 주어야 한다고 모녀가 마주앉기만 하면 뒤를 누를 겸 신신당부를 했고, 오늘 아침에 나갈 적에도 모친을 가만히 부엌으로 불러내어 그 말을 하면서 모친이 염려 말라고 해주니까 그저 입이 벙싯벙싯하는 것을 손등으로 가리고 나가기까지 했었다.

그랬었는데 지금 저녁에는 갑자기 신색이 말이 아니게 틀려 가지고 맥이 없이 들어오니까, 유씨는 처음에는 필경 몸이 아파서 그러는 줄로만 애가 쓰여서 그다지 성화를 한 것이다.

그러나 차차 보니, 제 말대로 역시 몸이 아픈 것은 아니고 무엇을 걱정하는 것 같은, 낙담한 것 같은 그런 기색이 엿보였다.

그러면 혹시 가려던 서울을 못 가게 되어서 그런 것이나 아닌가. 물론 집안엣일을 제가 그새 벌써 알았을 이치는 없고, 그렇다면 달리 무슨 곡절이 생긴 모양인데…… 대체 어찌 된 까닭인고

…… 유씨는 이렇게 두루 생각을 해보느라고 잠잠히 손끝의 바늘만 놀리고 있다.

초봉이는 잠자코 한동안 말이 없이 앉았다가 문득,

“어머니, 난 서울 못 가게 됐다우!”

하는 게 마치 성가신 남의 말을 겨우 전갈하듯 한다.

“으응? 왜”

유씨는 속으로는 그런 것 같더라니 하고서도 짐짓 놀란다. 그는 짐짓 놀라는 체했지, 속으로는 그거 일은 실없이 잘되었다고 마음에 썩 다행스러웠다.

유씨는 방금 오늘 아침까지도 딸더러 부친이 막는 것은 가로맡을 테니 염려 말라고 장담을 하면서 서울로 가라고 해왔었다.

그러던 것을 그날 하루가 다 못 가서 같은 그 입을 가지고, 이 애 너 서울 못 간다, 이 말을 하기는 아무리 모녀지간이요, 또 갑자기 좋은 혼처가 나선 때문이지만, 그래도 낯간지러운 노릇이었다.

그런데 계제에 제가 먼저 서울을 가지 못하게 되었단 말을 하고 보니 유씨는 이런 순편할 도리가 없던 것이다.

초봉이는 제가 한 말이고 모친이 묻는 말이고를 다 잊어버린 듯이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겨우 내키지 않게,

“아저씨가 오지 말래요.”

“아저씨? 제호 말이지”

“네에.”

“왜? 어째서”

물어도 초봉이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이 없다.

“아니, 글쎄…….”

유씨는 서슬을 내어 성구려 든다.

“……제가 자청을 해서 가자구 해놓구는 인제는 또 오지 말란다니, 그건 무슨 놈의 변덕인구…… 그런 실없은 일이 어딨다더냐”

물론 이편은 버젓한 혼인을 하게 된 고로 그렇지 않아도 일을 파의시켜야 할 판이었고, 그러니 절로 파의가 된 것이 다행이긴 하지만, 그건 그것이고 이건 이것이지, 생각하면 괘씸하고 도무지 경우가 그른 짓이다.

일껏 제 입으로 가자고 가자고 해서 다 말짜듯이 짜놓고는, 인제 슬며시 오지 말라고 한다니, 그래서 남의 집 어린 자식을 저렇게 신명이 떨어져서 죽을 상 되게 하다니.

요행 보내지 않기로 조금 전에 작정을 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유씨는 단박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쫓아가서 속이라도 시원하게 시비를 가리자고 들 그의 승벽이다.

사실 그는 당장에 초봉이가 가엾은 깐으로는 그대로 부르르 달려가서 제호의 턱밑에다 주먹을 들이대고, 자, 무슨 일로 그랬습나? 그런 경우가 어딨습나? 그만두소, 그까짓놈의 서울 안 보내도 좋습네, 보아란 듯이 버젓한 신랑감을 골라서 혼인을 하겠습네, 이렇게 콧구멍이 뻐언하도록 몰아세워 주고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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