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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27) -채만식-

카지모도 2021. 5. 3.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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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뜻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승재는 제 스스로도 의외로워할 만큼 가슴의 격동이 대단했고, 그것이 자연 얼굴에까지 나타나지 않질 못했다.

그렇듯 격동을 받아 놀라다가, 그는 이다지도 놀랄까 싶어, 그것이 또한 놀랍기도 했거니와 퍼뜩 다른 생각이 들면서 그만 계봉이를 보기에도 점직해, 얼른 기색을 숨기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시치미를 뗐던 것이다.

이것은 그러나, 그가 별안간에 의지력이 굳센 초인(超人)이나 어진 성자(聖者)가 된 때문도 아무 것도 아니다.

그는 계봉이가 흘개가 빠졌다고 지천을 하는 꼭 그대로, 주변성도 없고 저를 떳떳이 주장하지도 못하고 일에 겁(怯 : 내성)부터 내는 솜씨라, 가령 오늘 밤만 하더라도 선뜻, 아뿔싸! 내가 남의(초봉이의) 마음을 알지도 못하고서…… 괜히 속없는 요량을…… 이런 망신이라니! ……이 생각이었던 것이다.

--초봉이는 나한테 아무 뜻도 있었던 게 아니요, 단지 그저 사람됨이 착하고 상냥해서 보이기를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실상 말이지, 무엇을 가지고 초봉이가 나한테 향의가 있었다는 것을 주장을 할 테냐? 요전날 밤에 계봉이가 자리끼 숭늉을 가지고 나와서 쐐알거리던 말도, 짐짓 나를 놀려먹느라고 한 소리가 아니면, 저도 잘못 짐작을 하고서 그런 것일 게다. 글쎄 그런 것을 나혼자서만 건성 김칫국을 마시듯이 물색없이 좋아하다니! 그러고서 그가 결혼을 한다니까 후닥닥 놀라다니!

참말로, 큼직한 보자기가 있었으면 좋겠는 이 무렴을 끄느라고, 그는 계봉이가 보는 데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체, 그다지 능란하지도 못한 연극을 하느라고 한 것이다.

계봉이는 저 하고 싶은 대로 실컷 더 구박을 하다가 들어갔고 책상에 팔을 얹어 턱을 괴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승재는 마음이 세 갈래 네 갈래로 흐트러져, 시간이 가고 밤이 깊고, 다시 날이 밝는 것도 몰랐다.

제 몸뚱어리를 송두리째 어디다가 잃어버린 것 같은 헛헛함, 비로소 느껴지는 고독, 드세게 머리를 쳐들고 일어나는 초봉이에의 애착, 그러한 초봉이를 장차 차지할 고태수라는 미지의 인물에 대한 맹렬한 질투…… 승재로는 일찍이 겪어 보지도 못한 번뇌였었다.

꼬박 뜬눈으로 앉아서 밤을 새웠고, 훤하니 밝은 마당으로 내려섰을 때는 이 집이 감개도 깊거니와 일변 등뒤에서 누가 손가락질이나 하는 것만 같아서, 도망하듯 문간 바깥으로 나왔다. 다시는 얼굴을 쳐들고 이 집에는 들어서지 못할 듯싶었다.

뚜벅뚜벅 비탈길을 내려오면서 승재는 생각이다.

아무래도 어디 딴 데로 방을 구해서 옮아 가는 게 좋겠다. 물론 갑자기 이사를 한다면 계봉이는 물론 온 집안 식구가 속을 몰랐던 사람까지 되레 눈치를 채기 십상이요, 그래서 용렬한 사내자식이라고 삐쭉거릴 것, 그러니 그도 난처는 하다. 그렇지만 그게 난처하다고 그냥 눌러 있자니 그건 더 못 할 노릇이다. 누가 아무려거나 역시 옮아 버리는 게 상책이겠다…….

승재는 이렇게 작정을 하고서 병원에 당도하던 길로 아범(인력거꾼)을 시켜, 병원 근처로 몇 집을 우선 돌아다녀 보게 했다.

마침 병원에서 정거장 쪽으로 얼마 안 가노라면 ‘스래(京浦里)’로부터 들어오는 큰길과 네거리가 된 바른편 모퉁이에, 영감네 내외가 벌여놓고 앉은 고무신가게가 있고, 그 안으로 삼조짜리 다다미방 하나가 빈 게 있어서 그놈을 두말 않고 빌리기로 했다.

방은 뒤로 구석지게 붙었고 따로 쪽대문이 있어서, 주인네와는 상관없이 출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밤에 조용히 앉아 공부를 한다든지, 불려다닌다든지 하기에 십상인 품이, 되레 초봉이네 아랫방보다도 방만은 마음에 들었다.

오후 네시가 좀 지나서 승재는 새로 얻은 방을 닦달을 하려고 나서다가 마침 환자가 왔기 때문에 그대로 붙잡혔다.

환자는 처음 온 환자인데 처음 오는 환자는 주인 달식이가 초진을 하는 시늉을 하지만, 왕진을 나갔든지 해서 없으면 승재가 그냥 진찰을 한다.

환자는 간호부의 지휘로 벌써 진찰실 한옆에 차려 놓은 진찰탁(診察卓) 옆의 둥근 걸상에 가 단정히 걸터앉았고, 승재는 벗었던 가운을 도로 꿰면서, 직업적으로 환자를 한번 훑어본다.

역시 어떠한 환자나 일반으로, 사람처럼 생긴 사람이요, 그러나 양복과 신수가 멀쩡하니 이건 갈데없이 화류병(花柳病) 환자요, 하는 외에는 더 특별한 인상도 주의도 안 했고 또 그게 의사로서 보통인 것이다.

“성함이 누구시죠”

승재는 환자와 무릎이 서로 닿을 만큼 바싹 놓여진 진찰탁 앞의 회전의자에 걸터앉아 카르테를 펴놓고 잉크 찍은 철필 끝을 들여다보면서, 종시 직업적으로 무심히 묻는 말이다.

그러나 천만의외지, 환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대답이,

“네, 고태수라고 합니다.”

승재는 하릴없이, 별안간 누가 면상에다가 물이라도 쫙 끼얹은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 반사적으로 쳐든 얼굴로 뚫어져라고 태수의 얼굴을 건너다본다.

‘으응!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

승재는 이윽고 두근거리던 가슴을 진정하고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실상은 저도 모를 소리를 속으로 뇌느라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리는 것이다.

사실 그는 생각도 안 했다가, 별안간 고태수라는 그 사람과 섬뻑 만나 놓고 보니, 미처 무엇이 어떻다고 할 수가 없고, 어안이벙벙할 따름이었다.

그는 제 직업도 잊어버리고, 그대로 태수의 얼굴을 건너다보고 있다.

해맑은 얼굴이 갸름하되 홀쭉하지 않고, 볼때기가 도독한 것이며, 이목구비가 모두 골라서 미남자로 생긴 태수의 모습사리가 승재는 단박 판에 새긴 부각(浮刻)처럼 똑똑하게 머릿속으로 들어박히고, 그것이 백 년을 가도 잊혀질 것 같지 않았다.

‘흐응, 네가 고태수라아!’

일단 더 정리가 된 적의(敵意)로부터 우러나오는 마음속의 세리프다.

승재는 시방 이 사나이를 이렇게 만난 것이 어쩐 일인지 반가운 것 같은, 재미있는 것 같은, 그러면서 한옆으로는 해사하니 이쁘게 생긴 그의 얼굴을 무얼로다가 들이 으깨 주고 싶은 충동도 일어났다.

무례하다 하리만큼 얼굴을 똑바로 건너다보면서 기색이 심상치 않은 의사란 자의 태도에 태수는 마침내 이마를 찡그리고 낯꽃이 좋잖아진다.

“왜? 나를 아시나요”

누가 태수라도 따지자고 할밖에…….

“네, 아 아니오!”

승재는 그제야 정신이 들어 얼른 고개를 수그리고 펜을 놀린다.

태수는 이 괴한(怪漢)이 여간만 불쾌한 게 아니다.

그는 며칠 전부터 ××이 도졌고, 그래서 그새 줄곧 병원에 다녔는데, 그게 한번 도지면 좀처럼 낫지를 않는 줄은 번연히 알면서도 첫째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고, 또 혼인날도 며칠 남지 않았고 해서 혹시나 무슨 별 도리가 없을까 싶어, 마침 병원이 지금까지 다니던 그의 단골 병원보다 낫다는 소문이 있고 하니까 오늘은 시험삼아 이 금호의원으로 와본 것이다.

그러나 와서 본즉, 병을 보아 주겠다고 처억 나서는 위인이 우선 정나미가 떨어졌다. 태수가 보기에는 의사라고 하기보다는 기껏해야 제약사요, 그러잖으면 병원 ‘고쓰가이’ 푼수밖에는 못 될성싶었다. 더구나 체격이며 얼굴 생김새는 몸에다가 돈을 지니고 호젓한 데서 만날까 무서울 지경이다. 태수가 승재를 본 첫인상은 이러했다.

그래서 태수는 속이 찜찜한 판인데, 이건 성명을 대주니까 대체 무엇이 어쨌다구 남의 얼굴을 마구 뚫어지게 치어다보면서 뚱딴지같이 구는 데는, 의사고 무엇이고 한바탕 들이대고 싶게 심정이 상했다.

“어디가 편찮으신가요”

승재는 이내 고개를 숙인 채, 연령과 주소와 직업을 물어, 일일이 제자리에 쓰고 나서 비로소 철필을 놓고 회전의자를 빙그르르 돌려 태수와 마주앉는다.

그는 이 말을 묻기가 무서웠다. 보나 안 보나 화류병이기 십상인데, 제발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람이 착실하여 결혼 전에 건강진단을 하자는 것이었으면 하는 원념으로 다뿍 긴장이 되기까지 했다.

“××인데요……”

태수는 불쾌하던 끝이나 울며 겨자먹기로 오히려 점직해하면서 대답을 한다. 처음도 아니요, 또 의사 앞에서라지만 젊은 간호부까지 대령하고 섰는데서 부끄럼을 타는 불결한 병을 말하기란 누구나 마찬가지로 거북하고 창피할밖에 없는 것이다.

“×? ×”

승재는 짐작은 한 바이지만, 의사답지 않게 소리를 지른다.

--바로 며칠 아니면 초봉이와 결혼을 할, 소중한 그 초봉이와 결혼을 할 네가 천하에 고약하고 더러운 ××을 앓다니!

승재는 사뭇 치가 떨리는 것 같았다.

태수는 그러잖아도 점직한 판에 승재가 또 소리를 꽥 지르고 놀라고 해놓으니 더욱 무렴하기도 하거니와, 대관절 이게 의사가 아니고 미친놈이나 아닌가 싶었다.

“언제부터 편찮으셨나요”

승재는 이윽고 다시 의사가 되어 가지고 손을 내밀면서 묻는다.

“병이 생기기는 벌써 작년 가을인데, 치료해서 낫긴 나았어요, 그랬는데 자꾸만 도지구 해서…….”

“근치가 되지를 않았던 게지요, 그런 것을 조심을 안 하시니까…… 그러시면 안 됩니다! 조심을 하셔야지.”

승재는 제 요량만 여겨, 시방 초봉이의 남편 될 사람더러 충고하는 것이다. 태수는 그따위 참견은 다 아니꼬웠지만 절에 간 색시라,

“글쎄요, 그런 줄이야 다아 알지만, 자연…….”

하면서 어물어물거리다가,

“……그런데 좀 급한 사정이 있는데요…… 인제 한 사오 일 동안에 치료가 안 될까요”

승재는 속으로,

‘네가 이 녀석 단단히 급했구나!’

이런 생각을 하니 원수를 잡아다가 발밑에 꿇려 앉힌 것처럼 기광이 나는 것 같았다.

“거 안 될 겝니다!”

승재는 커다랗게 고개를 흔들다가,

“……아무튼 진찰을 해봐야 알겠지만, 아주 초기라두 어려울 텐테 만성이면 더구나…….”

“그래두 사정이 절박해서 그리는데요? 그래 상의를 해볼 겸, 또…….”

“무슨 일이십니까? 여행을 하십니까…… 여행 같으면 그 병엔 더구나 해롭습니다!”

승재는 짐짓 이렇게, 제 딴에는 태수를 구슬린다는 요량이다.

“아닙니다. 여행이 아니라…….”

“그럼”

승재는 심술궂게 추궁을 하고, 태수는 주저주저하다가,

“결혼을 하게 됐답니다, 헤.”

하면서 빙깃 웃는다.

“겨얼혼”

승재는 허겁스럽게 소리를 지르고 놀라는 시늉을 하면서 설레설레 고개를 흔든다.

“……결혼을 하시다니! 건 안 됩니다. 차라리 혼인날을 넌즈시 물리십시오.”

이 말은 의사로서 당연한 권고다. 그러나 승재는 결코 태수를 위해서 권고하자는 뜻이 아니다.

차라리 태수를 끕끕수를 주고 싶어서 하는 말이요, 그보다 더, 그래저래하다가 이 혼인이 파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심술로다가 하는 말이다.

그러나 태수는 또 태수라, 저도 고개를 쌀쌀 흔든다. 그는 혼인을 물리라다니 천만에 당찮은 수작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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