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Books/Reading Books

<R/B> 탁류(40) -채만식-

카지모도 2021. 5. 18. 04:27
728x90

 

죽기로 (결심이 아니라, 죽어야 한다고) 하고 나니 비로소 뭇 생각과 감정이 복받쳐오른다.

분하기가 이를 데 없다. 그 생김새부터 흉악한 저놈 장가놈한테 이 욕을 보다니, 그러고서 속절없이 죽다니, 당장 식칼이라도 들고 쫓아가서 구렁이같이 징그럽고 미운 저놈을 쑹덩쑹덩 썰어 죽이고 싶은 생각이 물끈물끈 치닫는다.

그렇지만 만약에 그랬다가는 내 부끄러운 것이 내가 죽은 뒤에라도 드러나고 말 테니, 또한 못할 노릇이다. 속시원하게 원수풀이도 못 하다니 가슴을 캉캉 찧고 싶다.

대체 이이는 어떻게 된 셈인고? 장가놈이 말한 대로 한참봉네 집엘 가서 정말 그렇게 하고 있는가

설마 그럴라구? 장가놈이 괜히 꾸며 댄 허튼 소리겠지. 그렇다면 어째서 그따위 소리에 가뜩이나 기가 질려 가지고는 맘껏 항거라도 해대질 못했던고!

분한지고! 이 원한을 못 풀고 그대로 죽다니. 내가 소리 없이 이렇게 죽어 버리면 어머니 아버지며 동생들은 오죽 놀라고 설워하리.

어느결에 눈물이 맺혀 내리고 절로 울음이 솟아쳐 나오는데, 그럴 때에 마침 요란히 대문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초봉이는 울음을 꿀꺽 삼키면서 반사적으로 일어서기는 했으나, 대답을 하고 나올 염을 못 하고 그대로 선 채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한다. 남편을 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가슴이 맞방망이치듯 두근거리고, 어째서 진작 목을 매든지 찻길이나 선창으로 나가든지 하질 않고서 여태 충그리고 있었더란 말이냐고, 당장 목을 맬 밧줄이라도 찾는 듯이 방 안을 둘러본다.

그러자 연거푸 대문을 흔드는 사이사이에,

“여보오 여보, 문 좀 열어요!”

하면서 부르는 음성이며 말투가, 분명 태수가 아닌 것을 퍼뜩 깨달았다.

초봉이는 남편이 돌아온 게 아닌 것이 섬뻑 마음이 놓이더니, 그러나 이어 그와는 다르게 새로 가슴이 더럭 내려앉았다.

그러면 장가놈이 하던 소리가 빈말이 아니고 무슨 탈이 난 것인가, 이런 의심이 들면서 그는 더 지체할 경황이 없이 가만가만 대문간으로 밟아 나온다.

“누구세요”

초봉이의 음성은 저도 알아보게 떨렸다.

“이게 고태수 집이래지요”

대문 밖에서 되묻는 건 갈데없는 순사의 말씨다. 마침 철그럭 하는 칼소리까지 들린다.

인제는 장형보의 하던 소리와, 그리고 무슨 탈이 났다는 것은 더 의심할 여지도 없다. 그러나 어떻게 돼서 혹시 장가놈이 내가 까무러쳤던 사이에 나가서 뒤로 무슨 흉계를 꾸몄다면 모르지만, 그러나 나를 그래 놓고서 억하심정으로 그렇게까지 할 며리도 없는 게 아닌가

또 몰라, 그놈의 짓이니…… 그렇지만 그 동안이 얼마나 된다고 어느 겨를에 나갔다가 들어오며…….

초봉이는 머릿속이 혼란한 채 밖에서 재촉하는 대로 대문을 열었다.

역시 시꺼먼 순사가 외등불 밑에 우뚝 섰다.

“고태수, 집에 왔소”

“네, 저어…….”

“응…… 그러면 저어, 오늘 저녁에 개복동 한서방네 집에, 그 집 안집에, 에 또, 간 일 있소”

“네에.”

“응, 응…….”

순사는 다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덱끄덱하더니,

“……그러면 저기 도립병원에 가보시우.”

“네에”

초봉이가 소리를 짜내면서 대문 밖으로 쏟쳐 나가는데 순사는 벌써 돌아서서 가고 있고, 여태 순사 뒤에 가 가려 섰다가 조그맣게 나서는 게 탑삭부리 한참봉네 집의 계집아이다.

“오! 너!…… 그래서”

초봉이는 숨차게 외치고, 계집아이도 초봉이 앞으로 와락 달려든다.

“저, 이 댁 서방님이…….”

계집아이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내다가 힐끗 순사를 돌려본다. 순사는 돌려다보지도 않고 멀찍이 가고 있다.

“그래서”

“이 댁 서방님이, 저어…….”

“으응, 그래서”

“저어, 아주 돌아가시게…….”

“머어”

초봉이는 정신이 아찔하여 몸이 휘둘리면서 쓰러지려고 하는 것을, 겨우 대문 문지방에 등을 지이고 선다. 그는 머릿속에 더운 물을 들어부은 것 같아 욱신거리기만 했지 잠시 어떻게 할 바를 몰랐다.

“아니, 웬일인가요”

등뒤에서 게다 끄는 소리가 달그락거리더니 형보가 뛰어나온다. 그는 허둥지둥하기는 해도, 아까 안방에서 건너간 뒤에 아직 잠을 자지 않고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대문간에서 웅성거리는 말소리를 대강 다 알아듣고도 물론 짐짓 의뭉을 피우던 것이다.

“……너 웬일이냐”

형보는 초봉이가 넋을 잃고 섰는 것을 힐끔 돌려다보다가 계집아이 앞으로 다가선다.

“저어, 이 댁 서방님이 다아 돌아가시게 돼서, 저어 병원으로…….”

“머어? 어째”

형보는 허겁스럽게 놀라는 체하는 것이나 속으로는, 일은 썩 묘하게 맞아떨어졌다고 좋아 죽는다.

“……거 웬 소리냐…… 대체 어떻게 된 일인데”

“저어, 우리 댁 나리가…….”

“응, 느이 댁 나리가”

“이 댁, 서방님을…….”

“그렇게…… 저어 뭣이냐, 돌아가시게 해놨단 말이지”

“네에.”

“네에라께…… 아니 글쎄…….”

“그리구 우리 아씨는 아주 그 자리서 돌아, 돌아가시구…….”

계집아이는 비죽비죽 울기 시작한다.

형보는 여편네 김씨까지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뜻밖이었으나 역시 그럴듯하기는 했다.

초봉이는 어느 틈에 큰길로 두달음질을 치고 있다.

“그럼 너는 느이 집으루 가보아라. 이 댁 아씬 내가 모시구 병원으루 갈 테니…….”

형보는 계집아이더러 말을 이르고서, 초봉이를 따라가느라고 유카다 자락을 펄럭거린다.

초봉이는 제가 병원엘 간다기보다도 등뒤에서 딸그락거리고 따라오는 형보한테 쫓기어 반달음질을 치고 있다.

‘이놈아, 이 천하에 무도한 놈아! 네가 이놈 나를…… 그리고 내 남편을…….’

초봉이는 돌아서서 이렇게 저주를 하고, 그의 죄상을 낱낱이 헤어 가면서 목청껏 외치고 싶었다.

그럴라치면 길가던 사람, 잠자던 사람 할 것 없이 숱한 사람이 모이고, 그 여러 사람들이 모두 달려들어 형보를 죽도록 때려 주고 걷어차고 할 것이고…….

게다를 신었어도 사내의 걸음이라, 몇십 간 가지 못해서 형보는 초봉이와 나란히 섰다.

“자동차라도 얻어 탑시다”

형보는 혹시 지나가는 자동차라도 없나 하고 앞뒤를 휘휘 둘러본다.

초봉이는 물론 들은 체도 않고 씽씽 가기만 한다.

“허, 그거 원!”

형보는 따라오면서 혼자말로 자탄하듯 두런거린다.

“……원 그럴 도리가 있더람!…… 그거 원 참!…… 그래, 어쩐지 전에두 보기에 위태하더라니!…… 글쎄, 결혼두 하구 했으면서 그런 위태한 짓을 할 게 무어람? 사람이 좀 당돌해서…… 당돌해서 필경 일을 저질렀어!”

실상 초봉이는 태수의 생명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애가 타기는 했어도, 일변 어찌 된 사맥인지 그것이 궁금하지 않을 것은 아니다.

“그러나저러나 간에…….”

형보는 인제는 바로 대고 초봉이더러 이야기를 건넨다.

“……실상, 고군이 오래잖아서 아무래도 죽기는 죽을 사람이었으니깐요…….”

‘무어야’

초봉이는 종시 못 들은 체하기는 해도 속으로는 대꾸를 않지 못한다.

“……은행 돈을 수우수천 원을 범포를 냈지요. 남의 소절수를 위조해 가지구설랑…….”

‘이 녀석이, 한단 소리가!’

“……그래 그것이 오래잖아 탄로가 날 테니깐, 그럴 날이면 창피하게 징역살이를 하느니 차라리 죽어 버린다구 그랬더라우. 오늘 아침에두 당신이 부엌에 내려간 새 나하구 그런 이얘길 한걸…… 행화두 태수가 죽는닷 소리는 육장 들었습넨다. 행화두 실상은 태수가 상관하던 계집인데 것두 여태 모르구 있습디다그려……”

‘무엇이 어째’

“……저의 집이 재산가요, 과부의 외아들이요, 전문학교 출신이요, 그게 다아 당신허구 결혼할 려구 꾸며 낸 야바우 속이라우, 야바우 속…… 보통학교만 겨우 마치구서 서울 ××은행 본점 급사루 들어갔다가 십 년 만에 행원이 된걸, 흥!”

‘아니, 무엇이 어째’

“……그리구 즈이 집은, 집두 터두 없어서 즈이 어머닌 머 어디라던가, 남의 셋방을 얻어 가지구 산답니다. 그날 혼인날 말이오, 내려오지두 않은 걸 보지? 내려오기는커녕, 혼인한다는 기별두 않은걸!”

‘거짓말 마라, 이 녀석아!’

“……이 군산바닥엔 그 사람네 본집이 어덴지 아는 사람이라구는 하나두 없어요. 당신한테두 아마 가르쳐 주지 않었으리다…….”

‘이 녀석아, 누가 네한테 그따위 개소릴 듣쟀어’

초봉이는 형보가 미운데다가 일이 안타까워서 그러는 것이지, 역시 형보의 말이 다 곧이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말이오, 다아 속내평이 그래서, 당신두 억울하게 속아 가지구, 말하자면 신세를 망친 셈이지요!”

‘무슨 상관이야’

“……그러니깐, 그저 지나간 일일랑 다아 잊어버리구서, 맘을 가라앉히시우. 내가 있는 이상, 장차에 살아갈 걱정은 할라 말구…….”

‘아니, 이 녀석이 가만 두어 두니까, 점점…….’

초봉이는, 형보가 인제는 바로 제 계집이 다 된 양으로 그렇게까지 말을 하는 수작이 하도 어이가 없어, 대체 어떻게 생긴 낯바대기를 하고서 이러느냐고, 침이라도 태액 뱉어 주고 싶은 것을 겨우 참는다.

“……집두 기왕 얻어 논 거요, 살림두 그만큼 채린 것이니, 일부러 그걸 떠헤치구 다시 채릴려구 할 거야 무엇 있소…… 되려 십상이지, 머…….”

“듣기 싫여!”

초봉이는 참다못해 발을 구르면서 한마디 외친다. 그 끝에 그는,

‘내가 네 간을 내먹자면 네 계집 노릇이라도 해야 하겠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차라리 안타깝다.’고까지 부르짖고 싶었던 것이다.

형보는 좀더 사람이 영리했다면 지금 이 경황중에, 더구나 태수의 흠을 들추어내 가면서 초봉이를 달래려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윽고 도립병원엘 당도하여 형보는 뒤에 처져서 순사가 묻는 대로 저 여자는 피해자 고태수의 아낙이요, 또 나는 한 집에서 지내는 그의 친구라고 온 뜻을 설명하고, 초봉이는 그대로 치료실 안으로 한 걸음 들여놓았다.

방금 맞은편에 있는 진찰대 옆에서는 간호부가 흰 홑이불로 태수의 몸뚱이를 머리까지 덮어씌우고 있을 때다.

그 흰 홑이불이 바로 죽음 그것임을 암시하는 것 같아, 초봉이는 머리끝이 쭈뼛하고 다리가 허든거렸다.

그는 무엇에 질리듯 더 들어서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칫 멈춰 선다.

마침 의사가 귀에서 청진기를 떼어 들고 돌아서면서, 이편 쪽으로 걸상을 타고 앉은 경부보더러 나른하게,

“모, 다메데스(운명했습니다)!”

란 말을 한다.

그러다가 마침 들어서는 초봉이를 힐끔 건너다보더니, 이어 본 둥 만 둥 커다랗게 하품을 씹는다.

경부보는 직업에 익은 대로 초봉이의 위아래를 마슬러보다가,

“고테수노, 오카미상(아내)요”

“네에.”

초봉이의 대답은 절로 떨리면서 목 안으로 까라진다.

“우응…….”

경부보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다가 턱으로 저편 침대께를 가리킨다.

초봉이는 머릿속이 무엇 두꺼운 헝겊으로 한 겹을 가린 것같이 멍하여 차근차근 사려를 갖는다든가 할 수가 없고, 경부보가 턱을 들어 가리키는 대로, 마치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휘청휘청 진찰대 옆으로 다가간다.

간호부가 조용히 홑이불 자락을 걷고 얼굴만 보여 주면서, 삼가로이 목례를 한다. 직업도 직업이려니와 애틋한 어린 미망인에 대한 같은 여자로서의 동정과 조상이리라.

태수의 얼굴은, 왼편 이마가 으깨어지듯 터져 피가 번져 나왔고, 같은 왼편 광대뼈가 시퍼렇게 피멍이 져서 부풀어올랐고,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린 자국만 얼굴에 남았지, 머리털이 있어서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피 묻은 얼굴은 숭업게 뒤틀리고, 눈과 입을 반만 감고 벌린 채, 숨이 져서 있는 꼴은 첫눈에 소름이 쪽 끼쳤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R/B> 탁류 (42) -채만식-  (0) 2021.05.20
<R/B> 탁류 (41) -채만식-  (0) 2021.05.19
<R/B> 탁류(39) -채만식-  (0) 2021.05.17
<R/B> 탁류 (38) -채만식-  (0) 2021.05.16
<R/B> 탁류 (37) -채만식-  (0) 2021.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