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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38) -채만식-

카지모도 2021. 5. 16.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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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시도 못 되어 그는 조바심이 나서 자리를 일어섰다. 열한시라고 했지만, 차라리 미리서 가서 숨어 앉아 기다리자던 것이다.

작은집은 물론이고, 취한 계집들이 모두 붙잡는 것을 스래까지 갔다가 열두시에 도로 오마고, 그리고 문득 그게 좋을 것 같아서 요새 미친개가 퍼져서 조심이 된다고 둘러대고는, 다듬이 방치 하나를 손에 쥐고 나섰다. 첫째 몸이 허전했고 겸하여 만약 거동이고 눈치고 수상한 놈이 어릿거리든지 하거든 우선 어깻죽지고 엉치고 한대 갈겨 놓고 볼 작정이던 것이다.

그는 혹시 누구한테 띌까 하여, 조심조심 큰집으로 내려와서 집 바깥을 휘익 한바퀴 둘러보았다.

대문은 잠겼고, 안에서도 아무 기척이 없고, 집 바깥으로도 별반 수상한 기척이 보이지 않았다.

우선 안심을 하고는, 가게 앞으로 돌아나와서 고리를 벗겨 둔 빈지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섰다.

어둔 속에서 방금 무엇이 튀어나오는 것 같아 간이 콩만했다.

겨우 어둔 속에서 더듬더듬 기다시피 가겟방으로 들어가서 앉고 나니 어쩐지 한숨이 내쉬어졌다.

그리고는 시방 눈을 끄먹끄먹,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참이다.

탑삭부리 한참봉은 음풍이 도는 듯 텅 빈 가게의 캄캄 어둔 방에서, 더듬는 손에 방치가 잡히는 것이 조금 든든하기는 했으나 시방 자꾸만 더해 가는 불안과 공포와 초조한 마음은 그만 것으로는 가실 수가 없었다.

곤란한 것은 마음뿐이 아니다. 방이 추운 것은 아니지만, 그만해도 벌써 오십객인데 까는 요도 없이 맨구들 바닥에 가서 누워 있자니 뼈가 배기고 찬기운이 올라와서 견딜 수가 없다.

시계는 밉살머리스럽게도 칠 줄은 모르고서 또옥 뚜욱 뚜욱 따악, 한껏 늑장을 부린다.

눈을 암만 크게 떠야 보이는 것은 없고, 땅 속 같은 어둠뿐이다. 이런 때는 담배라도 한대 피웠으면 좋겠는데, 성냥을 그으면 불빛이 샐 테니 그도 못 한다.

먹고 싶은 담배도 맘대로 못 먹는 일을 생각하면 슬며시 부아가 난다.

‘이놈! 어쨌든지 도적놈이기만 해봐라, 이놈을…….’

담배 못 피운 화풀이까지 할 작정으로 별러 댄다.

그러나 떼어 놓고 도적이려니 해본 것이나 암만해도 도적놈은 아닌 것 같다. 가령 도적이 들기로 한다면 가게로 들 것이지 안방이 무슨 상관이며, 하기야 안방에도 마누라의 패물이야 돈냥 없는건 아니지만, 그렇다면 안방을 앉아서 지키랄 것이지, 생판 아무도 모르게 숨어 들어와설랑은 열한점에 안방문을 열어 젖히라니, 이건 바로 샛서방을 잡는 수작이란 말인가

‘샛서방? 샛서방’

‘원, 그게 어디 당한 소리라고!’

그는 비로소 아낙 김씨에게로 그러한 치의가 가는 것을, 그만 펄쩍 뛰면서 당치도 않다고 얼른 생각을 돌린다. 그는 그만큼 아낙을 믿어왔고, 따라서 그러한 의심이 나는 것만도 몸이 떨리게 무서웠다.

그러나 생각을 말자면서도 생각은 자꾸만 그리로 쏠린다. 늙은 남편, 첩살림, 젊은 아낙, 샛서방, 과연 어째 지금이야 생각해 냈는고 싶게 근리하다.

‘그래도 설마하니 원…….’

제일 근리한 짐작인데 그러나 제일 싫고 제일 상서롭지 않은 일이라서 부득부득 아니라고 하고 싶어 애를 쓴다.

‘설마야 우리 여편네가…….’

천하의 계집이 다 그러더라도 우리 여편네만은 없을 테라는 것이다.

‘옳아! 그자 말이 재앙이라고 하지를 않았나’

재앙, 그렇다면 어떤 놈이 혹시 겁탈이라도 하려는 것을 알려 주자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사리가 닿지 않는 것이, 그렇다면 조심을 하라든지 역시 안방을 지키라고 할지언정, 열한시에 아무도 몰래 방문을 열어젖히라니.

별안간 목구멍이 간질간질하면서 기침이 나오려고 한다.

그놈을 꾸욱 삼키고 있노라니까, 이번에는 아주 밉상으로 콧속이 짜릿하면서 재채기가 터져 올라온다. 이놈만은 영 참을 수가 없어,

“처.”

하고 겨우 조금만 내쏟는다. 아무래도 감기가 오는 모양이다.

가게 밖으로 마침 쿵쿵쿵 누군지 발자국 소리가 요란히 들린다.

혹시 하고 귀를 바싹 기울인다. 그러나 발자국 소리는 그대로 콩나물고개로 사라진다. 그 끝에 문득, 이건 어느 몹쓸 놈이 정말로 장난을 한 것을 시방 내가 이렇게 병신 짓을 청승스럽게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그놈이 시방쯤은 허리를 잡고 웃고 있을 텐데, 이런 생각이 들고 혼자 있기도 점직한 것 같다.

그러나 그 끝에는 다시, 남의 우스개가 되어도 좋으니 제발 어떤 놈의 실없는 장난에 넘어간 것이었으면 하고 마음에 간절히 바라진다.

겨우겨우, 가게에서 낡은 괘종이 씨르륵 목 쉰 기침을 하더니 떼엥 뗑 늘어지게 열한 번을 친다.

우선 죽다가 살아난 것만큼이나 반가워 한숨이 몰려나온다.

그는 살금살금 가게 바닥으로 내려서서 신발은 신지 않고 우뚝 일어섰다. 가게 앞으로 사람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만 들릴 뿐 아무 기척도 없다.

방치를 바른손에다 단단히 훑으려 쥐고서 발 앞부리로 가만가만 걸어 안으로 난 판자문께로 다가선다.

이놈이 소리가 나고라야 말리라고 걱정을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밀어 본다.

아니나다를까, 처음에는 곧잘 말을 듣더니 필경 삐꺽 하면서 대답을 한다. 움칫 놀라 손을 움츠리고 귀를 기울인다. 한참 기다려도 아무렇지도 않다. 다시 문틈을 비집기 시작한다.

그놈을 몸뚱이 하나 빠져나갈 만하게 열기까지에는 이마와 등에서 땀이 배어 올랐다.

그는 우선 고개만 문틈으로 들이밀고 휘휘 둘러본다. 안방이고 건넌방이고, 다 불은 켰어도 짝소리도 없다. 마당도 어둡기는 하나 별다른 기척이 없다.

그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참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또 한번 휘휘 둘러본다. 역시 아무 이상도 없다.

사풋사풋 안방 대뜰로 올라섰다. 희미한 속에서도 마누라의 하얀 고무신이 달랑 한 켤레 놓인 것이 보인다.

그는 마누라가 혼자서 외로이 꼬부라트리고 잠이 들어 있을 것을 문득 생각하고,

‘어허뿔싸! 이건 내가 정녕 도깨비한테 홀려 가지고 괜한 짓을…….’

아무래도 부질없고 쑥스런 짓인 것 같아 그대로 돌아서서 나가 버릴까 한다. 제일에 아무것도 모르고, 혼자 자고 있는 마누라한테 미안해 못 할 노릇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는 기왕 이렇게까지 해놓고서 그냥 돌아서기는 싫었다. 그는 한 걸음 섬돌로 올라선다.

기왕 내친걸음이니 영영 속은 셈 대고 시키던 대로 다 해보아야 속이 후련하지, 그러잖고는 아예 꺼림칙할 것 같았다.

또 지금 나간댔자 잠그지 못하는 가게를 비워 놓고서 작은집으로 갈 수가 없으니 가겟방에 누워서 하룻밤 고생을 해야 하겠은즉, 그도 못 할 노릇이다.

그는 마침내 마루로 올라가서 윗미닫이의 문설주에 가만히 손끝을 댄다. 그 손이 바르르 떨렸으나 감각은 못 했다.

‘두말없이 그저 안방문을 열어 젖히십시오!’

이렇게 하던 말이 역력히 귀에 울리면서 머리끝이 쭈뼛한다. 그 서슬에 무심코 그는 방치를 든 바른손 손아귀에 불끈 힘을 준다. 이것은 제 자신이 의식지는 못했어도 몸과 마음이 다 같이 적을 노리는 체세였었다.

가슴 두근거리는 것을 진정하느라고 숨을 한번 깊이 들이쉬고 나서, 마침내 드르륵 미닫이를 열어 젖혔다. 열어 젖히면서 불쑥 머리를 들이미는데, 아랫목으로는 당연한 의외의 광경이 벌어져 있는 것이다.

낭자하던 향락의 뒤끝을 수습지 않은 채, 고단한 대로 풋잠이 든 두 개의 반나체, 얼기설기 서로 얼크러진 두 포기씩의 다리와 다리, 팔과 팔…….

탑삭부리 한참봉은 이것을 보고, 알아내고, 분노가 치밀고 하기에 반초의 시간도 필요치 않았다.

움칫 멈춰 서던 것도 같은 순간이요,

“으응!”

떠는 듯, 황소 영각 같은 소리를 치면서, 손에 쥐었던 방치는 어느결에 머리 위로 번쩍 치들고 아랫목을 향하여 우레같이 달려든다. 그 덤벼드는 위세의 맹렬함이란 하릴없이 선불을 맞은 멧돼지다. 그게 그런데 숱한 수염이 하나 가득 곤두서고, 불길이 뻗쳐 나오는 두 눈은 휙 뒤집히고 한 얼굴이니, 이 앞에서야 우선 떨지 않고 배길 자 없을 것이다.

피곤한 끝에 가냘피 들었던 잠이 먼저 깬 것은 김씨다. 잠이 깨고 눈을 뜨는 그 순간 겁에 질리어 벌떡 일어나 앉았을 뿐이지, 그 이상은 더 아무 동작도 가질 여유가 없었다.

한 초쯤 늦게 일어난 것으로 해서 태수는 겨우 머리칼 한 오라기만한 여유를 얻기는 했다고 할 것이다.

산이라도 떠받을 무서운 힘과 분노의 덩치가 바윗더미 쏠리듯 달려들면서,

“이히년!”

사나운 노호와 동시에 벼락치듯,

“따악.”

골통을 내리갈긴다.

김씨의 골통이다.

“아이머닛!”

하는 소리도 미처 다 지르지 못하고,

“캑!”

하면서 그대로 폭 엎드러진다.

태수는 김씨보다 아랫목으로 누워 있었고, 또 일 초만 더디게 일어난 것으로 해서 탑삭부리 한참봉의 최초의 일격이 우선 김씨의 머리 위로 내리는 순간을 탈 수가 있었다.

“따악.”

방치가 김씨의 머리를 내리치는 순간, 태수는 나는 듯이 몸을 뛰쳐, 열린 윗미닫이로 돌진을 한다. 그것이 만일 트랙에서라면 최단거리의 세계기록을 깨트리고도 남을 초인적(超人的) 스타트라고 하겠다.

돌진을 하여 탑삭부리 한참봉의 팔 밑을 빠져 마루로 솟쳐 나가는 태수는,

“사람 살리우-”

하면서 짜내듯 외친다. 몇 시간 뒤에는 자살을 할 그가 진실로 사람 살리라고 외치던 것이다. 그는 미처 그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거니와, 설사 생각했다 하더라도 역시 그와 같이 몸을 피할 것이요, 사람 살리라고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이 창피한 죽음을 벗어나 명예로운 자유의 자살을 하려는 의사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요, 오직 동물적 본능인 것이다.

우선 몸을 빼쳐서 나왔으나 이어 등뒤로부터 무거운,

“이히놈!”

소리가 뒤통수를 바투 덮어 누를 때, 태수는 방에서 솟쳐 나오는 여세로 하여, 몸을 바른편으로 돌려 마당으로 피할 여유를 갖지 못하고서 그냥 다급한 대로 건넌방 샛문을 향해 돌진을 계속한다. 미닫이의 가느다랗게 성긴 문설주가 몸뚱이로 떠받으면 만만히 뚫어지리라는 것, 그리고 건넌방에는 사람이 있다는 것, 이 두 가지의 절박한 여망이던 것이다. 그러나, 건넌방 샛문을 옳게 떠받자면, 그래도 삼십도 가량은 바른편 쪽으로 몸을 더 틀었어야 할 것인데, 세찬 타성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건넌방 그 샛문의 왼편에 놓여 있는 육중한 뒤주 모서리를 번연히 제 눈으로 보면서도, 어찌하지를 못하고 앙가슴으로다가 우지끈 들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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