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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41) -채만식-

카지모도 2021. 5. 19. 0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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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봉이는 반사적으로 외면을 하려다가 뒤에서 보는 사람들을 여겨 못 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싼다. 그리고는 순간만에 접질리듯 무릎을 꿇고 진찰대 변두리에다가 고개를 파묻는다.

서러운 줄은 모르겠어도,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에 따라 어깨도 떨린다.

그렇게 눈물이 먼저 나오고 어깨가 떨리고 해서 절로 울어지고, 울어지니까 비로소 서러워 온다.

무슨 설움인지 모르고서 울고 있는 동안에, 그제야 이 설움 저 설움 설움이 솟아나고, 분한 일 안타까운 일, 막막한 일이 모두 생각나고, 그래 끝이 없는 설움에 차차 더 섧게 운다.

그것은 제 설움이 하 망극하여 그렇겠지만, 그는 남편 태수를 슬퍼하는 정은 마음 어느 구석에고 돌지를 않았다. 보다도, 그는 그런 설움이야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했다.

형보가 이것저것 주변을 부렸다. 자동차부에 전화를 걸어, 집 근처까지는 가지 못하는 자동차로 우선 둔뱀이의 정주사네를 데리러 보낸 것도 그것이다.

그리한 지 한 시간이 넘어서야 복도를 우당퉁탕, 정주사네 내외가 달려들었다.

초봉이는 그때까지도 진찰대 변두리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정주사네 내외는 첨에는 사위 태수가 죽었다는 단지 그것만을 알았고, 그래서 웬 영문인지를 몰라 어릿어릿했다.

형보가 시원시원하게 내달아서, 제가 들은 대로 사실 경위 이야기를 해주고는, 연달아 아까 초봉이를 좇아 병원으로 오면서 하던 태수의 근지와 소절수 사건을 까집어 내기를 잊지 않았다.

정주사네 내외는 당장 눈앞에 태수가 송장이 되어 자빠졌다는 것 외에는 모두가 신반의스러웠

다. 아니 도리어 미더운 편으로 기울기는 하나, 이 혼인을 정할 때 장사 밑천에 홀리어 사위의 인물의 흐린 점이 있는 것도 모른 체하고 ‘관주’를 주어 버린 자기네의 마음의 죄책을 다만 얼마 동안만이라도 회피하기 위하여, 우정 형보의 씨월거리는 소리를 곧이듣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아무래도 좋고 ‘날아가 버린 장사 밑천’ 그것이 속절없어 태수의 죽음은 하늘이 무너진 듯 아뜩했다.

“허! 흉악한 일이로군!”

정주사가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이렇게 탄식을 한다. 그것은 사위가 죽은 데 대한, 따라서 딸의 신세를 생각하는 장인이요, 아버지의 상심(傷心)이 노상 아닌 것도 아니나 ‘날아가 버린 장사 밑천’이 더 안타까워,

“허! 허망한 일이로군!”

이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었다.

 

11 대피선(待避線)

 

이튿날 석양.

태수의 시체 해부한 것을 받아 내왔다.

해부를 한 결과 사인(死因)은 뇌진탕이요, 그 외에 두개골 한 군데가 바스러지고, 갈비뼈 네 대가 부러지고 한 것 말고, 대소 타박상이 스무 군데나 넘는다고 했다.

그리고 대소변을 지린 것 외에는 위장 계통에는 아무 이상의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다음날 장례를 준비하는 중에 경찰서에서 몰려나와 가택 수사를 했다. 은행의 소절수 사건이 뒤집혔던 것이다.

증거물로 태수가 미처 없애지 못한 도장이며, 소절수첩이며, 편지 같은 것을 압수해 갔다.

모든 것이 횅하니 드러났다.

다시 그 이튿날 소란한 중에서 태수의 시체는 공동묘지의 일광지지에다가 무덤을 장만했다.

관을 내리고, 파올린 붉은 황토를 덮어 봉분을 쌓고, 제철이라서 푸르러 있는 떼를 입히고 하니 제물로 무덤이 되던 것이다.

초봉이는 이 흙내 씽씽하고 뗏장 꺼칠한 무덤을 남기고 내려오다가, 그래도 끌리듯 뒤를 돌려다보고는 새로운 눈물을 잠잠히 흘리고 섰다.

낡고 새로운 무덤들 틈에 끼여 기우는 석양만 비낀 태수의 무덤, 이것이 저 가운데 여러 무덤과 한가지로 오늘 이 시각부터는 영영 무주총(無主塚)이 되어 버리느니 생각하면 비로소 태수라는 인생이 불쌍했고, 그래서 그는 이 자리에서야 처음으로 태수의 불쌍함을 여겨 눈물이 흐르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문득, 내가 어쩌면 이 무덤을 벌초 한 번이나마 해주지 않을 요량을 하고서 무주총일 것을 지레 슬퍼해 주는고 생각하니, 내 마음의 너무도 박절함이 부끄러웠다.

회심 끝에, 날이 인제 깊기 전에 꽃이라도 한 다발 갖다 놓아 주고, 일년 한 차례 삯꾼을 사서 벌초라도 해주려니 하는 마음을 먹어, 스스로 위로를 하면서 겨우 발길을 돌려 놓았다.

집이라고 돌아는 왔으나, 휑뎅그렁하니 붙일성이 없다.

마침 또 경찰서에 불려가느라고 장례에도 나오지 못했던 형보가 아기작거리고 들어서는 꼴이, 선뜩한 게 배암이 살에 닿고 지나가는 것처럼 몸서리가 치인다.

형보는 그새도 건넌방에 그대로 눌러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배포다. 요행 유씨와 형주가 밤에는 초봉이와 같이 자고, 낮에는 온 식구가 다 모이고, 그뿐 아니라 장례야, 경찰서 일이야 해서 일과 인목이 분잡하기 때문에 다시는 초봉이를 건드리거나 하진 못했다.

그 대신 안팎 일에 제 일 못잖게 살뜰히 납뛰어, 정주사네 내외의 환심을 사기에 온갖 정성을 다하는 참이다.

태수의 모친한테는 누구 하나 발설을 해서 기별이라도 해주자는 사람은 없었다. 장례날 초봉이가 겨우 생각이 나서 부친을 졸라 전보를 쳐달라고 했으나, 정주사는 ‘그런 죽일 놈’은 입에 붙이기도 싫었고, 주소를 모른다는 핑계로 방패막이를 하고 말았다.

초봉이, 정주사, 형보, 그리고 행화 외에 기생이며, 몇몇 사람이 여러 번 경찰서에 불려 다녔다.

그러나 필경 다 무사하고 말았고, 그 중에 형보는 며칠씩 갇혀 있기까지 하면서 단단히 치의를 받았으나 내내 모른다고 내뻗쳤다.

그리하여 소절수의 심부름을 해주던 사람, 즉 태수의 공범이 누구라는 것만 수수께끼로 남은 채 사건은 완구히 매듭을 짓고 말았다.

풍파가 인 지 보름이 지나고 차차 여름이 짙어 오는 유월 중순, 이슥하게 깊은 밤…….

옆에서 유씨와 형주는 곤한 잠이 들었고 초봉이만 혼자서 이 생각 저 생각 구름 같은 생각에 잦아져 뜬눈으로 누워 있다.

형보에게 무도한 욕을 보던 일이 그날 밤 그 당장에는 목숨을 끊자고까지 했던 크나큰 사단이었으나, 별안간 뒤를 이어 태수의 참변을 싸고도는 폭풍이 불어 치자, 그는 무서운 그 타격에 풀이 꺾여, 결벽이나 정조쯤 가지고 자결을 하려 들 만큼 팔팔하던 기운은 그만 다 사그라지고 말았다. 하루 아침에 사람이 늙어 버렸다고 할는지, 아무튼지 그러고서 인제 와서는 이것이고 저것이고 간에 지나간 일이 남의 일처럼 아프지 않고 시쁘듬한 게 곧잘 애를 삭일 수가 있었다.

물론 결혼 전의 고민으로부터 시작하여 태수와 결혼을 하던 것이며, 아무 멋은 모르겠어도 그다지 불행하든 않든 열흘 동안의 신혼생활이며, 그러다가 흉악한 형보에게 겁탈을 당하던 일, 태수의 불의지변과 뒤미처 현로가 된 온갖 협잡, 이리하여 마침내 곱던 무지개와도 같이 스러진 환멸, 이렇게 추어들어 오노라면 헛짚은 생애의 첫걸음이 두루 애달프고 분하고 원망스럽고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결국 그 순간이 지난 뒤에는 막연한 게, 마치 언 살을 만지기 같아 먹먹하지 그대도록 신경을 쑤시지는 않던 것이다. 연거푸 힘에 겨운 충격을 맞기 때문에, 신경이 아프다 말고서 지레 지쳐 버린 소치일 것이다.

지나간 일이 그렇듯 얼얼하기나 한 뿐이지 모질게 결리거나 아프지 않는 것이 요행이어서, 그는 모든 것을 옛말대로 일장의 꿈으로 돌리고 깨끗이 잊어버리자 했다--미상불 꿈 그대로 허망했던 것도 사실이니까.

지나간 일은 그러므로 그럭저럭해서 씻어 넘길 수도 있고 잊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되어 가는 대로 내던져 두거나 걱정을 않고서 지내거나 할 수가 없게시리 절박한 것은 닥쳐 오는 앞일이다. 지나간 일이야 마음 하나 둘러먹는 걸로 이렇게든 저렇게든 단념이 되는 것이지만, 앞일에는 신중한 계획과 한가지로 행동을 가져야 할 테니 말이다.

그리하여 그는 벌써 열흘을 더 넘겨 두고 밤이면 잠을 잊고 누워, 장차 어떻게 내 한몸을 가눌 것인가, 어떻게 하면 억울하게도 짓밟혀버린 내 일생을, 아까운 내 청춘을 잘 다시 추어올려 나도 남처럼 한세상을 보도록 할 것인가, 두루두루 궁리에 자지러져 있는 참이다.

환히 밝기만 한 오십 와트 전등불을, 눈도 아파 않고 간소롬히 바라보면서 모로 누워 있는 초봉이는, 때와 공간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다만 머릿속에서만 뜬 생각이 두서없이 오고 가고 한다.

옆에서는 모친 유씨가 형주로 더불어 가끔 몸 뒤치기는 해도, 딴세상같이 깊은 잠이 들었다.

때앵 때앵 마루에서 시계 치는 소리가 네 번째 나고는 그친다.

초봉이는 시계 치는 소리에 비로소 제정신이 들어,

“그럼, 군산을 떠나야지!”

하면서 놀란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앉는다. 그리 서두는 품이 방금 혼자말을 하던 대로 당장 옷을 차려 입고 뛰쳐나설 것 같다.

불쾌한 기억이, 나 자신도 자신이려니와 남의 이목의 부끄러움이 오래오래 가시잖을 이 군산바닥이 싫다. 더구나 장가놈이 있어서 위험하다. 하는 눈치가 앞으로 수월찮이 성가실 것 같다. 진작 피하니만 같지 못하다.

서울…… 서울이면 좋을 것이다. 무엇이 어쩌니 좋으리라는 것은 모르겠어도, 그저 막연히 좋을성부르다.

제호가 미덥다. 윤희를 생각하면 역시 제호의 상점이든 회사든 붙어 있기가 어려울 듯싶고 해서 불안한 게 아닌 것도 아니나, 일변 제호가 사람이 발이 넓고 변통성이 많은 사람인만큼 어떻게해서든지 일자리도 구해 주고 두루 애써 줄 것이다.

‘그러면 내일이라도…….’

마침내 군산을 떠날 작정을 하고 만다. 작정을 하고 나니 뒷일이야 그때 당해 보기로 하고 우선은 마음이 가뜬하여 맺혔던 한숨이 한꺼번에 시원하게 쉬어진다.

하다가 생각하니, 서발막대 내둘러야 검불 하나 걸릴 것 없고, 혹혹 불어 논 듯이 말짱한 친정을 그대로 두고 훌쩍 떠나기가 마음에 걸린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이 바닥에서는 직업을 얻기도 졸연찮거니와 그러기도 싫은 걸, 항차 어려운 친정집에 내 한 입을 더 얹어 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을 수는 더욱이나 없는 노릇이다.

‘차라리 내가 서울로 가서 차차 무슨 도리를 차리기로 하고…….’

친정 일도, 그걸로 걱정이나 하고 있었자 별수가 없을 터라 이만큼 요량만 하고, 하고 나니 다시는 더 돌려다보이는 것도 없이 마침내 책상 앞으로 다가앉아서 모친한테 편지를 몇 자 적는다.

편지 사연은, 마음이 울적하여 서울로 올라가니 달리 걱정은 말라고, 서울로 가서 다시 편지도 하겠지만 집을 세 얻느라고 낸 보증금 오십 원을 도로 찾고, 또 살림도 값나가는 것은 쓸어 팔고해서 가용에 보태 쓰라고, 그리고 내가 서울로 간 종적은 아무한테도 말을 내지 말라고, 끝에다가 긴히 당부를 했다.

편지를 다 쓴 뒤에 반지 두 개를 뽑고, 팔걸이시계를 풀고 해서 편지와 같이 봉투 속에 집어넣었다. 그럭저럭 날이 휘엿이 밝아서야 잠깐 눈을 붙였다.

이튿날 아침, 열한시가 되기를 기다려 초봉이는 모친더러 잠깐 저자에 다녀오마 하고 식모를 데리고 정거장으로 나왔다.

유씨는 그 동안 혹시 딸이 모진 마음이나 먹지 않을까 해서 늘 조심이 되었지만, 오늘은 식모를 데리고 나가는 것이 제 말대로 저자에 다니러 가나 보다 하고 안심을 했다.

초봉이는 결혼한 뒤로는 이내 쪽을 찌고 있던 머리를 학생 머리로 고쳐 틀고, 옷은 수수하게 흰모시 진솔 적삼에 검정 치마를 받쳐 입었다. 혼인 때 산 구두도 처음으로 꺼내 신고, 역시 혼인때 태수가 사준 파라솔과 핸드백을 가졌다. 돈은 태수가 일백오십 원 가량 남겨놓고 죽은 것을 백 원 가량은 그 동안 장례를 치르느라고 없어졌고, 오십 원 남짓한 데서 삼십 원을 모친한테 쓴 편지봉투 속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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