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거장으로 나오는 길에는 승재가 있는 금호병원께로 자꾸만 주의가 끌리는 것을 어찌하지 못하여 가뜩이나 마음이 어두웠다.
열한시 사십분 차가 거진 떠나게 되어서야 데리고 나온 식모에게다 집에 전하라고 편지를 주어 돌려보내면서, 그리고 딴 집을 구해 가서 부디 잘살라고 일렀다.
차가 슬며시 움직이자 이걸로 가위를 눌리던 악몽은 하직이요, 새로운 생애의 출발인가 하면 무엇인지 모를 안심과 희망이 조용히 솟는 것이나, 일변 너무도 호젓한 내 행색이 둘러보이면서 장차로 외로울 앞날이 막막하여, 그래도 군산을 떠나는 회포는 슬펐다.
12 만만한 자의 성명은……
초봉이가 이리(裡里)에서 호남선 본선을 대전(大田)으로 갈아타느라고 일단 차를 내려 분잡한 플랫폼의 여러 승객들 틈에 호젓이 섞여 섰을 때다.
“아니, 이건 초봉이가!”
별안간 등뒤에서 허겁스럽게 떠들면서 불쑥 고개를 들이대는 건 말대가리같이 기다란 박제호의 얼굴이다.
“아저씨!”
초봉이는 반가워서 절로 소리가 높았다. 남의 이목이 아니더면 덤쑥 부여잡고 싶게 이 뜻하지 못한 곳에서 제호를 미리 만난 것이 기뻤다. 제호도 무척 반가워한다. 그러나 반가워서 싱글싱글 웃으면서도, 기다란 얼굴은 표정이 단순치 않다. 그는 초봉이의 그 동안 사단을 갖추 알고 있던 것이다. 초봉이도 제호의 낯꽃이 심상찮은 것이 아마도 군산까지 왔다가 소문을 들었나 보다 싶어, 이내 고개가 절로 수그러지고 만다.
“그래 어딜 가느라구”
제호는 초봉이의 행색을 다시금 짯짯이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묻는다.
“거저 이렇게 나왔어요.”
초봉이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서서 발끝으로 땅을 비빈다.
“거저…… 아따 것도 할 만하지. 휘얼훨 바람두 쐬구 하는 게 좋구말구, 제기할 것…… 그래 잘했어…… 기왕 나선 길에 나하구 서울이나 구경두 할 겸 같이 가까”
제호는 옆에서 사람들이야 듣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요란하게 떠들어 댄다.
“그러잖어두 지금 저두…….”
“서울루 간다”
“네에.”
“거 잘했어! 아무렴, 그래야 하구말구…….”
초봉이는 기왕 말이 났던 끝이니, 또 아무 때 말을 해도 하기는 해야 할 것이니, 시방 그러지 않아도 아저씨를 바라고 서울로 가는 길이라고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미리 할까말까 망설이는 참인데 제호가 먼저 제 이야기를 부옇게 늘어놓는다.
저번에 서울로 올라간 뒤에 제약회사는 뜻대로 준비가 되어 가지고 며칠 아니면 영업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그래서 잠깐 일이 너끔한 기회에 볼일로 고향인 서천(舒川)까지 왔었다는 것이며, 다시 어제 아침에 군산으로 건너와서 볼일을 보고 지금 서울로 가는 길인데 군산항 정거장에서 차를 탔기 때문에 같은 차를 타고 오면서도 서로 몰랐다고, 이렇게 이야기가 싱겁거나 말거나 구수하니 지껄이고 있는데 마침 차가 들이닿았다. 둘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차에 올랐다.
차는 비좁았다. 찻간마다 죄다 지나면서 보아도 두 사람을 나란히 앉혀 줄 자리는 없다.
제호는 한 손에 보스톤을, 또 한 손에 과실 바구니를 갈라 들고 끼웃끼웃 앞서 가면서 연신 두덜거린다.
“이런, 제기할 것. 철도국 친구들은 냉겨먹을 줄만 알지 서비슨 할 줄 모른담…… 아, 이 이런놈의, 자리가 있어야지!…… 차장은 어디 갔누? 찻삯을 깎아 달라던지 해야지, 응…… 제기할 것.”
아무리 제기를 해도 빈자리는 종시 없다. 할 수 없이 되는 대로 이등칸으로 들어섰다.
“자, 여기 아무 데나 앉게나. 이런 때나 이등차 좀 타보지. 초봉이나 내나 돈 아까워서 언제 이등차 타겠나? 제기할 것.”
제호는 보스톤과 과일 바구니를 시렁에 얹고, 양복 저고리와 모자를 훌러덩훌러덩 벗어 젖힌다.
“제기할 것. 자아 차푤라컨 이리 달라구. 이따가 돈 더 주구서 이등차표하구 바꿔야지…… 어때? 이등은 자리가 성글구 또 깨끗해서 좋지? 다아 돈만 있으면 이런 법야!”
초봉이는 삼등칸이 좁으니까 이등칸에 앉는 줄만 알았더니 그래도 차장이 와서 말썽을 하든지 하면 창피할까 싶어 편안한 이등차가 편안치도 않았는데, 돈을 더 주고 이등차표와 바꾼다고 하니, 지닌 시재가 염려되고 속이 뜨악했다. 그러나 할 수 없이 핸드백에서 십 원짜리를 꺼내서 차표를 얹어 내놓는 것을, 제호는 손을 내저으면서,
“허어! 내가 초봉이한테 차 이등 한턱 못 쓸 사람인가…… 자아 돈일라컨 도루 집어넣구, 차표만.”
허겁을 떨고 차표만 뺏어 간다.
정거장의 성가신 혼잡과 훤화를 털어 버리고 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창으로는 시원한 바람이 아낌없이 몰려든다. 창 밖은 한창 살이 지려는 여름이 한빛으로 초록이다. 논에는 벌써 완구해진 모포기가 어디고 가조롱하다. 잔디풀 우거지는 산모퉁이의 언덕 소로에서, 머리에 보따리를 인 촌노파가 우두커니 차가 달리는 것을 보고 섰는 것도 초봉이에게는 기특한 풍경이다.
초봉이는 이렇게 묻디리고 뛰쳐나와서, 찻간에 몸을 싣고 첫여름의 싱싱한 풍경을 구경하면서 훨훨 달리는 것 이것 하나만 해도 그 불쾌한 군산바닥에 처박혀 속을 썩이느니보다 훨씬 나은 성 싶어, 마음은 이윽고 거뜬해 갔다.
“나는 참…….”
제호는 차표를 바꾸느라고 차장을 찾아갔다가 돌아오더니, 선반의 과실 바구니를 내려 가지고 앉으면서 이야기를 꺼낸다.
“……고, 배라먹을 여편넬 즈이 집으로 쫓아 버렸지, 헤헤헤, 제기할 것.”
“네에? 아니 왜”
초봉이는 놀라 묻기는 하면서도, 제호의 좋아하는 속이 그러려니 짐작이 가지고, 겸하여 초봉이 저한테도 아무튼지 일이 천만다행스러웠다.
“그깐놈의 여편넬 그것 쫓아 버리기나 하지 무엇에 쓰누…… 에잇 그놈의…….”
윤희를 쫓아 보냈다는 것은, 그러나 말투요, 실상인즉 일년 작정을 하고 별거를 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것은 오랜 계획이었었다.
윤희는 제 자신의 히스테리라든지, 또 부인병에서 생기는 전신의 쇠약이라든지 그것을 잘 알고 겸하여 그러한 신경과 건강을 가지고 그대로 부부생활을 계속하는 것이 우선 저를 위하여서도 좋지 못한 것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요전번에 서울로 이사를 해가는 기회에 별거를 하기로 진작부터 제호와 의논이 있어 왔었다. 그런 때문에 제호가 초봉이를 서울로 데리고 가려는 것을 한사코 막았던 것이다. 초봉이뿐 아니라 도대체 제호라는 위인의 행실머리가 미덥지 못했지만, 초봉이 일만이라도 제 뜻대로 한 것을 적이 마음놓고, 청진동에다가 살림만 차린 뒤에 이내 친정인 신천으로 내려갈 수가 있었다.
떠나기 전에 그는 제호를 잡아 앉히고 가로되 오입을 하지 말 일, 물론 첩을 얻어 들이지 말 일, 가로되 술을 먹고 다니지 말 일, 가로되 한 달에 세 번씩 편지를 할 일, 그리고 그 밖에 별별 옴두꺼비 같은 것을 다 다짐을 받았다.
제호는 그저 머리를 조아리면서, 네에 네 대답을 했다. 한 일년 그렇게 별거를 하는 동안에 히스테리가 가라앉아 사람이 되면 요행이요, 그렇지 않으면 눈치를 보아 어름어름하다가 이혼이라도 할 배짱이기 때문에 그저 마마손님 배송하듯 우선 배송만 시키려 들었던 것이다.
속내평이 그렇게 되었던 것인데, 그러나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그가 초봉이한테다가 짐짓 어떠한 색다른 암시를 주기 위하여 복선(伏線)을 늘이느라고 그러한 말을 내는 것이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초봉이도 윤희를 잘 알고, 알 뿐 아니라 적지 않게 성화를 먹이던 기억을 가진 그 초봉이인지라, 초봉이를 만나자 문득 생각이 나서 (종차에는 그놈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될 값에 적어도 시초만은) 한 개의 뉴스를 전하는 그런 탄탄한 마음으로 우연히 나온 것이다.
초봉이도 그러니까 역시 별다른 새김질을 하지 않고 한낱 뉴스를 듣는 정도로 들었을 뿐이다.
그것은 그렇다고, 그러면 시방 제호가 이렇게 만난 초봉이한테 그전과 같이 담담한 마음만 가질수가 있느냐 하면, 결단코 그렇지는 않다. 커녕 그의 배짱은 시방 자꾸만 시커매 간다.
군산서 초봉이를 데리고 있을 때는, 초봉이가 한고향 친구의 자녀요, 그래서 저한테도 자식뻘밖에 안 되는 어린애라는 것이며, 아내 윤희의 지레 내떠는 강짜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혼 처녀에게 대한 중년 남자다운 조심성으로 해서 그의 욕망은 행동으로 번져나지를 못했던 것이나, 지금 당해서는 아무것도 그런 것은 거리껴하지 않아도 좋을 형편이다.
그는 이번에 군산까지 내려왔다가 자자히 떠도는 소문을 듣고, 초봉이의 겪어 온 그 동안의 사단을 잘 알았었다.
안되었다고 생각도 하고, 그래서 초봉이를 우정 찾아보고 일변 위로도 해주려니와, 또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요량으로 같이 데리고 서울로 가고도 싶었었다.
그러나 막상 찾아가자 한즉 아직도 경황들도 없을 텐데, 또 정주사를 만나고 보면 자연 우는 소리에 짓짜는 꼴을 보아야 하겠어서 그런 성가신 발걸음이 아예 내키지를 않았다. 그래서 찾아보기를 단념하고, 차라리 모른 체했다가 서울로 올라가서 편지로든지 불러 올리려니 했었다.
그랬던 참이라, 초봉이를 뜻밖에 중로에서 만나고 보니 마치 무엇이 씌워 대는 노릇이기나 한 것처럼 희한하고 반가웠었다.
희한하고 반가움이 밖에서 들어오는데, 속에서는 초봉이가 인제는 ‘헌 계집’이니라 하니 안팎이 마침맞게 얼려붙은 셈인 것이다.
‘이미 헌 계집.’
‘그리고 임자 없는 계집.’
이러고 보니, 미혼 처녀에 대한 중년 남자다운 조심성과 압박으로부터 단박 해방이 될 것은 물론이다.
시집 잘못 갔다가 홧김에 서울로 바람잡일 나선 계집, 그러니 장차 어느 놈의 밥이 될지 모르는 계집, 그러니까 아무라도 먼저 재치 있게 주워 갖는 놈이 임자다. 옛날로 말하면 공문서(空文書)짜리 땅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게 눈도 코도 못 보던 초면엣계집이라도 모를 테거늘, 일찍이 가슴을 설레게 해주었고 두고두고 잊히지 않고 연연턴 초봉이고 보니 인절미에 조청까지 찍은 맛이다. 좋다. 또 윤희가 없어졌으니 더 좋다. 윤희를 이혼을 하든지, 못하면 작은마누라도 좋다. 저도 인제는 헌 계집, 나도 헌 사내.
제호의 검은 배짱이 각각으로 이렇게 터가 잡혀 가는 걸 모르는 이편 초봉이는, 그러나 안심하고 다행스러워하기는 일반이다.
윤희가 없으니 제호의 덕을 마음놓고 볼 수가 있을 테요, 그래 제호네 회사에서 제호 밑에서 있노라면 공부를 쌓아 가지고 한때에 희망했던 대로 약제사 시험을 치를 수가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앞으로 완전히 독립한 생활을 할 수가 있고…….
차는 줄기차게 달려만 간다. 바깥은 여전히 살쪄 가는 들이 아니면 짙게 푸르러 오는 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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