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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50) -채만식-

카지모도 2021. 5. 31.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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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면 십자군의 계집인 듯이 정조 무장을 하기가 일쑤요, 그렇지 않으면 마지못해서 계집 노릇을 한다는 것이 청루의 계집보다 더 싱겁다.

밤이 적이 서늘해서 겨우 잠자기 좋을 만하면, 어린것 감기 든다고 앞뒷문을 처닫는다. 한밤중이고 새벽녘이고, 옆에서 어린것이 빼액빽 울어 단잠을 깨놓는다.

그럴지라도 그게 내 자식이라면 귀엽고 소중한 맛에 그래저래 견딘다지만, 이건 생판 남의 자식을 가지고 그 성화를 받는단 말이다. 그런데다가 한술 더 떠서 아침에 조반상을 받고 앉으면,

“우리 송희 민적을 어서 어떻게 해야지!”

이런 소리를 내놓는다.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그래도 좋게 무어라고 어물어물하면, 실상 또 윤희와 이혼이 되지 않았으니 별수가 없기도 하지만, 되레 암상을 내가지고 들볶곤 한다. 그런 날이면 회사에 나가서도 온종일 기분이 좋지 않고 일에 마가 붙는다.

이러고 보니 제호는 결국 남의 자식을 낳아서 기르는 남의 계집을 먹여 살리느라고 눈 번히 뜨고 병신 구실을 하는 맥이다.

초봉이는 사실 또, 송희로 해서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도, 워너니 길이 제호의 정을 붙잡아 두지 못할 잡이는 못할 잡이다. 그저 인사삼아 껍데기로만 치렛본으로만 남의 첩이지, 속정을 주지 못하니 그럴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저래 제호로 앉아 보면 벌써 일년 반, 그 동안 웬만큼 사랑 땜은 했고, 했은즉 계집이 이쁘고 묘하게 생겼다는 것에 대한 감각이나 흥은 인제는 더엄덤해진 판이다. 누가 무어라 해도 애첩은 애첩인걸…….

이러한 때에 제호의 마음을 가라앉혀 그를 붙잡아 둘 건 초봉이의 애정뿐이겠는데 애당초부터 그게 없었으니 말이 안 된다. 그러니 초봉이란 간색만 좋았지, 애무의 취미에 있어서 사십 된 중년 남자의 무르익은 흥취를 만족시켜 주기에 쓸모가 없는 계집이고 말았다.

둘의 사이에는 그리하여 조만간 파탈이 나고라야 말 형편이었는데, 계제에 초봉이가 달밤에 삿갓 쓰고 나오더란 푼수로, 사사이 이쁘잖은 짓만 해싸니 그거야말로 붙는 불에 제라서 부채질을 하는 것이라고나 할는지.

제호는 그래서 여름이 식어 가는 구월달부터는 가정에 등한한 기색이 차차 드러나더니, 시월로 접어들자 그것이 알아보게 유표했다.

이틀에 한 번쯤은 저녁을 비워 때린 채 바깥잠을 자고, 그 다음날 저녁에야 들어와서는 행여 초봉이가 바가지라도 긁어 줄까 봐 손님이 왔느니 회사 볼일로 인천을 다녀왔느니 버엉뗑하고 하다가 아무 반응도 없으면 그만 헤먹어서 심심하게 앉았다가는 도로 힝하니 나가고…….

그러나 초봉이는 그걸 조금도 괘념 않고, 차라리 성가시지 않은 것만 다행히 여겼다. 그는 제호의 등한해진 태도를 제 말대로 회사일이 바빠서 그러나 보다고 심상히 여길 뿐이지, 유성온천에서 약속해 주던 ‘생활의 설계’를 든든히 믿고 의심은 해보려고도 않던 것이다.

그러던 끝에, 오늘도 초봉이는 제호가 더욱 전에 없이 사흘째나 싹도 안 보인 것은 통히 잊어버리고서 태평세월로 마루에 나앉아 송희한테 젖을 물리고 재롱 보기에 방금 여념이 없는 참이다.

다섯시나 되었을까, 가을해라 거진 기울게 되어 여윈 햇살이 지붕 너머로 옆집 뒷벽에 가물거리고, 그와 음영진 대문안 수통에서는 식모가 시시 무얼 씻고 있고.

송희는 한 손으로 남은 젖꼭지를 움켜쥐고 한편 젖을 빨면서 잠이 들려고 눈이 갠소름하다가 대문간에서 터덕거리는 발소리에 놀라 눈을 뜬다.

제호는 마치 손님으로 남의 집이라도 찾아오기나 하는 것처럼 기다란 얼굴을 끼웃거리면서 어릿어릿 안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모르는 집엘 오시나? 무얼 그렇게 끼웃거리시우”

초봉이는 그대로 앉아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말을 하는 초봉이 저도 실상 수수로운 손님이 찾아온 걸 맞는 것같이 어느 구석엔가 서먹서먹한 기운이 있는 걸 어찌하지 못했다.

“으응, 아니, 거 머…….”

제호는 우물우물하다가 히죽이 웃으면서 마룻전에 아무렇게나 털씬 걸터앉는다.

좀 푸짐하라고 우정 그렇게 털털하게 굴어 보는 것이나, 그래도 안길성이 없고, 더 싱겁기만 했다.

한참이나 밍밍하니 앉아 있다가는 심심삼아 고개를 이리저리 두르더니 초봉이가 안고 있는 송희를 들여다보면서,

“어디? 어디 보자”

하고 육중한 손바닥을 까분다.

오죽 멋쩍었으면 그랬으련만, 송희는 졸리는 눈을 뜨고 제호를 올려다보다가 엄마의 젖가슴을 파고들고, 초봉이는 마땅찮아서 이마를 찌푸린다.

“야아! 이놈의 딸년, 낯을 가리는구나…… 허허 제기할 것, 아범이 아주 쫄딱 망했지, 허허허허, 제기할 것.”

제호는 여느때와는 좀 다르게 짐짓 나와지는 너털웃음을 친다. 그러거나 말거나 초봉이는 칭얼거리는 송희만 다독다독한다.

“그것, 성미두 얼굴 생김새처럼 어멈을 닮아서 그렇지”

“걱정두 말아요!…… 아무려믄 당신 같은 털털이허구 바꾼답디까”

“허허허허, 제기…….”

“드끄러워요! 아이가 잠들려구 하는데 자꾸만 앉아서…….”

“하아, 이런 놈의!”

제호는 지천을 먹고 끄먹끄먹 앉았다가 담배를 피워 문다. 그 동안 초봉이는 잠이 든 송희를 안고 살그머니 안방으로 들어가서 조심조심 뉘어 놓고는 다독거리고 덮어 주고 돌려다보고 하다가 겨우 마루로 나온다.

“양식이 어떤고”

제호는 옆에서 서성거리고 섰는 초봉이를 올려다보면서 묻는다. 양식은 달로 헤아리지 않기 때문에 한 가마니를 들여보내면, 어느 때 동이 나는지 모르니까 집에서 말을 해야 다시 들여보내곤 했는데, 오늘은 자청해서 말을 내던 것이다.

“아직 괜찮아요.”

초봉이는 쌀 한 가마니 들여온 지가 보름도 못 되는 것을 생각하고 심상한 대답이다.

“그래두 하마 오래잖어 떨어질걸…… 아무튼 쌀 두주가 큼직하겠다, 내일 새루 한 가마니 들여 보내지.”

“싫여요! 그럭저럭하다가 햅쌀 나믄 햅쌀을 들여다 먹어야지, 냄새나는 묵은 쌀을 무슨 천주학이라구.”

“하하, 햅쌀밥이라! 것두 그렇기는 하군. 벌써 햅쌀밥 소리가 나구, 제기할 것…… 돈은 몇 푼 잡지두 못했는데, 금년 일년두 거진 다아 가더람!…… 그럼 쌀은 그런다구, 장작은 어떻다구”

“그거나 한 마차 내일이구 모레구…….”

“내일 들여보내지, 그럼…….”

제호는 돈지갑을 꺼내더니 십 원짜리 다섯 장을 내놓는다.

“……인제 생각하니 이달은 월급이 이틀이나 밀렸었군? 허허허허, 대장대신이 요새 건망증이 생겨서.”

“한 삼십 원만 더 주어요.”

“삼십 원? 그래…… 무어 살 것 있나”

제호는 돈을 다시 꺼내면서 혼자 속으로,

‘오냐,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달랄 테거든 맘껏 달래 가거라.’하고 활협을 부린다. 그럴 뿐 아니라, 초봉이의 눈치를 보아서 인제 아주 금을 긋고 갈라서는 마당에는 돈이라도 몇백 원, 혹은 돈 천 원 집어 주어서 뒤를 후히 해둘 요량까지 하고 있는 참이다.

삼십 원 더 얹어 주는 십 원짜리 여덟 장을 받아 괴춤에 넣으면서 초봉이는 저 혼자,

‘역시 착한 아저씨는 아저씨지!’

야고 생각을 한다.

사실 제호가 살림이고 돈이고 언제든지 이렇게 끙짜 한마디 없이 아끼잖고 사다 주고, 내놓고 하는 것을 받을 때만은, 그가 고마웠고, 고마운 만큼 더 미덥기도 했었다.

“참 어제 아침인가? 그저께 아침인가…….”

제호는 돈지갑을 도로 건사하면서 문득 남의 말이나 하듯이,

“……윤희가 올라왔더군”

“유운희? 왜애”

초봉이는 제 바람에 놀랄 만큼 깡총 뛴다.

비록 평소에는 의표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초봉이 역시 소위 남의 사내를 뺏어 산다는 ‘작은집’다운 신경의 불안이 없을 수가 없었고, 그것이 이런 고패를 당하여 두드러져 나오던 것이다.

“허! 왜라니…… 낸들 알 택이 있나!”

제호는 종시 아무렇지도 않게 코대답을 한다.

이것은 분명 무엇을 시뻐하는 냉랭한 태도이겠는데, 그러면 그것이 윤희가 서울로 올라온 그 사실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것인지, 혹은 초봉이 네가 즉 작은여편네가, 시앗이 시앗 꼴을 못 본다더라고, 왜 그리 펄쩍 뛰느냐고 어줍잖대서 하는 소린지, 그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인지를 초봉이는 선뜻 분간을 못 했다. 그러나 그는 제호를 저 혼자만 꽁꽁 믿는 만큼 설마 내게야 그러진 않겠지 하고 안심을 하고 싶었다.

“……아마 여편네니깐, 제 서방한테루 살라 온 게지.”

이윽고 제호가 한마디 되풀이를 하는 걸 듣고서야 초봉이는 옳게 정신이 들었다.

제호의 말이 그쯤 간다면, 그러면 앞으로 윤희를 어떻게 할 테냐 하는 제호의 태도가 자못 문제다.

‘제까짓 게 오면 무슨 소용 있나? 괜찮아 일없어.’

어떻게 보면 이런 눈치 같기도 하다. 그러나 또 어떻게 보면 코방귀를 뀌면서,

‘그야 오는 게 당연하고, 왔으니깐 살고 할 텐데, 왜니 어쩌니 하는 네가 딱하지 않으냐.’

하는 눈치 같기도 하다. 같은 게 아니라 훨씬 더 근리할 성부르다. 그렇다면 일은 커두었다.

절대로 이럴 일이 아니라고 (국제조약과 한가지로 계집 사내 사이의 언약은, 저 싫으면 차 내던지는 놈이 장사요, 앉아 당하는 놈이 호소무처라는 걸 모르는 초봉이는) 우선 유성온천서 받은 좀먹은 수형(手形)을 오랜 기억의 밑바닥에서 꺼내 놓고 뒤적거린다.

자, 여기 쓰이되, 한 일년 두고 서둘러 이혼을 한 뒤에 나를 민적에 올려 주마고 한 대문이 있지 않으냐

그런 것을 미룸미룸 이내 미뤄 오다가, 인제는 윤희가 저렇게 쫓아올라 왔으니 어떻게 할 요량이냐? 이혼을 하느냐? 못 하느냐? 만약 이혼을 못 하면 나는 어찌하라며, 나도 나려니와 우리 송희의 민적은 어떡하라느냐

이렇게 수형의 액면대로 죄다 캐고 따지고 하자면 아무래도 단단히 악다구니는 해야 할 테고, 급기야는 윤희와도 맞다디려 제호를 뺏으랴, 차지하랴 해서 요란스런 싸움이 한바탕 벌어지고야 말 것 같았다. 그리고 물론 싸움을 사양치 않을 각오다. 정작 싸우게 되면 울고 돌아섰지, 싸우지도 못할 성미이면서 우선 혼자서 방안장담은 해두는 것이다.

하기야 제호라는 사내는 그대도록 뺏기고 싶지 않은 하 그리 탐탁한 사내더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차라리 아이를 기르는 데 걸리적거리는 물건짝이니, 이 기회에 윤희에게로 도로 내주고 선뜻 갈리는 것도 무방은 하다. 그리고서 이를 악물고 나서면야 무슨 짓을 해서든지 송희 하나 못길러 가진 않을 자신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건 헐수할수없는 경우고, 그런 위태스런 바람 앞에 송희를 안고 나서느니보다는 그새처럼 평화롭고 안전한 온실 안에서 소중한 꽃 송희를 길러 내야 하고, 그것이 송희를 위한 안전한 방책인 것이다. 그러니까 제호는 우선 뺏기지 말고 보아야 한다.

초봉이는 이러한데, 그러나 제호의 배짱을 떠들고 들여다보면 대단히 그와는 상거가 멀다.

제호는 이마적 와서는 윤희와 이혼할 생각은 없기도 하려니와, 하고 싶어도 그게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다. 그건 고사하고, 초봉이와 이렇게 딴살림을 차린 줄을 윤희가 아는 날이면 큰 풍파가 일어나서 모두 뒤죽박죽이 될 판이다. 황차 회사에 증자(增資)를 하느라고 윤희를 추겨서 그의 친정 돈으로 주(株)를 얼마를 사게 했기에! 그러니 더구나 초봉이와는 하루바삐 손을 끊는 게 그저 상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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