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는 그러므로 켯속이 갈리느냐 안 갈리느냐가 아니라 갈리기는 꼭 갈리고야 말게만 되었은즉, 그럴 바이면 오늘 저녁 이 자리에서라도 자, 사실이 약시 이만저만하고 이만저만한데, 또 너와는 더 지내기도 싫어졌고 겸하여 너도 나와 살 맛이 덜한 눈치고 하니, 그저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갈라서자꾸나, 이렇게 이르고 일어서면 그만인 것이다.
사실 당장 그랬으면 싶고, 또 그리하자면 노상 못 할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영영 다급하면 몰라도 애초에 나이 어린 계집애를, 더구나 의리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동향 친구의 자식을 살자고 살자고 꾀어서 오늘날까지 데리고 살다가, 속이야 어떻게 생겼든 겉으로는 그다지 탈잡을 무엇이 없는 걸 그처럼 헌신짝 벗어 내던지듯 괄시를 하기는 두 뼘이나 되는 낯을 들고 좀체로 못 할 노릇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차마 이 성가신 석고상(石膏像)을 박절하게시리 내 손으로 내다버릴수는 없고 한즉, 그저 비벼 댈 언덕을 하나 만나 그걸 핑계삼아서 갈라서든지 그도저도 못 하면 아편쟁이 아편 끊듯이 서서히 두고라도 떼어 팽개치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는 것이 시방 제호의 요량장이다.
“그럼 어떡허실려우”
둘이는 제각기 제 생각에 잠겼느라고 한동안 말이 없다가 이윽고만에 초봉이가 입을 연다.
“응”
제호는 너무 오래된 이야기 끝이라 무슨 소린지 몰라 초봉이를 마주보다가 겨우 알아듣고 씨익 웃으면서,
“……어떡허긴 무얼? 거저 그렇구 그렇지…… 모두 성화야 성화! 제기할 것.”
제호는 어물어물 씻어 넘기자는 것인데, 초봉이는 종시 딴전만 보느라고 그 말을 어떻게 하기는 무얼 어떻게 하느냐? 그저 그러고 있으면 윤희 문제는 종차 다 요정이 날 텐데, 에이 성가시어!
이렇게 하는 말로 갖다가 알아듣는다. 그러고 보니 방금 혼자서 결이 나서 따지고 캐고 하던 것이 우스웠고, 따라서 인제는 윤희가 서울로 올라온 것도 위협이 되지 않고 앞일도 종시 이런 착한 아저씨가 있대서 안심이 되고 했다.
“벌써 다섯시 반이라? 어허 또 좀 나가 봐야 하나! 제기할 것.”
제호는 꺼내 보던 시계를 도로 집어넣으면서 기지개를 쓰고 일어선다.
제호가 일어서는 걸 보니 초봉이는 그가 시방 윤희한테로 가거니 생각하면 어쩐지 마음이 언짢고 그대로 놓아 보내기가 싫었다. 그건 단순한 물욕만도 아닐 것이고, 나그네 먹던 김칫국이나마 먹자니 더러워도 남 주자니 아까운 인심이라면, 초봉이도 일년 넘겨 이태 가까이 살아온 이 사내가 명색 큰여편네라는 것한테로 가고 있는 걸 보고 있기가 역시 그늘에서 사는 남의 작은집답게 오기가 나지 않을 수도 없던 것이다.
“왜? 저녁 안 잡숫구”
초봉이는 그새 여러 달 않던 짓이라, 갑자기 속을 뽑히는 것 같아 귀밑이 붉어 올랐다. 제호는 속으로 고소해,
‘흥! 너두 겁은 나기는 나는 모양이로구나…… 얌사스런 것!’
하면서, 그러나 겉으로는 그저 흔연히,
“…… 여섯시에 잠깐 누굴 만나기루 했는데…….”
“그래두 얼른 잡숫구 나가시우…… 그리구우, 저어…….”
초봉이는 오래간만에 해죽해죽 이쁜 웃음을 웃어 보이면서,
“……오늘 월급 탄 턱으루 육회두 치구 갈비두 굽구 해디리께, 당신 좋아허시는…….”
“육회? 갈비”
제호는 그 웃음에 그전처럼 얼굴과 몸치장까지도 했더라면 얼마나 운치가 있겠느냐 이런 생각을 하는데, 또 육회니 갈비니 하는 게 모처럼 초봉이의 얌전한 솜씨로 만든 안주가 입맛이 당기어 한잔 또한 해롭지 않다 싶어,
“……거 구미는 당기는데…… 그리나저리나 오늘은 웬 서비스가 이리 대단한구”
“월급 탄 턱으루…….”
“허허허허, 시에미가 오래 살면 자수물통에 빠져 죽는다더니…… 그러나저러나 시간이…….”
“진지는 다 했어요…… 지금 곧 고기허구 약주만 사오믄 고만일걸.”
초봉이가 어멈을 불러 대면서 부산나게 서두는 것을 제호는 다시금 시계를 꺼내 보다가,
“아니, 가만 있으라구…….”
하면서 그대로 마당으로 내려선다.
“……그럴 게 아니라, 내 다녀오지. 지끔 가서 만나 볼 사람 만나 보구, 여섯시 반이나 일곱시 그 안으로는 올 테니깐, 그새 무어구 천천히 만들어 뒀다가 줄려거던 주구…… 그럼 내 오는 길에 술은 한 병 사들구 오께시니, 잉? 그러면 좋잖어”
“그럼 그렇게 허시우. 여섯시 반이나 일곱시까지…… 꼭 오시우? 또 어디 가서 약주 잡숫느라구 남 눈이 빠지게 기대리겔랑 마시구…….”
“아무렴, 글랑 염려 말아요.”
제호는 거들거리면서 대문간으로 나간다.
초봉이는 방으로 들어가서 방금 제호가 주고 간 돈을 양복장 속서랍에다가 잘 건사를 한다. 그러면서, 내일은 송희를 업혀 가지고 백화점으로 침대며 유모차를 사러 가려니 하다가 돌려다보니 송희는 젖을 빠는 꿈을 꾸는지 입술을 오물오물하고 있다.
그놈에 정신이 팔려, 식모를 고깃간에 보내자던 것도 잊어버리고서 들여다보고 좋아하는데 마침 누군지,
“이리 오너라.”
하고 점잖게 찾는 소리가 대문간에서 들려 왔다. 한번 듣기에도, 귀에 여운이 처지는 쨍쨍하고도 따악 바라진 목소리다.
초봉이는 그것이 뉘 목소리인지 알아내기 전에 가슴이 먼저 알아듣고는 두근, 울렁거리면서 손이 절로 올라가서 꽉 눌러 준다.
14 슬픈 곡예사(曲藝師)
초봉이가 가만가만 마루로 나서는데, 부엌에서 식모가 대문간으로 나가더니 조금 후에 도로 들어오는 그 뒤를 따라 처억 들어서는 건 평생 가도 잊혀지지 않을 곱사 장형보다.
따라 들어서는 형보를 돌려다보고 식모가 무어라고 시비조로 말은 하는 것이나 퍽 익숙한 눈치고, 또 형보 역시 낯설잖은 태도로, 아니 뭐 괜찮으니 염려 말라고 하고 하는 게 이상히 보자면 볼 수는 있는 것이지만, 초봉이는 그런 걸 여새겨볼 정신이 없었다. 그는 선뜻 형보가 눈에 보이자 (실상은) 보기 전부터 놀라 가지고 있었다.
피는 한꺼번에 얼굴로 치달아 두 관자놀이가 터질 듯 우끈거리고 몸은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식모가 앞으로 와서, 아 저이가 아씨를 뵙겠다구 하길래 밖에서 기다리라니깐 안 듣구서 저럭허구 따라들어온대유, 하는 성화도 쿵쿵 가슴 뛰는 소리에 삼켜지는 듯 똑똑히 알아듣지 못했다.
이윽고 초봉이는 강잉해서 정신을 수습하여, 내가 왜 저 사람을 이대도록 무서워할까 보냐고 숨을 깊이 들이쉬고 고개를 꼿꼿이 쳐들었다. 그래도 종시 가슴은 들먹거리고 몸이 떨리는 건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언제 보아도 홀아비 꼴이 드러나게 꾀죄죄 때가 묻은 주제다. 홀조군하니 풀이 죽은 당목 두루마기에, 두루마기 밑으로 처져 내린 옹구바지는 더 시꺼멓다. 군산서 볼 때보다 는 것은 그리 낡지 않은 손가방 한 개다.
이 꼬락서니에 고개를 되들고 조롱을 하듯 비죽이 웃으면서 곱사등을 흔들흔들 그는 서슴잖고 대뜰로 올라선다.
“실례합니다. 에, 그새 다아 안녕하십니까”
“어째서 외간 남자가 남의 집 내정을 함부루 들어오구 있어요!”
초봉이는 눈을 아니꼽게 가라뜨고 형보를 내려다보다가, 떨리는 음성으로 준절히 나무란다.
“네에, 잠깐 좀 뵐 일이 있어서요…….”
형보는 네까짓 게 암만 그래 보아라 하는 듯이, 어느새 마룻전에 가서 척하니 걸터앉는다.
“……그새 어 참, 다아 평안하시구, 또오 궁금한 건 그 어린것인데, 잘 놀기나 하나요”
이 사람을 다뿍 깔보고 덤비는 형보의 괘씸스런 태도에 초봉이는 성이 나기보다 어처구니없었겠지만, 그러나 어린것이라는 소리에 놀라 겨우 가라앉던 정신이 도로 황망해졌고, 그러느라고 다른 경황은 통히 나지 않았다.
“잘 놀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으루 그래요? 일없으니 어서 가요!”
침착한 것과 초조한 것의 승부는 빠안한 거라 싸움의 첫합에 초봉이는 우선 지고 넘어가던 것이다.
“어 참, 그리구 박제호 씨 그분두 좀 뵐 텐데, 일곱시까지면 들어오신다구요”
이 소리에 초봉이도 더 놀랐거니와, 부엌문으로 끼웃이 내다보고 섰던 식모는 질겁을 해서 자라 모가지같이 고개를 오므라뜨린다.
식모는 그새 두 달 장간이나 가끔 대문 앞에 와서 어물거리는 형보한테 번번이 돈장씩 얻어먹는 맛에 주인집 내정 이야기를 속속들이 알려 바쳤었다. 형보의 계책을 알고 그런 건 아니나 아무튼 끄나풀 노릇을 한 셈이었었다. 그랬는데, 오늘은 아주 어엿이 이리 오너라 하고 찾더니, 바깥 주인의 동정을 물어 보고는 처억 안에까지 들어와서 맹랑한 수작을 붙이고 하던 끝에 제게서 들은 말을 내놓고 하는 게 아무래도 그 동안 저지른 소행이 뒤집혀지는 것 같아, 그래 겁이 나던 것이다.
초봉이는 형보가 제호를 만나겠다고까지 말하는 것은 분명 송희를 제 자식이라고 뺏어 가자는 배짱이거니 해서 그래 겁이 났다.
아무런들 송희야 뺏길까마는, 우선 제호는 여태 모르고 있는 낡은 비밀 하나가 드러날 테니 걱정이다. 거기 연달아 제호도, 그러면 제 아비가 나선 맥이니 차라리 내주고 말자고 할 것이요, 그러잔즉 두 사내가 우축좌축 하는 틈에 끼여 송희를 안 뺏기려고 혼자서 바워 내기가 좀쳇일이 아닐 것이다.
초봉이는 어쩔 줄을 몰라 쩔쩔맬 것 같았다. 형보는 보니, 바로 태평으로 앉아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고 있다.
“왜 가라는데 안 가구서 이래요…… 괜히 좋잖은 일 보기 전에 냉큼 나가요…… 내 원 별, 참…….”
마음이 초조한만큼 초봉이는 말을 하는 데도 음성에 그러한 기운이 완구히 드러난다.
“가기가 그리 급한 게 아니니, 위선 우리 이야기나 좀 해봅시다그려”
형보는 마룻전에 걸트린 채 한 다리를 접쳐 올려놓고, 초봉이한테로 처억 돌아앉는다.
초봉이는 문득, 내가 어쩌니 오늘날 와서까지 이 위인한테 이런 해거를 당하는고 하는 생각이 들면서 더럭 분이 치달아 올랐다. 그리고 분이 나는 깐으로는 당장 왜장을 쳐서 동네 사람이라도 청해 오고, 순사라도 데려다가 혼을 내주기라도 하고 싶었다. 꼭 그랬으면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러자면 그야말로 동네가 시끄러울 뿐 아니라 막되어 먹은 이 위인의 행티에 그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모르는 걸 섣불리 건드렸다가 지나간 사단이나 뒤집히고 보면 나만 망신을 하고 말겠으니, 생각하면 그도 못 할 일이고 분해도 참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이 위인을 어서 그저 쫓아 보내는 게 상책인데, 그러자면 제가 할 말이 있다고 하니 아무려나 말을 시키고 나서 어떻게든지 하는 게 좋을 성불렀다. 이것이 약점과 약한 마음을 지닌 탓이요, 그래서 그게 형보의 생판 억지와 떼에 옭혀 드는 시초인 줄이야 초봉이 자신은 알지도 못한다.
“이 애 초봉아”
별안간 형보는 지금까지 공대하던 말투는 딱 걷어치우곤 활짝 까놓고서 수작을 붙이고 덤빈다.
다만 식모는 꺼리는지 말소리만은 나직나직…….
초봉이는 형보의 무례하고 안하무인한 태도에 속이 불끈했으나, 이왕 제 이야기를 들어 보자던
참이라서 분을 꿀꺽 삼켜 버린다.
“에헴…….”
형보는 목을 한번 가다듬고 담뱃재를 툭툭 털고 하더니,
“……이야길 간단하게 하려 들면 아주 간단하다, 응? 무엇인고 하니…… 저 자식은 내 자식이구 …… 똑똑히 들어라…….”
발꿈치로 조지듯이 말끝을 한번 누르고는 바짝 고개를 되들어, 넌지시 기둥에 가 기대 섰는 초봉이를 올려다본다. 그러면서 콧구멍을 벌씸벌씸, 입을 삐쭉 하는 게,
‘자아, 어떠냐’
하는 꼴이다.
초봉이는 속으로,
‘역시 그런 수작이로구나!’
하고 다시금 가슴이 울렁거렸으나, 그런 내색은 애써 감추고서 꼿꼿이 형보를 마주 내려다보다가,
“별 미친 녀석을 다 보겠네!”
하고 외면을 해버린다.
“흥 암만 그래두 소용없느니라. 그리구 또, 들어 보아라…… 자식이 내 자식일 뿐 아니라, 너는 내 계집이야, 내 계집…… 그러니 너는 자식 데리구 나를 따라와야 한다, 나를 따라와야 해…….”
초봉이는 차라리 실소를 할 뻔했다. 자식이 형보 제 자식이라는 데는 초봉이도 아니라고 우겨 댈 거리가 없다면 없을 수도 있지만,
‘너는 내 계집이다.’
하는 데는 기가 막히는데,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자식 데리고,
‘나를 따라와야 해…….’
하니 생떼가 아니라면, 미친놈의 수작이라고밖에는 더 달리 보이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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