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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52) -채만식-

카지모도 2021. 6. 2. 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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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할 말이라는 게 겨우 그거더냐”

초봉이는 시쁘듬하게 형보를 내려다본다.

“그렇다. 그러니깐, 어서 기저귀 뭉뚱그려서 들쳐 업구 날 따라나서거라.”

“괜히 허튼 수작 하지 말구 냉큼 나가. 저엉 그렇게 추근거리다가는 순사 불러 댈 테니…… 무슨 권한으루다가 남의 집 내정에 들어와설랑은 되잖은 소릴 지껄이는 게냐? 법 무서운 줄두 모르구서…….”

“법? 흐흐 법”

형보는 저야 기가 막히다고 상을 흐트린다.

“……법? 그거 좋지! 그럼 그렇게 허까? 내라두 가서 순사라두 우선 불러오라느냐? 순사 세워놓구 담판하게”

“무척 순사가 네 편역 들어줄 줄 알았더냐”

“이 애 초봉아! 아니껍다! 내가 순사가 무서울 배면 이러구서 네게 오질 않는다. 불러올 테거던 불러오느라, 가택침입죄루다 이십구 일 구류밖에 더 살라더냐? 그보다 더한 몇 해 징역두 상관없다. 종신 징역이나 사형은 아닐 테니깐, 징역 살구서 뇌여 나오는 날이면, 응? 알겠니”

형보는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뽀도독 소리가 역력히 들리게 이를 간다.

“……약차하면 순사 보는 데서, 저 어린것을 칵 찔러 죽이구, 아주 시언하게 그래 버리구서 잽혀가구 말 테다. 순사 불러 댈 테거든 불러 대라, 불러 대!”

초봉이는 고만 푸르르 몸을 떤다. 그가 순사를 불러 댄다고 한 것은 정말 순사를 불러 댈래서 한 말이 아니라 엄포를 하느라고 그런 것인데, 형보는 그쯤 서둘러 대면서 덜미를 치고 나서니, 정말로 순사를 불러와야 하게 일은 절박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막상 순사를 불러 대고 보면 저런 환장한 놈인 걸, 지레 덤태가 날 것이고, 그러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마음이 다급하기만 했다.

당초에 형보는 초봉이를 넘보고서 하는 수작이요 염량은 말짱하여 제가 먼저 겁을 먹고 있는 터이니, 만일 초봉이가 속으로야 무섭고 겁이 나고 하더라도 그런 내색은 보이지를 말고서, 이놈 고얀놈이라고 엄포는 못 한다 할 값에 말 한마디 눈짓 한번이라도, 이 녀석아 네 소리는 미친 소리만도 안 여긴다는 태연한 태도만이라도 보이기만 했더라면 이 싸움에 그리 문문히 넘어 박히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것을 침착을 잃고 압기가 되어 가지고는 생판 부르대는 억지떼와 맞서서 승강이를 하니 아무러면 형보의 억지를 이겨 낼 리 만무한 것, 필경은 되잡칠 수밖에는 없던 것이다.

“네는 혹시, 혹시 말이다…….”

한참이나 있다가 형보는 훨씬 목소리를 눅여 가지고 조곤조곤 타이르듯,

“……저것 어린것이 고태수 자식이라구 요량을 대나 부다마는 그건 잘못 알았다. 고태수루 말하면 에, 몇 해를 두구 화류계 계집이며, 염집 계집을 줄창 상관했어두 자식이라구는 배본 적이 없더니라. 아니, 그런 걸 너허구 한 열흘 살었다구 자식이 생겼을 상부르냐? 응”

“……”

“그리구 또오, 너루 말하면 나허구는 어떻게 돼서 그랬던지 간에 하룻밤 상관이 있었을뿐더러, 에, 고태수가 생전에 내게다가 너를 맡겼더란 말이다, 응…… 아 여보게 형보, 내가 죽은 뒤엘라컨 우리 초봉일 거두어 줄 겸해서 아주 자네 마누랄 삼아 주게, 이런 말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더란다? 증인이 멀쩡하게 살어 있다!”

초봉이는, 속없는 태수 그 위인이 족히 그런 소리도 지껄이기는 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머, 느이 집 종의 새끼더냐? 느이끼리 맘대루 주구받구 하게”

“아니 그래, 네가 정녕 내 말을 못 듣겠단 말이냐”

“어째서 내가 네 말을 들어”

“정말이냐”

“그래서”

“그렇거들랑, 자식을 위선 이리 내놔라.”

“나를 목을 쓸어 봐라 ”

“자식두 못 내놓겠단 말이지”

“도둑놈! 날부랑당 같은 놈!”

“정말 못 내놓겠느냐”

“아니면”

“알았다. 너두 자식 소중한 줄은 아나 부구나”

초봉이는 대답을 않고 안방 문지방으로 물러선다. 무심결에 제 몸으로 송희를 가려 주고 있던 것이다.

“……네가 자식이 중할 양이면, 나는 더하다. 아무리 내가 이런 병신이기루서니 머, 속 창자까지 없을 줄 알았드냐? 흥!…… 너두 생각을 해봐라? 어느 시러베 개아들놈이, 그래 눈 멀뚜웅멀뚱 뜨구서 제 자식을 의붓애비한테 뺏기구 가만 있을 놈이 어디 있다드냐? 응…… 괜히 어림도 없다, 흥!…… 자아 보아라!”

형보는 잠깐 말을 멈추더니 조끼 호주머니를 부스럭부스럭하다가 짤막한 나무동갈 하나를 뒤져내어 손에다 쥔다. 동글납작하고 한쪽으로 금이 간 하얀 나무동갈, 그건 첫눈에 아이쿠치(단도)임을 알 수가 있었다. 초봉이는 그것이 칼인 줄도 알았고 그래서 무섭기도 했으나, 실상 알기 때문에 짐짓 모른 체하느라고 고개를 돌린다.

“……너, 이거 알지”

형보는 한 손으로 손가락을 놀려 칼집을 슬며시 반쯤 뽑아 가지고 쳐들어 보인다.

“오냐, 죽일 테거든 죽여라! 죽여두…….”

“죽이라? 왜 너를 죽일 줄 알구…… 가만있거라…….”

형보는 칼집을 맞추어 도로 조끼 호주머니에 집어넣으면서,

“……너는 종차 문제구, 네가 보는 네 눈앞에서 저걸, 자식을 말이다, 마구 칵 찔러 죽일 테란 말이다. 자식을…….”

초봉이는 형보가 금시로 칼을 뽑아 들고 달려드는 것을 막기나 하려는 듯이 두 팔을 벌려 문지방을 가로막는다. 노상 위협만이 아니고, 칼까지 품고 왔을 제는 참말 송희를 죽이려고 덤빌 줄 알았던 것이다.

인제는 기가 죽어서 무어라고 마주 악다구니를 할 기운도 안 나고, 몸은 사시나무 떨리듯 떨린다. 눈은 실성할 듯 휑하니 벌어진다.

형보는 초봉이의 사색 질린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신이 나는지 더욱 독살스럽게,

“……흥! 남의 의붓애비한테 뺏기구 말 테면 그까짓 것 죽여 버리기나 하구 말지, 그냥 두구 볼낸 줄 알았드냐? 어림없어…… 날 마다구 하는 네 심통머리가 얄미워서라두 네 눈구멍으루 보는데서, 너두 재랄복통이 나서 자진해 죽으라구, 요걸 요렇게 훑으려 쥐구는 거저 칵…….”

예까지 형보는 꼬박꼬박 제겨 가다가 문득 낭패한 기색으로 말을 뚝 그친다.

만약 말을 그렇게 했다가 초봉이가 무서워서 그랬던지 귀찮아서 그랬던지 아무튼 옜다 네 자식, 하고 선뜻 내주는 날이면 그런 낭패라고는 없을 판이다.

에미를 낚아 가자는 게 주장이요, 자식이야 실상인즉 어느 놈의 씨알머린지 모르는 것, 가령 또 내 자식이라 치더라도 꿈에도 생각잖는 것, 그러니 그걸 데려다가는 무얼 하느냔 말이다. 진소위 죽은 토끼 잡으려고 산토끼 쫓는 셈이지.

형보는 그래서 말이 잘못 나간 것을 깨닫고 당황하여 그놈을 둘러맞출 궁량을 부산나케 하고 있는데, 그러나 실상 초봉이한테는 도리어 그게 효과가 컸다.

형보의 눈 하나 깜짝 않고 딱 버티고 앉아서 따북따북 말을 뱉어놓다가 필경,

‘……요렇게 훑으려 쥐고 칵…….’

찔러 죽인다는, 손짓 눈짓 몸짓을 다 겹친 마지막 대목에 가서는 그만 아이구머니 하고 외칠 뻔 했다.

눈을 지그시 내리감는다. 그러나 감는 눈에는, 칼을 뽑아 쥐고 헤번덕거리는 형보와 피투성이가 되어서 바르르 떨고 엎어진 송희의 환영이 역력히 나타나 보인다. 푸르르 떨면서 눈을 번쩍 뜨고 무심결에 뒤를 돌려다본다. 의외던 것같이 송희는 고이 자고 있다. 호 하니 한숨이 나왔으나 안심은 순간이요, 마구 미칠 것 같다. 소리를 치자니 단박 칼을 뽑아 들고 덤빌 것이고, 송희를 들쳐업고 달아나자니 몇 걸음 못 가서 잡히고 말 것이다.

‘어떡하나’

대답은 안 나온다.

‘저놈을 그저…….’

총이 있으면 두말 않고 탕 하니 쏘아 죽일 것 같다.

마침 보니 형보의 머리 위로 굵다란 도리가 건너갔다. 저놈이 뚝 부러져 내리면서 정통으로 그저 저 대가리를 후려갈겼으면 캑 소리도 못 하고 직사할 것 같다. 속으로 제발 좀 그래 줍시사고 축수를 한다. 어쩌면 방금 우지끈 딱 하고 내려앉는 성싶으면서도 치어다보아야 그냥 정정하니 얹혀 있다.

“그러구저러구 간에 말이다…….”

이윽고 형보는 둘러댈 말을 장만해 가지고 새 채비로 나선다.

“……설사 네가 순순히 자식을 내준대두 나는 네가 보는 데서 죽여버릴 수밖에 없다. 죽여 버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 아 글쎄 이, 홀애비놈이 아직두 젖두 안 떨어져서 빼액빽 보채구 하는걸 데려다가 어떻게 길른단 말이냐…… 길를 수도 없거니와 액색해서 나 같은 성미 팔팔한 놈은 그런 꼴 눈으로 볼 수두 없구…… 그러니 눈 새까만 게 불쌍은 해두 죽여 버리는 수밖에 더 있느냐…… 그럴 게 아니냔 말이다, 이치가…… 생각을 해봐? 이치가 그럴 게 아닌가…… 머, 옛놈은 어린 자식 있는 사내를 계집년이 버리구 달아나니깐, 자식을 자반을 만들어서 짊어지구 그년을 찾으러 다녔다더라만, 다아 그게 애비 된 놈의 마음을 생각해 보면 근경이 그럴 만도 하니라.”

형보는 담배를 갈아 피우는 체하고 말을 잠깐 멈춘다.

초봉이는 형보의 하는 소리가 귀로 들어오지도 않는 듯이 외면을 하고 서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는 차라리 시방 제호라도 어서 들어와 주었으면 싶었다. 이렇게 되었으니 나 혼자서는 좀체로 바워 내기는 벌써 글렀고 한즉 제호는 기운도 세고 하니깐 어서어서 들어와서 저 위인을 혼띔을 주어서 쫓아보냈으면 하던 것이다. 제호는 사람이 너그럽고 하니까 지금 와서 낡은 비밀 하나가 드러났다고 어쩔 사람이 아니고, 또 가령 그걸로 제호한테 무안을 본다손 치더라도 형보에게 끝끝내 화를 당하느니보다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서…….

돌려다보니 마침 송희가 잠이 깨어 기지개를 쭈욱 펴더니, 눈을 둘레둘레하면서 때꾼한 목소리로 엄마를 부른다. 자고 깨면 맨 먼저 부르고 찾는 엄마, 이 근경이 새삼스럽게 반가우면서도,

그러나 단지 반갑지만 않고 눈물이 솟아났다.

송희는 엄마의 품에 담숙하니 안기어 젖을 빨고 있다. 누가 뺏어가는가 봐 한 손으로는 남은 젖을 간지게 움켜쥐고, 한 손으로는 꼼지락꼼지락하는 제 발을 잡아당기다가는 놓치고 그놈을 도로 잡으려고 바둥거리고 한다. 그 무심한 양이 들여다보고 있는 초봉이도 절로 따라 무심해지고, 방금 눈앞에 닥쳐온 위험이나 곤경은 저기 먼 데서 들리는 남의 이야긴가 싶기도 했다.

일곱시가 거진 다 되어, 가슴을 조마조마 죄면서 기다리던 제호가 술병을 손에 들고 터덜터덜 대문간으로 들어선다. 초봉이는 처음으로 제호라는 사람이 소중하고, 그가 집에를 들어오는 발길이 천하에 반가웠다.

“어허, 내가 이거 시간을…….”

제호는 무심히 떠들고 들어서다가 주춤하고 서서 뚜렛뚜렛한다.

형보는 헴 밭은기침을 한번 하고, 걸터앉았던 마룻전에서 천천히 대뜰로 내려선다. 제호는 이 낯선 나그네를 의아스러이 짯짯 훑어보다가 때마침 부엌문으로 내다보는 식모한테로 눈을 돌린다.

그러나 식모는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할지를 몰라 민망해서 고개를 숙여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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