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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54) -채만식-

카지모도 2021. 6. 5.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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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거니와, 그런데 복상께서두 아시겠지만, 그 사람이 어 참, 그런 참, 비명횡사를 하잖었겠습니까”

“듣자니 참 그랬다더군요!”

“네에…… 그런데, 실상인즉 그 사람이 진작부터두 자살!…… 자살을 헐 양으루 맘을 먹구 있었습니다, 결혼하기 그저언부터 그랬지요.”

“네에! 건 어째”

“역시 다아 아시다시피, 은행돈 그 조간이죠. 그게 발각이 나서 수갑을 차, 징역을 살어, 하자면 챙피할 테니깐, 여망 없는 세상, 치소받고 사느니 깨끗이 죽는 게 옳겠다는 생각이죠. 혹간 징역이란 말만 해두 후울훌 뛰었으니깐요.”

제호는 속으로 흥! 하고 싶은 것을,

“네에!”

하고 대꾸한다. 유유하게 결혼까지 할 사람이 자살을 하려고 결심했다는 건 종작없는 소리같이 미덥지가 않던 것이다.

“그래서 어 참, 그렇게 자살을 할 결심을 했는데 공교롭게스리 그 일이 생겼으니깐, 일테면 기왕 죽기는 일반인 것을 좀 창피하게 죽었다구 하겠지요, 허허!…… 아 그런데, 그런데 말씀입니다. 그 사람이 자살할 결심을 하구서는 내게다가 유언 비슷하게 부탁을 해둔 게 있단 말씀이죠!”

“네에!”

제호는 처음 짐작한 대로 초봉이네 친가에서 온 담판이 아니고, 그다지 듣고 싶지도 않은 고태수의 일을 장황히 늘어놓다가 필경 유언 소리가 나오니까, 옳지 그러면 고태수의 유복자를 찾으러 온 속이로구나 생각하고서 그럴 법도 하대서 혼자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런데 어 참, 그 유언이라는 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말씀이죠. 그 사람이 누차 두구서 날더러 하는 말이, 여보게 형보, 난 아무래두 이 세상 오래 살구 싶잖으이. 다아 각오했네. 그렇지만, 두루두루 미망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세. 아닌데, 그 중에도 꼬옥 한 가지 정말 맘 뇌잖는 일이 있네. 눈이 감길 것 같잖으니. 아 이런 말을 하군 한단 말씀이죠!…… 그래 오다가 맨 나중 번엔, 그게 그러니깐 바루 그해, 오월 삼십일날 그 사건이 생기던 전전날입니다. 장소는 개복동 살던 행화라구, 그 사람이 전부터 상관하던 기생의 집이구요…….”

만일 고태수가 초봉이와 결혼을 한 뒤로는, 행화의 집에는 통히 발걸음을 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듣는다면, 지금 형보의 하는 소리가 생판 거짓말인 게 빤히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제호는 물론이고, 초봉이도 그 진가를 분간할 길이 없던 것이다. 또 그 시비를 가린대야 그게 그다지 효험도 내지는 못하겠지만…….

“……그래서 말씀입니다…….”

형보는 하던 말끝을 잇대어,

“……내 말이, 아 이 사람아 자네두 거 미친 소리 인전 작작 해두게! 한 삼사 년 전중이나 살구 나오면 그만일 걸 가지구 무얼 육장 그런 청승맞은 소릴 하구 있나!…… 이렇게 머쓰리질 않었겠습니까? 그랬더니 그 군은 종시 고개를 흔들면서, 아닐세. 답답한 소리 말구 아무튼지 내 말을 허수히 여길 것이 아니라 잘 유념해 뒀다가 꼭 그대루 해주게…… 해주는데, 다른 게 아니라, 우리 초봉일 내가 죽은 뒤엘라컨 뒤두 거둬 줄 겸 아주 자네 마누랄 삼아서 고생살이나 않게 해주게 응? 형보, 나는 자넬 믿구 부탁이니 부디 무엇하게 생각 말구서…… 아, 이런 말을 한단 말씀이죠!”

“네에!”

제호는 속으로, 하하 옳거니! 하면서 무릎이라도 탁 칠 듯이 고개를 끄떡거린다.

인제 보니 조그만 놈 유복자 문제가 아니고, 이 친구가 시방 다 자란 어미 초봉이를 업으러 왔구만? 바루…… 딴은 그래!…… 초봉이도 그래서 저렇게 앵돌아져 가지고는…….

제호는 일이 어떻게 신통한지 몰랐다.

마침 주체스럽던 수하물(手荷物)이 아니었더냐! 하나 그렇다고 슬그머니 내버리고 가자니 한 조각 의리에 걸려 차마 못 하던 노릇이다. 그렇던 걸 글쎄 웬 작자가 툭 튀어들어, 인 다구 그건 내거다 하니 이런 다행할 도리가 있나! 아슴찮으니 돈이라도 몇 푼 채워서 내주어야겠다. 어허 실없이 잘되었다. 좋다.

제호는 전자에 호남선 찻간에서 처음 초봉이를 제 것 만들기로 하고 좋다고 하던 때와 다름없이 시방 와서는 그를 남한테 내주어 버리게 될 것을 역시 좋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초봉이는, 건뜻 넘겨다보니 눈을 내리깔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성미가 복받치는지 숨길이 거칠어 코가 발심거리는 것까지 보인다.

이것은 실상 초봉이가 아까 형보한테 직접 그 말을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태수가 작히 그런 염장 빠진 소리를 했으려니 해서, 태수 그에게 대한 반감이 다시금 우러난 표적이었었다. 그러나 제호는 단지 그가 이 괴물 같은 사내한테로는 가지 않겠다는 항거로만 보았고, 그러니 그야 처지를 뒤바꿔 놓고 생각하더라도 이런 위인한테 팔자를 고치고 싶지 않을 건 당연한 인정이려니 하면 초봉이를 여겨 일변 마음 한구석이 민망하기도 했다.

“아, 그런데 참…….”

형보가 갑자기 당황하게, 잠깐 말 그쳤던 뒤끝을 얼른 잇대어,

“……거 그 사람 고군이 말입니다. 짐작건대 정초봉 씨한테는 그런 말을 미처 못 해뒀을 겝니다. 그 군인들 머 그런 불의지변을 당할 줄은 몰랐으니깐, 종차 이야기하려니 하구만 있었겠죠. 그리다가 갑재기 그 변을 당했구, 허니 유언 같은 건 할 새두 없었습니다. 그런 유언이라껀 아내 되는 분한테다야 미리서 해두지는 못하는 것이구, 다아 자살이면 자살을 하기루 약까지 먹구 나서 하게 되는 거니깐, 그러니깐 아마 모르면 몰라두 정초봉 씨는 그 사람한테서 그런 이야긴 못 들었을 게 십상이지요. 그렇지만 그걸 머, 이 장형보 혼자만 들었을새 말이지, 한자리에 앉아서 같이 들은 행화라는 그 기생두 시방 멀쩡하니 살아 있으니깐요.”

형보가 황망하게 중언부언, 이 말을 되씹고 되씹고 하는 것은 행여 초봉이라도, 나는 그런 말 들은 일 없다고 떠받고 나설까 봐서 미리 덜미를 쳐놓자는 계책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러고저러고 간에 초봉이는 아직 말참견을 하지 않을 요량일 뿐 아니라, 또 그것만 하더라도 태수가 정녕 그런 소리를 했기 쉬우리라고 여기는 터라 그까짓 걸 가지고는 이러네저러네 상지를 할 생각은 통히 나지도 않았었다.

형보는 한참이나 있어 보아도 그냥 잠잠하니까, 제 재치 있는 주변이 효험이 났거니 하고 안심한 후에 이번은,

“자아 그런데 말씀입니다…….”

하면서 음성도 일단 높여,

“……어 참, 그렇게 다정한 친구한테 간곡하게 부탁을 받았을 양이면, 그게 다소간 거북한 일은 일이라구 하더라두 말씀입니다, 그 유언을 갖다가 꼭 시행을 해야 옳겠습니까? 그냥 흐지부지해 버려야 옳겠습니까? 어떻습니까? 복상 생각은…….”

“글쎄올시다, 원…….”

제호는 힐끗 초봉이를 건너다보면서 어물어물한다.

제호는 실상 형보의 그 말을 선뜻 받아, 그러니 마니 하겠느냐고, 아무렴 그래야 옳지야고 맞장구를 치고 싶었다. 일 되어 가는 싹수가 그만큼 굴지고 제 맘과 맞아떨어지던 것이다. 그러나 초봉이의 얼굴을 보면은, 하기야 그것도 마음이 한구석 이미 저린 데가 있으므로 하여 보는 눈도 자연 그렇게 어린 것이겠지만, 어쩐지 안색이 다 죽은 듯 암담한 것만 같고 해서, 차마 그쯤 어름어름하고 만 것이다.

제호의 얼굴을 곁눈질로 올려다보고 올려다보고 하던 형보는 말끝을 더 기다리지 않고 이어 흠선하게,

“아니 머, 복상 의견을 말씀하시기가 거북하시면 그만두셔도 좋습니다. 인제 대답은 단 한마디만 해주실 기회가 있으니깐요. 그러니 아직 내가 하는 말씀을 끝까지 다 듣기나 하십시오…….”

하고는 다시 목을 가다듬어,

“……헌데, 어 참 그 뒤에 그 사람이 가뜩이나 그러한 비참한 죽음까지 하구 보니까, 명색이 친구라는 나루 앉아서 당하자니 행결 더 불쌍한 생각이 들구, 이래저래 여러 가지루 비감이 나구 하더군요…… 그래서 어 참, 며칠 두구 밤잠을 못 자구 곰곰이 궁구 마련을 하다가 필경, 그러면 내가 그 유언이라두 시행을 하는 게 도리상 옳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 참, 그걸 어떻게 보면 다소 언짢은 노릇이 아닌 것두 아니긴 하지만, 남이야 무어라던 그대루 시행을 하는 게 생전시에 다아 정다웠던 친구한테 대한 의리니깐요…….”

제호는 의리하고는 별 되놈의 의리도 다 있던가 보다고, 그런 중에도 실소를 할 뻔했다.

사실 제호는 일이 다 십상으로 계제가 좋고 해서 따로 컴컴한 배짱을 차리고 있었기에망정이지, 이 괴상한 위인의 하는 수작이 제 모양새대로 해괴망측하고, 단지 초봉이라는 애틋한 계집 하나를 보쌈하듯 업어 가자는 생 엉터리 속이고 한 것을 몰랐다든가, 그래서 맞 다잡고 시비를 캐지 못한다든가 하던 것은 아니었었다.

“……그리구, 그리구 말씀입니다, 또 한 가지, 어 참 대단 요긴한 조간이 있습니다…… 그건 다른 게 아니라, 허허 이거 원 말씀하기가 거북해서…….”

“머, 괜찮습니다. 어서 다아…….”

“그럼 실례를 무릅쓰구 다아…… 헌데, 그 요긴한 조간이라껀 다른 게 아니라, 그 사람 고군 말씀입니다. 그 군이 변을 당하던 바루 그날 밤인데…… 그날 밤에, 어 참 정초봉 씨와 나와는 어참, 그 하룻밤 거 참, 에, 관계라는 게 있었단 말씀이지요! 허허.”

제호는 단박에 제 낯이 화틋 다는 것 같았다. 그는, 대체 어떻게 된 속셈이냐고, 족치듯이 좋잖은 낯꽃으로 초봉이를 건너다본다. 하기야 시방 계제 좋은 핑곗거리를 만나, 계집을 떼쳐 버릴 요량을 하고 있는 마당에, 계집이 일찍이 몇 사내를 했던들 상관할 게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여자의 정조에 대한 남자의 결벽은 결코 그렇게 담담하지가 않던 것이다.

제호의 기색을 살필 겨를도 없고, 다만 그와 눈이 마주칠까 저어서 초봉이는 지레 고개를 숙이고 들지 않는다.

그는 억울한 대로,

‘그놈이 나를 강제로다가 겁탈을 했대요!’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첫째 제호한테 마주 얼굴이 둘러지질 않고, 또 시방 그 변명을 한들 무슨 소용이겠느냐고 그대로 꿀꺽 삼켜 버리고 말던 것이다.

제호는 초봉이가 변명을 할 말이 없어 고개를 숙인 걸로 보았지, 달리 해석할 길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원 저게 어쩌면 그다지도 몸을 헤프게 가졌을까 보냐고 내내 불쾌한 생각이 가시지를 않았다. 그러나 일변, 전자에 호남선에서 만나 이편이 하자는 대로 유성온천으로 따라와서 별반 그리 주저도 없이 몸을 내맡기던 일을 생각하면, 본시 행실머리가 출 수 없는 계집이었구나 싶고, 해서 금시로 초봉이가 훨씬 내려다보이는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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