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그 동안 저 계집의 정조의 경도(硬度)를 시험해 보지도 않고서, 그의 정조도 얼굴 생김새와 같이 점수가 높으려니 믿었던--믿고 안 믿고 할 여부도 없이--의심 한 번 해보지도 않은 제호 제 자신이 소갈머리없는 등신 같기도 했다.
“어 참, 그렇게 하룻밤 관계가 있었을 뿐 아니라…….”
형보는 제호의 낯꽃이 변한 것을 보고, 오냐 일은 잘 되어 간다고 좋아하면서,
“……그것두 참 다아 인연이라구 할는지, 공교롭다고 할는지…… 아, 어린것 하나가 생겼습니다그려!…… 바루 저게 그거지요.”
형보는 고갯짓을 해서 뒤를 가리킨다.
어린아이 송희가 형보의 혈육이라는 것도 제호가 듣기에는 의외엣 소식이었었다. 그러나 곧 그도 그럴 법하다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러자 또, 작년에 초봉이가 ××를 시키려고 약까지 집어 먹고 그 야단을 내던 속도 비로소 옳게 안 것 같았다.
고태수의 씨라서 그런 줄만 알았더니 옳아! 이 장형보와 그러고 그래서 생긴 불의한 자식이라서…….
제호는 눈을 갠소롬히 뜨고 연거푸 기다란 얼굴을 끄덕끄덕한다.
잠잠하니 말이 없다. 형보는 제가 던진 돌멩이가 일으켜 놓은 파문을 시험하느라고 담배만 뻐억뻑 피우고 있다.
조용해진 틈을 타서 또옥 딱 또옥 딱, 뒷벽의 괘종이 파적을 돕는다. 밤은 차차로 어두워 온다.
안방과 건넌방의 전등이 내비쳐 마루에 앉은 두 사내의 그림자를 괴물같이 앞뒤로 늘여 놓는다.
격동을 싼 순간의 침묵은 임종을 기다리는 것같이 답답하게 무겁다.
초봉이의 떨어뜨린 눈은 품에 안겨 젖을 빨면서 무심히 꼼질거리는 송희의 고사리 같은 손에 가서 또한 무심히 멎어 있다.
초봉이는 제호가 어떤 낯꽃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하면서도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한다. 비록 낡은 새 흉이 드러났대야 그것은 제호가 다 눈감아 주고 탈을 않겠거니 하면 안심이 되기는 하나, 그렇다고 노상 부끄럼이 없진 못했다. 물론 제호가 시방 딴 요량을 먹고서 딴 궁리를 하고 있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령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눈치를 알아챘다고 하더라도, 설마 그게 벌써 오래전부터 다른 원인이 있어 그래 오던 것이라고까지는 아무리 해도 깨닫지야 못할 것이고, 그저 오늘 당장 장형보라는 저 원수가 들이덤벼 가지고는 조사모사 해놓는 소치로만 여겼을 것이다. 따라서 그냥 잠자코 있으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가령 송희를 두고 말하더라도, 그건 결코 그런 게 아니라 사실이 약시 이만저만한 사맥인즉 장가의 자식일 법도 하나, 꼭이 그러랄 법도 없소, 또 ××를 시키쟀던 것은 불의한 자식이라서가 아니라 원수의 자식일는지도 모를 뿐더러, 일변 아비 없는 자식을 낳지 않으려고 그랬소 하고 변명을 하자고 들었을 것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형보와의 하룻밤 관계라는 것도 잠든 틈에 그놈이 나를 겁탈을 한 것이지, 내가 그러구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오.
고태수의 명색 유언이라는 것도 다 종작없는 소리겠지만, 가령 고태수가 주책 없이 그런 부탁을 했다기로서니, 내가 고태수의 물건이길래 저희끼리 주고받고 한단 말이오? 또 내가 죄인이고, 고태수가 법관이라서 내가 그 말을 준수해야 한단 말이오
이렇게 초봉이는 들고 나서서 변명하고 마주 해댈 말이 없던 것이 아니다.
물론 천언 만언 변명을 한대야 제호의 배짱 토라진 내력이 따로 있는 이상 아무 효험도 없을 것이고, 그런즉 이 경우에 초봉이가 잠자코 변명을 않기 때문에, 그런 때문에 장차 몇 분 후면 판연히 드러날 한 새로운 운명을 자취하게 된 것은 아니다.
운명은 넌출이 결단코 조만치가 않다.
시방 초봉이의 새로운 이 운명만 하더라도 그 복선(伏線)은 차라리 그가 어머니로서 송희를 사랑하는 죄…… 하기야 마니아(狂)에 가깝도록 편벽된 구석이 없진 않으나…… 아무튼 어머니 된 죄, 그 속으로부터 넌출은 뻗어 나온 것이다.
하나, 그놈을 다시 추어 보면 넌출은 애정 없이 사랑할 수 없다는 서글픈 인정 속에 묻혀 있는 복선의 연맥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시 그 끝은, 팔자를 한 번 그르친 젊은 여인이란, 매춘의 구렁으로 굴러들기 아니면, 소첩 애첩의 이름 밑에 아무 때고 버림을 받아야 할 말이 없는 위험지대에다가 몸을 퍼뜨리고 성적 직업에나 종사하도록 연약하기만 하지, 여자이기보다 먼저 인간이라는 각오와 다구지게 두 발로 대지를 밟고 일어서서 버팅길 능(能)이 없이 치어났다는 죄, 그 죄로 복선의 끝은 면면히 뻗어 들어가서 있는 것이다.
만일 이 복선의 넌출을 마지막, 땅에 뿌리 박은 곳까지 추어 들어가서 힘껏 뽑아 낸다면 거기엔 두 덩이의 굵은 지하경(地下莖)이 살찐 고구마와 같이 디룽디룽 달려 올라오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한 덩이는 세상 풍도(風度)요, 다른 한 덩이는 인간의 식욕(食慾)이다.
기구한 생애가 시초를 잡고 뻗쳐 나오는 운명의 요술주머니란 바로 이것인 것이다.
형보의 그 다음 이야기는 대강 이러했다.
박제호 너도 저 어린것이 네 혈육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그렇다. 혹시 고태수의 것이라고 한다면 그건 근리할 말이겠지만, 그러나 역시 그렇지도 않은 것이, 고태수는 몇 해를 두고 뭇 계집을 상관했으되 단 한 번이라도 자식을 밴 적이 없었다. 그러니 정초봉이와 한 십여일 지냈다고 임신이 되었을 이치가 없고, 한즉 고태수의 자식도 아니다. 그렇다면 묻지 않아도 내 자식일 것이 분명하다. 보아한즉 어린것이 제 어미를 그대로 닮았더라. 하니, 모습을 가지고는 아비를 찾을 수야 없겠지만, 자세히 뜯어 놓고 볼 양이면, 이목구비나 손발 어느 구석이고 한곳은 나를 탁한 데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군색스럽게 꾸며 대는 형보는, 그러나 동인(東仁)의 「발가락이 닮았다」의 독자는 아니리라.)
고태수가 죽자 정초봉이는 바로 서울로 올라왔었다. 웬만했으면, 그때에 그 뒤를 곧 쫓아 올라와서 도로 데리고 내려가든지, 혹은 그대로 주저앉아 동거를 하든지 했을 것이나, 내가 그때까지는 통히 축재를 해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 책임 있는 일을 하자니 섬뻑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그래서 걱정 걱정 하던 중에, 듣잔즉 박제호 너와 만나서 산다기에 우선 안심을 했었다.
그 뒤에 나는 이를 갈아 가면서 부라퀴같이 납뛴 결과 요행 돈을 몇천 원 손에 잡았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다 친구의 간절한 부탁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일편단심이던 것이다.
또, 알아보니 자식을 낳았다고 하는데 속새로 염탐을 해본 결과 내 자식인 게 분명했고, 그래서 그때부터는 자식을 찾아야 하겠다는 아비 된 책임도 크게 나를 채찍질했었다.
일변 나는 전부터 경륜하던 유리한 영업이 한 가지 있던 터라, 지난 여름 서울로 올라와서 그 돈 기천 원을 밑천삼아 우선 영업을 해보았다. 미상불 예상한 대로 이익이 쑬쑬하고 해서 몇 식구는 넉넉 먹고 살고도 남을 형편이다. 만약 못 미덥거든 증거물이라도 보여 주마. 저 가방 속에 들어있는 수형이 그것이다. 수형 할인 장사다.
바야흐로 나는 만단 준비가 다 되었다. 즉 두 인간을 데려다가 고생살이는 안 시킬 만한 힘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하루를 천추같이 기다리던 이 오늘에 비로소 너와 및 저 모녀를 찾아온 것이다.
형보는 여기까지 말을 끊고, 마른 입술을 혓바닥으로 침질을 하면서 꺼진 담배를 다시 붙여 문다
. 그 다음 말을 힘주어서 하자고 호흡을 가다듬는 것이다.
“자아, 그러니 말씀입니다…….”
형보는 오래 지체를 않고서 곧 뒤를 잇대어,
“……나는 저 모녀를 데려가야 하겠습니다. 어 참, 절대루 그래야만 하겠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나는 앞으로 남은 세상을 단지 친구의 소중한 부탁을 시행한다는 것 하나허구, 내 자식을 찾아서 길르는 것 하나허구, 단지 그 두 가지를 낙을 삼고 여망을 삼아서 살아가자는 사람이니깐요.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건 말하자면, 어 참, 내게는 생사가 달린 일이라구두 할 수 있습니다. 생사가…… 허니 그런 것두 충분히, 참 양해를 하셔서…….”
형보는 쨍쨍 울리는 목소리로 꼬박꼬박 제겨서 말을 내뱉어 놓고는 고개를 꼿꼿 쳐들어 똑바로 제호를 건너다본다.
제호는 비로소 말대답을 해야 할 경운 줄은 아나 침음하는 체 입술을 지그시 물고, 깍짓손으로 한편 무릎을 안고 앉아서 입을 열려고 않는다. 그러나 시방 그가 이럴까저럴까 주저를 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요량은 다 대놓았으면서 말을 내기가 차마 난감하여 그러던 것이다.
이러한 속을 알아서가 아니라도, 초봉이한테는 진실로 간이 녹는 순간이다.
형보의 하는 수작은 어느 모로 따져야 경우도 조리도 안 닿는 생판 억지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초봉이는 그 억지가 무서웠다. 만일 까딱 잘못하여 이 자리에서 제호를 놓치는 날이면 영영 꼼짝없이 형보의 밥이 되어 그 억지에 옭히고 말지, 아무리 버티고 부스대고 해도 모면할 수 없게 그렇게시리 꼭 사세가 절박한 것만 같았다.
도무지 천만부당한 엉터리요 하니, 비웃어 버리고 대거리도 할 것 없는 억지인 것을, 눈 멀거니 뜨고 옭혀들어, 되레 엉엉 울어야 할 기막히는 재앙…….
이 재앙을 면하자니 제호가 아쉬웠다. 물론 그가 미덥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래도 혹시 어떨까 저어하는 마음에, 마치 신탁(神託)을 듣는 순간처럼 그의 입 떨어짐을 기다리기가 무서웠었다.
지리한 찰나가 무겁게 계속되는데 갑자기 때앵땡 괘종이 연달아 여러 번을 친다. 그러자 시계 치는 소리에 깜짝 놀란 것처럼 제호는 앉았던 자리에서 후닥닥 일어선다.
하릴없이 무엇에 질겁을 한 것처럼 제호가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형보나 초봉이나는 미처 무슨 일인지는 몰랐어도 다 같이 놀라 고개를 쳐들고 그를 올려다본다.
“잘 알아들었습니다…….”
제호는 쾌히 말을 꺼내다가, 처음 그렇게 후닥닥 일어서던 것은 어디로 가고 천천히 허리를 꾸부려 앉았던 옆에 놓아 둔 모자를 집어 얹는다. 제가 생각해도 무단히 그리 납뛴 것이 남 보기에 점직했던 것이다.
“……헌데, 거 원 무슨 곡절이 있어서 사단이 그쯤 엉클어졌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허나 시방 대강 듣자니 아무튼 일은 맹랑하기는 한 것 같군요. 보매 단순치는 않은 상싶어요. 그런데 내라는 사람은 본시 성미루 보던지, 처신으루던지 어디루던지 간에 그런, 말하자면 성가신 갈등에 참례를 해서, 내가 옳으네 네가 그르네 하고 무릎맞춤을 한다던가 하길 싫여하는 사람입니다. 싫여할 뿐 아니라, 사람 됨됨이 그러지를 못하게시리 생겨먹었습니다. 허허…… 그러니 에 참…….”
제호는 잠깐 말을 더듬고 있고, 제호를 따라 마주 일어섰던 형보는 벌써 결과를 다 거니를 채고서, 꽝꽝하던 낯꽃이 금시로 풀어진다. 그는 박제호가, 상당히 아귓심 있게 버팅기지, 그래서 저는 위협깨나 해보다가 필경 뒤통수를 툭툭 치고 말겠거니, 그렇더라도 밑져야 본전이니 그만인 것이라고 했던 것인데, 이대도록 선선히 박제호가 물러서고 보매 도리어 헛심이 씌는 것 같았다.
“……그러니…….”
제호는 초봉이에게로 얼굴을 돌리려다가 못 하고서 그대로,
“……나는 이 당장에서 아주 깨끗이 손을 끊겠습니다. 나는 모르구서, 고의가 아니라 말씀이지요…… 모르구서 남의 권리를 침해했던 맥이니깐요, 허허…… 그리구 뒷일은 두 분이 상의껏 다아 조처하십시오. 나는 인제부터 아무 상관두 없는 사람입니다.”
제호는 종시 형보를 맞대 놓고 하는 소리는 하는 소리나, 그것이 초봉이더러 알아들으란 말임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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